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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Chapter 1381 - Chapter 1390

1480 Chapters

제1381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유건이 걸음을 멈췄다.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눈빛은 공허했다.“시연, 왔네.”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유건은 옆에 서 있는 리슬을 힐끗 보며 말했다.“다 들었구나?”“네.”시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뭘 도울 수 있을지 몰랐다.“누가 한 건지 알아요?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누군지는 알고 있지.’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굳이 시연이 알 필요도 없었다.그건 그저 시연의 근심을 더 할 뿐이었다.이제 시연은 유건이 기대거나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유건은 대답을 피하며 담담히 말했다.“일이 갑작스러워서 미안해. 괜히 오게 했네.”시연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지금 중요한 건 고상훈 유골함이었다.이 일이 누가 저질렀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밤이 되자 유건은 지하를 만났다.“세상에, 인간이란 게 이렇게 비열할 수가 있냐?”지하가 한숨을 내뱉었다.“진짜 방심할 틈이 없네.”‘고장민 일가... 사람은 CA국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런 수작을 부려?’“이제 어떻게 할 거야?”지하의 말에 유건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한참을 들이마신 뒤, 짧게 내뱉었다.“어떻게 하긴. 할아버지가 저쪽 놈들 손에 있잖아.”‘선택의 여지가 없지.’그 말에 지하와 다른 친구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진짜 갈 생각이야? 그놈들이 일부러 너 끌어들이는 거잖아.”“맞아. 거기 가면 어떤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안 가면 어쩔 건데?”유건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친구들이 하는 말, 다 알고 있었다.고장민 일가가 함정을 팠다는 사실도, 그 속내까지도. 하지만 유건은 피할 수 없었다.‘우리 할아버지, 아직 땅에 묻히지도 못했는데... 내가 모셔 와야지.’고장민, 그 인간은 짐승보다 못했다.죽은 아버지까지 이용하다니.지하와 친구들은 말을 잃고 서로를 바라봤다.“가도... 괜찮겠어?”누군가 낮게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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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2화

하지만 유건은 정말 아무도 없었다.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유건 씨... 잘 있는 걸까? 무사히 도착했을까?”어제 출국했다면, 지금쯤 D시에 도착했을 터였다.‘그동안 유건 씨가 겪은 일들... 전부 고장민 일가 소행이었지.’이번에도 또 무슨 비열한 짓을 꾸미고 있진 않을까,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진아가 말했다.“주지한은 여기 남았대. 고 대표는 정민환이랑 정기환 데리고 갔다더라.” 그 말을 듣고 시연은 그나마 안도했다.“정민환 씨랑 정기환 씨가 같이 갔다면 좀 낫겠네.”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왠지 모르게 불안해.’유건이 떠난 뒤로 시연은 줄곧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상훈의 사재 날, 시연은 평소처럼 납골당을 찾았다.안은 조용했다. 고상훈의 영정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시연은 향을 피우고, 조심스레 절을 올렸다.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할아버지, 유건 씨가 이제 할아버지 모시러 갔어요. 하늘에서도 지켜봐 주세요. 유건 씨가 꼭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요.”하지만, 결국 사고가 터졌다.소식은 진아를 통해 시연에게 전해졌다. 그날 오후, G시엔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시연과 진아는 카페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잠시 쉬고 있었다.그런데 진아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뭔가 말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얼굴이었다.“왜 그래? 할 말 있어?”“그렇게 티나?”진아는 헛웃음을 지었다.‘역시 나, 비밀 같은 건 못 숨겨.’“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또 부 대표랑 싸웠어?”“아니.”진아는 고개를 저었다가, 이내 작게 끄덕였다.“부지하랑 싸우는 건 뭐, 맨날 싸워서 별일도 아니고... 그건 됐어.”진아는 말을 돌리더니, 시연의 손을 꼭 잡았다.“부지하가 너한텐 말하지 말래. 말해봤자 괜히 걱정만 늘 거라고. 근데... 나는 그래도 말해야 할 것 같아.”“무슨 일인데?”시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설마...’“혹시... 유건 씨 일이야?”진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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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3화

“응?”시연이 무심코 중얼거렸다.“나 괜찮아.”‘괜찮다고?’진아는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시연의 눈물을 닦아줬다.“이게 괜찮은 얼굴이야? 이렇게 울면서 무슨 소리야.”“울었어...?”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손끝에 닿는 건 뜨겁고도 차가운 눈물자국뿐이었다.‘정말 울고 있었네...’진아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차가운 두 손을 꼭 감싸 쥐었다.“이미 벌어진 일이야. 걱정한다고 바뀌는 건 없잖아. 지금은 너부터 버텨야 해.”시연은 멍하니 고개를 숙였다. 눈빛이 초점을 잃은 듯했다.“시연!”진아가 다급히 불렀다.“생각해 봐. 고 대표 그 사람, 예전에도 칼 맞고, 폭탄 터져도 멀쩡했잖아. 이번에도 분명 괜찮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그래... 그랬지.’시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건에게 칼을 들이댄 것도, 폭탄을 쓴 것도... 다 고장민 그 집안이었다.그 두 번 다, 유건은 살아남았다.하지만...‘죽다 살아나는 게 몇 번이나 반복될 수 있겠어?’그 집안은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이었다....다음 날, 웨딩숍에서 전화가 왔다. 드레스 피팅을 다시 해야 한단다.이미 치수를 잰 상태였지만, 원단이 바뀌어서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은범이 강울대병원 앞으로 와서 시연을 데리러 왔다.차 안에서 은범이 시연을 흘끗 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눈이 왜 그래? 밤에 잠 못 잤어?”“응? 아... 응, 좀.”시연은 무의식적으로 눈가를 만졌다.‘잠을 못 잔 게 아니라... 아예 눈을 붙일 수가 없었어.’눈을 감으면, 유건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피투성이로 쓰러진 얼굴, 비에 젖은 어깨, 손끝이 닿지 않는 거리.그래서 차라리 깨어 있는 게 나았다.잠드는 게 더 두려웠다.시연은 그저, 누군가에게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진아 쪽에서도, 지하 쪽에서도 알아낸 건 없었다.그가 전한 말은 단 한 줄이었다.“아직 경찰 수배 중이래.”그 말이 귓가에서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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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4화

시연은 충동적으로 CA국에 가겠다고 한 게 아니었다.유건은 조이의 친부였다.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시연은 그냥 모른 척할 수 없었다.게다가 레오가 CA국에 있었다.‘레오는... 분명 도와줄 수 있을 거야.’물론, 그건 시연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인연이었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자존심이니 체면이니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은범은 잠시 말없이 시연을 바라보다가 물었다.“네가 아는 사람? 어떤 사람이야?”“그건...”시연은 잠시 머뭇거렸다.“나중에... 자세히 말해줄게. 지금은 그냥 믿어줘, 응?”은범은 대답하지 않았다.사실, 시연이 정말 마음먹었다면 자신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그녀는 이미 성인이었고, 어디든 갈 자유가 있었다.그런데도 이렇게 묻는 건... 은범을 ‘신뢰하고 있다’는 의미였다.“그럼... 나도 같이 갈까?”은범의 목소리가 낮고 진지했다.‘이대로 혼자 보내도 괜찮을까?’ 불안감이 그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아니.”시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 혼자 가도 돼. CA국에 가는 건 위험하지 않아.”‘레오가 날 지켜줄 거야. 부명주도 마찬가지고.’시연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지금 은범에게 너무 가혹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이건... 정말 불공평해. 하지만 유건 씨가 위험한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무수한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켰다.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결국 시연은 자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금방 다녀올게.”시연은 은범을 바라보며 간절히 말했다.“그래도... 괜찮지?”잠시 정적이 흘렀다.은범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은범아...”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눈물이 금세 고여 흐르려 했다.“고마워. 진심으로.”“그런 말 하지 마.”은범은 씁쓸하게 웃었다.“네가 친구를 구하러 가는 건, 당연한 거야. 그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야.”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덧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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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5화

시연은 또 한 사람을 만나러 갔다.이번엔 고상훈이 아니라, 지동성이었다.“아빠...”묘 앞에 선 시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한때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버거웠던 그 호칭이... 이제는 자연스레 흘러나왔다.하지만 시연의 목소리는 떨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죄책감이, 단 한마디 말조차 어렵게 만들었다.“아빠... 나... CA국에 다녀와야 해요.”은범에게조차 말하기 힘들었던 그 이야기를... 시연은 오늘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고했다.‘나, 예전에 뭐라고 했더라...’시연은 스스로에게 물었다.‘다시는 레오, 부명주 그 두 사람과는 엮이지 않겠다고 했지.’‘다신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하지만, 시연은 그 약속을 번번이 어겼다.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이번만은, 정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지동성의 묘비 앞에 선 시연은 어떤 변명도, 어떤 이유도 댈 수 없었다.“아빠... 내가 약속을 어겼어요. 정말... 죄송해요.”지동성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시연에게 얼마나 실망했을까...그가 간신히 살아온 억울한 세월은 금세 물거품이 되었겠지...그럼에도 시연은 자신을 지켜줬던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열하다’라는 단어가 마음속을 스쳤다.지동성의 반대도, 질책도 더는 들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시연은 감히 이렇게 와서 말하고 있었다.“하지만, 아빠... 이번엔 가야 해요. 유건 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도 몰라요.”시연의 눈가가 점점 붉어졌다.“그 사람은 조이 아빠예요.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그냥 모른 척하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요.”“아빠, 나를... 미워할 거죠?”묘역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산바람만이 나뭇잎을 스치며 지나갔다.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리고 이내 무릎이 풀리듯 주저앉았다.“아빠... 미워하셔도 돼요.”그녀는 두 손을 모아 들었다.그리고 이마를 손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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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6화

시연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이번엔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연결됐다.[시연?]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레오의 목소리는 놀라움으로 떨리고 있었다.[진짜... 시연 맞아?]레오의 핸드폰엔 당연히 시연의 번호가 저장돼 있었다.그럼에도 그렇게 되묻는 건, 믿기지 않아서였다.그는 평생 다시는 시연에게서 전화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네, 저예요.”시연은 짧게 대답했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다.‘회장님... 레오 선생님... 뭐라고 해야 하지...’결국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시연은 망설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지금 G시 국제공항이에요.”[공항?]레오가 순간 멍해졌다.[공항엔 왜... 어디 가는 거야?]잠시 생각하더니 급히 물었다.[혹시 우주 보러 오는 거야?]“아니요.”시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저... CA국으로 갑니다. 혹시... 저를 데리러 올 사람 좀 보내줄 수 있으세요?” 순간,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끊겼나...?’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듣고 계세요?”[듣고 있어!]레오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들리는 숨결이 가빠져 있었다.[듣고 있지! 시연, 지금 어디야? 아니, 그걸 내가 왜 묻지... 공항이라며! 몇 시 도착이야? 아빠가... 아니, 내가 직접 갈게!]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누구랑 통화해?]부명주의 목소리였다.[시연이야!]레오의 목소리엔 흥분이 가득했다. 기쁨이 숨길 수 없을 만큼 터져 나왔다.[시연이가 여기 온대!][그래?]부명주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전화 좀 바꿔줘. 나도 시연이랑 얘기 좀 하게.]곧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바뀌었다.[시연! 나야, 엄마야! 들리니?]‘이렇게 큰 소리로 부르는데, 못 들을 리가 있나요...’시연은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뜨며 말했다.“네, 들려요.”그녀는 입술을 떼었지만, 역시 어떻게 불러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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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7화

레오가 시연이 우는 소리를 어떻게 참겠는가?[울지 마... 알았어. 지금 바로 처리할게. 사람 시켜서 찾게 할게.]“...”시연은 목이 메었다. 하지만 입을 열었다 닫더니 말했다.“탑승해야 해요. 이제 가야 해요.”[잠깐만.]레오가 급히 그녀를 막았다.[무슨 좌석 타? CA국까지 열 시간 넘는데, 이코노미석이면 힘들잖아.]‘힘들긴 뭐가 힘들어...’‘수많은 사람이 다 이코노미석 타는데, 나라고 못 탈 게 뭐람.’“괜찮아요...”[괜찮긴.]레오는 드물게 딸 챙길 기회가 생겨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잠깐만 기다려봐. 전화 한 통만 하면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거야. 금방 끝날 거야.]“정말 괜찮아요...”[괜찮지 않아.]시연이 아무리 거절해도, 레오의 고집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탑승할 때, 한 직원이 시연의 좌석이 이미 업그레이드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시연은 자리에 앉아 눈가리개를 썼다.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잔 터라, ‘이번엔 그냥 푹 자고 일어났을 때 CA국 D시에 도착해 있고, 유건 소식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뿐이었다....열 시간 후, CA국 D시.이번에 시연은 짐도 많이 안 가져왔다. 출국장을 나서자마자 멀리서 검은 정장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설마 레오 쪽 사람이야? 이건 좀 너무 티나는데...’역시나.그 무리의 맨 앞에는 레오와 부명주가 서 있었다.“시연아!”부명주가 제일 먼저 시연을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여기야! 여기!”시연은 조용히 손을 들어 흔들었다.“시연아!”이번엔 레오가 부명주를 데리고 앞으로 나왔다.뒤에는 조그만 그림자 하나가 따라붙었다.“누나!”케빈이었다.갈색 웨이브 머리를 한 케빈이 부모를 빙 돌아, 시연에게 달려들더니 그대로 안겼다.“누나, 제가 마중 나왔어요!”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케빈까지 데리고 나올 줄 몰랐네...’“후후.”레오가 웃으며 말했다.“원래 케빈은 안 데려오려고 했는데, 이 녀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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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8화

시연은 대저택에 살아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나라가 달랐다.G시에서는 별장이나 대저택의 규모와 위치가 법으로 제한되어 있었다.CA국은 달랐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앤더슨 가문은 달랐다.눈앞에 펼쳐진 저택은 한눈에 봐도 백 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세월을 품은 듯한 묵직한 건축물, 끝이 안 보이는 넓은 대지.‘이건...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잖아.’시연은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았다.왜 어떤 사람들이 몇 번이고 자신을 없애려 했는지...만약 시연이 원했다면, 이 모든 것의 첫 번째 상속자는 바로 그녀였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건,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누나.”케빈이 시연의 손을 살짝 당겼다.“들어가요. 누나 비행기 오래 탔잖아요. 많이 피곤하죠?”“응, 그래. 들어가자.”문을 열고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겨울의 냉기가 단숨에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어서, 외투 벗어.”부명주가 다정하게 말했다.“안 그러면 땀나고 감기 걸려.”그녀는 직접 시연의 패딩을 벗겨주며, 웃음을 지었다.“배고프지? 밥 다 차려놨어. G시에서 온 요리사야. 입맛은 걱정 안 해도 돼.”부명주는 원래 G시 사람이었다.그래서 이 집에는 자연스럽게 G시 요리사가 있었다.“아, 맞다. 내가 밀크셰이크 만들어줄게. 케빈, 누나 손 씻을 수 있게 안내해 드려.”“네, 엄마.”케빈이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시연은 그들의 분주한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이게... 집이란 걸까?’‘따뜻하고, 시끄럽고, 다정한 곳... 이런 게 진짜 가족의 모습일까?’그 순간, 시연은 문득... 정말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누나, 가요!”케빈이 시연 손을 잡고 세면대로 데려가 손을 씻겼다.그런 다음 다시 손을 잡고 주방으로 향했다.레오는 가사도우미와 함께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는 국그릇에 손을 대보며 온도를 확인했다.“딱 좋네. 안 식었어.”부명주는 방금 만든 밀크셰이크를 들고나왔다.“자,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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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9화

시차에다 마음이 복잡해서, 시연은 밤새 뒤척였다.겨우 새벽 무렵에야 잠이 쏟아졌지만, 부명주의 목소리가 들렸다.“시연아, 일어나.”시연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떴고, 머리가 지끈거렸다.“속 안 좋아?”부명주가 시연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이마를 짚었다.“조금만 버텨. 아침 먹고 점심쯤에 잠깐 자면, 밤에는 좀 나아질 거야.”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부명주는 시연을 일으켜 세웠다.마치 어린아이를 돌보듯, 세수도, 머리 손질도 다 챙겨줬다.시연은 괜히 쑥스러워서 말했다.“저 혼자 할게요.”“괜찮아. 넌 양치만 해.”부명주는 손사래를 치며, 시연이 양치하는 사이에 빗을 들어 머리를 다듬어줬다.짧은 단발을 매만지다 말없이 웃었다.“어릴 땐 긴 머리 되게 좋아했는데, 이젠 안 그래?”‘이걸 뭐라고 말하지... 유건 씨가...’시연은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웃으며 말했다.“너무 바빠서요. 단발이 관리하기 편하잖아요.”“그렇지.”부명주는 흐뭇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시연, 이제 훌륭한 의사가 됐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을 가리켰다.“갈아입을 옷 챙겨놨어. 이따 내려와.”“네.”부명주가 나간 뒤, 시연은 옷을 갈아입으며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유건 씨가 무사히 돌아오면... 다시 머리 길러야지.’...계단을 내려가니 다이닝룸에는 부명주 혼자였다.“시연, 와서 앉아.”그녀가 손짓하며 말했다.“케빈은 수영하러 갔고, 레오는 제임스 경무관 만나러 갔어.”‘경무관’이라는 말에 힘을 실었다.시연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부명주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래, 네 생각대로야. 경찰도 찾고 있어. 우리보다 먼저 찾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두 방향으로 준비해야지. 그렇지?”“네, 맞아요.”시연은 고개를 숙였다.‘다행이야. 여기에 레오가 있어서...’‘나 혼자였으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야.’‘이 낯선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겠어.’‘그냥... 괜히 발만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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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0화

루시는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그래, 그런데...”부명주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너희 아빠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정말 집에 없어.”“헛소리하지 마!”루시는 믿을 리가 없었다.“아빠 안 부를 거야? 좋아, 내가 직접 찾을게.”그녀는 부명주를 밀치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아주 무서운 기세였다. “오늘은 꼭 아빠 데리고 집에 갈 거야!”“사모님...”가사도우미들이 당황한 얼굴로 부명주를 바라봤다.“어쩌죠...?”부명주는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찾게 둬.”루시는 직접 확인해야만 믿을 테니까.한참이 지나 루시가 다시 나타났다.얼굴에는 믿기지 않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아빠 어디 계셔?”“루시.”부명주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나 거짓말 안 했어. 너희 아빠 진짜 없어.”“안 믿어!”“아까 방 다 뒤졌잖아.”“여기는 엄청 크잖아. 당신이 우리 아빠 숨겨놨을 수도 있지!” 부명주는 미간을 찌푸렸다.“루시, 너희 아빠는 사람이야. 사람을 내가 어떻게 숨기겠어? 그리고 너도 알잖아. 너희 아빠는 한 번도 널 피한 적이 없어!” 그건 사실이었다.레오와 예희주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에 틀어졌지만, 루시는 레오의 딸이었다.레오에게 루시는 케빈만큼 소중한 아이였다.바로 그 때문에 예희주는 루시를 내세워 이곳을 몇 번이고 찾아오게 했다. 루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제발, 아빠를 돌려줘. 우리 엄마 아파... 이번엔 진짜야. 많이 안 좋아.”예희주가 아프다는 말...부명주는 그 말을 벌써 수없이 들었다.‘또 그 이야기네... 몇 년째 똑같은 말.’루시는 올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마치 예희주가 당장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굴었다. 예희주가 진짜로 아픈 건지, 아니면 또 연극인지, 부명주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그저 루시의 얼굴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알겠어. 너희 아빠 돌아오면 꼭 전할게.”“흥.”루시는 고개를 홱 돌렸다.오늘은 더 이상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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