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991 - Chapter 1000

1006 Chapters

제991화

하정서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진짜야? 저 자식이 그렇게 대단한 집안이면 민지를 왜...? 뭔가 수상한데.’하정북은 얼굴을 잔뜩 구기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혹시 사기꾼 아냐? 둘째 형이 일부러 우리 속이려고 데려온 애 아니야?”하정동은 이미 눈썹이 한데 모였다.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듯, 서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었다.서준의 외모야 흠잡을 데 없고, 말투나 자세, 그 조용한 자신감까지, 딱 봐도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저 정도 포스는... 어디서 급하게 데려와서 연기시키기엔 무리야.’ 하정동의 마음이 살짝 무거워졌다. 하지만 갑자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자네... 성이 ‘임’이라고 했나?”서준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큰아버지.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J시 말이야. 나도 예전에 좀 다녀봤거든. 그 동네 사람들을 꽤 아는데, 자네 아버지 성함은 어떻게 되시나?”서준은 미소를 띤 채, 아주 또박또박 한 이름을 말했다.그 이름을 듣자마자 하정동의 눈빛이 번쩍 흔들렸다. 그 유명한 이름, 절대 모를 리가 없었다.‘뭐야... 진짜 그 사람이랑 관계가 있다는 거야?’하지만 곧, 하정동은 억지웃음을 띠며 말했다. “젊은이... 허풍도 적당히 해야지. 허리 삐끗하면 모르겠는데, 혓바닥 다칠라.”“J시에서 성이 ‘임’인 사람들야 많지. 근데 하필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 이름을 골라서 말하면...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야?”서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여유롭고도 날카로운 미소였다.“제가 왜 굳이 그 이름을 말했을까요? 듣는 사람이 의심할 거 뻔히 아는데도요. 혹시... 허풍이 아니라, 진짜라서 그런 건 아닐까요?”‘이놈, 만만치 않다.’ 하정동의 얼굴빛이 순간 몇 번 바뀌었다. 믿어야 하나, 의심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그 어색하고 미묘한 침묵은 오래갈 틈도 없었다. 왜냐면, 차트를 든 간호사의 목소리와 함께,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 무리가 병실 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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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2화

민지는 임수인의 질문을 듣고 순간 멈칫했다. 그러곤 자신도 모르게 서준을 바라봤다. ‘진짜 사람을 쓴 거야...?’서준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이렇게 큰 병원에서 병원장이며 의사며, 연기할 사람 데려와서 회진 흉내를 낸다? 시작도 하기 전에 병원 출입 금지당했을걸?”“그럼... 방금 회진한 분들 전부 진짜 의사들이고, 그 병원장님도 진짜 병원장...?”서준은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장영철 원장님. 포털에 검색해 보면 바로 나올걸?”잠시 후, 민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헐, 진짜 병원장이네? 서준아... 너 대체 어디까지가 진짜야? 너무 대단한 거 아냐?”서준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말씀은 다 드려놨어. 곧 치료 계획 나올 거고, 병실도 바꿔줄 거야. 잠시 후 간호사가 안내해 줄 테니까, 어머님은 따라가시면 돼요.”임수인의 눈이 동그래졌다.“병실을... 옮겨?”“네, 아버님이 지금 계신 병실은 일반 3인실이잖아요. 지금은 운 좋게 다른 환자분이 없지만, 언제 또 누가 들어올지 모르고, 시끄럽고 불편한 환경은 회복에 안 좋을 수도 있어서요.”“조금 더 쾌적한 VIP 병실로 옮기려고 해요. 미리 상의 안 하고 결정해서 죄송해요. 괜찮으시겠어요?”“아니... 괜찮고말고! 너무 고마운걸...!”임수인은 정신이 살짝 아득해져서 얼떨떨한 손짓과 함께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근데 VIP 병실... 우리도 예약 해보려고 했는데, 담당 의사가 자리 없다고 했잖아...’하지만 그땐 몰랐다. 다른 사람은 못 해도, ‘서준은 할 수 있다’는 걸. 병원장이 직접 회진까지 왔는데, 못할 게 뭐 있겠는가?그제야 임수인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슬쩍 서준을 바라봤다.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서준 학생, 근데 아까 말했던 거 말이야. 양가에서 예전에 혼인을 정해놨다느니, 아버지 대신 안부를 전하러 왔다느니, 두 집안이 만나야 한다느니... 그거 다 농담이지?”“우리 부부는 J시에 아는 사람도 없고, 임씨 가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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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3화

민지는 살짝 멍해졌다. ‘진짜 이 분위기 뭐야? 꿈 아니지?’임수인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데 서준만이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 손바닥에 땀 나는 거 좀 봐. 이거, 연기인 것처럼 보이면 안 되는데...’그는 속으로 깊은숨을 삼켰다.화고 병원은 말 그대로 ‘움직였다’.점심때, 하정남은 곧장 VIP 병실로 옮겨졌고, 임수인은 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화고 병원에 자주 오긴 했지만... 이런 병실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 일반 VIP 병실 말고, 또 다른... 특별 VIP 병실이라니.”‘VIP는 그냥 돈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어. 근데 여긴... 아무리 돈 있어도, 인맥이 없으면 발도 못 들일 거야.’ 그녀는 다시 한번 병실 안을 천천히 살폈다.하정남은 병상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희한하네... 똑같은 병원인데, 천장 색깔도 공기 냄새도, 다 다른 것 같아.’하정남이 숨을 들이켰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방 안을 훑었다.소파, 테이블, 조명, 심지어 화장실까지. 거의 호텔 수준이었다.‘여기가 병원이 맞긴 해? 이런 데도 있었구나...’그리고 처음으로, 하정남은 돈보다 더 무서운 걸 느꼈다.‘돈 많은 사람은 많아. 근데 이런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진짜 극소수지.’‘임씨 가문... 이게, 그 임씨 가문의 힘이란 건가?’저녁이 가까워지자, 신경내과 교수 몇 명이 정시에 병실로 들어왔다.별도의 회의실도, 환자 가족의 퇴장도 필요 없었다. 병실 바깥쪽에 마련된 응접 공간에서 바로 회진이 진행됐다.임수인, 민지, 그리고 서준. 셋은 모두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다.교수들이 설명할 때마다 민지나 임수인이 질문하면, 바로바로 답이 돌아왔다.그리고 병실 안쪽에 있는 하정남 역시 침대 옆에 설치된 스마트 회진 시스템을 통해 모든 대화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었다.‘이런 시스템이 있는지도 몰랐어... 아니, 아예... 이런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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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4화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직진 고백 폭격’에 민지는 그야말로 넋을 잃었다. “뭐...?”‘얘 지금... 뭐라는 거야... 서준이... 원래 이렇게... 직진형이었나...?’서준은 천천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대답 안 하면... 수락한 걸로 간주할게.”“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거절도, 정정도 안 받습니다.”‘이게 고백이 맞나? 완전 선전포고잖아...!’하지만 이상하게도 민지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심장만 덜컥덜컥 뛰었다....하정남의 회복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상태가 안정되었고, 이틀 뒤엔 퇴원하게 되었으니 말이다.퇴원 당일, 하정남은 휠체어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 대신, 목발을 짚은 채 이를 악물고 한 발씩 직접 걸어 나왔다.주강국은 수염을 살살 비비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기세가 아주 좋습니다. 집에 가서도 이렇게 꾸준히 운동하세요. 앞으로 두 달 분 약은 처방전으로 보내드릴 테니... 잘 달여서 복용하시면 됩니다.”임수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선생님, 그 두 달이 지나고 나면요...?”“네? 그다음이요?”“그다음 약은...”주강국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다 나았는데 뭘 더 먹어요?”임수인은 속으로 아주 놀랐다.‘와... 이분... 진짜 ‘신의’ 아니야? 약도 기세도 다르네...’감탄이 가시기도 전에, 주강국은 서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서준아, 이젠 별일 없겠지? 난 먼저 J시로 돌아간다.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고.”말하면서 슬쩍 민지를 향해 곁눈질. 감사한 눈빛을 보내는 둥글둥글한 얼굴.‘음... 얼굴 혈색 좋고, 목소리도 또렷하고, 저런 애가 며느리면 집안 복도 따라오지. 좋아, 괜찮아.’서준은 깔끔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네, 선생님. 멀리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차 한잔 대접해 드릴게요.”“그 말, 기억할 거야.”...그날 오후, 서준과 민지는 J시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출발 전, 임수인은 공항까지 직접 배웅을 나왔다.“서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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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5화

[5. 돈 많음. 맘껏 써도 됨. 6. 얼굴 됨. 데리고 다니면 체면 서는 외모. 7. 몸매 괜찮음. 안심하고 기대도 됨. 8. 두뇌 풀가동. 과제나 시험공부, 대놓고 도와줌.][...] [16. 무료 PT. 헬스장 따로 필요 없음.] [...] [30. 무료 모닝콜 서비스. 절대 지각없음.] ... ‘임서준의 여자 친구가 될 경우의 좋은 점’은 총 38가지였다. A4 용지 한 장 가득, 빼곡하게 인쇄된 조항들. 그리고 그중 단 하나도 겹치는 항목이 없었다.민지는 말문이 딱 막혀 혀가 꼬이는 듯했다. “너... 이거...”서준은 팔짱을 끼고,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예전에 나한테 물었잖아. 나랑 사귀면 뭐가 좋냐고... 그에 대한 답변인데, 충분하지 않아? 부족하면 더 추가할 수 있어.”‘아니, 그건 그냥... 시간 끌려고 던진 말이었는데... 진짜로 리스트를 만든다고? 그것도 38가지나...?’“서준아! 나 진짜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니야! 그, 그땐 그냥... 장난이었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고...”민지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사실 그때는 당황한 나머지 서준의 입을 막기 위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준은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눈앞의 한 장짜리 계약서와 같은 리스트가 완성된 것이었다.그 순간, 서준은 슬쩍 웃음을 거두며 진지하게 말했다.“근데 하민지, 나는 장난 아니야. 난 지금, 진심으로 널 좋아하고 있어.”그 말에 민지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저 잠깐 멍하니 서준을 바라보다가 금세 두 볼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뭐야... 왜 이렇게 진지하게 말해... 눈도 피하지 않고... 그냥, 날 똑바로 보잖아...’창문 너머로 퍼지는 저녁노을과 민지의 뺨에 번지는 붉은 기운. 그 둘 중 뭐가 더 눈부신지는 알 수 없었다.“민지야, 내 여자 친구가 되어줄래?”서준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절대 너한테 빚 갚으라는 것도 아니고, 부담 주려는 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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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6화

같은 밤하늘 아래, 좁은 골목길.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와... 진짜 올렸네.’그때, 재석이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왔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맞췄다.“뭘 그렇게 웃으면서 봐?”“SNS요.”“누구 거?”정은은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풀고 재석에게 내밀었다.“직접 봐봐요.”재석은 고개를 숙여 화면을 보고 눈썹이 살짝 들렸다.“임서준이랑 하민지?”“네, 놀랍죠?”재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처음엔 좀 놀랐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당연한 거 같기도.”“왜 당연한데요?”“둘이 붙어 있는 거 보면, 딱 예전의 우리 같지 않아? 우리는 벌써 사귀고 있잖아. 걔네도 그러는 게 당연하지.”“우리 같다고요?”재석은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응, 진짜 비슷해.”정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 보니... 진짜 그렇네요.”재석은 다시 핸드폰을 가져가 민지의 계정을 눌러봤다.“근데 왜 서준이만 올렸지? 민지는 아무것도 안 올렸네?”정은도 핸드폰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정말 민지 쪽은 조용했다.“지금 서준이, 혹시 핸드폰 붙잡고 계속 새로고침하고 있는 거 아냐? ‘나는 올렸는데 왜 내 여자 친구는 아무 반응도 없지? 민지, 지금 후회 중인가?’ 이러면서 머릿속 난리 났을걸?”“푸흣... 당신... 왜 이렇게 디테일하게 아는데요? 사람 심리까지 다 파악했네요?”재석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같은 입장인 사람끼리는 통하는 법이지. 무슨 마음인지 다 알 수 있거든.” 정은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몇 초 뒤에야 깨달았다. ‘지금 날 돌려 까는 거였어?!’생각해 보면, 정은과 재석이 사귀기로 한 그날 밤. 재석은 자신의 SNS에 ‘데카르트 연애 곡선’ 사진을 올렸다. 은근슬쩍 ‘연애 시작’ 신호를 보낸 셈.하지만 정은의 SNS는... 아직도 조용했다.“푸하핫... 그래서 당신도 그날... 속으로 ‘얘 진짜 나랑 사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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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7화

재석의 두 눈은 어둠을 품은 듯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은빛이 번지는 듯한 그 눈동자는 마치 바닥없는 소용돌이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꿈틀대는 야수 같기도 했다.“잘 자.”재석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절제하면서도 미련을 담은 손길로 정은의 가느다란 허리를 슬쩍, 조심스럽게 감았다가 놓았다.“잘 자요.”재석은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 순간, 정은의 목소리가 뒤에서 그를 붙들었다.“잠깐만요.”재석이 돌아보자, 정은은 신발장 위에서 뭔가를 집어 들더니 그에게 건넸다.재석이 손을 펴자, 그 안에 고요히 내려앉은 건... 열쇠 하나였다.정은은 짧게 말했다.“오늘 늦어서 미안해요. 당신을 문 앞에서 기다리게 해서... 다음엔 그냥 열고 들어와요. 집에서 나를 기다리면 되잖아요.”“응.”‘집에서 기다리라니... 이거, 진짜... 이건... 거의 결혼 예행연습이잖아...’재석은 열쇠를 받아서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하고 나왔을 때까지도 입꼬리가 내려갈 줄을 몰랐다.‘와... 이거 실화야?’침대에 누워서야 겨우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3단계 실험 데이터에 오류 생겼으면 일단 중단하고, 원인 파악 먼저 하자.]전진욱은 거의 즉답 수준으로 답장을 보내왔다. [오케이! 근데 너 요즘 집에 무슨 일 있어?][아니.][근데 왜 요즘 칼퇴근이야? 답장도 늦고.]재석은‘여자 친구랑 있어야 하니까’라고 입력했다가, 그 문장을 보며 스스로 피식 웃었다.‘이걸 굳이... 말해야 하나?’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그 순간, 진욱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야, 하나만 묻자. 정은이가 방금 SNS에 올린 거... 뭐야?]‘SNS?’재석은 입력하던 메시지를 삭제하고, 다시 물었다.[뭘 올렸는데?][네가 직접 들어가 봐. 방금 정은이가 올렸거든.]‘정은이가...?’재석은 손가락으로 빠르게 앱을 눌렀다. 정은의 계정으로 들어간 순간, 남자의 손이 멈췄다.그녀의 피드, 방금 올라온 따끈따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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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8화

다음 날, 정은은 실험실에 들어섰다. 서준과 민지는 이미 와 있었다.“정은 언니!” “아버님은 괜찮으셔? 일은 다 잘 마무리됐지?” 민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다 끝났어요! 서준이 덕분에...”정은은 두 사람을 천천히 스윽 훑어보고는, 잔잔히 웃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축하해, 두 사람. 결국 사랑이 이루어지는구나.”민지의 두 뺨이 사르르 물들었다. 서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나, 같이 축하해요.”정은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자, 민지가 작게 외쳤다. “맞아요! 언니, 우리한텐 얘기도 안 하고, 조 교수님이랑 사귀게 된 거예요?”‘역시 눈치챘군.’“굳이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었잖아?” “그렇지만...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잖아요!”정은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데이트하러 간다고 했잖아, 그 정도면 눈치챘어야지.”민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그렇게 대놓고 말한 거였어? 나만 몰랐나...’오후, 정은은 학교에 들렀다가 재석에게 자료를 전해주려 연구실에 들렀다.“정은이다!” 진욱이 그녀를 보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걸 내려놓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교수님, 오랜만이에요. 요즘 잘 지내세요?”진욱은 피곤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야근이 조금 심하긴 해...” 뒷말은 살짝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누가 들을까 조심스럽게.“그럼 조 교수님께 말씀드려야죠. 과제 좀 줄여달라고요. 밥도 천천히 먹어야 소화가 되잖아요?”진욱은 양손을 ‘탁’ 치며,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말했다. “봐! 역시 정은이는 내 마음을 제일 잘 알아!”“작은 디저트 좀 사 왔어요. 생활 구역에 놔뒀는데, 교수님이 다른 분들께 말씀 좀 해주실래요? 요즘 날이 더워서 생크림 녹을까 봐요.”“와, 정은이 진짜 세심하다. 그냥 오면 되지, 무슨 디저트까지 챙겨오고 그래. 지금 당장 알려줄게!”“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조 교수님은요?”“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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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9화

“아팠어?” 재석의 숨소리는 여전히 가쁘고 뜨거웠다.정은은 그를 밀치며,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미쳤어요?!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실험실이란 말이에요!”“그래서?” 재석은 오히려 태연했다.“일하는 곳이에요! 집도 아니고... 지금 뭐 하는 거예요?!”‘진짜... 갑자기 키스는 또 뭐야...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재석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반은 맞았어.”“뭐가요?”“여긴 실험실이기도 하지만, 내 휴게실이기도 해. 걱정하지 마. 프라이빗한 공간이니까 아무도 안 와.”정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문제는 프라이빗한 게 아니잖아. 그게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니까...’“쉬...”재석이 자기 코끝으로 정은의 코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말하지 마. 계속... 키스하고 싶으니까.”‘이 사람 진짜... 도대체 언제 이렇게 능숙해진 거야...’“호흡해. 숨 멈추지 말고.”정은은 할 말이 너무 많았지만... 말 대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키스를 받아들였다.‘이거... 내가 가르쳐준 거였는데...’ ‘이젠 완전 능숙하잖아. 하... 남자는 이런 쪽에 참 빠르다니까.’“자기야, 집중해.” 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에, 정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점점 더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숨결. 정은의 몸이 천천히 힘을 풀며 기대오자, 재석의 눈이 살짝 휘어지며 웃음을 머금었다. 남자의 입술은 점점 더 탐욕스러워졌고, 시간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갔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재석은 그제야 숨을 고르며 정은을 놓아주었다.정은은 마치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정신이 겨우 돌아오자, 반사적으로 유리 테이블 위의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깨달았다. ‘잠깐... 아까 그 ‘목마를 테니까’... 그게 이런 뜻이었어?!’“조 교수님, 이렇게... 위험한 사람인 줄 몰랐네요!”재석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 “왜?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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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0화

쾅!휴게실 문이 세차게 열리는 순간, 진욱의 입에서 나오려던 말은 그대로 목에 걸려버렸다.그리고 그는, 마치 조각상처럼 문 입구에 얼어붙었다.진욱은 두 눈을 세차게 깜빡였지만, 눈앞에 펼쳐진 충격 실화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여자의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한 남자의 팔이 감싸 안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들고 있었으며,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얼굴을 가까이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입술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그 사이의 시선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실처럼 이어져 있었다.‘이게 지금 뭐야? 드라마 찍냐고...?’실내에는 어쩐지 흐릿하고 달콤한 공기가 남아 있었다. 그건 진욱이 문을 열며 불어넣은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았다.정은과 재석 사이에서 피어난 ‘봄’은, 그야말로 진욱의 얼굴을 와락 껴안는 듯했다.입술이 파르르 떨던 진욱은 손끝을 겨우 제어했다.“너... 너너너... 너, 너희 둘...”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조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교수, 정은이랑 조 교수님 찾았어?”‘헉... 안 돼, 이건 지금 들키면 안 돼!!’진욱은 본능적으로 문틈에 몸을 밀어 넣듯 들어갔고, 순식간에 문을 반대로 당겨 ‘쿵’ 소리 나게 닫았다.미진 도착 1초 전, 완벽한 타이밍.“응?” 미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문 닫혔지? 맞지? 확실히 뭔가 있었는데...”그 순간, 손태민도 따라왔다. “미진 누나? 전 교수님 안에 계세요?”“아, 나도... 정확하진 않은데... 뭔가 있었던 것 같긴 해...”‘뭐지... 방금 그림자도 스쳤고, 문 닫히는 소리도 났는데...’‘근데 왜 전 교수가 문을... 혼자 들어갔나?’“전 교수님? 무슨 상황이에요? 안에 계세요?”태민이 다시 물었다.안에서 진욱은 등과 손바닥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간신히 목을 가다듬고 일부러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 어! 괜찮아! 조 교수랑 정은이랑 얘기 좀 나누고 있는데, 조금 이따 바로 갈게.”“응.” 미진은 문을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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