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카운트다운, 너를 버릴 시간: Chapter 911 - Chapter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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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1화

안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드는지 코웃음을 쳤다.“아, 잠깐. 그것도 안 되겠다. 우리 지금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서율 씨가 무릎 꿇고 빌어도 내가 못 보잖아요.”임서율은 싸늘하게 웃더니 찬물을 끼얹었다.“정말 유감이네요. 당신 평생 내가 무릎 꿇는 꼴은 못 볼 거예요.”“뭐라고요?”안나는 지금 임서율 말투가 심상치 않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400억. 한 시간 안에 안나 씨 계좌로 보낼 거예요.”안나는 벌떡 일어섰다.“돈을 마련했다고요? 말도 안 돼! 아까 김유민이 나한테 전화해서 제발 며칠만 더 봐달라고 빌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 시간에 이 큰 돈을 만들 수가 있어요!”임서율은 살짝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내 남자 친구 뒤에 차씨 가문 있는 거 몰랐어요?”“차씨 가문에서 돈을 내줬네요!”안나는 분노에 책상을 내리쳤다.이번엔 임서율을 완전히 끝내버릴 줄 알았는데 뒤에 이런 대형 후원자가 숨어 있었다니!임서율은 태연하게 웃었다.“안 대표, 미안하지만 실망 좀 했겠어요.”안나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임서율은 김유민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려고 안나에게 전화를 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안나가 그녀를 얼마나 싫어하는데, 굳이 듣지 않아도 김유민이 무슨 말을 들었을지 눈앞에 그려졌다.안나는 차갑게 내뱉었다.“이번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말을 끝내자마자 전화도 확 끊어버렸다.임서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하도원과 함께 은행으로 가서 400억을 그대로 회사에 이체했다. 금방 재무팀에서도 전화가 와 입금 확인을 했다.이제야 진짜로 한시름 놓았다는 실감이 들었다.하도원이 옆에서 말했다.“김유민 그 녀석한테 전화하는 게 어때?”“아, 맞다. 도원 씨는 차 가지고 오고 나는 여기서 전화할게요.”임서율은 김유민이 얼마나 초조할지 떠올랐다.하도원이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유민아.”“누나, 무슨 일이에요?”김유민의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혹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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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2화

어찌 됐든 김유민은 임서율의 일이 해결됐다는 말에 그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누나, 이건 진짜 축하할 일이에요!”“그래, 조만간 내가 밥 살게.”임서율이 웃으며 말했다.“유민아, 정말 고맙다. 그 상황에서 날 위해 안나한테 부탁까지 했잖아.”임서율은 안나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일이든 사생활이든 안나는 강압적이었고 말도 매섭게 하는 편이었다. 김유민처럼 자존심 센 성격이 그녀 앞에서 얼마나 고생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에이, 예전에 누나 아니었으면 나 이미 감옥 갔어요. 그거 갚는 거죠.”“그 얘긴 그만해. 나 잠깐 처리할 게 있어서 이따 다시 연락할게.”“네, 누나 일 보세요.”전화를 끊고 난 직후, 마침 하도원이 차를 몰고 도착했다.임서율이 아직 타기도 전에 하도원은 서둘러 내려와 조수석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직접 문을 열어주며 임서율의 머리가 닿지 않게 손으로 받쳐줬다.그는 임서율이 앉는 걸 확인한 뒤에야 문을 닫고 다시 운전석에 올라와 시동을 걸었다.임서율은 그 모습을 힐끗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내가 임신했지, 국보를 품은 건 아니잖아요. 당신 너무 조심하면 남들이 뭐라 생각하겠어요.”“괜찮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지금 우리한텐 네가 국보 맞아.”임서율은 안전벨트를 채우며 말했다.“우리 병원 잠깐 들러요.”순간, 하도원의 표정이 굳어졌다.“어디 불편해?”걱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자 임서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도원 씨, 제발 좀 놀라지 마요. 당신이 이러면 나도 같이 긴장돼. 아직 임신 한 달 째예요. 앞으로 몇 달이나 남았는데 계속 이럴 거예요?”하도원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가 서서히 내려갔다.“알겠어. 그럼 왜 병원 가는데, 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임서율은 피식 웃었다.“당신이 깜빡했죠? 차 회장님이 우리를 이렇게 도와줬는데, 인사 드려야죠.”하도원은 짧게 숨을 내쉬며 웃었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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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3화

“저런 남자 어디 가서 찾냐. 난 평생 못 만날 듯.”“근데 좀... 재호 그룹 대표님 닮지 않았어?”“헐, 그 스캔들 한 번도 안 난다는 전설의 고령지화?”“맞아, 아무리 봐도 그 사람 맞아.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거든.”“와... 제발 나한테도 저 정도 되는 남자 한 명만 내려주시라고요. 도대체 무슨 공을 몇 생을 쌓아야 저런 남자랑 만나?”임서율은 그 말들을 들으며 하도원을 힐끔 쳐다봤다..조금... 아니, 꽤 자랑스러웠다.병원으로 가는 길, 임서율은 문득 차진만과 하도원의 관계가 떠올랐다.둘이 한 공간에 있으면 괜히 분위기가 불편해질 것 같아, 그 전에 먼저 이야기를 정리해두기로 했다. “도원 씨, 이번에 차 회장님 정말 큰 도움을 주셨어요. 게다가 예전부터 화해하려고 했던 것도 다 보여요.”신호대기 중, 하도원은 긴 손가락으로 가볍게 핸들 위를 두드렸다.“그래서?”임서율은 손짓까지 써가며 부탁했다.“혹시 나중에 차 회장님 뵐 때 조금만 부드럽게 말하면 안 될까요? 기 좀 살짝 내려놓고 말투도 조금만 온순하게.”하도원은 그녀 눈에 비친 기대를 보며 마음속의 고집이 서서히 누그러졌다.임서율이 진심으로 두 사람의 오해를 풀고 싶어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차진만이 정말로 손을 내밀어 준 셈이기도 했다.하도원은 한숨을 내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가락을 맞잡았다.“그래. 네 말 들을게. 그리고 다들 아내 말 잘 들으면 성공한다더라.”임서율은 바로 엄지를 쑥 올렸다.“정답. 나도 그 말 믿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꼭 부드럽게 해요.”둘은 근처의 오래된 점포에서 차진만이 좋아하는 간식을 골랐다.약국 앞을 지날 때 하도원은 또 차에서 내려 노인이 먹기 좋은 온화한 보양제를 처방받았다. 그는 말은 적어도 챙겨야 할 것은 누구보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병원 주차장에 도착하자 임서율은 셔츠 깃을 한 번 정리하고 하도원의 넥타이까지 만져주었다.“잠시 후에 너무 딱딱하게만 서 있지 말고 회장님이랑 말도 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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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4화

하도원은 손에 든 보양제를 병상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몸은 좀 어떠세요? 의사 말로는 회복세가 괜찮다던데요.”짧은 한마디의 안부였지만 차진만의 눈빛엔 놀라움이 스쳤다.하도원이 집을 떠난 이후로 두 사람은 사실상 왕래가 끊긴 상태였다. 이번 입원을 계기로 관계가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하도원이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의 말 속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있었다.차진만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럭저럭. 오래된 지병이라 쉬면 나아.”임서율은 분위기가 조금 풀린 걸 눈치 채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회장님, 이번에 진짜 회장님 덕분에 살았어요. 주 집사님이 서류 안 가져오셨으면 도원 씨가 자회사 팔아버릴 뻔했어요. 정말 큰 도움 주셨어요.”차진만의 시선이 임서율 쪽으로 옮겨졌는데 그 눈빛에는 드물게도 따뜻한 칭찬이 담겨 있었다.“그건 원래 우리 차씨 가문 일이다. 이놈 회사가 휘청였을 때 네가 전 회사 프로젝트 자금을 몰래 돌려서 막지 않았냐.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문 닫았을 거다.”그는 하도원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이제 그만 좀 삐져라. 나도 나이 들어서 더는 너랑 다툴 힘도 없다. 앞으로 잘 살아주기만 하면 돼.”그 말에 하도원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그는 차진만의 옆머리에서 흰 머리카락이 늘어난 걸 보며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그때의 차진만은 아직 젊었고 무릎 위에 그를 앉혀서 주식 코드를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물론 그 시절은 제법 혹독했다. 평범한 아이로 살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그를 만든 것도 결국 그 시간 덕분었다.“어쨌든 이번엔 제가 신세를 졌습니다.”“가족끼리 무슨 신세 타령이야.”차진만이 손을 휘저었다.그때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풍겨오자 임서율이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며 가슴을 눌렀다.“욱...”차진만은 단박에 눈치를 챘다.“임서율이 너... 혹시 임신한 거 아니냐?”눈살을 찌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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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5화

차진만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이 환해졌다.“좋지. 나중에 시간 나면 와서 나랑 바둑 몇 판 좀 해라.”“그러죠.”하도원은 군더더기 없이 대답했다.차진만은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평생을 사업 전쟁터에서 살아왔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도 숱한 상처를 겪어 봤다. 말년에 와서 가장 바라는 건 이렇게 조용하고 평온한 시간이었다.그는 과자를 하나 집어 한입 천천히 물었다. 달지 않고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텅 빈 가슴 한구석까지 따뜻하게 채워지는 듯했다.병실을 나올 때까지 차진만은 줄곧 하도원에게 당부했다.“임서율 잘 챙겨라. 애도 있으니까 더 조심하고.”병원을 나서자 임서율은 웃음을 터뜨렸다.“봤죠? 회장님 겉으론 무섭고 말도 차갑게 하지만 속은 진짜 너무 다정하시다니까요. 조만간 더 가까워질 거예요. 분명히.”하도원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응. 네 말대로 할게.”일주일 뒤, 하도원은 회사 일들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주말을 골라 임서율과 함께 혼례복을 보러 갔다.낡은 골목 안쪽, 세월이 배어 있는 한복 숍의 목문을 밀자 화려한 운금과 자수가 한눈에 들어왔다.사장이 환하게 웃으며 둘을 맞았다.“하 대표님, 사모님. 저번에 주문하신 옷 다 준비해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임서율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진홍빛 비단 위에 금사로 수놓은 봉황이 어깨에서 치맛단까지 곡선을 따라 흐르고 꼬리깃엔 잔진주가 촘촘히 달려 조명 아래서 은은하게 빛을 흘리고 있었다.조심스럽게 천을 만지자 부드러운 촉감이 살에 스며들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하도원도 천을 살짝 만져보고 말했다.“마음에 들면 입어봐.”“그럼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요.”임서율은 사장과 함께 탈의실로 들어갔다.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커튼을 열며 물었다.“도원 씨, 어때요?”하도원은 고개를 드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거울 앞에 선 임서율은 화사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봉관에 달린 구슬 장식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그녀의 눈매를 더 따뜻하게 비춰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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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6화

옆에서 보고 있던 사장은 영업직원과 감탄을 넘어서 부러워하고 있었다.“아휴, 저 대표님 좀 봐. 저렇게 아내 사랑하는 사람도 있네. 우리 집 그 인간이랑은 정말 하늘과 땅이야. 요즘 한 달에 며칠을 집에 오는지!”“내가 혼례 전문점 차렸다지만 정작 내 결혼 생활은 이래. 웃기지?”직원이 웃으며 사장님을 달랬다.“사장님,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혼인 관계가 아쉬운 건 맞지만 그건 사장님 탓은 아니에요. 그래도 남편분이 사장님한테 돈은 꼬박꼬박 주잖아요.”사장은 그 말에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듯 어깨를 내려놓았다.“그건 그래. 그 돈 아니었으면 이 가게도 못 냈어. 아마 지금도 회사에서 잔심부름이나 하고 있었을 거야.”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요. 그리고 이 가게 덕분에 얼마나 많은 신혼부부가 예쁜 추억 남겼는데요.”“듣고 보니 그러네.”사장은 임서율과 하도원이 다정하게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괜히 뿌듯했다. 이 가게를 열었던 초심이 그대로 떠오르는 듯했다.그때 임서율이 하도원의 옷자락을 당겼다.“자꾸 내 것만 고르지 말고 당신 것도 골라요. 결혼하는데 남편이 허술하면 안 되죠.”하도원은 문서 검토는 질릴 만큼 해도 옷을 고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진승윤이 알아서 맞춰주고 끝났으니까.그는 임서율의 손을 잡아 귀하게 다루며 키스했다.“나는 옷 고르는 감각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 와이프가 챙겨주세요.”임서율은 행복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어쩔 수 없네요. 내가 골라줄게요. 하지만 중요한 건 도원 씨 마음에 들어야 해요. 당신이 좋으면 그걸로 끝.”“괜찮아. 난 오늘 네 마네킹이야. 네가 예쁘다 한 걸로 고르자.”그녀는 하도원을 끌고 남성용 복장 코너로 갔다.밑단에는 은은한 소나무와 대나무 문양이 들어간 도포였는데 고급스러움이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전통적이지 않아 세련됐다.임서율은 하도원의 어깨 넓이를 대보고 눈을 반짝였다.“이거 도원 씨가 입으면 딱이겠어요.”하도원은 그녀가 옷깃을 잡아 다듬는 걸 얌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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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7화

차주헌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손가락은 저절로 휴대폰을 쥐어짜듯 힘이 들어갔다.한때, 그도 임서율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한 적이 있었다. 서양식 레이스에 긴 트레인, 한 땀 한 땀에 미래를 그려 넣었었다.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우리 결혼하자.”하지만 그는 결혼식은커녕 그녀를 끝없이 아프게 만들었다.지금 임서율은 누구보다 예쁜 예복을 입고 그 옆에는 그녀를 위해 옷 한 벌 한 벌 골라주는 하도원이 서 있었다.임서율은 지금 차주헌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유리창 너머로 서로 마주 보며 웃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차주헌은 목구멍이 꽉 막혀왔고 결국 곁의 있던 협력업체 대표에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하지만 현장 먼저 보러 가시죠. 괜찮으시면 바로 계약하겠습니다.”“좋습니다.”하도원과 임서율은 옷을 고른 뒤 이번에는 결혼식장을 예약하러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사실 하도원은 임서율의 몸 상태를 생각해 오늘은 좀 쉬게 하려 했지만 임서율은 이번 결혼식만큼은 직접 챙기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결국 하도원은 그녀를 이기지 못해 따라나섰다. 호텔까지 고르고 나오는 순간 임서율이 갑자기 쓰레기통 옆에 고개를 숙이고 심하게 토하기 시작했다.하도원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냥 괴로워하는 모습만 지켜봐야만 한다니.“우리 병원 갈까? 조 선생한테 가서 입덧 좀 잡을 수 있는 약이라도 받아오자. 아니면 이후 준비는 전부 나한테 맡기고 너는 집에서 편하게 골라. 내가 직접 현장 다 확인할 테니까. 어때?”임서율은 손사래를 치고 그의 손에서 생수를 받아 마셨다.“괜찮아요. 임신하면 다 겪는 일인데 뭐 그렇게 요란을 떨어요. 입덧 안 하는 임산부가 어딨어요.”하지만 하도원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눈앞에서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본인은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게 미칠 것 같았다.그리고 어디선가 들은 말이 생각났다.임신하면 입맛이 변한다고 했던가.“먹고 싶은 거 없어? 신 거나 매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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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8화

임서율은 이 상황이 웃기기만 했다.“강수진 씨, 스스로 가슴에 손 얹고 말해봐요.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이 말, 양심에 걸리지는 않아요? 당신이 먼저 삐뚤어지게 굴다가 결국 자업자득으로 된 건데 그걸 다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게 말이 돼요?”하지만 지금의 강수진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차주헌과 이혼하고 난 뒤,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처참하게 살고 있었다.조용히 살아도 문제없을 만큼의 돈은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어디를 가든 수군거림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불륜 사실을 인터넷에 퍼뜨렸다. 온라인에서는 하루종일 악플이 쏟아졌고 밖에 나가면 손가락질이 따라다녔다.한 번은 겨우 초대받아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 신상을 까발리는 바람에 현장이 아수라장이 됐다.누군가가 그녀에게 음료병을 던지기 시작했고 한 번이 두 번, 두 번이 수십 번이 되어 무려 한 시간 동안 맞았다.도망치고 싶었지만 주최 측은 끝까지 자리에 있어야 출연료 준다며 막아섰다.모욕과 공포로 손이 덜덜 떨리고 숨이 막힐 것 같았던 그 순간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이 모든 게 임서율 때문이라고.하도원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녀를 망신주지 않았다면 차주헌이 아무리 사랑이 식어도 과거의 정은 생각해서 이혼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다.그렇다면 그녀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차 사모님이었을 거다.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데, 얼마나 꾸며내고 얼마나 버텼는데, 그렇게 애써 빼앗아낸 자리가 임서율이 돌아온 순간 송두리째 무너졌다.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가 온몸에서 끓어올랐다. 강수진은 독기 서린 눈으로 임서율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왜 내가 당신을 탓하면 안 되는데? 해외에 계속 있었으면 우리 서로 편하게 살았을 거 아니야! 왜 굳이 다시 나타나서 차주헌 눈에 들어온 거냐고!”임서율은 문득 예전에 미쳐 날뛰던 임유나가 떠올랐다.차이라면 임유나는 이제 정신을 차렸다는 점이었다.“강수진, 제발 좀 정신 차려. 내가 어디서 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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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9화

임서율은 걸음을 옮기려다 길 건너로 달려오는 승용차가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강수진의 눈에 독기가 번뜩였다.‘지금 밀어버리면 끝이야. 이 여자가 사라지기만 하면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임서율이 발을 뗀 바로 그때 뒤쪽에서 거친 발소리가 달려왔다. 몸을 돌기도 전에 강수진의 손이 그녀의 등허리 쪽으로 뻗쳐왔다.그녀의 눈동자는 광기와 증오로 미쳐 있었다.“강수진, 뭐 하는 거야!”“죽어버려, 임서율!”강수진은 전력을 다해 밀어붙였다.하지만 임서율은 위험을 감지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크게 피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작은 움직임 하나에 강수진의 손끝은 허공만 가르며 미끄러졌다.순간, 중심을 잃은 강수진의 몸이 앞으로 쏠렸고 두세 걸음 비틀거렸다.“꺄악!”강수진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발뒤꿈치가 인도 가장자리에 흩어진 자갈에 미끄러지는 순간, 몸이 균형을 잃고 그대로 차도로 넘어졌다.그때 마침 교차로로 한 승용차가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들어왔다. 운전사는 반응할 틈도 없이 브레이크를 밟았고 공기를 찢는 듯한 끔찍한 제동음 뒤에 ‘쾅!’ 하는 둔탁한 충돌음이 터졌다.강수진의 몸이 공중으로 한 바퀴 휘말려 나가더니 도로 위에 세게 내팽개쳐졌다.임서율은 그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눈앞이 아찔해졌다.그녀는 단지 자리를 피하려 했을 뿐,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사람들이 몰려들고 웅성거림이 도로 위를 가득 메웠다.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하도원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 곁에 서 있었다.짙게 찌푸린 그의 미간 위로 불안과 두려움이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다.“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나, 나는 괜찮아요 근데 강수진이...”하도원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돌려 세우며 낮게 말했다.“일단 차에 가 있어. 진 비서 부를 테니까 여기 일은 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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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0화

구급차가 도착하자 하도원은 진승윤에게 교통사고 처리와 경찰 응대를 맡겼다. 그리고 본인은 강수진을 따라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혹시라도 강수진이 깨어나 난동을 부리거나 말을 바꾸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구급차가 달리는 동안, 하도원은 휴대폰을 꺼내 차주헌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시립병원으로 와. 강수진이 교통사고 났어.”잠시 침묵 후, 차주헌이 담담하게 말했다.“삼촌, 저랑 강수진은 이미 이혼했어요. 사고가 나든 말든 저랑은 상관없습니다.”하도원의 목소리는 곧장 차가워졌다.“이게 상의하는 거로 들려? 지금 당장 와.”“알겠습니다.”병원에 도착하고 강수진은 곧바로 응급실로 들어갔다.하도원은 의사에게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걱정 마세요. 보호자분은 밖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곧 수술실 불이 켜졌고 하도원은 재빨리 진승윤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사고 난 자리, 건물 외곽에 CCTV 있더라. 바로 영상 확보해놔. 필요하면 경찰보다 우리가 먼저 손써야 할 수도 있어.”“네, 대표님.”잠시 후, 차주헌이 허겁지겁 병원으로 들어왔다.“삼촌.”하도원의 표정은 살얼음판처럼 차가웠다.“이혼 정리 깔끔하게 안 했나?”“했어요. 돈도 줬고요. 근데 강수진이 적다고 난리였죠. 그 뒤로는 연락도 안 받았어요. 지금 무슨 일인데요?”하도원은 방금 전 들은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했다.“서율이가 길가에서 나 기다리다가 강수진을 만난 것 같아. 강수진 성격은 네가 제일 잘 알겠지. 겉으론 순한 척하지만 속은 독해.”“둘이 실랑이하다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 건 아직 확인 중이야.”차주헌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그야 뻔하죠. 서율이가 먼저 시비 걸 리 없잖아요. 강수진 아마 나랑 이혼하고 화풀이할 데가 없으니까 서율이를 건드린 거예요.”“이건 조사할 필요도 없어요. 생각만 해도 답 나오잖아요. 분명 강수진이 꾸민 일이에요.”하도원이 차주헌을 싸늘하게 흘겨봤다.“머리에 물이라도 찬 거야? 경찰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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