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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작가: 서담

다음 날 아침, 허정안이 막 아침 식사를 마친 참이었다.

하녀장이 갑자기 찾아오더니, 답지 않은 알랑거리는 웃음을 띤 채 말했다.

“큰아가씨, 문안드립니다. 부인께서 말씀을 전하시라고 하셨습니다. 왕 유모의 소식을 찾았답니다.”

“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왕 유모 복귀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갑자기 소식을 찾았다니?”

하녀장이 두 손을 모으고 굽신거렸다.

“아이고, 아무렴 큰아가씨의 일인데 부인께서도 마음이 안 좋으시지요. 겉으론 안 된다고 하셨지만, 가시고 난 뒤 바로 사람을 시켜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부인께선 그저 표현이 좀 서투실 뿐, 친 딸이신데 당연히 항상 마음에 두고 계시지요.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이렇게 알리고 오라고 지시하신 것만 봐도 모르시겠습니까?”

허정안은 입술을 꾹 다물며 헛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참았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배려에 감사해야겠네. 그래서, 언제쯤 왕 유모를 다시 데려올 수 있나?”

“아이고, 안 그래도 그 때문에 의견을 여쭈러 왔습니다. 왕 유모께서 돌아오시는 걸 거부하셔서... 아가씨께서 직접 가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정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녀장은 더 강한 기세로 그녀를 설득하려 들었다.

“어릴 적부터 아가씨를 키워온 사람인데, 그래도 아가씨가 직접 가시면 분명 돌아올 겁니다. 부인께서도 왕 유모가 돌아오면 잘 챙겨주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언제 출발하면 되나?”

“내일이요! 제가 일찍 마부 보고 마차를 서쪽 문 쪽에 대 놓으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좋다. 수고 많았다, 하녀장.”

“아이고, 별말씀을요.”

하녀장이 공손히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자마자 소영이 얼굴을 찌푸린 채 다가왔다.

“아가씨, 부엌에 있는 원 아주머니께 물어봤는데, 내일이 바로 유진 아가씨를 정식으로 족보에 올리는 날이랍니다. 다른 친척분들께도 이미 초대장을 다 돌리셨고, 주방은 지금 제사 준비로 아주 바쁘더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왕 유모의 일을 들먹이며 나갔다 오라니... 너무 뻔히 보이는 수작이네요.”

허정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과거 회귀 전에도 똑같았다. 사당을 열어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가친척, 모두를 동원해 의식을 치러야 하는 큰 행사였다.

그리고 이때도 하녀장은 왕 유모의 소식을 미끼로 그녀를 집 밖으로 유인했다. 당연히 이건 거짓이었고, 그저 그녀를 속여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허정안은 왕 유모를 만났을 수 있을 거란 희망찬 마음으로 안고 도성을 떠났는데, 돌아온 것은 잘못 찾아왔다는 낯선 사람의 대답뿐이었다.

허정안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해가 저문 뒤, 모든 절차는 마무리되어 있었다. 그렇게 허유진은 자연스럽게 허씨 집안의 큰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소영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알고 계셨으면, 왜 하녀장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셨어요?”

“이런 말이 있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계략을 꾸몄으면 나도 계략으로 맞서줘야 하지 않겠느냐? 걱정 말거라. 절대로 저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허정안은 서리 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허 부인은 새벽부터 일어나, 생전에 허 노부인이 자주 방문하던 불당에 가서 기도를 올렸다.

오늘은 그녀가 가장 아끼는 아이, 허유진이 족보에 새겨지는 중대한 날이었다.

“부처님, 간절히 비나이다.”

그녀가 방석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빌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녀장이 다가와 그녀에게 알렸다.

“부인, 친척분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계십니다. 부인 대신 어르신과 유진 아가씨께서 정문 앞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계시는데... 이만 가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허 부인 눈을 뜨며 하녀장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정안은? 일찍 나갔느냐?”

“예, 날이 밝기도 전에 왕 유모를 찾겠다고 의욕 넘치게 나갔습니다. 제가 직접 마차에 오르는 것도 봤습니다.”

“어리석긴, 겨우 유모 따위를 찾겠다고 정신이 팔려서... 내가 그 아이를 낳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참 정나미가 없어.”

허 부인이 비웃으며 관자 머리를 매만졌다.

“뭐, 그 덕에 마음 편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우리도 어서 가보자꾸나.”

사당 뜰엔 어느새 북적북적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조상들이 모셔져 있는 자리인 만큼, 모두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허함산은 증인으로 나라의 세금과 호적 업무를 책임지는 고위 관료, 호부시랑인 고 대인까지 초청했다.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을 족보에 올리기 위해선 반드시 친척 관계가 없는 사람을 한 분 모셔야 했다.

증인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확실한 정당성이 생긴다.

고 대인은 본래 허함산과 어떠한 인연도 없었지만, 나날이 커지는 신책장군의 명성에 기꺼이 이 초대에 응했다. 황제가 주목하는 가문인 만큼 가까워지면 자신의 입지도 더 커질 거란 기대에 비롯되었다.

허유진은 오늘을 위해 매우 신경을 써서 단장을 마쳤다. 하지만 지난번 장 공주에게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있어 화려한 색의 옷은 최대한 자제했지만, 장신구까진 트집 잡힐 일이 없을 거로 생각해 붉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귀걸이를 착용했다.

안 그래도 피부가 희고 가녀린 그녀가, 여우 털을 두르고 연잎처럼 나풀나풀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그녀를 향했다.

허명진은 그녀의 옆을 지키며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저희 누님이십니다.”

자초지종을 몰랐던 사람들은 곧장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인사를 하였다.

“큰아가씨의 명성은 자주 들었습니다.”

허유진은 굳이 설명하지 않고, 웃음으로 그들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녀가 허씨 집안 장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친척 중에서 셋째 집 가족밖에 없었다. 허씨 가문은 원래 아들이 셋이 있었고, 허함산은 그 둘째였다. 비록 분가하긴 했지만, 다 한 담장을 끼고 살 정도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허 노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큰집에서 서로의 집을 연결하는 통로를 봉쇄했고 제사나 명절 때만 왕래하게 되었다.

그녀가 인사를 건네자, 셋째 허함철이 인자하지만,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따라 더 예쁘구나, 유진아. 이건 우리가 오늘 특별히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란다.”

셋째 집 부인이 옆에 있던 하녀에게 손짓하며 비단 상자를 건네게 했다. 허유진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 선물을 받아들였다.

“셋째 숙부, 숙모 감사합니다.”

허 부인이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큰형님이랑 큰형수님은 왜 안 보입니까?”

그러자 셋째가 답했다.

“큰형수 어머니께서 무척 아프셔서 지금 며칠째 간호 중이십니다. 그래서 조금 늦게 출발하신 듯한데, 금방 도착할 것입니다.”

이때, 허함산이 허 부인에게 허유진을 데리고 고 대인한테 인사하고 오자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허함철 옆에 서 있던 다섯째가 중얼거렸다.

“쟤가 언제부터 큰아가씨가 됐지?”

셋째 부인이 얼른 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자리에선 말조심해야지.”

바로 그때, 국공부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허씨 집안의 가장 큰 어르신, 큰집이 도착한 것이었다.

곧 마차 문이 열리고 허함산의 형인 허함현의 딸이자 허씨 가문의 셋째 아가씨 허주연이 부축을 받으며 내려왔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예물만 전달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괜히 남의 집안일에 끼어서 좋을 것 없다면서요.”

허주연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런데 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백부님?”

허함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허정안이 마침 말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정안이? 넌 왜 안에 들어가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 것이냐?”

그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그러자 허정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왕 유모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는데, 급한 마음에 말을 타고 갔다가 문득 위치를 안 물어봤다는 것이 생각나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러자 허함현의 얼굴이 묘하게 어두워졌다.

“너... 설마 모르는 것이냐?”

“무엇을 말입니까?”

“아니, 모르셨어요? 큰언니 부모님이 새 딸을 입양한답니다!”

젊은 허주연이 입빠르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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