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981 - Chapter 990

1006 Chapters

제981화

서준은 그 가능성을 떠올리는 순간, 심장이 저릿하게 조여왔다. ‘이유가 없다면... 내가 그 이유가 되면 되잖아. 민지가 여기에 머물 이유.’ 하지만 서준이 보기에 자신이라는 존재만으로는 아직 그 이유가 부족해 보였다.‘괜찮아, 언젠간 충분해질 거야. 반드시.’예상대로, 실험실에는 이미 정은이 먼저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어, 서준이 왔네. 민지는?” 평소라면 두 사람은 늘 같이 오는 게 당연했는데...서준은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대답했다. “민지가 오늘은... 갑자기 저를 태워주기 싫대요.” 그 말투에 서린 서운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진짜... 너무했다.’정은은 순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럴 애가 아닌데... 혹시 너, 민지한테 뭐 잘못한 거 아냐? 그것도, 꽤 큰 잘못?” 서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가 봐요.” “뭐야 그게...”정은은 이해가 안 됐다.8시 무렵 실험실에 들어선 서준의 시선은 줄곧 출입문에 붙박여 있었다. 언제 다시 들어올지 모르는, 어제 허겁지겁 도망친 그 토끼 같은 민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하지만 오전 10시가 되도록, 민지는 오지 않았다.서준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 ‘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9시 반부터 전화도 하고, 메시지도 수십 번 보냈다. 하지만 민지는 전화를 계속 끊었고, 메시지에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진짜... 왜 이래, 민지야...’“누나, 민지 아직도 안 왔는데 저...” “어? 몰랐어? 민지가 말 안 했어?” 서준은 멍해졌다. “뭘요?”정은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아까 9시쯤에 민지가 문자 보냈어. 일주일 정도 휴가 낸다고.” “휴가요...?!” “응, 집에 일이 생겼대. 당장 내려가야 한다던데?” “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인지 말했어요?” “민지 아버지 건강이 좀 안 좋으시대. 많이 급한 일 같았어. 나도 자세히는 못 물어봤고.”서준의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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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2화

정은에게 물을 먹여주던 순간, 재석은 혹시라도 컵이 너무 기울어져서 그녀가 사레들지 않을까 조심스러워졌다. 컵을 드는 손끝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이었다. ‘저 표정은 뭐야. 학회 발표라도 준비하는 얼굴 아니야?’ 정은은 곁눈질로 재석의 잔뜩 진지한 얼굴을 흘끗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물 한 모금 마신 뒤 컵을 도로 받아 든 재석. 그런데 고개를 들자마자, 정은의 눈웃음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웃음엔 뭔가 숨어 있었다. 마치 작고 예리한 갈고리 두 개가 숨겨져 있는 듯한 미소였다. ‘큰일 났다...’ 정은의 눈길 하나에 심장이 박자를 잃었고,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조 교수님? 무슨 생각 하세요?” 재석은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무것도.” 당황한 그는 얼른 뒤를 돌아 컵을 씻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돌아온 재석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아무렇지 않게 정은 옆에 섰다. “나도 도와줄게.” 정은도 별다른 말 없이, 칼을 쥐여주며 말했다. “그럼 감자 먼저 채 썰어줘요.” “응, 알겠어.” 둘은 오래 함께 맞춰온 만큼 호흡이 척척 맞았다. 요리 실력은 정은이 훨씬 앞섰지만, 손질, 씻기, 썰기, 설거지 같은 잡일은 재석이 단연 프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엔 세 가지 반찬과 따끈한 국 하나가 가지런히 놓였다. 윤기 좌르르한 돼지고기 조림, 달짝지근한 탕수육, 매콤한 고추 감자채, 그리고 맑은 국물의 해물탕까지. 재석은 막 수저를 세팅했고, 정은은 마지막 정리를 마친 뒤 앞치마를 벗고 나왔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자연스레 웃었다. 재석은 먼저 정은의 밥을 푸고, 그다음에 자기 밥을 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은이 물었다. “술 한 잔 할까요?” 예상대로, 재석은 고개를 저었다. “안 마실래. 몸에 안 좋아.” 그러곤 잠시 뜸을 들인 후, 덧붙였다. “너도 마시면 안 돼.” 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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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3화

물론 끝내 드러난 사실은, 심현빈과 정은이 정말 ‘남다른 사이’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는, 재석이 오해했던 그 의미와는 전혀 달랐다. 애초에 그 본질이 달랐으니 말이다.그래서 재석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심장이 두 배로 뛰었다. ‘세상에... 이게 진짜야?’ 정은은 그런 재석이 거침없이 인정하는 모습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그럼 그때 왜 나한테 직접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렇게 간단한 걸... 술까지 마셔가면서 끙끙 앓을 일은 아니었잖아요?” 정은이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재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때는... 내가 너한테 물을 자격도 없는 것 같았어. 뭔가 명분도 없고... 괜히 얘기 꺼내는 게 웃길까 봐.” 정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친구라면, 내 연애사가 궁금할 수도 있죠. 그 정도 관심은 충분히 괜찮은 거예요.” 하지만 재석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네가 다른 사람이랑 어떤 사이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어. 게다가... 난 너랑 그냥 친구는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욕심이 많네요!” 정은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맞아, 나도 내가 너무 욕심 많은 거 알아. 근데... 다행히 하늘이 내 욕심을 들어주더라고.” 정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물리학자잖아요? 과학만 믿는다면서요? 근데 지금 그 ‘하늘’한테 감사하고 있는 거예요?” 재석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학의 끝은 신학이라고 하잖아. 예전엔 그냥 말뿐인 줄 알았는데... 널 만나고 나니까, 점점 믿게 되더라.” “재석 씨.” 정은이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조금 더 욕심부려도 괜찮을지도 몰라요...” “응?” ‘그게 무슨 뜻이야?’ 하지만 정은은 더 말하지 않았고,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고요. 다 식겠어요.”...세 가지 반찬과 따뜻한 국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싹싹 비웠다.정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리하려 하자, 재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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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4화

“정은아,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은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정은은 입에 문 딸기를 천천히 재석의 입 가까이 가져갔다. 하지만 그와 함께 다가온 건, 딸기만이 아니었다. 여자의 숨결.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여자의 향기. 재석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마치 갑자기 얼어붙은 조각상처럼. 그리고 재석의 입술에 딸기의 끝이 닿았다. 달콤한 맛이 퍼지기도 전에, 반대편은 정은이 살짝 베어 물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정은은 자연스럽게 몸을 물렸다. 정확히 반쪽씩 나눠먹은 한 알의 딸기. 재석 쪽엔, 뾰족한 딸기 끝. 정은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춘 재석을 바라봤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몰아친 후의 바위처럼 멍하니, 그 자리에 그대로.‘귀엽다... 아니, 너무 순진해서 가끔은 숨 막힐 정도야.’ 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건, 아까 것보다 덜 달지 않아요?” “어? 아, 아니... 난 진짜, 엄청 달았는데...” ‘진짜로... 지금까지 먹은 딸기 중 제일 달았다고.’ ‘한 반만 더...’ 재석은 무심코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접시는 이미 비어 있었다. 아쉬운 듯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살짝 입꼬리를 내렸다. ‘없네...’TV에선 여전히 예능 소리가 들렸지만, 재석의 머릿속엔 온통 딸기를 문 정은의 모습만이 맴돌았다. ‘조금만 더 가까웠으면... 키스였는데...’ 그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가슴 한켠이 분명하게 계속 흔들렸다.그리고 재석이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정은아.” “네?” 정은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방금 그거... 한 번만 더 해줘.” “뭐라고요...?” “아까처럼. 딸기... 입으로...” 정은은 잠깐 말을 잃고 멈췄다.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재석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다가와, 정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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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5화

그 동작엔 평소의 온화함과 단정함이 없었다. 조금은 성급했고, 거칠었고, 그 속엔 어딘가 절박함 같은 게 섞여 있었다. “심현빈이야?” 재석이 물었다.“네.” ‘다 들었는데, 굳이 또 묻네. 하...’“내일 외갓집 간다고 했지?”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랑 식사하려고요... 다음 주에 L시로 내려가신대요.” “내가 데려다줄게.” ‘그냥 데려다주고 싶은 거잖아. 누가 말리겠어?’정은이 속으로 말했다.시계가 어느덧 밤 11시를 가리켰고, 재석은 일어섰다. “나 이제 갈게.”정은은 문 앞까지 배웅했다.재석은 신발을 갈아 신고 돌아서는 순간, 정은을 그대로 안아 버렸다. 그리고 곧이어, 깊고 강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이 사람, 진짜... 학습 속도 미쳤다.’ ‘하룻밤 사이에 이 정도라니.’그 키스엔 애틋함도, 열기도, 욕망도, 모두 섞여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재석은 겨우 정은을 놓았지만, 완전히 놓진 않았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남자의 눈동자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 여자 친구... 네가 그랬잖아. 좀 더 욕심내도 된다고.”‘아니,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게다가 이렇게 바로 실천에 옮겨?’‘이건... 내 발등, 내가 찍은 거지 뭐.’정은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재석은 그런 정은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회를 준 것도 너고, 신호 준 것도 너야.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늦었어.” “그럼 이제 어쩔 건데요? 좋은 건 다 챙겨놓고, 이제 와서 귀엽게 굴면 다 되는 줄 알아요?” 정은은 고개를 살짝 젖히며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마.” 재석은 그녀의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말했다. “그 눈으로 보면... 난, 더 원하게 될지도 몰라.” 정은은 말없이 그 손안에서 숨을 골랐다. ‘진짜... 이 사람, 점점 무섭게 들이대네.’ 결국, 재석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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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6화

“나야.” ‘서준이...?’민지는 순간 얼어붙었다. ‘내가 너무 예민해서 환청이 들리는 건가?’ 하지만 바로 이어진 목소리는 정말... 서준이었다. “무서워하지 마, 하민지. 나야, 서준이. 문 좀 열어줘.” 민지는 그대로 문을 벌컥 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의 민지와 하루 종일 달려온 듯 지친 얼굴의 서준. 서준은 눈앞에 선 민지를 보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일 있었던 거야...’“너...”서준이 말하려던 순간, 민지가 갑자기 달려들어 그를 껴안았다. 꽉-너무 갑작스러워서 서준은 순간 숨이 막혔지만, 곧 조심스럽게 민지의 몸을 안아주었다. “흑... 서준아... 진짜 너구나...”“넌 내가 귀가 이상한 줄 알았어... 흐윽...” 서준은 그녀의 등을 천천히 다독이며 말했다. “이제 울지 마. 응, 나야. 진짜 왔어.” 민지는 한참을 울며 서준의 품에 안겨 있다가, 조심스럽게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눈물을 손등으로 슥 닦으며 말했다. “들어와... 많이 춥지?” 서준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민지는 곧장 문을 ‘탁’ 닫았다. 자물쇠까지 ‘딸깍’ 소리 나게 채우는 모습에 서준의 가슴이 다시 조여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해줄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민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늘 하루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녀는 서준의 고백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하지만 바로 그 무렵, 그런 민지에게 어머니 임수인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기 너머의 임수인은 울먹이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쓰러졌어. 구급차에 실려 갔는데, 반쪽 몸이 움직이지 않는데...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이야.]그 순간, 민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그녀는 그냥 고민할 겨를도 없이 제일 빠른 비행기 티켓을 끊고 그 길로 G시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곧장 병원으로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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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7화

민지도 늘 건강하던 아버지 하정남이 갑작스럽게 쓰러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이젠 안 가도 되지 않을까’ 하던 마음을 접고 결국 G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서준을 피하려던 것도 살짝 있었지만, 이건 정말 부수 효과일 뿐이었다. 서준은 그런 민지를 보며 차마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지금 뭐라고 하면... 또 울겠지? 울면서 미안하다고 할 거고.’ “저녁은 먹었어?” 서준이 불쑥 묻자, 민지는 순간 멍해졌다. ‘이 타이밍에 갑자기 밥 얘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서준이 말꼬리를 자연스럽게 끊어줬다. 따지고 들 생각은 없는 듯했다.“아직...” 민지는 고개를 저었다. “정신없어서... 먹을 새도 없었어.”‘밥 생각이 어떻게 나겠어... 온종일 병원, 집, 눈치 보기 반복인데.’서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냉장고에 뭐 좀 있어?” “잘 모르겠는데...” 그 말을 끝내자마자 서준은 바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남의 집이건 말건, 자기 집처럼 행동하는 게 참 자연스러웠다. “다행이다. 재료가 좀 있네.” 그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들어갔고, 냄비를 꺼내 불을 올렸다. 그리고 20분 후, 따뜻한 자장면 한 그릇이 민지 앞에 놓였다. 진한 고기향이 나는 짜장 소스 위에 계란 프라이 하나, 송송 썬 파와 고소한 참깨까지.그릇을 멍하니 바라보던 민지는 서준이 건넨 젓가락을 조용히 받아서 들었다. 첫입을 먹는 순간,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바로 폭풍처럼 먹기 시작했다.6,7입만에 그릇의 반이 사라졌고, 드디어 말을 꺼낼 여유가 생겼다. “서준아... 이 면... 으흐응... 진짜...” 면이 입 안에 가득해 여자의 발음이 뭉개졌다. 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천천히 먹어. 누가 뺏어 먹는 것도 아닌데.” 민지는 겨우 삼키고 말했다. “이 면, 진짜 맛있어. 특히 이 짜장... 어떻게 만든 거야?” 서준은 간단하게 재료랑 방법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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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8화

그날 밤, 서준은 민지의 집에서 묵었다. 게스트룸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민지가 갈아입을 옷을 챙기는 동안, 서준은 거실에서 전화를 두 통 걸었다. 민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가끔 들리는 서준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응... 맡길게, 정리 좀 해줘.” “삼촌, 감사해요... 할아버지께 안부 전해주세요...”“...”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 무리의 친척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병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안에서 고성이 들렸다. 이미 한바탕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둘째야, 내가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지금 네 꼴이 그게 뭐냐? 이 상황에서 뭘 잘했다고 설치려 들어?” “민지가 그냥 감기라던데, 이게 감기냐? 중풍이지! 제 아버지 병세를 거짓말로 덮으려 들다니, 이게 말이나 돼?” ‘뭐? 내가 아빠 병을 숨겼다고?’ 민지는 분해서 이를 악물었다.딸 바보 하정남은 누가 자기 딸을 욕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반박하려 들었다.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얼굴만 붉어지고 눈만 커졌지, 몸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제기랄... 움직이질 않아... 젠장...’ 하정남은 속으로 울부짖었다.옆에 있던 임수인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친척들의 기세에 대응하랴, 남편 상태를 보랴, 정신이 없었다. 혹시라도 하정남이 흥분해서 병이 악화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그만들 좀 하시죠! 우리 민지가 어떤 아이인지 부모인 우리가 모르겠어요? 당신들이 뭔데 입을 대요?!”“여보, 움직이지 마요, 화내지도 말고 그냥 누워 있어요. 내가 대신 말할게요. 걱정 마요.”임수인은 하정남을 달래고 나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무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아주버님, 오늘 서방님들까지 모시고 오신 건... 무슨 의도죠?”하지만 하정남의 형, 하정동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병상에 누운 동생을 노려봤다.“남자들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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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9화

“그리고 말인데요, 형수님도 그렇고 민지도 그렇고... 여자들이 직접 나서서 세입자들 상대하다간, 오히려 손해 보는 일 생길 수도 있잖아요?”임수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요? 법도 있고 CCTV도 있고, 세입자들이 무슨 깡으로 우리한테 해코지한다는 거죠?”하정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 문제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형수님이 아무리 둘째 형님하고 결혼하셨다지만, 결국 성은 ‘임’ 씨잖아요? 민지는 성이 ‘하’ 씨지만, 여자애고요.”“여자애는 결국 시집가게 되어 있고, 시집 가면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피땀 흘려 일군 하씨 집안의 재산이,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임수인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서방님,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시네요. 여자는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른다니... 그 논리면 저도 ‘하’ 씨가 돼야 할 텐데, 왜 자꾸 제 성이 ‘임’ 씨라고 강조하세요?”“그리고 민지는 ‘하’ 씨니까 괜찮다고 하시면서, ‘어차피 여자애는 시집간다’고 하시네요... 좋은 말도 나쁜 말도 다 서방님 마음대로인데, 좀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정서는 잠깐 말문이 막혀 멋쩍은 듯 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러고는 옆에 앉아 있던 하정북을 슬쩍 쳐다봤다. 눈빛으로 ‘이제 네 차례야’라고 말하는 듯했다.덩치가 큰 하정북은 말주변이 없었지만, 이런 자리에선 망설일 성격이 아니었다,그래서 딱딱한 말투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쨌든 오늘 둘째 형님 앞에서 이 얘긴 정리해야겠어요. 형수님 댁엔 아들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 같은데, 민지가 상속을 받을 순 없는 거잖아요.”“그럼 결국, 둘째 형님 명의로 된 부동산은 다 우리 하씨 가문 몫이 되는 게 맞는 거죠. 형수님께선 불편하시겠지만... 그게 순리 아닌가요?”하정서도 덧붙였다. “맞아요. 이렇게 가족 다 모인 날, 아예 확실하게 정리하는 게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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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0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약... 약혼자?” 순간 병실이 정적에 휩싸였고, 임수인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약혼자...?’“네, 맞아요.” 서준은 오히려 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자리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이었다.“저는 임씨 가문의 막내, 임서준입니다. 정남 삼촌께서 저희 아버지랑 예전에 저랑 민지의 혼인을 정하신 적이 있어요. 그땐 양가 어른들 모두 그냥 농담처럼 넘겼고, 저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죠.”“근데 이번에 민지가 우리 학교 대학원에 들어오게 됐고, 같은 학번에 같은 지도교수님 아래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게 됐어요.”“그리고 점점 마음이 깊어졌고... 지금은 연인 사이입니다. ‘우연이 아닌 인연’이라는 말, 그게 바로 저희를 가리키는 말일 거예요.”“민지는 이미 저희 부모님과 할아버지도 뵀어요. 그리고 이번에 제가 남쪽에 내려온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죠.”“첫 번째는, 아버지 대신 이모님이랑 정남 삼촌을 찾아뵙기 위해서였어요. 아버지께서는 직접 오시지 못한 걸 너무 죄송해하시면서, 꼭 저더러 대신 사과드리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서준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살짝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아버지는 올해 초부터 우리나라를 위해 열린 회의 때문에 바쁘셨고, 그 회의가 끝난 후에는 바로 유럽 국빈 방문 일정이 잡혀 있으시거든요.”“다음 달쯤 귀국 예정인데, 그때는 꼭 이모님이랑 정남 삼촌을 저희 집으로 모시고 싶다고 하셨어요.”“두 번째 이유는 제 개인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앞으로 장인어른, 장모님이 되실 두 분께 미리 인사드리고 싶었거든요.”서준은 민지를 향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민지는 멈칫하지도 않고 그 손을 꼭 잡았다.두 사람의 손가락이 얽히는 순간, 서로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짓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그냥 ‘커플’ 이상이었다. ‘저게 뭐야... 드라마인가...’ 병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속마음은 비슷했을 것이었다.민지는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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