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카운트다운, 너를 버릴 시간: Chapter 921 - Chapter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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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1화

“차주헌, 그때 그렇게 난리치던 게 누군데? 죽어도 서율이를 버리고 네 첫사랑이랑 같이 있겠다고, 결혼이고 뭐고 다 내팽개쳤던 게 너잖아. 그땐 서율이 몰래 바람피우느라 안달이더니, 마치 누가 둘 사이 떼어놓기라도 할까 봐 미친 사람처럼 굴었잖아. 근데 지금은? 그 여자만 보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도망치네. 너희 둘, 진짜 제정신이냐?”“차라리 그냥 다시 만나. 서로 물어뜯든 말든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 해칠 일은 없겠네.”듣는 내내 구역질 날 정도로 기분이 상했지만 차주헌은 아무 말도 못 했다.하도원의 눈빛에 담긴 압박감은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하도원에게 눌려 살았는데 지금 와서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더 치명적인 건 이젠 차 회장도 하도원을 편들고 있다.임서율은 하도원의 아이를 가졌고 그가 불임이라는 사실은 이미 가문에 퍼져 있었다.차씨 집안에서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데 이런 판국에 하도원을 건드렸다간 회사며 사업까지 다 날아가게 생겼다.냉정히 생각해도 상황은 명확했다.하도원은 이미 차 회장의 자금 지원을 받아 임서율의 위기를 막아냈고 이제 두 사람은 손잡고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하도원의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임서율 또한 업계에서 입지 있는 인물이다. 둘이 힘을 합치면 그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다.하도원이 병원을 떠나자 차주헌은 결국 꼼짝없이 강수진 옆을 지키는 신세가 되었다.한편, 김유민 덕분에 안정을 되찾은 임서율은 경찰의 조사를 차분히 마쳤다.CCTV 영상까지 확인한 경찰은 임서율에게 어떤 과실도 없음을 바로 인정했다. 오히려 강수진 쪽이 ‘고의 상해’, 심지어 ‘살인미수’ 혐의까지 의심되는 정황이 나왔다.그 소식을 들은 하도원은 거의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브레이크도 제대로 밟지 않고 경찰서 앞으로 들이닥쳤다.도착하자마자 그는 벤치에 앉아 있는 임서율을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는데 손엔 진술서가 꼭 쥐어져 있었다.“서율아.”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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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2화

하도원은 임서율이 넘어질까 두려워 안다시피 반쯤 품에 안고 차에 데려갔다. 그는 문을 열어 그녀를 조심히 태우고 안전벨트까지 직접 채워주었다.차가 출발한 뒤에도 강수진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가볍고 평소처럼 일상적인 말만 골라 건넸다.“아주머니 말로는 오늘 누렁이가 화분 하나 엎어놨다더라. 율이가 가서 혼 좀 냈다며?”임서율은 그가 일부러 분위기를 돌리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애써 미소를 지어 맞장구쳤다.“그래요? 누렁이가 이제 이 집에 점점 적응하나 봐요. 처음 데려왔을 땐 겁도 많고 낯도 많이 가렸잖아요.”“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대. 아주머니 말씀로는 요즘은 율이랑도 아주 잘 논다더라.”집으로 돌아오자 하도원은 먼저 임서율을 소파에 앉히고 따뜻한 꿀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직접 부엌으로 가서 국을 데워 가져왔다.“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지 말고. 부족하면 주방에 더 있어.”임서율은 이런 하도원의 모습이 아직 조금 낯설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릇을 받으며 말했다.“나 괜찮아요. 도원 씨는 일 봐요.”“회사 일은 거의 다 처리했어. 병원 쪽은 차주헌을 보내놨고 무슨 소식이 있으면 바로 전화 올 거야.”그의 말을 듣는 순간, 임서율의 손끝이 조금 움찔했다.“강수진은 상태가 어때요?”“아직은 뭐라 단정하기 어려워. 하지만 너무 부담 갖지 마. 이번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 오히려 강수진이 자업자득인 거지. 그 사람이 널 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사고는 없었을 거야.”임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그저 그때의 상황이 너무 충격적이었을 뿐 죄책감은 없었다.하도원의 말처럼 애초에 강수진이 삐뚤어진 마음만 품지 않았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천천히 국을 떠먹으며 창백했던 얼굴에도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그제야 하도원은 휴대폰을 들어 차주헌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강수진이 수술실에서 나왔습니다. 양쪽 다리 모두 심한 분쇄골절로, 생명을 지키려면 절단해야 한다는 의사 소견입니다.]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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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3화

“그래, 나도 널 속였지. 근데 너도 나한테 별 짓 다 했잖아.”차주헌은 그녀의 위선을 깡끄리 까발렸다.“너 왜 나한테 접근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차씨 가문 돈, 이름, 지위. 그거 얻으려고 달라붙은 거잖아. 지금 이 꼴이 된 거 다 네가 쌓아온 업이고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침대 위에서 악을 쓰고 울부짖는 강수진을 보면서도 그의 표정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우린 이미 끝났어. 네 인생이 어떻게 되든 더 이상 나하고는 아무 관계 없어. 비서 시켜서 치료비는 줄게. 그걸로 마무리하고 앞으로는 네가 알아서 살아.”말을 마치고 차주헌은 돌아섰다. 강수진이 뒤에서 울부짖고 욕을 해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병실 안을 가득 채웠던 울음소리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제는 강수진의 절망적인 흐느낌만이 잔잔히 울리고 있었다.차주헌이 떠난 지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경찰 두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감시장치의 ‘삑삑’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선명하게 울렸고 강수진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침대 머리맡에 기대 있었다. 빈 바짓단이 가지런히 이불 위에 놓였는데 마치 생기를 잃은 천 조각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강수진 씨, 저희는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웨딩숍 앞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습니다.”앞에 선 경찰이 노트를 꺼내며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현장 CCTV 영상과 목격자 진술에 따르면 당시 임서율 씨에게 먼저 다가가 밀치는 듯한 행동을 보였죠. 사실입니까?”강수진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시트 가장자리를 꽉 움켜쥔 채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들며 억지로 변명하려 했다.“내가 민 게 아니에요! 그 여자가 갑자기 피해서 내가 중심을 잃고 넘어진 거라고요!”“CCTV에 다 찍혀 있습니다. 당신이 임서율 씨를 강하게 밀친 게 분명하고 그때 도로 맞은편에서는 차량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걸 못 봤을 리 없죠.”다른 경찰이 태블릿을 꺼내 CCTV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여기 보세요. 손을 뻗을 때 당신의 시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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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4화

갑자기 병실 안에서 모니터 경고음이 울리며 심박 곡선이 크게 요동쳤다.간호사가 바로 뛰어들어와 몸부림치는 강수진을 붙잡았다.“지금 환자 상태가 너무 불안정해서 조사를 이어가기 어렵습니다. 좀 안정되면 다시 오시죠.”경찰은 병상 위에서 점점 진정되어 가는 강수진을 힐끗 바라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수첩을 덮었다.“그럼 저희는 일단 돌아가겠습니다. 상태가 호전되면 다시 조사 일정을 잡겠습니다. 강수진 씨도 차분히 생각해보고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게 유일한 길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네요.”경찰이 나가자 병실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고 모니터의 규칙적인 소리만 울렸다.강수진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눈물이 조용히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차주헌과의 이혼이 인생의 밑바닥이라 여겼지만, 이제야 알았다.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고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린 진짜 나락이었다.일주일 뒤, 진승윤이 하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강수진은 살인미수 혐의로 3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을 가능성이 높답니다.”그 말을 들은 임서율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렸다.하도원은 담담하게 말했다.“알겠어. 결국 자기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거지.”전화를 끊은 뒤, 하도원은 조용히 임서율 뒤로 걸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살짝 얹고 머릿결 사이로 스쳐오는 은은한 치자꽃 향을 깊게 들이켰다.“강수진이 조금이라도 일찍 멈췄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 결국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거니까. 너도 부담 가질 필요없어.”“응. 이젠 괜찮아요. 도원 씨, 아기 옷을 인터넷에서 주문했는데 이 쇼핑몰 옷 질이 정말 좋더라고요. 소재도 부드럽고 매장에서 파는 거랑 다를 게 없어요.”그녀는 이제 완전히 마음을 정리했다.강수진의 죄를 그녀 탓처럼 안고 살아갈 필요는 없었다. 세상엔 누구나 자기 몫의 인과가 있으니까.임서율은 휴대폰을 들어 쇼핑 앱을 열고 요즘 장바구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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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5화

“어제 엘리 선생님이랑 통화했습니다. 마지막 재검 때 지우 누나 종양이 또 많이 줄었다고 하셨어요. 컨디션만 관리하면 웨딩 참석도 문제 없다고 합니다.”김유민이 말을 이었다. “호텔 쪽에도 미리 얘기해뒀습니다. 휴게실과 가장 가까운 좌석으로 배정했고 혹시 피곤하면 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휠체어도 준비해뒀습니다.”“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네. 너 요즘 일은 잘 적응하고 있지? 모르는 거 있으면 진 비서한테 물어보고.”임서율이 임신한 뒤 업무는 자연스럽게 하도원이 인수했고 김유민도 곁에서 배우며 실무를 처리하고 있었다.“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대표님.”“그래, 수고했다.”전화를 끊는 순간, 욕실 문이 열리더니 임서율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나왔다.그녀는 면 소재의 넉넉한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물방울이 젖은 머리카락을 따라 쇄골 위로 또르르 떨어졌다.“누구랑 통화해요? 이 시간에 또 일 얘기예요?”“아니야. 유민이랑 결혼식 당일 일정 확인했어.”하도원은 그녀를 앉혀 놓고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말려주었다.“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잖아. 힘들지 않아? 다리라도 주물러줄까?”“괜찮아요. 요즘 나 아주 튼튼해요.”임서율은 그의 품에 기대어 드라이기의 잔잔한 웅웅거림을 들으며 마음 깊숙이 안도감을 느꼈다.“회장님께서 내일 퇴원하신대요. 그럼 결혼식에도 참석하실 수 있겠죠. 또 본인 소장품 중에 있던 옥여의 한 쌍을 저희 신혼 선물로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근데 워낙 이것저것 챙겨주셔서 그건 받지 않았어요.”“왜 안 받아? 그건 회장님의 성의잖아.”차진만이 임서율에게 그렇게 잘해준다니, 하도원은 진심으로 기뻤다. 예전 임서율이 차주헌과 함께 있을 때 차씨 가문의 사람들은 줄곧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그는 이미 다 조사해 알고 있었다. 임서율도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끝내 바뀌지 않았다.그런데 이번에 차진만이 귀하게 아끼던 옥여의를 내어줄 만큼 마음을 열었다는 건 차씨 가문이 이제 진심으로 임서율을 받아들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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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6화

둘이 말끝을 맺기도 전에 하도원의 휴대폰이 또 울렸다. 그러자 임서율은 웃으며 투덜거렸다.“하 대표님, 곧 결혼한다면서요. 그런데도 일은 쉼이 없네요.”하도원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차진만이었다. 임서율에게 숨길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통화 버튼을 누르며 스피커폰을 켰다.“여보세요.”하도원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담담했다.“도원아, 나 퇴원했어. 집에 액땜도 할 겸 식구들만 모여서 간단히 식사나 하려고. 서율이랑 같이 와서 밥이나 먹어.”목소리만 들어도 차진만은 기분이 한껏 올라와 있는 게 느껴졌다.하지만 하도원의 대답은 찬물을 끼얹듯 단호했다.“즐겁게들 보내세요. 우리는 곧 결혼 준비로 챙길 일이 많고, 서율이도 요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서요. 이번에는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차진만은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못 오는 거야? 사실 사람도 많지 않아. 그냥 평소에 자주 오가던 친척들뿐이야. 서율이도 맨날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와서 바람 쐬면 얼마나 좋겠어.”하지만 하도원의 태도는 흔들림이 없었다.“정말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차진만은 말을 잇지 않았지만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임서율은 서운해하는 차진만이 마음에 걸려 하도원의 손에서 휴대폰을 살짝 가져갔다.“회장님, 저 서율이에요. 그럼 이렇게 해요. 저희가 오래 머무르진 못해요. 집에서도 챙길 일이 많으니까요. 점심식사만 같이 하고 바로 돌아오면 안 될까요?”“그래, 얼굴만 봐도 좋지. 역시 서율이는 살뜰하구나. 저 녀석은 어려서부터 혼자 돌아다니던 버릇이 있어서... 그러면 내일 점심에 보자.”“네. 내일 뵐게요.”“좋아, 좋아. 기다리고 있을게.”전화를 끊고 임서율이 휴대폰을 건네자 하도원이 낮게 물었다.“굳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네가 자신을 누를 필요 없어. 예전에 말했잖아. 너는 나와 결혼하는 거지 차주헌 때처럼 차씨 가문의 비위를 맞추는 결혼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고. 너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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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7화

차주헌은 임서율에게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임서율은 원래 승부욕이 강해서 지는 법을 몰랐다. 차씨 가문 사람들이 임서율이 차주헌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몰아붙일수록, 임서율은 오히려 자기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실제로 임서율은 실적으로 입을 막았다.하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이 트집을 잡은 건 임서율에게 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싫어했을 뿐이었다. 한 번 미워하기 시작한 사람은 언제든 어디서든 흠을 찾아내기 마련이었다.하도원은 습관처럼 임서율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어디서든 손해 보지 마. 누가 너한테 토를 달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받아쳐. 정 안되면 내가 또다시 맞서면 그만이야. 그쪽도 날 어쩌지 못해.”등을 받쳐 주는 사람이 있으리 이렇게 든든했다. 임서율은 더 이상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되었다.다음 날, 임서율과 하도원은 백화점에 들러 회장님을 위한 선물을 골랐다. 차씨 가문 본가에 도착하자 두 사람의 표정이 묘하게 갈렸다. 이 집은 두 사람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하도원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도 이 가문과 얽혀 있었고 임서율 역시 결혼 후 내내 차씨 가문의 빈정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임서율은 자신보다도 하도원의 마음이 더 복잡할 거라는 걸 알았다.임서율은 하도원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하도원의 낯설어하는 기색과 거부감을 읽고 부드럽게 달랬다.“밥만 먹고 바로 나와요.”“응.”하도원도 임서율의 손을 되잡았다.임서율은 하도원의 손을 가져다 살짝 불룩해진 아랫배에 조심스레 얹었다.“우리는 이제 둘이 아니고... 셋이잖아요.”작은 생명의 온기가 전해지자 하도원의 눈가에 서린 냉기가 조금 누그러졌다.“가자.”안으로 들어서자 차진만이 2층에서 내려오며 임서율의 배부터 슬쩍 살폈다.“어서 들어와 앉아. 바람 들겠어.”그리고 부엌 쪽을 향해 소리쳤다.“오 아주머니, 아까 끓이라던 닭곰탕은 다 됐어요? 얼른 서율이 그릇부터 떠 와요.”그러자 임서율이 손사래를 쳤다.“괜찮아요. 오는 길에 과일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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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8화

웃으며 권하는 사람을 굳이 뿌리치기도 애매했다. 그렇게 하면 예의 없어 보일 터였다.임서율은 미소 지으며 접시를 건네받았다.“셋째 고모, 고마워요.”마를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정말 맛있었다.하도원은 옆에서 흘러내린 임서율의 머리 한 가닥을 귀 뒤로 살짝 넘겨주고는 따뜻한 물을 건넸다.“목이 막히지 않게 천천히 먹어.”그러고는 셋째 고모를 바라보며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서율이가 부드러운 음식만 골라 먹어요.”“무슨 신경을요.”셋째 고모가 손사래를 치며 임서율의 아랫배로 시선을 떨구었다. 목소리에는 다정함이 묻어났다.“내가 말이 좀 직설적이었지. 예전에는 미안했어. 지난 일은 다 잊자꾸나. 그런데 혼례복은 뭐로 골랐니? 회장님 말씀으로는 한식으로 한다며?”“네. 붉은 바탕에 봉황 자수를 놓은 치마고요. 도원 씨는 대나무의 은은한 문양이 들어간 걸로 했어요.”임서율은 휴대폰을 열어 지난번 샘플 피팅 때 찍어 둔 사진을 찾아 내밀었다.“이게 지난번 피팅 때 사진이에요. 시아버지께서 이 화관에 붉은 옥구슬을 몇 알 더 달면 얼굴빛이 더 살아난다고 하시더라고요.”“아이고, 원단이 좋네!”셋째 고모가 화면 속 혼례복을 톡톡 짚으며 눈을 반짝였다.“바느질 좀 봐라. 요즘 이렇게 한식 혼례복 제대로 뽑는 장인이 드물어. 나도 결혼할 때 이런 거 입고 싶었는데, 그땐 형편이 안 돼서 결국 빨간 솜저고리만 입었지. 지금도 그게 살짝 아쉬워.”“고모가 좋아하시면 그날 제가 가까이에서 제대로 보여 드릴게요.”임서율이 웃었다.“화관도 제대로 올려졌는지 봐 주세요. 고모가 저희보다 이런 건 더 잘 아시잖아요.”“그럼. 좋아!”셋째 고모가 눈을 가늘게 웃으며 건너편을 향해 외쳤다.“큰언니, 이리 좀 와서 봐요. 서율이의 혼례복이 아주 근사해요!”큰어머니는 임서율의 사촌 언니인 차미화와 나란히 앉아 귤을 까고 있다가, 반쪽 깐 귤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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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화

“그러면 잘됐네요!”차미화가 화면을 톡톡 두드리면서 말했다.“내가 아는 플로리스트가 있어서 신선한 계화를 구해 올 수 있어. 그때 화분을 넉넉히 보내 달라고 할게. 결혼식장에 계화 향이 가득하게 말이야!”하도원은 임서율의 웃는 눈을 보며 손바닥으로 임서율의 손을 살짝 꼭 쥐었다. 그러자 하도원의 낮은 목소리가 스쳤다.“네가 좋아하면 그것대로 하자. 네 혼례복이랑도 잘 맞아. 붉은 바탕에 금빛이 더해져 한껏 경사스럽겠네.”임서율은 고개를 살짝 돌려 수줍은 듯 대답했다.“네.”곁에서 지켜보던 셋째 고모가 웃으며 큰어머니에게 말했다.“봐요, 저 둘이 얼마나 잘 어울려요. 회장님이 사람 볼 줄 아시네요. 서율이는 살갑고, 도원이는 챙길 줄 알고. 앞으로 복 터질 팔자네요.”그러자 큰어머니도 맞장구쳤다.“그러게 말이야.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차씨 집안에 식구가 하나 더 늘겠지. 명절이면 더 북적북적하겠네.”임서율은 오늘 친척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데 적잖이 놀랐다. 예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빈정거리던 사람들이 오늘은 하나같이 싱글벙글했다.‘해가 서쪽에서 뜬 건가?’이유가 뭐든 괜히 시비만 안 걸면 되었다.사실 임서율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예전처럼 비아냥거렸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주헌이 왔어요!”“주헌이가 여자를 데리고 왔어!”다른 친척들도 벌떼처럼 웅성거렸다.“어떤 여자인데? 설마 또 강수진 같은 타입은 아니겠지?”“좀 그만해. 강수진은 정말 최악이야. 겉으로는 얌전한 척하면서 속은 완전 딴사람이었지. 그런 여자가 사람을 제일 잘 속여.”셋째 고모가 바깥을 힐끗 보고 말했다.“그만들 해. 주헌이가 들어오고 있잖아.”차주헌이 오가연과 함께 들어섰다. 차주헌은 창가 쪽의 하도원과 임서율을 보자 살짝 놀란 눈치였다. 하도원이 임서율과 함께 본가에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집안 사람들도 다 알다시피 하도원은 오래전부터 차씨 가문과 발길을 끊고 살았다. 최근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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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0화

임서율을 소개하는 순간, 차주헌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색해졌다.그러자 하도원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차주헌을 바라보며 말했다.“왜? 주헌아, 작은어머니를 소개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차주헌은 시선을 내려 목소리를 낮추더니 마지못해 오가연에게 말했다.“여기는 우리 작은어머니, 임서율 씨야.”오가연은 차주헌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가문의 실력이 탄탄하다는 것 말고는 차주헌의 사정을 거의 모르는 상태였다. 바에서 차주헌에게 쫓겨난 뒤로는 한동안 연락도 끊겼다. 차주헌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눈치 없이 매달릴 성격은 아니었다.공교롭게도 어제 근무하던 중 만취 손님이 달라붙었다. 상대가 까다로워 매니저도 말리지 못했고 차라리 술 한 잔 받아 주고 끝낼까 하던 순간 손님이 오가연을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차주헌을 마주쳤다. 어젯밤 그 우연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오가연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런데 집에 데려다준 차주헌이 뜻밖에도 여자 친구가 되어 달라고 했다. 술김에 하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몇 번을 되물어도 진심이었다. 원래 마음이 있던 터라 오가연은 차주헌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이틀 만에 뜻밖으로 차씨 가문 본가까지 따라오게 된 것이다.오가연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했다.“작은어머니, 안녕하세요.”임서율이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서 앉아요. 어르신께서 먹을 걸 많이 사 오셨어요. 입맛에 맞는 게 있나 한 번 봐요.”“고마워요.”오가연은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말투에는 약간의 긴장이 묻었지만, 겉보기에는 순하고 꾸밈이 없어 보였다.임서율은 오가연이 마음에 들었다. 분위기가 어쩐지 강수진과 닮아 있긴 했지만 강수진은 달랐다. 임서율은 처음 봤을 때부터 강수진이 속내를 깊게 숨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겉으로 보이는 온순함과 공손함은 연기에 가까웠고, 눈동자 너머로는 분명한 야심이 번뜩였다. 그래서 임서율은 애초부터 강수진을 경계하고 싫어했다.반면 오가연의 눈은 너무도 맑았다. 갓 대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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