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Chapter 801 - Chapter 810

1471 Chapters

제801화

오건우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하병철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그래, 건우도 같이 가기로 했다.”하병철이 직접 그렇게 말하는데 윤하경은 더 이상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알겠어요.”그 모습을 본 오건우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윤하경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윤하경은 그 미소를 굳이 받아줄 생각이 없었기에, 아무 말 없이 하병철의 팔을 살며시 잡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이번에 하병철 회장이 경성에 오면서 데리고 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간단한 경호원과 수행원을 제외하면 가족 중에서는 윤하경이 유일했다.최근 들어 윤하경도 나름대로 이 집안에 대해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하씨 집안에서 자신의 엄마인 하여진을 진심으로 그리워하는 사람은 이제 하병철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하석호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결국은 하병철의 의중 때문이었다.거대한 재벌가일수록 가족 간의 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냉정한지 윤하경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윤씨 가문만 해도 서울에서 이름 없는 집안이었지만 돈 때문에 부자간에도 등을 돌리고 싸우는 지경이었다. 그러니 하씨 같은 거대한 집안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올해는 유난히 겨울이 일찍 찾아왔다. 예년 같으면 이맘때쯤 경성에 눈이 오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벌써 산 위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탓에 윤하경과 하병철은 눈발을 맞으며 산을 올라야 했다.하여진의 묘 앞에 도착했을 때, 어느새 하병철의 어깨 위에도 하얀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윤하경은 손을 들어 하병철의 어깨 위 눈을 조심스럽게 털어주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묘비를 바라보았다. 엄마 하여진의 얼굴은 변함없이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엄마, 외할아버지가 엄마 보러 오셨어요.”윤하경은 묘비 앞에 작게 속삭였다. 이 순간이 엄마가 늘 바라던 순간인지, 그녀로서는 잘 알 수 없었다.그렇게 잠시 묘비를 바라보다가 다시 하병철을 돌아봤을 때, 윤하경은 조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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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2화

“남 얘기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실 수 있는 거예요.”윤하경은 감정을 숨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오 대표님, 이제 그 착한 척은 그만하시죠.”방금 오건우가 한 말은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윤하경은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윤 씨 집안이야 경성 재계에선 뒷전으로 밀려난 가문이지만 험담은 어디서든 빠지지 않는다. 집안 얘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떠돌았고 오건우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그걸 뻔히 알면서도 마치 모른 척, 동정심 있는 척하며 감정 얘기를 꺼내는 모습이 우습기까지 했다.그녀의 직설적인 반응에 오건우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피식 웃었다.“역시 하경 씨는 다르네요. 다른 여자들 같으면 방금 같은 말에 감동할 줄 알았거든요.”윤하경은 눈빛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받아쳤다.“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마세요, 오 대표님.”두 사람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묘지처럼 고요한 곳에서는 작은 대화도 잘 들렸다. 결국 하병철의 귀에도 닿았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다 오건우를 손짓해 불렀다.“건우야, 이리 와.”오건우는 늘 그렇듯 공손하게 하병철에게 다가갔고 하병철은 조용히 하여진의 묘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여진아, 이 친구가 내가 골라본 네 사윗감인데... 어때, 괜찮지 않니?”“외할아버지...”윤하경은 당황해 조심스레 불렀지만 오건우가 먼저 나섰다. 그는 묘비 앞에서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했다.“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그 모습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마치 정말 하여진과 눈을 맞춘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윤하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하병철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난 여진이랑 조금만 단둘이 있고 싶구나. 너희는 먼저 내려가 있어라.”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하이힐 소리를 죽이며 산길을 내려갔다.경호원들은 눈치껏 십여 미터 거리에서 떨어져 대기하고 있었고 방해는 하지 않으면서도 안전은 챙기는 거리였다.산 아래 도착한 윤하경은 차에 몸을 기댄 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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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3화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윤하경이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자, 강현우는 입꼬리를 비틀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하병철 회장님이 오 대표 꽤 마음에 들어 하신다던데. 둘이 잘 어울린다고까지 하셨다면서?”역시, 강현우는 모르는 게 없었다. 윤하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그냥 외할아버지 생각일 뿐이에요.”강현우는 대답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더니 곁에 있던 민진혁에게 말했다.“출발해.”민진혁은 조용히 대답한 뒤,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어디 가는 거예요?”윤하경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강현우는 아무 대답 없이 창밖만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고 분위기마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차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몇 분이 흘렀고 결국 차가 멈춘 곳은 구청 앞이었다.“여기서 뭐 하려는 거예요?”윤하경은 어안이 벙벙한 채 건물을 바라보다가, 다시 강현우를 돌아봤다.“내려.”그의 짧은 한마디에, 윤하경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렸다.그녀가 아직 상황 파악도 못 한 채 앉아 있자, 강현우는 이미 반대편으로 돌아와 직접 차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별다른 말도 없이 그녀의 팔을 잡고 차 밖으로 이끌었다.시간대가 애매했는지 내부는 한산했고 곳곳에 띄엄띄엄 몇 커플이 혼인 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의 외모가 워낙 눈에 띄었기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여기저기서 시선이 몰렸다. 강현우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천천히 걸었다.윤하경은 그 분위기에서 뭔가 직감했고 순간 목이 말라져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여긴 왜 온 거예요?”부디, 제발 자기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기를 바랐다.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말끝이 흐려졌다. 그 순간,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겠어. 당연히, 혼인신고 하러 온 거지.”‘혼인신고’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뒤돌아 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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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4화

강현우는 손에 들고 있던 혼인신고서를 가볍게 흔들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러니까, 사모님. 앞으로는 다른 생각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을 거야.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아까 차 안에서 오건우 이야기를 꺼낸 게, 결국 이 말을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뭔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강현우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자연스럽게 차에 올랐다.“이번에는 또 어디 가는 건가요?”윤하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저, 아직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결혼했으면 당연히 신혼집부터 가봐야지.”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그러고 나서 하 회장님께 인사드리러 같이 가는 거고.”“안 돼요!”윤하경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그 말을 듣는 순간, 강현우의 눈빛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왜 내가 인사드릴 자격도 안 된다는 거야?”“그런 뜻이 아니에요.”윤하경은 당황해 급히 말을 이었다.“외할아버지 연세도 있고 제가 갑자기 이렇게, 이렇게...”그녀는 말을 고르다 말고 살짝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힐끔 봤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그 말이 너무 낯설고 어색했다.강현우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이렇게 뭐?”윤하경은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고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얼버무리듯 말했다.“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하지만 강현우는 가만히 넘어가지 않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잡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말해봐. 뭐라고 하려던 건데.”윤하경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남편’이라는 단어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아버지 상태가 어떤지 보고 싶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같이 가자.”혼인신고서를 내고 난 뒤라 그런지‘같이 가자’는 말이 왠지 모르게 다르게 들렸다. 살짝 묘한 감정이 깃든 듯해, 윤하경은 괜히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하지만 거절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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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5화

사람을 벌주는 방식에는 정말 여러 가지가 있는 법이다.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게 있다면 지금의 윤수철 같은 모습일 것이다.윤하경은 작게 웃으며 몸을 숙여, 윤수철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봐요, 지금 당신 꼴이... 엄마 돌아가시기 직전이랑 참 많이 닮았네요. 하지만 전 결국... 너무 착해서 당신을 그냥 죽게 내버려둘 순 없어요.”윤수철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안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포는 이제 더 이상 숨겨지지도 않았다.“그런 눈으로 절 보지 말아요.”윤하경은 시선을 낮추며 조용히 말했다. 그 목소리는 참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말만 놓고 보면 정말 다정한 부녀 사이의 대화 같기도 했다.병실 문가, 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에 기대선 채, 몸을 약간 비스듬히 기울이고선 말없이 윤하경을 바라보았고 그 눈빛은 차분했지만 묘하게 깊어졌다.병실을 나온 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희미하게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바닥에 스치듯 내려앉고는 곧바로 사라졌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다.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이 자기 인생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잠깐 왔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만 같은 인생 말이다.엄마는 떠났고 아버지는 그 엄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 그 현실이, 오늘따라 더 서늘하게 다가왔다.그렇게 한참을 병원 앞에 서서 멍하니 서 있던 윤하경의 허리를 누군가 슬쩍 감싸안았다.언제 나왔는지 모를 강현우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차로 이끌었다. 차 안에서 윤하경은 무심히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강현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그 또렷한 이목구비와 단단한 턱선이 유난히 또렷해 보였다.“왜 처음 본 사람처럼 그렇게 쳐다봐?”강현우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먼저 말을 꺼냈다.윤하경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왜 오늘... 갑자기 나 데리고 혼인신고까지 한 거예요?”그 말에 강현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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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6화

윤하경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저 혼자 갈게요.”그리고 쿨럭거리듯 가볍게 기침을 한번 해, 자신의 민망함을 감췄다.강현우 성격에 하병철을 만나기만 하면 바로 혼인 신고서부터 꺼내 들 것 같았다.하지만 하병철의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그런 충격은 도무지 감당 못 할 수도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목소리를 낮췄다.“그래서 지금, 날 그렇게까지 숨기고 싶은 거야?”그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아니면... 혹시 오건우가 보는 게 불편해서 그래? 두 사람 다시 잘해보려는 중이야?”그는 그렇게 말하며 윤하경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손을 점점 위로 올렸다. 따뜻하고 은근한 그의 손길은 분명 스킨십이었지만 묘하게 강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아니에요.”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부정했다.“현우 씨가 오해하셨어요. 그냥 외할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서... 이런 이야기는 좀 더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을 뿐이에요.”강현우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 시선을 그녀의 어깨 너머 창밖으로 돌렸다.그러고는 얇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그렇게 해.”그러더니 갑작스럽게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며 입을 맞췄다. 강현우는 윤하경을 좌석에 밀어 눕히듯 누르고 한 팔로 그녀의 몸 너머로 창문 버튼을 눌렀다.닫혀 있던 창문이 내려가고 차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지만 윤하경은 그에게 눌린 채로 움직일 수 없었고 그저 그의 키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강현우의 눈은 차창 밖 어딘가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 속에는 광기에 가까운 소유욕이 번져 있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강현우는 입을 뗐고 두 사람의 숨결이 얽혀, 차 안은 온기가 가득 찼다.“내려.”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고 심지어 다정하게 차 문까지 열어줬다.뜻밖에도 강현우가 너무 순순히 물러서자, 윤하경은 속으로 안도하면서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눈을 들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오건우와 마주쳤고 그는 주머니에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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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7화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조용히 돌아섰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건우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차가운 눈매는 여전히 침착해 보였지만 그 안에 스멀스멀 피어오른 건 억제되지 못한 분노였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홀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윤하경은 별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하병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고민 끝에 위층에 있는 그의 임시 방으로 향했다.“외할아버지.”조용히 문을 열며 부르자, 창가에 앉아 있던 하병철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손에는 작은 물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윤하경이 다가가며 슬쩍 시선을 내리자, 그것은 오래된 회중시계였고 안쪽에는 우아한 한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인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단번에 그 여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외할머니... 또 생각나셨어요?”윤하경은 다가가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고 하병철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냥... 옛 생각이 나서 말이지.”그는 손안의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제 나도 머지않아 네 외할머니 곁으로 갈 테지. 다만 아직도 네 엄마 일로 날 원망하고 있을까 그게 걱정이야.”윤하경의 손길이 잠시 멈췄고 짧은 침묵 끝에 조심스럽게 말했다.“외할머니도, 엄마도 외할아버지께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아실 거예요. 게다가... 엄마의 죽음은 외할아버지 탓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진짜 죗값을 받아야 할 사람은 이미 벌을 받았으니까요.”윤하경은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다가 마음 한구석이 시리게 아려왔다.“요즘은 의료 기술도 많이 발전했잖아요. 외할아버지는 백 세까지도 거뜬하실 거예요.”하병철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사실 지금 내가 마음에 걸리는 건 딱 하나야. 너랑... 오건우 그 친구.”“외할아버지.”윤하경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른 말을 막더니 괜히 머리를 문지르는 척하며 말했다.“아무래도 오늘 산에서 찬 바람을 너무 쐬었나 봐요.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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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8화

“야, 빨리 좀 말해봐. 진짜야? 혼인신고 했어?”배지훈이 강현우 앞에서 한참이나 성급하게 다그쳤다.하지만 강현우는 언제나처럼 침착한 표정으로 와인잔을 천천히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나서야 슬쩍 옆눈으로 배지훈을 바라봤다.“남자가 이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 많아 되겠냐?”배지훈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야, 네 얘기니까 궁금하지. 남이면 내가 신경이나 썼겠냐? 네가 연애만 하면 소문이 순식간에 다 퍼지잖아. 이번에도 소문 엄청 돌던데?”강현우가 갑자기 혼인신고를 했다는 얘기는 이미 경성 재계뿐만 아니라,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화제였다. 특히 이런 스캔들은 언제나 큰 이슈였기에, 배지훈이 관심을 갖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이때 배지훈이 다시 들썩이며 물었다.“진짜냐고 맞는지 말 좀 해봐.”“응.”강현우는 별 감정도 없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배지훈을 바라봤다.“진짜 그거 물으려고 이렇게 불러낸 거야?”드디어 궁금증이 풀린 배지훈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웃었다.“근데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둘이 결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그 말에 강현우는 오늘 받은 사진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사진에는 오건우가 윤하경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려는 모습이 찍혀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잠깐 생각에 잠긴 강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갑자기라니. 지난번 결혼식 때 일 잊었어?”배지훈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날의 일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금기 같은 이야기였다.아무리 강현우라고 해도,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도망치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서 자리를 바꿔치기했다니 생각할수록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사실 배지훈도 그때 이후로 강현우가 윤하경을 어떻게 할지 걱정했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머쓱하게 웃으며 와인잔을 비워낸 배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윤하경은... 괜찮아?”강현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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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9화

윤하경은 놀라 허둥지둥 휴대폰을 잡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낮고 깊은 강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다물고 대답했다.“네, 여보세요. 무슨 일이세요?”“나 지금 밖이야. 데리러 왔어, 집에 가자.”그가 ‘집’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순간, 윤하경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 술기운이 살짝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그 말투는 이상하리만치 다정하게 느껴졌다.‘집이라니.’지금 이 상황에서 그 말이 얼마나 생소하게 들리는지, 윤하경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가 말하는 ‘집’이란, 이제 막 혼인신고를 한 그 ‘신혼집’을 의미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낯설고 어딘가 불안했다. 마치 그 집이라는 단어가,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가는 함정처럼 느껴졌다.윤하경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강현우는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다 읽기라도 한 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안 나올 거면 내가 직접 들어갈 수도 있는데 괜찮아?”그 말에 깜짝 놀란 윤하경은 하병철 앞에서 그와 마주칠까 봐 순간 식은땀이 났다. 잠시 고민한 끝에, 결국 조용히 대답했다.“잠깐만 기다려줘요. 곧 나갈게요.”전화를 끊고 침대에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방을 나섰다.밖에 나서자 이미 밤이 깊었고 눈발도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얇은 트렌치코트만 걸친 채, 윤하경은 조심스레 마당을 건너 별장 대문 앞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 조금 떨어진 곳에 강현우의 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이렇게 눈이 쏟아지는데도, 강현우는 차에서 내려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서 있었다.길고 검은 코트 자락에 소복이 쌓인 눈, 그 아래로 은은하게 번지는 담배 불빛까지, 묘하게 분위기 있는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윤하경의 심장이 괜히 쿵 내려앉았다가 이내 조용히 뛰기 시작했다.강현우는 추운 밤공기 속에서도 기품 있게,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의 날카로움은 옅어지고 어딘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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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0화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지금은 통화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아. 내일 내가 다시 전화할게.”막 옷을 챙겨 입던 소지연이 잠깐 멈추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는 윤하경에게 다그치듯 물었다.“너 지금 설마 강현우랑 같이 있는 거 아니야?”순간적으로 놀란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조용하던 차 안은 윤하경이 통화하는 목소리만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는데 윤하경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옆자리에서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강현우가 갑자기 눈을 떴다.차갑고 예리한 눈빛이 조용히 옆으로 돌아와 윤하경을 바라봤고 그 시선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윤하경은 대답을 마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강현우의 표정을 살폈다.마침 두 사람의 시선이 딱 마주쳤고 강현우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당황한 윤하경은 급하게 전화를 정리하려고 애썼다.“나 지금 일이 좀 있어서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게. 미안해.”소지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윤하경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마치자마자 윤하경의 휴대폰 화면에는 조금 전 자신이 검색했던 ‘배우자 몰래 혼인신고 취소하는 방법’이라는 검색어가 상단에 떠 있었다.강현우는 원래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어서 휴대폰 화면을 힐끗 보기만 해도 그 내용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윤하경은 그의 눈매가 점점 더 매서워지는 게 느껴져 깜짝 놀라 재빨리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그리고 어색하게 강현우를 향해 웃어 보이며 속으로는 제발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를 간절히 바랐다.“저기... 방금 전화 온 거, 소지연이었어요.”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을 이어가 봤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따뜻하게 느껴졌던 차 안 공기가 어느새 다시 차가워진 것만 같았다.윤하경은 불안한 마음에 괜히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바로 그때 강현우가 갑자기 몸을 기울여 다가오더니 윤하경을 차 문 쪽으로 바짝 몰아세웠다.강현우의 거칠고도 강렬한 기운이 한순간에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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