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151 - Chapter 160

212 Chapters

제151화

왠지 모르게 긴장이 몰려왔고,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남진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후회했다.‘아, 이 입이 문제야!’역시나.유하는 무표정하게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단호히 잘라냈다.“애들한테나 어울리는 거지, 어른이 좋아할 만한 건 아니에요.”남진은 속으로만 머쓱하게 웃었다.다행히 낯짝이 두꺼운 편이라, 금세 웃는 낯을 되찾고는 가져온 음식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자, 밥 먹자. 밥부터 먹어야죠.”유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말했다.“고마워요.”“에이, 당연한 거죠.”남진은 서둘러 받아쳤다.그동안 유하가 병원에 머물며 재윤을 돌본 덕에, 남진은 유하에게 돈으로 보답하려 했었다. 하지만 유하는 그중 일부만 받았고, 늘 거절이 많았다. 밥 한 끼 대접하려 해도 ‘입원 중이라 나갈 수 없다’라며 단칼에 거부했다.오늘이야말로 처음 한 식탁에 마주 앉은 자리였다.세 사람이 앉은 식탁의 공기는 묘하게 어색했다.남진은 몇 번이나 화제를 꺼내려 했지만, 그때마다 유하는 재윤에게 반찬을 집어 주거나 작은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을 거는 중이었다.남진은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결국 입을 다물었다.한참을 지켜보니, 이 장면이 낯설게 다가왔다.정작 눈앞에서 밥을 나누는 유하와 재윤은 꼭 가족 같았고, 자신만 덩그러니 곁에 붙은 듯했다.‘이상하다... 내가 오히려 남 같네.’재윤이 유하에게 반찬을 집어 올려주자, 남진의 가슴은 괜히 쓰라렸다.‘내가 친 외삼촌인데도 이런 건 한 번도 못 받아봤는데...’속이 쓰린 와중에도, 결국 남진은 재윤의 숟가락에 생선 한 점을 올려주었다.그러나 그다음 순간, 유하의 젓가락이 그 생선을 집어 들었다.“이건 가시 있어서 그냥 먹으면 안 돼요. 잘못하면 입이나 목을 다칠 수 있잖아.”그녀는 차분히 가시를 발라내 재윤의 그릇에 놓았다.재윤은 고개를 숙인 채, 입안 가득 생선을 넣으며 웅얼거렸다.“엄마, 고마워.”남진은 씁쓸하게 웃었다.‘내가 너무 대충 살아온 건가?’한 끼 식사가 끝나자, 남진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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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화

“보자.”승현은 아들이 하는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연등을 받아 들었다. 위아래, 좌우를 꼼꼼히 살피며 특히 직접 손으로 그린 고양이에게 눈길이 오래 갔다.역시나... 남진의 핸드폰 사진에서 보았던 그 연등과 거의 흡사했다. 특히 고양이 그림이 그랬다.승현의 어머니는 화가였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그림에 익숙해져 있던 덕에, 승현은 그림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 이 붓놀림은 같은 사람의 손길에서 나온 게 분명했다.몇 개의 선만으로도, 섬세한 기교와 묵직한 내공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아주 뛰어난 화가다.다만, 그때 남진의 사진 속 연등은 온갖 작은 동물들이 가득 그려져 있어 훨씬 더 근사했다. 하지만 이번 연등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였다. ‘역시 그렇지. 누가 선물하면서 제일 좋은 걸 내놓겠어.’한참 감상하던 승현은 대수롭지 않게 연등을 준서에게 던져 주며 무심히 말했다.“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지. 재윤이한테 답례 잊지 마.”준서는 연등을 꼭 안고 아빠의 태도에 살짝 토라졌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감은 엄청 많잖아. 안 뜯은 것도 쌓여 있는데...’‘그중 하나 골라서 재윤이 주면 되겠다.’연등을 챙겨 넣은 준서는 차가 집 쪽으로 가지 않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아빠, 어디 가는 거예요?”“연우 이모네.”그 말에 준서의 눈이 반짝였다.“진짜요? 오늘도 거기서 자는 거예요?”승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담담히 대답했다.“상황 봐서.”...하씨 저택.“뭐라고?!”거실 안, 하지철의 시선이 연우에게 꽂혔다. 얼굴에는 놀람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연우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지친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말을 이었다.“확실한 소식이에요. 그 ‘유산’ 팀이 귀국하고 제일 먼저 접촉한 쪽이 태씨 가문이래요.”애초에 계획대로라면, 연우의 지도교수와 그 ‘AI 천재’ 유산의 지도교수가 친분이 있었고, 그 인연으로 유산은 귀국 후 연우를 만나 승현과 함께 연구 협력 논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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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화

“태준혁은 원래 잔인한 성격이지. 겉으론 웃으면서 속에는 호랑이를 감추고 있어. 그쪽은 쉽게 파고들기 힘들다.”하지철이 갑자기 연우를 바라봤다.“내 기억엔... 태준혁 동생, 태준범이 너한테 꽤 관심 있지 않았어?”연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네.”하지만 오씨 가문과의 혼인 계획이 진행 중이었고, 게다가 하지철이 일찍부터 단단히 단속해 둔 탓에 연우는 최근 준범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준범 역시 형에게 붙잡혀 외출이 뜸했고, 요즘은 얼굴을 볼 일도 없었다.하지철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그래도 다시 접촉할 필요가 있다. 그 녀석은 형만큼 머리가 비상하지 않다. 네가 쥐고 흔들기 훨씬 쉽지.”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하지만... 승현이랑 아직...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요?”“조심만 하면 되잖아!”하지철이 눈을 부릅떴다.“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결혼은 천천히 해도 돼. 중요한 건 네가 오승현의 아이를 먼저 갖는 거야.”“그러면 오승현이 인정하든 말든 이미 끝난 거야. 너는 왜 맨날 질질 끄는 거냐? 무슨 ‘때를 기다리자’라는 소리나 하고 있어?”“그렇게 굼뜨다간 기회 다 놓친다. 방법 따위는 상관없어.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끝내!연우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옆에서 듣던 류정인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입술만 달싹이다가 닫았다. 집안의 큰일에 그녀가 나설 자리는 애초부터 없었다.“태준범은 네게 맡긴다.”하지철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태준혁 쪽은 내가 막을 테니, 절대로 태씨 가문한테 기회를 주지 마라.”말을 마치자마자 하지철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잠깐만! 금방 승현이 올 텐데, 지금 어딜 가는 거예요!”류정인이 다급히 불렀지만, 하지철은 이미 차에 올라 떠나버렸다....그 무렵, 승현은 준서를 데리고 하씨 저택에 도착했다. 집 안에는 류정인과 연우만 있었다.“삼촌은 안 계셔?”승현이 무심히 물었다.“일 때문에 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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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화

한밤중.인적 드문 골목에 검은색 차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불 꺼진 차는 어둠 속에 녹아 들어, 마치 밤의 유령 같았다.이솔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꽉 쥐고, 다른 한쪽 눈길로는 뒷좌석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흘끔거렸다. 그러고는 핸드폰 너머의 유하에게 목소리를 낮춰 사정을 설명했다.운도 지독히 없었다.명절이 끝나자마자 쏟아진 사건들. 이솔은 정신이 없을 만큼 바빴다. 그중 하나, 경제 분쟁 사건의 당사자들이 다시 충돌했고, 급기야 몸싸움까지 번져 경찰까지 출동했다. 이솔은 새벽까지 달래고 수습하느라 진이 빠졌다.간신히 정리하고 나오니, 이미 시간이 꽤 늦었다. 사건 당사자의 집이 외곽 쪽이라 돌아오는 길은 더 한적했다.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그러다 불현듯, 좁은 골목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차 앞으로 몸을 던졌다.순간, 이솔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이솔은 치를 떨며 목소리를 낮췄다.“이거 완전 보험사기 아니야? 내가 새벽이라 속도 줄이고 조심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그냥 치여 죽었을 거라고!”‘그랬으면... 난 억울하게 살인자가 되는 거였잖아.’“사람은? 괜찮아?”유하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피가 많이 났다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숨은 붙어 있어.]이솔의 대답에, 유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경찰 불렀어? 구급차는? 일단 살릴 수 있으면 살려야지. 죽지만 않으면 수습은 가능해. 괜히 질질 끌면 진짜 일이 커져! 네가 변호사면서 그걸 몰라?”[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이솔은 목소리를 한껏 눌렀다.[근데 이게 단순 교통사고면 차라리 다행이지...]사람이 차에 부딪히자, 이솔은 당황해서 바로 내렸다. 그런데 땅에 쓰러져 있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이솔을 차 안으로 세게 밀어 넣었다.저항할 틈도 없이, 차가운 총구가 미간에 들이닥쳤다.‘씨...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곧이어 멀리서 차 소리와 사람 목소리가 몰려왔다. 누굴 찾는 듯한 기척.좋은 상황일 리 없었다.이솔은 그렇게, 남자를 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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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화

이솔의 대답은 여전히 빨랐다.[확실하진 않아. 내가 있던 데가 워낙 외진 곳이라... 오는 길에 CCTV 몇 개 본 것 같긴 한데 불은 꺼져 있었어. 작동 중인지는 모르겠어.]유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거... 점점 더 까다로워지는데.’“서로 얼굴은 봤어?”유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잠시 정적.이솔의 침묵이 모든 걸 말해 주었다.유하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끝났네. 이건 확실히 얼굴까지 노출된 거야. 일이 훨씬 커졌다.’곧바로 결정을 내렸다.“지금은 어떻게든 몸부터 떼어내야 해. 사람도 총도 전부 어디 깊은 데 던져 버려. 차는 깨끗하게 정리하고.”“출국 수속은 내가 사람 붙여서 급히 처리해 줄게. 내일? 아니, 오늘 밤 바로 나가.”이솔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뭐... 도망가라고?]“그러면 남아 있겠다는 거야?”유하의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네 얼굴을 이미 들켰어. 이제 발뺌은 불가능해. 게다가 상대가 총을 쓰는 놈들이라면...”“경찰이든 다른 쪽이든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 확률이 높지. 넌 생판 모르는 외부인이고.”“이런 판에 끼어들면 그냥 소모품으로 끝나는 거야. 차라리 선제적으로 몸을 빼는 게 낫지.”유하는 목소리를 더 낮추며 이어갔다.“해외로 나가. 바다 건너가면 세상은 넓어. 그놈들이 거기까지 쫓아오진 못해. 게다가 이렇게 한밤중에 몰래 움직이는 걸 보면, 그쪽도 크게 시끄러워지는 건 원치 않을 거야.”“일이 더 커지기 전에 지금이 기회야. 멀리 도망쳐. 몇 년은 숨죽이고 살아야겠지만, 목숨은 보전할 수 있어.”‘정체도 모르는 두 세력이 부딪치는 판에...’‘평범한 인간이 끼면, 제물이 될 수밖에 없지.’하지만 이솔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갑자기 도망치라니...’‘내가 여기서 변호사로 쌓아 온 6년 경력과 인맥이 다 물거품이 된다고?’[내 사건들은... 내 일은 다 어떻게 하고...]유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가씨, 지금 그게 문제야? 총 들고 설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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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화

유하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병실로 돌아왔다.문을 밀고 들어선 순간, 그대로 멈춰 섰다.어두운 방 안, 창가로 스며든 달빛이 희미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빛 가운데에 재윤이 앉아 있었다.동그란 눈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푹 꺼진 어깨 위로 라쿤 잠옷의 후드가 흘러내려 있었다.문소리에 재윤의 고개가 유하를 향했다.“엄마...”목소리는 금세 울음에 걸려 떨렸다. 작은 발이 벌써 바닥으로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유하는 재빨리 달려가 아이를 침대 위에서 붙잡았다.“괜찮아,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엄마 여기 있잖아.”“엄마가... 없는 줄 알았어.”재윤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엄마가 잠깐 나갔다 온 거야. 봐, 이렇게 다시 왔잖아.”유하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내가 그동안은 한밤중에 자릴 비운 적이 없으니까...’‘아이가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네. 분명 잘 자고 있었는데.’유하가 꼭 안고 오랜 시간 달래자 겨우 다시 잠들었다.하지만 유하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시선은 자꾸 핸드폰으로 향했다. 마음속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아직 완전히 밝아오기도 전, 병원 바깥에서 차 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새벽 4시를 막 넘긴 때였다.더는 가만히 있기도 힘들 무렵, 마침내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이번엔 병실을 나서지 않았다. 아이를 생각해서였다.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자, 유하는 몸으로 바람길을 막으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나야!]전화기 너머, 이솔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섞여 있었다.[됐어, 됐다니까! 내가 그 남자 지하실에 가둬 놨어!]유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 ‘대나무숲’ 주택단지에 사두었던 집.지하 한 층이 딸려 있어, 유하는 쓰지 않는 물건이나 값비싼 자재들을 보관하는 용도로만 썼다.게다가 성격상 열쇠로 잠그는 걸 번거로워해, 집안 모든 문을 연동 비밀번호 시스템으로 바꿔 놓은 상태였다. 총괄 조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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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화

“유하 씨, 얘기 좀 할까요?”...하씨 저택.이른 아침, 승현은 준서와 함께 다이닝룸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식사가 절반쯤 지나갈 무렵,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승현은 화면을 확인하더니, 테이블에 앉은 이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리를 살짝 비켜 통화를 받았다.[승현아, 큰일 났어! 우리 형이 사고당한 것 같아!]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준범의 목소리가 쏟아졌다.승현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입가의 미소 역시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는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무슨 일인데?”[형이 어젯밤부터 집에 안 들어왔어. 전화도 안 받고. 처음엔 회사에 있는 줄 알았는데, 회사에 물어보니까 이미 퇴근했다더라고.]준범의 목소리에는 불안이 가득 묻어났다.[우리 형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지금까지 밤에 집에 안 들어온 적이 한 번도 없었어. 혹시 늦더라도 꼭 연락했는데... 이번엔 아무 소식이 없어.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승현은 느긋하게 응대했다.“조급해하지 마. 아직 이른 아침이잖아. 혹시 어딘가에서 잠깐 눈 붙였는데 전화를 못 들었을 수도 있지.”[그럴 리 없어!]준범은 바로 반박했다.“우리 형은 어디를 가든 내 전화를 무조건 받아. 아무 말 없이 잠적하는 사람이 아니라고!”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승현아, 나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준범은 평소 가문 일에 휘말리려 하지 않았지만, 형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밤새 끙끙 앓다 결국 믿을 만한 친구 승현에게 연락한 것이다.‘승현이라면 분명 방법을 찾을 거야.’승현은 핸드폰을 든 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렇게 하자. 나 잠시 뒤에 FK테크에 들러야 해. 거기로 와.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 그 사이에 네가 다시 한번 연락해 보고.”...준범을 진정시킨 뒤, 승현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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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화

‘대나무숲’ 주택단지.택시 한 대가 단지 측문 앞에 멈춰 섰다.차에서 내린 건 흰색 패딩에 마스크를 쓴 여인이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해 단지 안으로 들어가더니, 고양이 문양의 붉은 연등이 달린 한 빌라 문을 밀고 들어섰다.거실 안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이솔이 곧장 달려 나왔다.“유하야!”“지금 상황은?”유하는 문을 닫으며 마스크를 벗어들고, 다른 손에 든 커다란 가방을 들고 그대로 지하실 쪽으로 향했다.“그 사람, 의외로 순순히 협조하더라.”이솔은 곧장 따라붙으며 반투명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안에는 금속성 광택을 내는 권총이 들어 있었다.처음에는 태준혁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유하는 그를 내버려두는 것도 불안했고, 그렇다고 목숨이 위태로워지길 원하지도 않았다. 결국 서로 한 발씩 물러선 셈이었다.총은 지하실 문 뒤로 던져두었고, 태준혁은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 틈을 타 이솔이 총을 챙겨 나오고, 필요한 약품을 다시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다행히 준혁은 순순히 응했다.지하실 문 앞에 다다르자, 유하는 잠시 뒤돌아 이솔을 보았다.이솔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갑 낀 손으로 봉지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장전까지 마쳤다. 모델은 달라도 총은 총, 오랫동안 다뤄온 경험이 몸에 배어 있었다.유하와 이솔은 조심스럽게 지하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어둑한 지하실 구석.준혁은 고개를 떨군 채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주변에는 개봉된 소독약과 항생제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의식이 없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태준혁 대표님?”유하가 가까이 다가가 낮게 불렀다.대답이 없었다.조심스레 몇 발짝 더 다가서자, 이솔은 총구를 그의 가슴께로 곧바로 겨눴다.만약 준혁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덤벼들면, 그 순간 방아쇠를 당겨 움직임을 봉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막상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자, 이솔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 이마를 타고 흘렀다.유하는 바닥에 쓰러진 태준혁을 눕혔다.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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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화

준범은 연우를 보자 잠시 멍해졌다. 거칠게 튀어나오던 목소리도 무의식중에 한 톤 잦아들었다.연우의 부드러운 손길에 이끌려 소파에 앉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듯 다시 고개를 들어 승현을 바라봤다.“승현아, 우리 형이...”“뭘 그렇게 서두르냐.”승현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오는 길에 이미 나 비서 시켜서 교통관리국 쪽에 연락해 놨어. 네 형이 회사 나간 뒤 어떤 경로로 갔는지 CCTV 추적 중일 거다. 곧 결과 나올 테니 조급해하지 마.”“봐, 승현이가 널 그냥 두겠어?”연우는 미소 지으며 물 한 잔을 건넸다.“마셔. 진정 좀 해. 준혁 오빠는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 아니잖아. 분명 무사할 거야.”연우의 목소리에 눌려 있던 불안이 조금 가라앉은 듯, 준범은 물을 받아 들고 한 모금 삼켰다. 눈빛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호흡은 고르게 가라앉았다.그때, 사무실 문이 두드려지더니, 태건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선은 방 안을 훑다 승현에게 가 닿았다.승현이 자리를 비켜 나가려는 순간, 준범이 먼저 일어나 달려갔다.“형 찾았어? 무슨 소식 있어?”태건은 잠시 승현을 바라봤다. 승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액정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태준혁 대표님이 마지막으로 포착된 장소에서 발견했습니다.”준범은 그 순간 얼굴이 굳었다. 눈이 커지고, 이내 다급하게 달려가 핸드폰을 낚아채듯 받아들었다.잠시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눈가가 금세 붉게 젖었다.“이거... 우리 형 폰 맞아! 그럼, 형은? 사람은 어디 있냐고!”그가 한 걸음 다가서려는 순간, 승현이 준범의 어깨를 꽉 눌렀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정신 차려! 네가 이러면 찾을 수 있던 것도 못 찾아!”단호한 목소리에 준범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이 붉게 충혈됐지만, 끝내 더는 소리치지 못했다.승현은 태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보안 인력 총동원해. 인원 되는 대로 다 끌어모아. 핸드폰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원형으로 퍼져 나가면서 수색해.”“C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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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화

짐을 대충 챙긴 유하는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왔다.병상에 앉아 숨을 고른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리고 남진이 하교한 재윤을 데리고 들어왔다.“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남진의 시선이 유하의 붉게 상기된 볼에 멈췄다.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유하는 짧게 놀라 손으로 볼을 만져 보았다. ‘아까 뛰느라 얼굴에 열이 올랐나 보다.’“날이 좀 풀려서 그런가 봐요. 좀 덥네요...”그녀는 대충 둘러대고는 고개를 돌려 재윤에게 다정히 몇 마디를 건넸다. 이내 남진을 병실 밖으로 끌고 나가, 아이가 들을 수 없는 곳에서 말을 꺼냈다.“곧 퇴원할 거예요. 그런데 계속 아이를 제 곁에 두는 건 좋지 않아요. 재윤이가 저한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도 문제고...”“전 애초에 계속 아이를 책임질 위치가 아니잖아요. 배남진 씨가 보호자니까, 결국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게 맞아요.”뜻밖의 말에 남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역시 재윤을 더 가까이에서 돌보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이였다. 지금 재윤은 오직 유하만 ‘엄마’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강제로 떼어낼 수도 없었다.‘그래. 여기까지 도와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 더 바라면 안 되지.’남진은 난처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이번 주말 이틀만 더 봐줄 수 있을까요? 재윤이가 워낙 유하 씨를 따르니까요. 이틀 지나면 제가 데리고 갈게요.”유하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하지만 오늘 밤은 안 돼요. 친구가 급히 부탁한 일이 있어서 밤새 작업을 해야 하거든요.”“내일 아침에 다시 데려오세요. 그게 재윤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될 거예요.”남진은 괜찮다고 말하려다, 유하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지자 곧바로 수긍했다.저녁, 유하는 재윤과 함께 저녁을 먹고, 내일 또 같이 놀아주겠다고 약속하며 재윤을 달랬다. 결국 재윤은 아쉬움을 가득 안은 채 남진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아이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유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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