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집안 때문에... 고 대표가 시연이더러 문란하다고 했어. 그래서, 시연이를 버린 거라고!]은범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고,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내가 시연이를 이렇게 만든 거야?’ ‘시연이가 이렇게까지 무너졌는데... 정작, 난... 그 이유도 모른 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은범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고유건한테 가야 해. 오해든, 분노든, 뭐든 다 풀어야 해.’‘내가... 시연이 대신 말해야 해.’ 그날 밤, 은범은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부터 GP그룹 앞으로 향했다. 해가 채 뜨기도 전이었다. ‘여기서 마주친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어젯밤부터 회사에 있었던 건가?’ 시계는 어느덧 오전 10시를 가리켰고, 불안해진 은범은 1층 로비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에 조심스레 물었다. 직원은 은범이 또 계약 관련 건으로 온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대표님,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안 나오셨다고요?” 은범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어디 계신지는...” “죄송합니다.”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희가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은범은 더 묻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바로 백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군데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정보를 얻었다. [고 대표? 지금 태평컨트리클럽에 갔대.]“알겠어. 고마워.” 전화를 끊자마자, 은범은 곧장 차를 몰아 태평만으로 향했다. 그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골프장. 다행히 은범도 회원권이 있어, 어렵지 않게 입장할 수 있었다. 프런트에 물으니, 유건은 성하그룹 대표와 라운딩 중이라고 했다. ‘협상 중이겠지... 괜히 방해하면 안 돼.’ 그래서 은범은 탈의실 근처에서 조용히
“형님!” “고 대표님!” 바로 그때, 주지한과 성하그룹 대표 공대식이 뒤늦게 골프장 클럽하우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순간 굳어졌다가, 곧바로 달려가 두 사람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놔!” 유건은 이미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제어 불가능한 분노로 이성을 잃은 채, 버둥거리며 외쳤다. “오늘 저 자식, 내가 진짜 죽여버릴 거야!” “하하하!” 은범도 미쳐 있었기에, 핏줄이 터질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죽여봐! 오늘 못 죽이면, 넌 진짜 개X끼야, 알아?!” “아이고!” 공대식이 은범을 힘껏 누르며 혀를 찼다. “노 사장님, 그 입 좀 다물죠? 지금 얼굴이 반쯤은 엉망이잖아요. 거울도 안 봤어요?” “지한아, 이 손 놔!” 유건이 이를 갈며 외쳤다. “형님...” 지한은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절대 이 손을 놓아선 안 돼.’ 이 상태로 풀어주면 유건이 또 한 대 날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보안팀 부를까요? 노 사장님 좀 모시고 나갈 수 있게요.” “안 돼!” “필요 없어!” 두 사람은 마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하이에나처럼 공대식과 주지한을 향해 동시에 외쳤다.일단 상황은 멈췄고, 은범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고 대표, 그날 병원에서... 나... 의식 없었어요. 아무것도 몰랐다고요. 며칠 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유건의 눈썹이 스치듯 꿈틀거렸다. “우리 어머니가 멋대로... 아버지를 시켜서 잠든 시연이를 침대 위에 올려 둔 거라고요...”“시연이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날... 시연이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뭐라고?” 유건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입술이 조금 떨릴 정도로 호흡도 빨라졌다. ‘그게... 진짜야? 그럼... 시연이는...’ 하지만 곧, 유건은 싸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그건 비즈니스에서 밀린 너희 집안이 만들어낸 말
시연은 마스크에 장갑까지 단단히 착용한 채, 응급실 입구로 빠르게 걸어 나왔다. “어떤 상황이에요?” “소한테 받혔어요! 가슴 쪽을요!” “복부 쪽이잖아요.” 시연은 빠르게 환자의 상태를 스캔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여보내세요. 모니터 잡고, 간호사도 불러야 합니다. 아, 정맥 확보가 우선이고, 제모 준비랑 수술실에 보고도 해야 해요.” “채혈은 제가 할 테니까 수술실 세팅도 해주세요. 결과 나오는 대로, 혈액은행에 전달해서 수혈 준비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만삭에 가까운 배를 안고 있음에도, 시연의 동작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예전처럼, 아니 그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시연이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도 충분히 잘하고 있네.’ 유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가 본 건 단 한 장면뿐이었다. 응급실 자동문이 ‘슥’ 닫히며, 시연의 뒷모습이 그 안으로 사라지는 장면. 참 절묘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참... 어색한 순간이기도 했다.유건은 아무 말 없이 로비 벤치에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가만히 문만 바라보며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시연이 진료차트를 손에 쥔 채, 빠르게 걸어 나왔다. “보호자는 어디 계세요?” “제가 보호자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간단히 설명해 드릴 거고, 동의서 작성도 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시연은 보호자를 이끌고 다시 사라졌다. 사무실 쪽 문이 ‘딸깍’ 닫히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유건의 어정쩡한 시선뿐. ‘뭐 하는 거지, 나...’ 어느새 유건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시연이를 보러 오다니...’ ‘만나면... 대체 뭐라고 할 생각이었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날 있었던 일... 시연이 억울했을 가능성이 컸다. ‘기회를 안 준 것도 아니었잖아. 그날, 병원에서...’‘난 시연이한테... 내 나름의 여지를 줬어.
처음엔 놀랐지만, 시연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대답 대신,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요?” 그 반응에 유건은 거의 확신했다. 즉, 시연은... 억울했던 거다. 비록 이젠 남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한때 부부였다.시연의 저런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유건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이걸 기뻐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억울한 게 아니었다면, 더 견딜 수 있었을까? 아니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까?’ 유건은 시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냥, 진실이 궁금해서.” “진실이요?” 시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 웃기네요.” “시연아.” 유건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미안해요.” 시연은 웃음을 거두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단단하게 다듬어진 목소리로. “이미 무덤에 들어간 얘기까지 꺼낸 이유가... ‘검시’하고 싶어서였어요?” “진실이 그렇게 궁금해요? 그럼 적어도, 그 ‘시신’한테 동의는 구했어요?”‘이 사람은 늘 이래. 자기가 정리해 놓고선, 나중에 궁금해지면 다시 와서 묻는다니까.’ ‘그땐 믿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뭘 들으려는 거야?’ “알겠어.” 유건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후회, 미안함, 그리고... 자책.“말 안 해도 돼. 내가 잘못했어.” 시연의 미소가 서서히 굳어졌다. 그리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야... 사과하러 온 거였어?’ 유건의 눈빛은 흔들렸고,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너한테 너무 미안해.” 시연은 눈을 크게 떴다. 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놀람이 컸다. ‘고유건이... 사과를... 했어?’‘그것도, 진심으로?’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 유건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시연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지? 이제 와서 왜
발걸음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지만, 유건은 억지로라도 걸음을 옮겼다. ‘시연이는... 날 좋아하지 않아.’ ‘어떻게든 날 벗어나려고 했고, 그걸 막는 건... 아무 의미 없어.’ 잡을 수 없다면, 남자답게 놓아줘야 했다.‘내가 없어야 시연이가 더 편하고 행복하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아이가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뿐이야.’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없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니까.’ ...이틀이 지나고, 일상은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시연은 확신했다. ‘그날 고유건은 진짜로 사과하러 온 거였구나. 다른 의도는 없었어.’ 그렇게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날 오후, 시연은 정리해 둔 진료차트를 품에 안고, 의무 기록실로 향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고, 시연은 걸음을 멈췄다. 안에 있던 두 사람. 한 사람은 휠체어에 앉아 수액을 맞고 있는 장소미. 그리고, 그 옆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사람은... 유건이었다. 시연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다음 엘리베이터 타면 돼. 굳이 같이 탈 이유 없어.’ 소미는 시연을 힐끔 보더니, 유건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시연의 팔을 잡아당겼다. 순간, 시연은 깜짝 놀라 유건을 쳐다보았다. 유건은 시연의 맨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엘리베이터 타려던 거 아니었어?” “아... 다음 거 타려고요.” “지금 타.” 유건은 말을 마치자마자, 시연의 팔을 살짝 힘줘 당기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이끌었다. “비어 있잖아. 굳이 안 타고 기다릴 이유 없잖아.” 시연은 입을 열려다 닫았다. ‘말해봤자 소용없지. 이미 문 닫혔고... 빠져나갈 타이밍도 지났어.’ 그렇게, 시연은 진료차트를 품에 안은 채, 엘리베이터 구석에 가만히 기대섰다. 유건과는 거리감이 느껴질 만큼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우린 지금, 같은 공간에 있지만.
저녁 여섯 시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잔잔했던 하늘은 어느새 흐려졌고,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유건의 표정은 조금 무거웠다. 소미의 검사 결과가... 예상보다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겠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질까 봐... 그게 걱정이야.’ 유건이 그렇게 천천히 병원 1층 로비를 빠져나오던 중, 현관 앞, 처마 밑에 서 있는 시연이 눈에 들어왔다. 우산 없이 비를 피하는 모습이었다. 유건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조용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우산 없어?” 그 목소리에 시연은 고개를 들었고,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깜빡했어요.” “그 집 쪽으로 가는 거지?” “네.” “비 많이 와. 내가 데려다줄게.” 유건의 차는 지하 주차장에 있었고, 차까지 함께 내려가면 비에 젖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시연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 순간, 유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왜? 내가 데려다주는 게 싫어? 아직 네 ‘전남편’도 아닌데, 차를 태워주는 것조차 거절할 만큼... 싫어졌어?” “그런 거 아니에요.” 시연은 다급히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진아한테 연락했어요. 곧 데리러 온대요.” ‘진짜...?’ 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속이 꽉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핑계 같아. 나랑 조금이라도 마주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거겠지.’ “그럼 나도 같이 기다릴게.” “네...?” 시연은 당황스러웠다. ‘같이 기다린다고? 왜? 설마, 내가 거짓말하는지 확인하려고?’ 하지만, 여긴 병원. 그가 서 있겠다는 걸 그녀가 막을 권리는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병원 입구 처마 아래,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말도 없이, 눈빛도 없이. 오직 들려오는 건... 비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뿐. 잠시 후, 멀리서 진아가 달려
그래서일까... 우주에게 ‘아빠’라는 개념은 너무 희미했다. 시연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우주의 아빠. 우주한테도 아빠가 있어. 모든 사람은 다, 자기만의 엄마랑 아빠가 있는 거야.” 우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작은 손가락이 살짝 꼼지락거렸고, 표정엔 혼란이 가득했다. ‘당연한 말을 하는 건데... 우주는 그조차도 낯설구나.’ 시연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우주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우주가 입을 열었다. “아빠도, 엄마처럼... 없는 거야?” 그 말에 시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목이 잠기듯 아팠고, 눈시울이 금세 뜨거워졌다. “왜 그렇게 생각해?” 우주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 “아빠, 한 번도 우주 보러 안 오잖아.” 시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이 콱 막힌 느낌이었다. ‘내가 괜한 얘기를 했어. 그냥 말하지 말걸.’ ‘간 이식 못 받는 거, 그건 그 사람 인생의 업보야.’‘자식한테 무심했던 대가일 뿐인데...’ 그 현실을, 그녀는 장애가 있는 여린 우주에게 말할 수 없었다. “우주야, 누나가 아끼는 딸기 하나 줄게.” 시연은 애써 미소 지으며 조심스럽게 분위기를 바꿨다. “입 주변에 잼 다 묻었어. 어휴... 완전 고양이 같네, 고양이!”결국, 시연은 우주와 함께 저녁 식사하지 않고, 병원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내일 수술을 앞둔 환자가 있었고, 수술 전 설명이 하나 남아 있었다. ...시연은 병동에서 그 일을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다.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이 시연을 불렀다. “시연아.” “교수님?” 대학병원 교수이자, 시연의 수련 책임자인 양석현이었다. 양석현은 평소에 워낙 바빠 병동에서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이 시간에 연구실로 따로 부르다니... 무슨 일이지?’ 시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따
집에 돌아온 시연은 서둘러 박스를 꺼내 큰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졸업 논문과 관련된 모든 자료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원본 USB까지 포함해서, 단 하나도 빠짐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건 전부 시연이 직접 발로 뛰며 모은 결과물이었다. ‘절대 버릴 수 없어. 아무 데나 놓는 것도 싫어.’ 이 자료들만 있으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그 자료들을 들고 양석현 교수에게 찾아갔다. “교수님, 여기 있습니다.” “그래.” 양석현은 자료를 꼼꼼히 넘겨보며 미묘하게 안도의 빛을 띠었다. “이 정도면, 정은주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할 거야. 고작 입으로만 떠든다고 다 되는 줄 아나?” “네.” 이제 남은 건 학교와 병원의 조사 결과였다. 그날 오후, 양석현이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을 때,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점점 커졌다. “아직 단정하긴 이르지만...” 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게도, 정은주 쪽에서도 뭔가 자료를 제출했더라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사람이? 자료를?’ ‘거짓으로 나를 모함한 사람이,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나도 정확히는 몰라. 나는 네 담당 교수이고, 이번 사건은 학교와 병원이 직접 조사하는 부분이라 나한테는 공유가 안 됐거든. 아무튼 좀 기다려보자.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돼 있으니까.”“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시연은 불안함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하루하루를 견뎠다. ‘뭔가, 진짜 잘못될 것 같아...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닐까...’ 그리고 셋째 날, 결국 소식이 전해졌다. 양석현 교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연아, 지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