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Chapter 21 - Chapter 30

40 Chapters

제21화

람옥헌으로 돌아온 초희옥은 군것질을 좀 챙겨달라는 핑계로 하련을 주방으로 보낸 뒤, 은밀히 석무(石武)를 불러들였다.나이는 서른 좌우, 그을린 피부에 매우 몸이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그는 원래 아버지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사하자 자연스레 초연의 곁을 지키면서 안전을 책임이제 된다. 그만큼 충성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머리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전생, 그는 초연이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려 잡혀가던 날, 하련에게 잠시 한 눈 팔려 자리를 비웠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리고 초연이 사형당하던 날, 마찬가지로 후계자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죄로 초씨 가문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건 명백한 숙청이었다. 큰집에 충성을 바치는 이들을 모두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초희옥이 환생한 지금, 절대도 벌어지게 두지 않을 일이었다. “아무 아재, 육 오라버니께 이 60냥을 전달해주세요. 삼일 뒤 혁이를 진현으로 보내기로 했어요. 이걸로 집 얻으라고 전해주세요.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돼요."초희옥이 나지막이 말했다. 초씨 가문 사람들에겐 육희지가 그저 성경에 발붙이고 있기 힘들어 진현으로 돌아가는 거로 되어 있었다. 즉, 아직까진 그가 진현에 아무런 연고도 집도 없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집을 마련해야 했다. 이 정도 은자면 아마 꽤 괜찮은 조건의 집을 구매할 수 있을 터였다. "예, 아가씨. 맡겨만 주십시오!"석무가 가슴팍을 툭툭치며 말했다. "지금 바로 떠나곘습니다!"석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련이 돌아왔다. 그녀의 손엔 밤으로 만들어진 다고 한 접시가 들려 있었는데, 무언가 불만인지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니, 부엌에 갔더니 셋째 아가씨 쪽에서 또 약을 달이고 있더라고요. 얼마나 냄새가 고약한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약을?'안 그래도 오늘 초약섬이 문안 인사 때 보이지 않아 의아하게 여기긴 했었다. 하지만 바로 전날에 만났을 때 멀쩡했기에, 다른 사정이 있나보다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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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후작부, 품하헌(品荷轩).초약란은 책상에 앉아 정성을 다해 서예 필사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하녀 둘이 수틀을 든 채 한참 자수에 매진 중이었다. "아가씨, 다섯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문 밖에 있던 하녀가 다급히 알렸다.그러자 초약란은 서둘러 붓을 내려놓고, 옆에 놓인 수틀을 들며 의자에 앉았다. 마치 자신도 지금까지 자수를 놓고 있는 듯이 위장한 것이다. "어머, 어쩐 일이야? 어서 와서 앉아."초약란이 피곤한 듯 눈을 비비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초희옥은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보고는 속으로 조소를 날렸다. 공기중에 은은히 베어 있는 먹냄새를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둘째 언니, 요즘 제 자수까지 놓느라 고생이 많아요. 그런데 어쩌죠... 또 부탁할 일이 생겼는데. 제가 요즘 이래저래 챙길게 많아가지고 은자가 바닥났네요. 그래서... 좀 빌려주실 수 있죠?""...어?"그 말에 초약란은 순간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 자존심 높은 초약란이 자신한테 은자를 빌리러 오는 날이 올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나도 가진 게 별로 없어. 그런데 무슨 일로 은자가 필요한데?"초약란이 친철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내가 아는 전당을 소개해줄 게. 거기서 바꿔보는 건 어떠니?"하지만 초희옥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껏 억울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요즘 옥 팔찌 하나 사려면 스무 냥을 줘야 하더라고요. 언니, 제가 그동안 언니한테 준 옥팔찌만 해도 열개는 넘지 않아요? 그것도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좀 빌려달라는데...."그 말에 초약란의 얼굴이 민망함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손목에 차고 있는 옥 팔찌조차 초희옥이 준 것이기 때문이다."그럼, 그럼. 네가 나한테 해준 게 얼마인데, 이 정도도 못해줄까? 내가 비록 한 달에 예은(例银)으로 다섯 냥 밖에 못 받긴 하지만, 20냥 정도라면 모아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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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진현은 산과 물이 가까운 경치 좋은 도시지만, 동시에 성경과 가깝기도 해서 늘 활기차고 번화했다.육희지는 서쪽 끝 한 어귀에 넓고 한적한 집 한 채를 빌렸다. 이미 가구와 집기들이 모두 갖추어진 곳이었기에 연세에 50냥을 쓰고도 10관이 남았다. 사실 혼자였다면 초가집 하나면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혁도 함께 살 집인데,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판단해 결정한 장소였다. 초희옥은 넓은 안채과 별당, 그리고 정원 가득 자란 대나무들을 보며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두 사람에게 어울리지.'이번만큼은 반드시 초혁과 육희지가 넉넉한 삶을 살게 해주리라 그녀는 다짐했다. "육 오라버니, 저 잠깐 나갔다가 올 일이 있어서 혁이 좀 부탁드릴게요. 혹시 누가 물으면 그냥 시내 구경 갔다고 둘러대 주시고요."하녀들이 분주히 집안 곳곳을 채워 넣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초희옥이 말했다. 곧바로 알아들은 육희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초혁의 옆을 지켰다. 그렇게 초희옥은 석무 한 명만 데리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얼마 지났을까, 그녀의 눈에 익숙한 길이 나왔다. 남쪽 큰길 어귀 골목으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가보니 간판에 전(钱)자가 붙은 큰 저택이 나왔다. "전씨 집안 팔자도 참... 어쩌다가 조상이 쌓은 복은 다 날리고, 저런 자식이 남았을까...""그래 말이야, 학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집이 어쩌다가 저런 도박꾼이 나왔는지..."이때, 남자 몇명이 혀를 차며 도자기, 옥석 등 값비싼 물건들을 저택에서 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곧이어 초희옥도 저택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눈 밑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운 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나왔다."뭐, 물건이라도 사러 오셨어?"그는 진현에서 소문난 망나니, 도박에 미쳐 아버지가 돌아신 뒤 하루가 멀다고 집안 재산을 팔아 치웠다.환생하지 않았더라면 초희옥은 몇년 뒤에 되서야 이 집에서 헐값으로 나온 고서들을 뒤지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 마저도 거의 곰팡이가 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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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그 말에 망나니 공자는 의아했지만, 큰 망설임없이 수락했다."좋아요. 이 이정도쯤이야..."그도 그럴 것이 볼품없는 진흙 도자기 인형 따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흥정은 끝났고, 그는 고서 몇개에 진흙 인형 하나 얹혀 주는 것으로 스무 관이나 번 것을 기뻐했다.초희옥은 스무 관의 가치와 같은 은자 20개를 망나니에게 건넸다. 그런 다음, 고서들을 곱게 감싸 석무에게 넘기고 자신은 마당 구석에 놓여 있는 도자기 인형을 가지러 가던 찰나였다.그런데 이때, 좀 전까진 비어 있던 마당에 한 인물이 들어섰다. 그리고는 바닥에 놓여 있던 도자기 인형을 들어올리며 무심히 말했다. "이건 얼마입니까?"그는 인형의 무게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목소리를 들은 초희옥은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아름다운 구름 무늬가 새겨져 있는 넓은 소매의 장삼(长衫), 허리엔 운(云)자가 새겨져 있는 고급 백옥, 정갈한 이목구비에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얀 피부... 마치 높은 봉우리에 핀 꽃처럼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진 소유자, 운진(云榛)이었다.게다가 그는 조황서원의 최연소 학사(学士)이자, 천하 제일 거문고 명인, 불음관(拂音馆) 관주, 대성 최고의 인기남, 수많은 여식들의 꿈속 연인... 셀 수 없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인물이었으며, 신황과 영왕 모두가 탐내는 중립에 있는 강북 사대 세가의 수장 운씨 가문의 소가주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한 번 본 사람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는 치명적인 매력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어디 갈 때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다니곤 했었다. "공자님, 역시 안목이 대단하시네요! 이 인형, 저희 집 가보입니다. 명인이 고급 진흙으로 직접 구워 낸 거예요."새로운 손님이 나타나자 망나니 공자는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침을 튀기며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원래 팔 생각이 없었는데, 공자님께서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대신, 가격은 잘 쳐주셔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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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초희옥은 진흙 도자기 인형을 품에 안은 채, 만족스러운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때, 또 누군가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좀 전에 운진 옆에 있던, 연한 송화빛 자수가 새겨진 도포를 걸친 청년이었다. 그 또한 운진에 비할 바는 못 됐지만, 꽤 호감이 가는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소저, 잠시만요!"초희옥은 그가 좀 전까지 운진과 함께 있던 청년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경계 어린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무슨 일이죠?""아, 오해 마세요. 운진 형님께서 오늘 아가씨의 식견에 감탄하셔서, 혹시... 어디 가문에서 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청년은 이 말과 함께 정중히 자신의 신분도 밝혔다."저는 강북의 장회(姜淮)라고 합니다. 녹명서원에서 학문을 배우고 있고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강북의 사대세가 중 하나인 장씨, 거기다 운진과 가까운 사이라면 만만한 신분이 아닌 것 같았다.하지만 초희옥은 단호히 말을 잘랐다."겨우 한번 본 인연인데, 굳이 제 신분까지 밝힐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단호한 거절에 장회는 순간 멍해졌다.운진의 이름이 통하지 않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 게요.""잠시만요! 이 초대장... 혹시 관심이 있으면, 꼭 좀 들려주세요."장회가 다급히 초대장을 내밀며 말했다.거기에 적혀 있는 불음관, 초희의 눈빛이 잠시 빛났다.그녀는 어떤 인물들이 이곳에 참석했던지 떠올렸다. 이것은 기회였다. 초희옥은 조심스레 초대장을 받아들인 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고맙습니다."그리고는 석무와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운진 형님, 제가 방금 저 소저한테 가문을 물었더니, 아는 체도 안 하더라고요. 분명 형님이 누군지는 아는 눈치던데, 아무렇지 않아 하다니... 정말 특이한 것 같아요."하지만 운진은 별 반응 없이 조용히 청화자기를 감상할 뿐이었다. 그저 보물 하나를 먼저 알아본 이에게 건넨 초대장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다른 뜻은 없었다."다음 감정회 때, 만약 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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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말발굽 소리가 또각또각 울려 퍼졌다.한 대의 마차가 선천산의 험한 산길을 돌고 돌며 힘겹게 나아가고 있었다.초희옥은 창밖으로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가에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연화 원년, 섭정왕이 진현을 순행하던 도중, 함께 데려간 호랑이 대귤이가 선천산에서 사냥꾼 두 명을 물어 죽인 일이 있었다.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연명으로 탄원서를 올려 그 악독한 호랑이를 죽여 달라 청했고, 그 탄원은 결국 경성까지 올라갔다.하지만 섭정왕은 끝까지 그 호랑이를 감쌌다.맹수에게 사람을 죽이게 했다며 그의 악명은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 사건은 그가 저질렀다 전해지는 수많은 악행 중에서도 가장 굵은 붓으로 그려진 치욕으로 남았다.“매부리절벽 거의 다 왔어?” 초희옥이 채근하듯 물었다.석호가 말채찍을 휘두르며 앞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소저, 안심하십시오. 저기 산 절벽이 매부리처럼 휘어 있지 않습니까? 저 곳이 틀림없습니다.”매부리절벽.전설처럼 전해지는, 사냥꾼 두 명이 죽었다는 그곳.당시 그 사건은 온갖 소문이 떠돌며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고, 초희옥 역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 못했다.하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대귤이는 결코 함부로 사람을 해칠 그런 짐승이 아니야. 이 일에는 분명 수상한 구석이 있어!’“어? 소저, 저 앞에 누가 있습니다! 호랑이도 있는 것 같고… 대, 대귤이입니다!”석호가 숨을 들이쉬며 외쳤다.초희옥은 재빨리 외쳤다.“어서 달려가라!”…“도끼랑 장뇌초가 역시 효과가 있긴 있구먼. 봐, 정신이 몽롱해졌잖아…”왜소한 체격의 소년이 직접 만든 활을 들어 대귤이를 향해 조준했다.“오늘 이 악독한 호랑이를 죽여서 백성의 해악을 없애자! 그 간신이 이장님 다리까지 분질렀으니, 우린 그놈의 호랑이를 죽여 복수하는 거야!”피부가 검게 그을린 또 다른 소년이 도끼를 들고 호랑이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언제나 위풍당당하고 예민하던 대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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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이렇게나 못돼 먹을 수가…처음부터 노리고 있던 게 분명하다. 완전히 작정하고 덮어씌운 것이다.전생의 소문엔 대귤이가 상처를 입었다는 말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사나운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 죽였다고만 여겼고, 그건 맹수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다.실상은 사람이 호랑이를 죽이려다 도리어 물려 죽은 것뿐인데 말이다.‘죽어도 싸지!’‘왜 대귤이가 그놈들 목숨값을 대신해야 하는데?’"아무 아재, 때려버려!"초희옥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고,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예!"석무는 단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두 사람을 거칠게 내리쳤다.…"우우——"대귤이는 낮게 신음을 내뱉더니, 눈빛이 점점 맑아졌다.초희옥을 바라보며, 마치 그녀를 알아본 듯한 눈빛으로 억울한 아이처럼 커다란 머리를 그녀의 뺨에 슬쩍 부비더니, 다시 두 사냥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대귤아, 저들이 널 건드리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을 물어 죽이면 안 돼. 네 주인에게 큰 화가 돼."초희옥은 손을 뻗어 대귤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달랬다.물론 대귤이가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적어도 두 놈이 맞고 있는 건 대귤이에게도 보일 테니까, 분명 알아볼 것이었다.이젠 물지는 않겠지…"죽일 테면 죽여봐라! 퉤! 간신이랑 한패인 년이, 별수 있나?""그래, 독한 년! 죽을 각오쯤 했어! 찡그리는 순간부터 사내도 아닌 거지!"두 소년의 뼈는 단단했다. 맞아가면서도 욕설은 멈추지 않았다.초희옥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닿았다.간신? 그 말은 아마 섭정왕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보아하니 그들도 대귤이가 섭정왕부의 호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단지 호랑이 가죽이 탐나서 사냥한 게 아니었다."대귤이는 너희를 해치지 않았다. 먼저 칼을 든 건 너희야. 그러니 내가 지금 대귤이를 대신해 너희를 때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 감히 사내대장부를 운운하지 마라. 죽고 싶으면 그냥 절벽에서 뛰어내려. 이 손으로 너희를 죽이는 건… 내 손 더럽히는 짓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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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현령이 한 사람당 한 마지기밖에 안 준다고 했다고? 그건 분명 섭정왕이 꿀꺽한 거야!”화살이 발끈하며 외쳤다.초희옥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그렇다.전생에 그 마을 사람 백여 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이는 섭정왕이 백성들의 이주 보상용 토지를 빼돌렸다고 고발한 것이고, 두 의로운 청년이 이에 분개해 반발하니 그 대가로 그가 호랑이를 풀어 물어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하지만 나중에 그 일은 진현의 현령과 호부 주사가 짜고 벌인 일이었다는 진상이 밝혀졌다. 윗사람을 속이고 아랫사람을 누르며 몰래 착복한 것이었다.그러나 아무 소용 없었다.지금은 당쟁이 격렬했고, 섭정왕과 호부 주사는 모두 신황제파였다.사람들은 입을 모아 섭정왕이 졸을 버려 장수를 보존했다고 말했다.이 누명은 끝내 섭정왕에게 씌워진 채로 남았다.“너희는 섭정왕을 오해하고 있는 듯 하다.”“너야 당연히 두둔하겠지! 같은 패거리잖아!” 화살이 쏘아붙였다.초희옥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게 바로 첫 번째 오해야. 나는 권력도 배경도 없는 그저 평범한 규수일 뿐이지. 그런 내가 어떻게 섭정왕과 같은 당파가 되겠니?”“둘째, 고작 현령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섭정왕의 뒷배가 되겠어?”“셋째, 그 사람은 돈이 많아. 게다가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지. 돈으로 해결될 일은 일로도 취급하지 않아. 물론, 그가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장담하진 못해. 하지만 고작 이주 보상용 밭 몇 마지기? 음…”“너희는 그 왕야를 너무 가난하게 본 거다. 그는 백성 밥그릇에 든 찬밥 한 숟가락이나 탐낼 사람이 아니야. 그는 고기만 먹지.”선천산이야말로 그가 노리는 고기였다.두 사람은 초희옥의 말에 얼떨떨해져 멍하니 있었다.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한 듯 했다.하지만 어쩐지 그녀의 말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내가 이렇게 길게 말한 이유는 너희가 섭정왕을 직접 마주하게 됐을 때, 진실을 말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야 진짜로 마을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 이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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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너무 궁지에 몰아넣지만 않았어도, 그 녀석이 사람을 물어 죽이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전생에 그 녀석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그래도 이번엔 가벼운 상처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다.석호는 멍한 얼굴이었다.‘소저는 이름도 남기지 않았고, 그 두 사냥꾼 역시 소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섭정왕이 어떻게 그게 소저라는 걸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인가?’…초희옥이 떠난 뒤, 대귤이는 두 사냥꾼을 향해 한 번 으르렁거리더니 산림 속으로 몸을 숨겨 자신의 주인을 찾아 나섰다.그 시각, 섭정왕은 진현 최대의 주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진현 현령은 그의 곁에서 아부에 바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이번 선천산 징발 건은 호부 주사 호대귀가 주관하고, 도찰원 도어사 범렴이 보좌한 사안이었다.비록 명의상은 섭정왕의 건이었지만, 그가 진현에 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현령 역시 설마 자신이 직접 그 얼굴을 뵙게 될 줄은 몰랐다.소문에 따르면 섭정왕은 재물을 탐하고, 색을 밝힌다고 했다.그래서 잠시 뒤 갓 기년을 넘긴 자신의 딸을 불러 섭정왕을 모시게 할 생각이었다.만약 섭정왕의 눈에 들어 첩실로라도 들여진다면, 그야말로 벼락 출세 아니겠는가!“어흥!”낮게 깔린 한 차례 포효와 함께, 화려한 무늬의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번개처럼 튀어나오자, 진현 현령은 비명을 지르며 철푸덕 주저앉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며 바닥을 굴러 도망치듯 뒷걸음질쳤다.세상에!섭정왕이 저 흉물을 정말 데려온 거란 말인가!“밖에 놀러 나간다더니, 이렇게 금방 돌아왔냐?”무표정하던 군야신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대귤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희미하게 풍겨오는 피냄새와 약초 냄새.대귤이의 앞다리에 비단 손수건이 감겨진 것을 보았다.“왕야, 보주가 다쳤습니다!”소청풍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왕야의 보물 같은 존재에게 누가 감히 손을 댄단 말인가?“의관을 불러서 상처를 확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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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15분쯤 후.소청풍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현령을 바라보며 말했다.“한 사람당 한 마지기씩 줬다고? 그럼 남은 수십 마지기는 어디로 간 것이냐?”진현 현령 판필달은 속이 뒤집히는 심정이었다.아까 왜 도망치지 못하게 해달라고 빌었을까…차라리 그들이 도망쳤길 바랐어야 했다.판필달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덜덜 떨며 애걸복걸했다.“왕야, 부디 현명히 살펴주십시오! 이 두 악질 백성이 저를 모함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일이…!”“원보.”군야신이 비웃으며 말했다.대귤이는 순식간에 굶주린 호랑이처럼 날아들었다. 판필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혼절할 듯한 기세로 뒤로 기어갔고, 그만 바지를 적셔버렸다…“왕야, 살려주십시오! 제발요! 이건 전부 호대감의 지시였습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저는 제 몫만 조금 받은 것뿐, 모든 안치전을 제가 삼킨 게 아닙니다요!”“호대감이 분수도 모르고 왕야께 따로 한 몫 챙겨드리지 않은 건 그의 실수입니다!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이건 그의 실수지, 저의 잘못이 아니옵니다… 왕야, 제발 목숨만은…!”판필달은 울면서 살려달라며 자백을 줄줄 쏟아냈다.대귤이는 땅에 고인 오물을 보고 코를 찡긋하더니, 슬쩍 몸을 돌려 군야신 곁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마치 자랑하는 듯한 모습이었다.어때, 나 잘했지?군야신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대귤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이 멍청한 놈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네! 왕야께서 분배 받지 못해서 화를 내신다고 생각한 거냐? 그 머릿속에 든 건 돼지 뇌냐!”소청풍은 화가 나 소리쳤다.대체 이 자들은 왕야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거란 말인가? 정말이지 주먹을 날리고 싶을 정도였다.군야신은 말이 없었다.선황은 한 수 앞을 내다보며 대국을 두었고, 영왕을 견제하기 위해 조정의 인재를 모조리 그에게 몰아주었다.폐하는 그런 영왕 당파를 견제하기 위해 성품이 어떻든 상관없이 자신에게 충성만 하면 모두 끌어들였다.그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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