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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1화

지한은 난감했다.[제가 안 알려드리는 게 아니라, 알려드려도 도움이 안 될 거예요. 괜히 같이 마음만 급해질 필요가 있나요?]“그럼 지한 씨는, 제가 지금 안 급해 보이세요? 숨기면 숨길수록 더 불안해요.”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지한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해 드릴게요.]어차피, 지한은 시연에게 말한다고 해서 방해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시연이 도움 될 건 없을 게 뻔했지만, 그건 시연이 원한 일이었다.지한은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다만 고장민과 고승하에 관한 건 살짝 감췄다.사업 쪽 이야기는 시연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지한의 설명은 충분히 구체적이었다.대강의 흐름은 시연도 이해할 수 있었다.“알겠어요. 고마워요.”전화를 끊은 시연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한참 뒤에 중얼거렸다.“CA국...이라고?”...병원.“이 집사, 나 좀 일으켜 줘. 간병인 불러오고, 옷 좀 갈아입어야겠네.”고상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일어나시겠다고?’“어르신...”이호민은 얼굴이 굳어 급히 부축했다.“이러시면 안 됩니다.”고상훈은 이미 너무 쇠약했다. 일어날 힘조차 없어 보였다.이호민의 눈가가 붉어졌다.“제발요. 이러시다 유건 도련님이 아시면... 전 정말 끝입니다.”그 울상에 고상훈은 씁쓸하게 웃었다.“됐어. 내가 안 일어나면, 유건이가 끝장이야.”고상훈은 이를 꽉 물었다.“내가 키운 애야. 누구도 유건을 그렇게 만들 순 없어! 이 집사, 나는 어차피 오래 못 살 몸이야.”“그렇다고 언제까지 유건 뒤에 숨을 수도 없지. 간병인 부르고, 유건한테 전화해.”“...”이호민은 고개를 숙인 채 눈시울이 붉어졌다.“예... 알겠습니다.”고상훈이 옷을 갈아입고 막 나서려는데, 문이 열리며 유건이 들어왔다.한밤중에 할아버지를 깨운 죄책감이 유건의 얼굴을 짓눌렀다.“할아버지... 저는 너무 못났어요.”“그만해라.”고상훈이 손을 내저었다.“일 터졌다고 그렇게 풀이 죽어 있으면 어떡하니? 누구는 평생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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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2화

“좋아, 아주 좋아.”고상훈은 유건의 말을 다 들은 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이 짧은 시간 안에 이런 판단을 내리다니, 이미 충분히 잘했다.이 정도면, 자신이 세상에 없더라도 마음 한편이 놓였다.“그럼...”고상훈은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일어섰다.“우리 둘이 나눠서 움직이자.”“할아버지?”유건이 황급히 일어나 그를 부축했다.“이러지 마세요, 농담하지 마세요.”“농담?”고상훈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지금 농담하는 얼굴로 보이냐? 너 혼자 다 떠맡으면, 결국 쓰러질 거야.”고씨 가문은 부씨 가문처럼 번성한 집안이 아니었다.고씨 가문이라 해 봤자, 지금은 유건 혼자뿐이었다.유건에게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이런 때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고씨 가문’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유건 곁에 나설 수 있는 이는 고상훈, 그 한 사람뿐이었다.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였다.‘할아버지 말씀이 다 맞아...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프지.’“가자.”고상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내가 도울 수 있을 때 돕는 게 낫지, 누워서 썩을 순 없잖아.”이미 오래 버티기 힘든 몸이었다.하지만 죽음을 기다리느니, 조금이라도 쓸모 있게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너는 사람들을 모아라. 나는 사직 문제부터 처리하마. 시간이 없어, 더는 미룰 수도 없다.”유건은 대답 대신 주먹을 꼭 쥐었다.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세게.‘지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해. 그래야 모두를 지킬 수 있어.’...그날 밤, 시연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다음 날, 출근하기 전 시연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고상훈이 이 일을 아는지 궁금했다.그냥 상황을 확인만 하려던 것이었는데, 시연이가 병실 문을 열자, 고상훈의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어르신은 어젯밤에 나가셨어요.”간호사가 조용히 말했다.“급하게 고 대표님이랑 같이 나가셨거든요.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신 것 같았어요.”“지 선생님도 아시잖아요.”간호사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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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3화

들어온 사람은 이호민이었다.“집사님.”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시연 씨.”이호민이 고개를 살짝 숙였고, 표정엔 무거운 기색이 짙게 깔려 있었다.“어르신, 고장민 쪽 뒤에는 해성파 세력이 있습니다.”“해성파?”고상훈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그래, 해성파... 그러면 이해가 가는군.”그는 낮게 웃었다.“그놈, CA국에서 그동안 나름 잘 기어다녔나 보네.”‘그래서 직원들을 그렇게 꾀어낸 거였군.’‘이익은커녕 회사를 무너뜨리는 짓을 하면서도...’‘자기가 뭘 건드린 건지는 모르는 모양이지.’고상훈은 속으로 씁쓸하게 혀를 찼다.‘해성파 빚을 지고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그놈이 어떤 최후를 맞을진 뻔한데.’물론, 그런 건 더 이상 고상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고상훈의 마음속에서, 아들 고장민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자기가 만든 업보는, 자기가 감당해야지.’“됐어.”고상훈이 간병인을 흘깃 보았다.“이제 발도 충분히 불었겠지.”“네, 어르신.”간병인이 마른 수건을 가져와 조심스레 발을 닦았다. 이윽고 바지를 무릎 위로 올리고 마사지를 준비했다.원래라면 매일 이 시간에 하는 일상이었다.하지만 고상훈은 손을 내저었다.“그만하자. 오늘은 시간이 없어.”“네?”“양말 신겨라. 나가야겠으니.”직원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고상훈이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늦을 터였다. 간병인은 난처한 얼굴로 이호민을 바라봤다.“집사님...”이호민이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어르신 뜻대로 하세요. 지금은 말려봤자 소용없습니다.”“하아... 네, 알겠습니다.”간병인이 조심스레 양말을 신기고, 신발 끈을 매주었다.그 모습을 시연은 말없이 바라봤다.‘해성파... CA국...’그 이름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뒤섞였다.시연은 문득 지난 일을 떠올렸다.‘그때 외국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날 구해준 사람도 해성파와 관련이 있었지.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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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4화

시연은 먼저 병실을 나섰다.잠시 뒤, 이호민이 들어갔을 때는 고상훈이 이미 지팡이를 짚고 일어선 상태였다.“이 집사, 잘 왔다. 나가자.”“예, 어르신.”이호민은 당연히 회사로 가는 줄 알았다.그런데 차에 오르자, 고상훈이 전혀 다른 주소를 불러주었다.“오랜 친구 좀 만나러 가야겠다.”“어르신, 지금이 그런 때입니까...?”이호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 상황에 친구라니... 어르신답지 않으신데.’고상훈은 짧게 웃었다.“하하, 그냥 운전해라.”차가 도착한 곳은 조용한 고급 주택가였다. 문을 연 건 가사도우미였다.“누구를 찾으시죠?”고상훈이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밝혔다.“내 성은 ‘고’라고 하오. 당신네 사모님께 오래전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지.”“잠시만 기다려 주세요.”가사도우미가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다시 열렸다.이번엔 부명주가 직접 나왔다.“어르신!”부명주는 놀란 얼굴로 급히 달려 나왔다.두 사람은 오래전 인연이 있는 사이였다.“이렇게 직접 오시다니요. 어서 들어오세요.”“명주야, 여전하구나. 괜히 격식 차리지 마라.”고상훈은 부명주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웃었다.“아주머니, 차 좀 준비해요.”부명주가 부드럽게 지시했다.“어르신, 녹차로 드릴까요, 아니면 보이차로 드릴까요?”“둘 다 좋다.”“그럼 제가 알아서 고르겠습니다.”“그래.”잠시 후, 차가 준비되는 동안,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어르신, 우리... 십몇 년 만인가요? 그동안 건강은 좀 어떠셨어요?”“하하.”고상훈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그런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사실은 별로야. 그때 네가 살려준 목숨, 이제는 제때가 되어서 곧 하늘로 올라가야 할 것 같구나.”“어르신... 그런 말씀 마세요.”부명주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괜찮다.”고상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된 마음이었다.“살 만큼 살았다. 이제는 정리할 일만 남았지. 오늘 온 건... 부탁할 일이 있어서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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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5화

레오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왔어?”부명주가 문 앞으로 나가며 반가이 맞았다.그녀는 다가온 레오의 팔을 살짝 붙잡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르신 꽤 오래 기다리셨어. 무슨 일이든, 도울 수 있으면 꼭 도와줘야 해. 혹시 직접 해결이 어려워도... 방법을 좀 찾아봐.”두 마디를 채 끝내기도 전에 부명주의 눈가가 벌써 붉어졌다.“알겠어.”레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살짝 감쌌다.‘시연이가 보낸 거겠지. 그렇다면... 내가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거고...’“걱정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게.”그는 짧게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고,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어르신.”고상훈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조심스럽게 인사했다.“앤더슨 회장님.”레오는 잠시 멈춰 섰다.‘내 성까지 아시는 걸 보니... 이건 단순한 부탁이 아닐 거야.’“앉으시죠, 어르신. 편하게 말씀하세요.”“그래요. 그럼,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고상훈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상황을 처음부터 설명했다.잠시 후, 모든 이야기를 들은 레오는 짧게 한 단어를 내뱉었다.“해성파.”레오의 시선이 곧 부명주를 향했다.부명주는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그래... 역시 그쪽이구나. 결국 그 이름이 여기까지 들어오다니.’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생각을 명확히 읽을 수 있었다.고상훈만 모를 뿐이었다.“그렇습니다.”고상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급박한 상황이라... 시간도 부족하고, 부득이하게 이렇게 찾아뵙게 됐습니다. 무례를 범했지요.”“어르신, 그렇지 않습니다.”레오가 즉시 손사래를 쳤다.“직접 뵙는 건 처음이지만, 시연과 우주에게 베푸신 정은 저와 명주,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감사의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그런 말씀을...”고상훈은 잠시 멈칫했다.‘역시 그렇구나. 부명주가 살아 있고, 앤더슨 가문의 사람이 된 이유...’‘레오와의 관계가 단순치 않겠지.’그는 눈을 가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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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6화

이미 사직서를 낸 직원들은 생각했다.유건이 지금은 괜찮다고, 지난 일은 잊자고 말하지만, 그게 진심일까?하지만, 유건은 워낙 발이 넓고, 외부에서 사람을 끌어올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나중에 뒤끝이라도 있으면 어쩌지?’그렇다면 차라리 새로 온 두 명의 ‘고 이사’를 계속 밀어주는 게 낫다고 여겼다.이익이 걸린 문제라면, 그런 생각이야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고상훈이 도착했을 때, 유건과 직원들 사이의 팽팽한 분위기는 여전했다.“할아버지.”작은 회의실에서 나온 유건은 고상훈의 얼굴을 보더니, 아까보다 더 짙게 미간을 찌푸렸다.“또 오셨어요? 집사님께 말씀드렸잖아요. 여기 일은 저 혼자면 된다고요.”“알아, 알아.”고상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지. 근데, 병원에만 있자니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있어야지.”유건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됐어요, 전 괜찮아요.”고상훈은 손을 내저으며 손자를 달랬다.“그냥 지켜만 볼게. 아무것도 안 할게, 됐지?” 할아버지가 이렇게 걱정하는 걸 보니, 유건은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더 단단히 버텨야 하는데...’하지만 고상훈을 돌려세울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럼 이렇게 하시죠.”유건은 고상훈을 부축하며 말했다.“휴게실에서 잠깐 쉬세요.”고상훈이 다시 말 꺼내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안 그러시면 집사님 불러서 바로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집사님...”“에이, 에이.”고상훈은 웃으며 손자의 팔을 붙잡았다.“알았어, 알았다고. 간다고 했잖아. 됐지?”“그 정도면 됐어요.”유건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휴게실에 들어온 고상훈에게 이호민이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어르신, 약 드실 시간입니다. 약 드시고 푹 주무세요.”솔직히 말해, 고상훈이 지금까지 버틴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나도 너무 무리하면 안 되지.’‘내 손자 곁에 조금이라도 더 있으려면 체력부터 챙겨야 해.’“그래.”고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을 삼켰다.레오 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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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7화

유건은 고장민과 고승하 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이 두 분, 고 이사님들이 여러분께 약속했던 것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어졌습니다.”유건은 미간을 살짝 올리며 말을 이었다.“그래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그래도 퇴사하겠다고 고집할 겁니까?”탁- 탁-유건은 손끝으로 책상 위를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렸다. 그 책상 위엔 직원들이 낸 사직서 뭉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순식간에 웅성거림이 번졌다. 눈치 빠른 몇몇 직원들이 고장민에게 물었다.“이사님, 고 대표님 말씀이 무슨 뜻이죠?”고장민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이게 뭐야...?’그는 유건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줄로만 알았다.그 시선엔 불쾌함과 동시에 어딘가 측은한 감정이 스쳤다.“유건,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직원들이 널 믿을 것 같아?”그 말투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어차피 그의 뒤엔 해성파가 있었으니까.“쳇...”유건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시선을 고장민에게 맞추며 말했다.“그래? 그럼 당신이 직접 ‘주인님’한테 전화해 볼래?”고장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었다.‘뭐야, 설마 그걸 알아낸 거야?’‘불과 서른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하지만 곧 스스로를 다독였다.‘그래, 알아냈으면 뭐 어쩔 건데.’‘해성파랑 나, 이미 계약 끝났어. 고씨 가문이 CA국까지 손 뻗을 리도 없잖아.’그런데, 고장민의 예상은 틀렸다.바람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유건은 아무 말 없이 고장민을 조용히 바라봤다.마치 곧 닥칠 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그리고 그때...띠링-회의실 안에 울리는 벨소리.고장민의 핸드폰이었다.‘설마...’유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갯짓했다.“받아.”그 한마디에 공기가 얼어붙었다.고장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해성파에서 온 전화였다.“어서 받아.”유건이 낮게 말했다.“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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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8화

“유건.”지나가던 유건을 승하가 불러 세웠다.유건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왜.”‘뭐야, 자기 아버지나 도와주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네가 이겼어.”승하가 웃으며 말했다.“뭐, 애초에 네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놈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축하라도 해주겠다는 거야?”유건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고맙다.”그렇게 말하며 유건은 허리를 숙여 승하의 휠체어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이 따위 수를 그동안 숨겨둔 거야? 넌 진짜 그 정도밖에 안 되냐?” 말을 끝내고 유건은 손을 떼며 돌아섰다....휴게실 안.고상훈은 반쯤 잠든 얼굴로 누워 있었다. 자는 것도 같고, 깨어 있는 것도 같았다.그러다 문득 눈을 번쩍 떴다. 마치 무언가를 예감한 듯.“이 집사?”“할아버지?”문이 열리고, 유건이 먼저 들어왔다. 그 뒤를 이호민이 따랐다.유건은 침대 곁으로 다가가 고상훈의 몸을 부축해 앉혔다.“깨어나셨네요?”유건은 생각했다. ‘역시 편히 주무시진 못하셨겠지.’“할아버지, 다 정리됐어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돼요.”유건이 말했다.“이제 집사님이 병원으로 모실 거예요, 괜찮죠?”‘끝났다고?’고상훈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그래? 그래, 잘됐구나.”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역시, 레오답군.’고상훈은 손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결국 유건을 끌어 올린 게 시연이라니...’‘둘은 서로를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함께할 수 없으려나?’진실을 말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지만, 고상훈은 꾹 참았다.‘말할 수 없어. 시연의 도움을 받고도 그 아이를 더 아프게 만들 순 없지.’유건은 무릎을 꿇고 고상훈의 양말과 신발을 신겨 주었다.그다음 고상훈을 부축해 이호민과 간호사에게 넘겼다.“할아버지, 먼저 병원에 가 계세요. 전 금방 마무리하고 찾아뵐게요.”“그래.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중요한 일부터 챙겨야지.”“알겠어요.”이호민과 간호사는 고상훈을 양옆에서 붙잡고 천천히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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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9화

“이 얼굴로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어?”유건의 손끝은 풀리지 않았고, 눈동자엔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고장민 일가... 대체 몇 대를 이어온 원수라도 되는 걸까?“당신, 우리 엄마를 죽게 만들고, 이젠 할아버지까지 손대려고?” “유... 유건아?”고장민이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연신 저었다.“아, 아니야... 난 그런 짓 안 했어...”자기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는 말,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안 했다고?”유건이 냉소를 흘렸다.‘입만 열면 거짓말이지.’“당신이 벌인 일이 아니었으면, 할아버지가 지금 저 안에 누워 있겠냐?”“나... 그건...”“그게 우리 탓이야?”고장민이 말문을 잇지 못하자, 옆에 있던 심화연이 결국 끼어들었다.“우린 처음부터 예의 지켰어. 처음에 시비 건 건 너희 할아버지랑 너였잖아?”유건의 몸이 순간 굳었다. 눈동자가 번쩍이며 심화연을 베듯 바라봤다.그 시선만으로도 공기가 얼어붙었다.‘법만 아니면, 지금쯤 네 목은 이미 날아갔을 거다.’유건의 눈빛에 담긴 살기만으로, 심화연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움츠렸다.그러면서도 작게 중얼거렸다.“틀린 말은 아니잖아...”“입 닥쳐!”이번엔 참지 못한 건 고장민이었다.“내 아버지가 안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는데, 지금 그딴소리를 해야겠어? 세상 어느 자식이 아버지를 원망한단 말이야!”그는 말끝을 흐리며 유건을 힐끔 봤다.의도적인 시선이었다.‘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고, 저놈한테 던지는 말이기도 하지.’유건은 코웃음을 쳤다.“웃기지도 않네.”“유건.”고장민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린 가까이 안 갈게. 그러니까... 제발, 우리를 쫓아내진 말아줘. 적어도... 네 할아버지가 수술실에서 나올 때까진 기다리게 해줘.”‘나온다고?’그 한마디에, 유건의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그는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등을 보였다.“지한.”“예, 형님.”“저 사람들, 가까이 못 오게 해.”그 말이면 충분했다.허락은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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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0화

간호사가 조심스레 설명했다.“지 선생님이 오신 줄 몰랐어요. 지금 막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그 말에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같이 들어가죠.”시연이 작게 미소 지었다.“네, 감사합니다.”문으로 향하던 시연이 잠시 멈춰 리슬을 바라봤다.그 시선을 눈치챈 유건이 조용히 말했다.“시연?”“가요.”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유건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예상과 달리, 고상훈은 침대에 반쯤 누운 채 꽤 또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마지막 힘을 내고 계신 건가?’ 시연은 가슴이 조여들었다.“조이 왔구나.”고상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그가 조이에게 손을 내밀었다.“증조할아버지!”유건은 조이를 침대 옆으로 올려 앉히며 말했다.조이가 그 손을 꼭 잡았다.“아이구, 착하지.”고상훈은 손을 덮으며 웃었다.“증조할아버지, 왜 계속 누워 계세요?”조이가 순진하게 물었다.“그게 말이지...”고상훈은 조용히 웃었다.“증조할아버지가 조금... 많이 피곤하거든.”“그럼 증조할아버지는 계속 누워 계세요. 조이가 옆에서 같이 누워 있을게요.”작은 몸이 고상훈의 품에 폭 안겼다.그 온기가, 병실의 공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참, 착한 아이구나.”고상훈이 조이를 품에 안은 채, 유건과 시연을 바라봤다.“마지막에 너희 둘이랑 조이까지 다 곁에 있으니... 이제 미련은 없겠구나.”시연의 눈가가 번쩍 젖더니, 순식간에 눈물이 흘러내렸다.“유건아.”고상훈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이제 더는 할아버지가 걱정할 일은 없겠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잘 해낼 거라 믿는다.”그가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미안하구나. 할아버지가 네 곁에 오래 못 있어 줘서... 좋은 가족 한 명 남겨주지 못해서...”그러고 나서 밖에 있는 고장민 일가가 떠올랐다.‘차라리 없는 게 나았지.’‘할아버지...’유건은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그가 조용히 눈가를 손으로 가렸다.“걱정하지 마세요. 저... 혼자서도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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