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맨스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 챕터 1421 - 챕터 1430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의 모든 챕터: 챕터 1421 - 챕터 1430

1476 챕터

제1421화

시연의 허리는 거의 꺾이다시피 굽어 있었다.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등에 업힌 유건의 체온이 뜨겁게 번졌다.시연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썼다.‘조금만 더... 제발 조금만 더 버텨줘요, 유건 씨...’그 순간이었다.“야!”어디선가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시연은 놀라서 비명을 삼켰다.발이 헛디뎌 앞으로 쏠렸지만, 이를 악물고 간신히 버텼다.“허억... 허억...”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하, 하하하...”남자는 이상하게 웃었다.햇빛에 바랜 갈색 머리카락은 떡이 져 있었고, 얼굴은 피곤과 광기에 뒤섞여 있었다.옷은 찢겨 있었고, 냄새는 코를 찔렀다.‘뭐지... 이 사람...’시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그 남자의 눈빛이, 어딘가... 위험했다.“블랙 헤어 걸?”남자가 시연을 똑바로 보며 눈을 번뜩였다.“블랙 헤어 걸 맞지?”시연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새도 없었다.하지만 직감적으로 느꼈다.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야.’“움직이지 마.”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그리고 눈동자가 미친 듯 흔들렸다.“거기 멈춰. 스윗하트,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아주 위험하단 거 알아?”시연의 몸이 얼어붙었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미쳤어... 완전히 미쳤어.’남자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친 듯이 웃었다.“좋아, 잘했어. 스윗하트. 이제 우리 게임 하나 하자, 응?”“무... 무슨 게임?”시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남자가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그 웃음은 섬뜩하고 기분 나쁘게 길었다.“의사랑 환자 놀이.”남자는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나는 의사야.”그리고 시연을, 그다음 등에 업힌 유건을 가리켰다.“너희는 환자지.”순간, 시연의 심장이 멈춘 듯했다.‘고승하... 그 사람이 한 말, 그게 이거였구나.’그녀는 조금 전 승하가 비웃듯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메터지강이 이렇게 넓은데
더 보기

제1422화

시연은 이를 악물고 숨을 몰아쉬었다.“우리, 이제 운명에 맡기죠. 오늘... 같이 살든, 같이 죽든!”뒤에서 미친 남자의 웃음소리가 퍼졌다.‘메터지강이 이렇게 넓은데, 하필이면 저런 미친X을 만나네.’그 미친 남자은 정말 말 그대로의 미친 남자였다.서양 남자라 체격도 크고 속도도 빠른데, 시연이 유건을 업고 뛰는 걸 두고도 따라잡지 않는 건, 분명 고의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 ‘사냥’의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뛰어봐, 하하하!”남자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말 안 듣는 환자들! 의사 선생님한테 와야 주사 맞을 수 있지!”“윽...!”결국 시연의 다리가 풀렸다.무릎이 꺾이며 땅에 그대로 쓰러졌다.“유건 씨!”시연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함께 넘어지는 유건을 감쌌다.유건의 상처가 다시 터질까 두려워, 온몸으로 감싸안았다.“괜찮아요... 괜찮아요...”시연은 입술이 떨렸지만, 소리는 단단했다.자기 무릎이 깨져 피가 배어 나와도, 시연은 이를 악물고 한 마디의 신음도 내지 않았다.그때, 주사기를 든 남자가 미친 듯이 다가왔다.“우리 예쁜 환자, 이제 주사 맞을 시간이야!”그가 웃으며 팔을 들었다.주사기 속 액체가 섬뜩하게 흔들렸다.“안 돼!”시연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 속에서,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그러고는 남자의 팔을 잡아채며 온 힘을 다해 밀어냈다.“응?”남자가 놀란 눈으로 시연을 내려다봤다.이 가냘픈 여자가 이런 힘을 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잠시 후, 그의 입꼬리가 다시 비틀렸다.“하하... 말 안 듣네? 괜찮아, 의사 선생님은 아주 착하거든. 환자가 순하게 될 때까지 끝까지 치료해 줄게.”그는 팔에 더 힘을 주었다.시연의 팔목이 부서질 듯했다.그러다 문득 남자가 팔을 홱 빼냈다.시연이 순간 중심을 잃고 앞으로 쏠린 그 틈...그가 주사기를 유건 쪽으로 내리꽂았다.“유건 씨!”시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팔을 들어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번개처
더 보기

제1423화

미친 남자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곧바로 검은 복장의 남자들이 달려들었다.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를 땅바닥에 눌러 짓눌렀다.“형님!”민환이 달려와 유건을 부축했다.유건의 손끝이 떨렸다.피투성이가 된 유건의 얼굴을 보자, 민환의 넓은 어깨가 와르르 무너졌다.“이 X자식... 고승하 그 X끼...!”민환은 이를 악물었고,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시연!”뒤늦게 달려온 레오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시연을 보자마자 그대로 무너졌다.레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내 딸...!”레오는 조심스레 시연을 안아 올렸다.그 품 안에서 시연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얼굴은 피범벅이었고, 입가엔 아직도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아빠가... 왔어... 진짜로...’시연은 흐릿한 시야로 레오를 바라봤고, 순식간에 눈가가 젖어 들었다. 레오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자, 눈빛이 미친 듯이 날카로워졌다.바로 한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그 시선의 끝엔... 조금 전의 미친 남자가 있었다.“저 자식...”레오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죽이지는 마라. 대신... 살려두지도 마.” “예, 회장님.”경호원들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이내 터져 나온 건... 짧은 비명과 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다.고통의 울음소리가 어둠 속에 묻혔다.레오는 시연을 꼭 끌어안았다.마치 깨질 것 같은 유리잔을 안는 듯한 손길이었다.“딸... 미안하다. 아빠가... 너무 늦었지.”시연은 입을 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피곤과 통증, 모든 게 한꺼번에 몰려왔다.그녀는 그저 희미하게 고개를 들어, 레오의 얼굴을 확인했다.“괜찮아. 이제 됐어.”레오가 시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고 대표 말이지? 그 사람도 같이 데려갈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너희 둘 다... 아빠가 지킬게.”그 말을 듣자 시연의 긴장이 서서히 풀렸고,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이제... 괜찮아... 아빠가 왔으니까...’시연의 고개가 레오의 어깨에 살며시
더 보기

제1424화

그 미친 남자가 들고 있던 주사기는 바로 국과수로 보내졌다.결과는 충격적이었다.주사기 안에서는 실제로 HIV 바이러스가 검출되고 말았으니까.그건 아마 그 미친 남자의 혈액에서 나온 바이러스일 것이다. 주삿바늘은 분명 시연의 팔을 스치듯 찔렀다.하지만 감염이 확실한 건 아니었다.시연은 의사였다.그녀는 침착하게 응급 외과 처치를 한 뒤, 레오가 불러온 감염내과 전문의와 상의해 즉시 격리 후 예방치료를 시작했다.HIV는 전파 경로가 제한적이라 해도, ‘혹시’라는 가능성 앞에서 단 한치도 방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집엔 시연의 가족이 모두 있었다.레오, 부명주, 그리고 케빈.레오와 부명주는 ‘괜찮다’라며 아무렇지 않게 굴었지만, 시연은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케빈한테 혹시라도...”결국 부모인 레오나 부명주는 그녀의 뜻을 존중했고, 시연은 별도의 독채에서 생활하며 치료를받기로 했다. 그럼에도 부모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두 사람은 매일 같이 시연을 찾아와 식사를 챙기고 대화를 나눴다.소독과 방호 따위는 번거롭지도 않았다.지금은 유건이 찾아왔다.방 안에서는 구역질 소리가 들렸다.“웩...”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는 유건의 심장을 죄어왔다.“시연!”그가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작은 방 안, 시연은 쓰레기통을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피곤함에 절은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은 움푹 꺼져 있었다.“유건 씨...?”시연이 고개를 들었다.가느다란 목소리.그 속엔 놀람과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유건은 서둘러 다가가 시연의 손을 붙잡았다.“왜 토하고 있어?”그는 목이 메였고, 가슴이 막혀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괜찮아요.”시연이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약 먹고 나면 그래요. 부작용이에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날의 일.그 주사기.그 순간을...유건은 잊을 수 없었다.“부작용이 이렇게 심해?”“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유건을 안심시키려 했다.“걱정하
더 보기

제1425화

본채로 돌아왔을 때, 레오가 이미 와 있었다.그는 응접실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회장님.”유건이 조심스레 인사했다.레오가 잠시 눈을 들어 바라보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앉아.”“네.”민환이 재빨리 다가와 유건을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그렇게 긴장하지 말게.”레오가 손짓했다.“나한테 굳이 ‘회장님’이라고 안 해도 돼. 그냥 ‘레오’라고 불러도 돼. 편하게 생각하게.”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천천히 덧붙였다.“자네는 시연의... 친구지.”‘친구.’그 단어 앞에서 유건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레오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어쨌든, 자네가 어려움에 부닥쳤는데 시연이 먼 길을 달려왔잖나. 그런데 내가 가만있을 순 없지.”“감사합니다.”유건은 낮게 고개를 숙였다.말은 짧았지만, 그 속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한때는 이 사람을 경쟁자로 봤었지.’‘그런데 이제는, 시연의 아버지.’어색함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짙고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그때, 부명주가 들어왔다.둘을 보자마자, 양손을 허리에 얹고 말했다.“아니, 이게 뭐야? 둘이 무슨 무언극이라도 하는 거야?”“여보.”유건이 얼른 일어섰다.“여사님.”“앉아, 얼른!”부명주가 손을 내저었다.“민환 씨, 얼른 고 대표 앉혀. 그 몸으로 자꾸 일어나면 어떡해. 그러다 상처라도 벌어지면, 우리 시연이 속만 더 상할 거 아니야.”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앉아 있어.”유건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이상하다. 분명 날 걱정하는 말인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부명주는 레오를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 고 대표한테 할 말 있다며? 왜 말 안 해?”“아, 맞다.”레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사실 그는 잊은 게 아니었다.유건을 보자마자 머릿속이 뒤엉켜 버린 것이다.시연과 유건, 두 사람 사이의 세월과 상처는 아버지인 레오의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남자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원망해야 하나...’레오는 잠시
더 보기

제1426화

“하...”레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또 한숨을 내쉬었다.유건은 아무도 못 본 줄 알았는데, 실은 아니었다.여긴 레오의 구역이라 레오만 본 게 아니었고, 부명주도 똑똑히 봤다.부명주는 괜히 웃음이 났다. 한숨만 내뱉는 레오를 보며 눈을 흘기더니...“한숨은 왜 쉬어? 시연이랑 있으려는 거잖아. 네 딸 해치러 가려는 것도 아니라고.”“알아...”레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복잡했다.한참을 말없이 있던 레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됐어, 당신은 몰라.”“응?”부명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이상하네,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말을 다 하고? 요즘 담력 좀 붙었나 봐?” “아니...”레오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가슴을 눌렀다. 진심으로 답답한 듯했다.“아버지랑 어머니는 달라! 특히, 딸 가진 아버지는 다르다고! 당신은 몰라,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떤 남자가 한밤중에 자기 딸 방에 들어가는 걸 보면...”‘하... 미치겠네 진짜.’“어떤 마음인데?”부명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시연이가 우리 딸인 건 맞지. 근데 시연이가 이제 와서 우리를 찾고, 도움받겠다고 하는 게 어디야.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부명주가 말했다.“그리고 기억해. 사위 말이야... 우리가 고를 자격은 없어.”“알아!”레오는 여전히 괴로운 얼굴이었다.“사위를 고르라면 말이야... 굳이 고른다면, 난 고 대표 꽤 괜찮다고 봐.”적어도, 레오 눈에는 노은범보단 훨씬 나았다.뭐랄까... 노은범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아마 비슷한 부류라 그런가... 레오도 한때는 세상 무서울 게 없던 놈이었다.그래서 레오는 자신처럼 독한 성격의 유건이 더 마음에 들었다.부명주가 눈을 깜빡였다.“그럼 대체 뭐가 그렇게 괴로워?”“나, 나 그게...”레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어떻게 말해야 하지... 그러니까 말이야, 시연이가 아무리 커도, 내 눈엔 아직도... 음, 조이만 한 애처럼 보여! 그 느낌, 당신은 모르지?”
더 보기

제1427화

“그러면 나도 안 나가.”유건이 단호하게 말했다.시연이 아무리 밀어내도, 그는 이미 붙잡은 불덩이 같은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이마는 뜨겁고, 얼굴은 잿빛이었다.‘이렇게 아픈데, 내가 어떻게 나가...’유건이 문 쪽을 돌아보니, 간병인이 얼음주머니와 알코올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그릇 안에는 거즈 두 장이 담겨 있었다.유건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그거 여기 두세요. 제가 할게요.”“하지만...”“안 돼요!”시연이 날카롭게 외쳤다.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떨리며 떨어졌다.“내 말 안 들려요? 지금 감염됐을 수도 있다고요. 잠복기일 수도 있다고요!”“그래서 내가...”“유건 씨!”그녀가 단호히 말을 끊었다.“정말 내 말이 안 들리는 거예요? 당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에요. 그 상처 하나하나가 감염경로가 될 수도 있다고요! 건강한 사람보다 위험도가 몇천 배는 높아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다 감쌌잖아!”유건은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외쳤다.붕대로 꽁꽁 감긴 팔, 손목, 심지어 손등까지.“봐봐, 이 정도면 괜찮잖아!”남자의 눈빛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그냥 고집이 아니었다.‘지금 이 순간, 시연을 혼자 두는 건... 절대 안 돼.’사람 인생에 진짜로 누군가의 곁이 필요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을까?아마 손에 꼽을 만큼일 것이다.그 몇 번 중 하나가 바로 지금이었다.그가 떠나더라도, 시연은 분명 버틸 것이다.하지만, 이때 이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은 유건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후회로 남을 게 뻔했다. “시연.”유건은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부탁이야. 나 여기 있게 해줘. 이 시간만이라도 같이 견디게 해줘.”남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유건 씨를 이렇게까지 붙잡고 싶진 않았어요.’‘그런데, 이 사람의 눈을 보면 아무 말도 못 하겠어요.’시연이 말없이 유건을 바
더 보기

제1428화

그 ‘어떤 사람’이란, 바로 부지하였다.지하는 자라면 자랄수록 점점 더 여자애처럼 변해갔다.“사진 있어요?”시연은 유건의 말을 듣고 호기심이 일었다.“보고 싶어요. 유건 씨가 얼마나 여자애 같았는지.”“지금은 없어.”사진은 전부 G시에 있는 본가에 있었다.유건은 잠시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거 꼭 사진으로 봐야 해? 조이 보면 되잖아.”“쳇.”시연은 피식 웃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하하하...”그 웃음이 방 안을 가볍게 울렸다.하지만 열 때문인지, 시연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오르고, 숨결이 거칠어졌다.유건은 재빨리 휴지를 뽑아 시연의 눈가를 닦아주었다.“눈 아프지? 눈 좀 감아. 푹 쉬어.”“네, 알겠어요.”시연은 힘없이 대답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눈이 너무 뜨겁다... 그래도 마음은 좀 편해졌다.’“그러면 당신은요?”시연이 겨우 눈꺼풀을 들어 물었다.유건도 부상 중이라 오래 버티면 안 될 걸 알고 있었다.시연은 옆쪽 큰 책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저기 일회용 격리복 있어요. 입고 좀 누워요.”“알았어.”유건은 손을 뻗어 시연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가라고 하더니, 사실은 못 보내겠지?”그 말에 시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이미 눈꺼풀은 반쯤 내려와 있었다.유건은 격리복을 꺼내 입고, 간병인용 긴 소파에 몸을 눕혔다.이제 그 자리는 완전히 그의 차지였다.시연은 눈을 감은 채, 금세 희미한 신음 같은 숨소리를 냈다.유건은 조용히 일어나, 식은 거즈를 새로 갈고 얼음팩도 교체했다.그래도 손끝에 닿는 시연의 피부는 여전히 뜨거웠다.‘이 정도로 반응이 심할 줄은 몰랐는데...’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이제 남은 건, 시연 스스로 버텨내는 것뿐이었다.“시연아.”유건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그리고 손으로 시연의 뺨을 살짝 쓸어내렸다.“많이 힘들지? 내가... 뭘 해주면 좀 나을까?”시연은 이미 반쯤 의식이 흐려져 있었다.불타는 열기 속에서도
더 보기

제1429화

유건은 품 안의 여자를 내려다봤다.사실 두려운 건 시연만이 아니었다.‘나도 무섭다. 이게 시연 일이라 해도 두려움의 크기가 다르진 않아.’그저 하늘을 향해 조용히 빌 뿐이었다.‘제발... 이번만은 너무 잔인하지 않게 해주세요.’창밖이 서서히 밝아올 무렵, 시연의 체온이 조금 내려가고, 거칠던 숨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그제야 유건은 긴 숨을 내쉬었다.품 안의 여자가 편히 잠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잠시 눈을 붙였다.다시 눈을 떴을 때, 시연이 옆으로 누워 유건을 바라보고 있었다.유건은 피식 웃었다.“깼어? 좀 잤어?”“네.”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계속 누워만 있었잖아요. 자다 깨다 반복했어요.”“그래도 지금은 좀 괜찮아 보이네.”유건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차가운 손끝이 시연의 축축한 머리카락을 스치며 내려왔다.“머리카락 다 젖었네. 머리 감을래?”“좋아요.”유건은 시연을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갔다.시연은 안락의자에 앉듯 조심스레 기대었고, 유건은 물 온도를 맞춘 뒤 천천히 머리를 적셨다.“온도 괜찮아?”“네, 조금 더 뜨거워도 돼요. 저는 뜨거운 게 좋아요.”“알았어.”유건은 능숙하게 샴푸를 덜어 손바닥에 비볐다.거품이 부드럽게 이는 순간, 남자의 손끝이 시연의 두피를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참, 손길이 여전하네.’시연은 눈을 감은 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잠시 후, 유건이 낮게 말했다.“머리 좀 길었네.”“네, 그래요.”시연의 머리는 조금 길었다.옆머리가 볼을 스치고, 끝은 목덜미에 닿을 정도.애매하게 길어서 묶기엔 짧고, 자르기엔 아까운 길이였다.“자를래?”“아니요.”시연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그냥 기르려고요. 긴 머리가 더 좋아요.”유건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다시 부드럽게 움직였다.“그래, 너한테는 뭐든 잘 어울리니까.”그리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유건은 맑은 물로 거품을 모두 헹궈내고, 두꺼운 수건으로 머리칼을 천천히 닦아냈다.“드라이기로 말릴까?
더 보기

제1430화

“네, 알고 있습니다.”유건이 모를 리가 없었다.다만 어젯밤, 시연의 옆을 잠시라도 비울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잠든 와중에도 유건이 조금만 움직이면, 시연은 금세 끙 하고 신음했다.‘시연이 나 때문에 그렇게 고생했는데...’‘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상처 치료를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유건은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그 시간, 부명주와 레오도 막 도착했다.부명주는 간병인이 준비해 둔 식재료들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아무리 딸이 먹고 싶은 거라지만, 그래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 대표, 신세 좀 많이 졌네.”“신세라뇨.”유건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시연 씨가 뭘 먹고 싶다고 말해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이 나올 정도면, 마음도 몸도 조금은 괜찮아졌다는 뜻이잖아요.”그 말에 부명주도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지. 먹고 싶단 말이 나올 정도면 이제 한숨은 돌린 거야.’“이거 혼자 다 할 수 있겠어? 내가 좀 도와줄까?”“괜찮습니다. 금방...”유건이 대답하기도 전에 레오가 불쑥 끼어들었다.“됐어. 우리는 이만 올라가자. 당신이 끓인 미음도 있잖아. 시연이한테 그거 좀 먹여봐야지.”“에이, 잠깐만, 혹시 고 대표한테 내가 필요할 수도 있잖...”“필요 없어.”레오가 짧게 잘랐다.“남자잖아. 요리 좀 한다고 사람 불러다 쓸 거야? 뭐, 나라고 당신 도움 안 필요했나?”“당신은...”부명주는 말끝을 삼켰다. 말해봤자 이길 리가 없었으니까.‘참나, 이 사람은 언제 봐도 고집불통이야.’결국 두 사람은 그렇게 계단을 올랐다.부명주는 중간에 한 번 뒤를 돌아봤다.주방 안, 유건이 팔을 걷어붙이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며 부명주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고 대표... 시연한텐 정말 최선을 다하네. 앞으로 둘이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그래도 인연이면, 다시 이어지겠지.”레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더 보기
이전
1
...
141142143144145
...
148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