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우는 손에 들고 있던 혼인신고서를 가볍게 흔들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러니까, 사모님. 앞으로는 다른 생각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을 거야.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아까 차 안에서 오건우 이야기를 꺼낸 게, 결국 이 말을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뭔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강현우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자연스럽게 차에 올랐다.“이번에는 또 어디 가는 건가요?”윤하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저, 아직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결혼했으면 당연히 신혼집부터 가봐야지.”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그러고 나서 하 회장님께 인사드리러 같이 가는 거고.”“안 돼요!”윤하경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그 말을 듣는 순간, 강현우의 눈빛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왜 내가 인사드릴 자격도 안 된다는 거야?”“그런 뜻이 아니에요.”윤하경은 당황해 급히 말을 이었다.“외할아버지 연세도 있고 제가 갑자기 이렇게, 이렇게...”그녀는 말을 고르다 말고 살짝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힐끔 봤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그 말이 너무 낯설고 어색했다.강현우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이렇게 뭐?”윤하경은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고 기침을 한 번 하더니 얼버무리듯 말했다.“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하지만 강현우는 가만히 넘어가지 않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잡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말해봐. 뭐라고 하려던 건데.”윤하경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남편’이라는 단어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아버지 상태가 어떤지 보고 싶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같이 가자.”혼인신고서를 내고 난 뒤라 그런지‘같이 가자’는 말이 왠지 모르게 다르게 들렸다. 살짝 묘한 감정이 깃든 듯해, 윤하경은 괜히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하지만 거절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윤하경이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자, 강현우는 입꼬리를 비틀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하병철 회장님이 오 대표 꽤 마음에 들어 하신다던데. 둘이 잘 어울린다고까지 하셨다면서?”역시, 강현우는 모르는 게 없었다. 윤하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그냥 외할아버지 생각일 뿐이에요.”강현우는 대답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더니 곁에 있던 민진혁에게 말했다.“출발해.”민진혁은 조용히 대답한 뒤,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어디 가는 거예요?”윤하경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강현우는 아무 대답 없이 창밖만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고 분위기마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차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몇 분이 흘렀고 결국 차가 멈춘 곳은 구청 앞이었다.“여기서 뭐 하려는 거예요?”윤하경은 어안이 벙벙한 채 건물을 바라보다가, 다시 강현우를 돌아봤다.“내려.”그의 짧은 한마디에, 윤하경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렸다.그녀가 아직 상황 파악도 못 한 채 앉아 있자, 강현우는 이미 반대편으로 돌아와 직접 차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별다른 말도 없이 그녀의 팔을 잡고 차 밖으로 이끌었다.시간대가 애매했는지 내부는 한산했고 곳곳에 띄엄띄엄 몇 커플이 혼인 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의 외모가 워낙 눈에 띄었기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여기저기서 시선이 몰렸다. 강현우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천천히 걸었다.윤하경은 그 분위기에서 뭔가 직감했고 순간 목이 말라져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여긴 왜 온 거예요?”부디, 제발 자기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기를 바랐다.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말끝이 흐려졌다. 그 순간,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겠어. 당연히, 혼인신고 하러 온 거지.”‘혼인신고’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뒤돌아 뛰려
“남 얘기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실 수 있는 거예요.”윤하경은 감정을 숨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오 대표님, 이제 그 착한 척은 그만하시죠.”방금 오건우가 한 말은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윤하경은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윤 씨 집안이야 경성 재계에선 뒷전으로 밀려난 가문이지만 험담은 어디서든 빠지지 않는다. 집안 얘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떠돌았고 오건우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그걸 뻔히 알면서도 마치 모른 척, 동정심 있는 척하며 감정 얘기를 꺼내는 모습이 우습기까지 했다.그녀의 직설적인 반응에 오건우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피식 웃었다.“역시 하경 씨는 다르네요. 다른 여자들 같으면 방금 같은 말에 감동할 줄 알았거든요.”윤하경은 눈빛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받아쳤다.“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마세요, 오 대표님.”두 사람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묘지처럼 고요한 곳에서는 작은 대화도 잘 들렸다. 결국 하병철의 귀에도 닿았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다 오건우를 손짓해 불렀다.“건우야, 이리 와.”오건우는 늘 그렇듯 공손하게 하병철에게 다가갔고 하병철은 조용히 하여진의 묘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여진아, 이 친구가 내가 골라본 네 사윗감인데... 어때, 괜찮지 않니?”“외할아버지...”윤하경은 당황해 조심스레 불렀지만 오건우가 먼저 나섰다. 그는 묘비 앞에서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했다.“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그 모습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마치 정말 하여진과 눈을 맞춘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윤하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하병철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난 여진이랑 조금만 단둘이 있고 싶구나. 너희는 먼저 내려가 있어라.”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하이힐 소리를 죽이며 산길을 내려갔다.경호원들은 눈치껏 십여 미터 거리에서 떨어져 대기하고 있었고 방해는 하지 않으면서도 안전은 챙기는 거리였다.산 아래 도착한 윤하경은 차에 몸을 기댄 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오건우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하병철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그래, 건우도 같이 가기로 했다.”하병철이 직접 그렇게 말하는데 윤하경은 더 이상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알겠어요.”그 모습을 본 오건우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윤하경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윤하경은 그 미소를 굳이 받아줄 생각이 없었기에, 아무 말 없이 하병철의 팔을 살며시 잡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이번에 하병철 회장이 경성에 오면서 데리고 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간단한 경호원과 수행원을 제외하면 가족 중에서는 윤하경이 유일했다.최근 들어 윤하경도 나름대로 이 집안에 대해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하씨 집안에서 자신의 엄마인 하여진을 진심으로 그리워하는 사람은 이제 하병철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하석호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결국은 하병철의 의중 때문이었다.거대한 재벌가일수록 가족 간의 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냉정한지 윤하경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윤씨 가문만 해도 서울에서 이름 없는 집안이었지만 돈 때문에 부자간에도 등을 돌리고 싸우는 지경이었다. 그러니 하씨 같은 거대한 집안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올해는 유난히 겨울이 일찍 찾아왔다. 예년 같으면 이맘때쯤 경성에 눈이 오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벌써 산 위에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탓에 윤하경과 하병철은 눈발을 맞으며 산을 올라야 했다.하여진의 묘 앞에 도착했을 때, 어느새 하병철의 어깨 위에도 하얀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윤하경은 손을 들어 하병철의 어깨 위 눈을 조심스럽게 털어주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묘비를 바라보았다. 엄마 하여진의 얼굴은 변함없이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엄마, 외할아버지가 엄마 보러 오셨어요.”윤하경은 묘비 앞에 작게 속삭였다. 이 순간이 엄마가 늘 바라던 순간인지, 그녀로서는 잘 알 수 없었다.그렇게 잠시 묘비를 바라보다가 다시 하병철을 돌아봤을 때, 윤하경은 조금 놀랐다.
하병철이 바둑판에 마지막 돌을 내려놓으며 크게 웃었다.“봐라, 내가 뭐랬냐. 건우 말이야. 사람 참 든든하지 않냐?”하병철이 노골적으로 오건우와 윤하경을 엮으려는 속내는 이제 감추려 하지도 않는 듯했다. 윤하경은 그 기류를 뻔히 느끼면서도 굳이 맞장구치지 않았다.“이제 도착했으니 슬슬 움직이죠.”최대한 예의 바르고 담담하게 말하고 오건우를 향해서도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비행기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대표님.”윤하경은 일부러 거리를 두면서 말했고 오건우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좀 서운하네요.”은근히 농담을 섞어 분위기를 흐리지만 윤하경은 받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때 하병철이 크게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뭘 그렇게 예의 차려. 다 한집 식구 같은데.”그리고 윤하경을 돌아봤다.“아, 맞다. 너한텐 미리 말을 안 했구나. 이번에 경성 온 김에, 나는 건우가 준비한 별장에 머물 거다. 너도 같이 있으렴.”“네?”윤하경은 순간 당황해서 하병철을 바라봤다.“숙소는 제가 따로 알아볼게요.”하지만 하병철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잘랐다.“괜찮아. 굳이 그럴 필요 없어.”그러고는 더 이상 윤하경이 반박하지 못하도록, 먼저 비행기에서 내렸고 윤하경은 답답한 마음에 오건우를 흘겨봤다.“무슨 수를 쓴 거예요? 우리 외할아버지한테.”오건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시치미를 뗐다.“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혹시 그냥 하병철 회장님이 절 좋게 보시는 거 아닐까요?”윤하경은 잠깐 한숨을 쉬고 오건우가 장난스럽게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오건우는 장난스럽게 다가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요. 괜히 내가 미운털 박힌 거 아니죠?”윤하경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최대한 거리를 유지했고 오건우가 다시 농담을 던졌다.“제가 하경 씨를 살려준 적도 있잖아요. 그 정도면 좀 친절하게 대해줄 만도 한데...”“그건 제가 빚진 거니까, 언젠간 갚을 거예요.”윤하경이 단호하게
윤하경은 더 이상 오건우를 신경 쓸 마음이 없었다.“알아서 하세요.”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하고는 어젯밤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에 얼른 방에 올라가 쉬고 싶었다. 막 계단을 오르려던 찰나, 밖에서 들어오던 집사가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윤 대표님, 회장님께서 오시라고 하십니다.”윤하경은 그 말을 듣자 본능적으로 오건우를 한번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하병철이 부르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네, 알겠어요.”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윤하경은 다시 오건우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오 대표님, 혹시 외할아버지가 저를 부르신 이유 아세요?”오건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저도 몰라요.”딱히 더 묻고 싶지 않았던 윤하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하병철이 계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오건우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붙었다.하병철의 별장에 가까워지자, 멀리서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집사들과 직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조용한 공간이 이렇게 북적이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윤하경은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가, 오건우와 함께 차분히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별장 마당에는 붉은 매화가 몇 그루 있었고 언제 피었는지 모를 매화 위로 은빛 눈이 소복이 내려앉아, 그 조화로운 풍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니 집 안에서 하병철의 목소리가 들렸다.“외할아버지.”윤하경은 조용히 인사하며 하이힐을 신고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무슨 일이신가요?”하병철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불렀어. 너랑 같이 한 번 경성에 다녀올 생각이야.”“경성이요?”윤하경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잠시 놀랐다.“경성에는 왜 가시려는 건가요?”외할아버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네 어머니가 어디에 묻혔는지, 난 아직 한 번도 직접 가보지 못했어. 내 몸이 언제 더 안 좋아질지 모르니까, 지금이라도 꼭 가보고 싶구나...”“외할아버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하병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