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131 - Chapter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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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1화

재윤은 너무 얌전하고 조용하다 싶을 정도였다. 하루 종일 유하 곁에만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고, 유하 말고는 누구도 재윤을 달래지 못했다.밤이 되자 승환은 경찰서 쪽에서 해야 할 일 뒤처리 때문에 나갔고, 병실엔 이솔만 재윤을 지켰다.재윤이 잠들자, 이솔은 결국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이 애는 왜 이렇게 너한테만 딱 붙어있는 거야? 내가 별짓을 다 해도 웃지도 않고. 전혀 아이답지 않잖아?”유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급할 거 없어. 아직 낯을 가리는 나이잖아.”물론 이솔도 그건 알고 있었다. 그저 괜히 질투가 났을 뿐. ‘나도 저렇게 안으면 포근한 아이를 꼭 안아보고 싶은데...’‘게다가 이렇게 귀엽고 얌전하기까지 하잖아.’...그날 밤은 별다른 일 없이 흘러갔다.다음 날 아침, 유하는 일찍 눈을 떠 재윤과 함께 씻고 아침 식사까지 챙겼다. 그런데 식사 내내 이솔의 시선이 자꾸만 스치듯 다가왔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머뭇거리는 표정이었다.“왜 그래?”밥을 다 먹이고 난 뒤, 유하는 결국 이솔에게 물었다.“아냐, 아무것도 아니야.”이솔은 잠시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유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솔이 무슨 일이든 끝까지 속에 담아두겠어? 절대 못 참지.’ 역시, 30초도 안 지나 이솔이 유하에게로 쓱 몸을 기울였다.“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화내면 안 된다?”유하는 바로 예감했다. 이솔이 말하려고 할 것은 분명 자기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대체 뭐지?’유하는 먼저 재윤에게 약을 먹이고 아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재윤아, 저기 침대에서 장난감 갖고 조금만 놀고 있어.”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유하는 시선을 이솔에게로 옮겼다.“이제 말해. 나 괜찮아.”하지만 이솔은 바로 말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엔 굵은 제목의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오씨 가문과 하씨 가문, 두 집안의 결혼설?]내용은 설 연휴 밤에 하연우가 한 남자와 함께 호텔에 들어가는 장면이 찍혔다는 것이었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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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이혼 이야기가 나오자, 유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심사 절차는 이미 다 끝났어. 그냥 연휴 끝나고 나면 법원에서 바로 재판 들어가는 거지.”이건 유하의 변호사팀이 몇 번이고 독촉한 끝에 겨우 여기까지 온 결과였다. 원래대로라면 유하는 연말 전에 모든 걸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마다 연말이면 법원에는 늘 사건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형사나 민사 분쟁 같은 급한 사건들이 우선이었고, 개인 가정사인 이혼 사건은 모조리 다음 해로 넘어가는 것이다.결국 유하로서는 해가 바뀌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이솔은 곧장 눈치챘다.“그럴 만하지. 이런 개인 가정 문제들은 연말엔 다 그다음 해까지 밀리더라고.”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법원으로선 그러는 게 편하지. 설에 집에 가서 가족과 얘기 좀 해 보고, 주변에서 적당히 말려 주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래서 연휴 지나고 돌아와서 소송을 취하해 버리면 더 간단하잖아.”유하는 허탈하게 입술을 다물었다.취하?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7년이었다. 그 7년은 유하에게 겨우 7년이 아니라, 너무 길고도 혹독했던 시간이었다.유하는 이미 수백 번 마음속으로 되뇌며 각오한 선택이다. 절대 후퇴나 번복은 없을 것이고, 이혼은 반드시 하게 될 것이다. 유하는 지금 그저 법원이 개정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이솔은 친구의 굳은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오승현은 진짜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역시 남자들은 끝까지 코너에 몰려야 정신 차려. 특히 바람핀 놈들은!”그 순간, 이솔의 머릿속엔 배씨 가문의 배설아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 교도소에 있는 그 여자.‘그 사람, 진짜 대단했지.’배설아는 결국 6년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원한은 풀었고 남은 인생은 조용해졌다.유하는 쓴웃음을 흘렸다.“그건 아니야. 뭐 하러 그래.”그녀 보기엔, 자신은 이미 승현과의 7년은 지옥 같은 시간이었는데, 다시 그 일 때문에 감옥까지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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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유하와 재윤이 몸이 약했다면, 소성란은 목걸이만이 아니라 온몸에다 부적을 달아 줬을지도 모른다.유하는 진저리를 쳤다.결국 몇 바구니 분량의 훈계와, ‘절대 말 안 듣고 혼자 돌아다니지 않겠다’는 갖가지 약속을 받아놓고 나서야, 간신히 소성란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소성란이 떠난 뒤, 유하는 ‘마침’ 돌아온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누가 이른 거야?”이솔이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나는 절대 아니야!”승환도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저도 아니에요!”소성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솔과 승환이었다. 공연히 자진해서 욕먹을 이유는 없었다.‘대체 어느 미친놈이 흘린 거야!’...검은색 SUV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뒷좌석에 앉아 있던 승현이 갑자기 재채기를 하고는 붉어진 콧등을 만지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계속 말해.”남자의 목소리엔 나른하면서도 잠긴 기운이 섞여 있었다.운전대에 앉은 태건은 룸미러를 통해 기운 없어 보이는 승현을 힐끔 보더니, 히터 온도를 조금 높이고서야 다시 보고하듯 말을 이었다.“온라인에서 여론이 계속 퍼지고 있습니다. 기사 내리게 할까요?”승현은 대답 대신 다른 걸 물었다.“사모님이 널 찾아와 묻지는 않았나?”태건이 고개를 저었다.“아직은 없습니다.”승현은 코웃음을 흘렸다.“그 사람, 참 끈질기네.”태건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덧붙였다.“사모님 쪽 변호사팀이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마 재판에서 증거로 쓰려는 것 같습니다.”‘역시 기어코 소송까지 가겠다는 거군.’승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차 안에 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잠시 후, 탁 트인 저음이 다시 흘러나왔다.“필요 없어. 인터넷에 떠도는 건 전부 내려.”“네.”태건이 짧게 응답한 뒤,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하연우 씨 쪽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승현은 무심히 대꾸했다.“곧 만날 거야. 내가 직접 얘기하지.”“알겠습니다.”태건이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승현은 연거푸 재채기를 터뜨리더니 기운이 쭉 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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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곧 설 연휴가 끝난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날이 머지않았다.이솔은 책상 위에 쌓인 사건 서류들을 떠올리며 일찍 병원을 떠났다. 해야 할 일 준비를 미루다간 곤란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승환도 지도교수에게서 연락을 받고 잠시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이제 병실엔 유하와 재윤, 단둘뿐이었다.유하는 작은 탁자 위에 보드게임을 펴 두고 재윤과 마주 앉아 있었다.아이와 며칠간 함께 지내며 유하는 점점 알게 되었다. 재윤의 상태가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았다.재윤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웃는 일도 거의 없었다.지금까지 감정을 드러낸 순간은 단 세 번 있었다.자신을 붙잡으며 살려 달라 외치던 그때, 삼촌을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삼촌이 자신을 데려가려 할 때.그 외 다른 시간엔 마치 작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얌전히 유하 곁에만 매달려 있었다.무얼 시키든 고분고분 따랐고, 저항하거나 고집부리는 행동은 전혀 없었다.‘재윤이가... 혹시 자폐 스펙트럼이 아닐까?’준서의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모습과는 정반대였다.아직은 어린 나이였지만, 전문가와의 상담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유하의 마음을 스쳤다.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윤의 가족이 선택일 일.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아니었다.지금은 단순한 비행기 놀이 중이었다.이솔이 사다 놓고 간 주사위 게임이었다.이번엔 재윤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였다.작은 두 손을 포개고 주사위를 살짝 흔들다 조심스레 탁자 위로 던졌다.6이 나왔다.유하는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우와, 재윤이 대단하다! 6이야! 한 번 더 던질 수 있어. 이제 거의 다 왔네!”재윤은 살짝 눈을 빛내면서 유하를 바라봤다.그 따뜻한 시선에 힘입어 다시 주사위를 집어 던졌다.이번엔 3이 나왔다.유하는 목소리를 높였다.“우와, 3이다! 여기서 몇 칸만 건너뛰면 바로 날 수 있어!”재윤은 말을 집어 들고 유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옮기려 했다.그 순간,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낯선 남자, 태건이 안으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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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태건은 잠시 멈칫했다.그는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지금 유하는 승현이 걸린 병이 하찮은‘감기’정도라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사모님, 이번 일은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유하는 미간을 찌푸렸다.“겨우 그 말 하려고 온 거야?”괜히 대단한 얘기라도 있는 줄 알았다. ‘이런 가식적인 걱정이라면, 차라리 도장 찍힌 이혼합의서가 낫지.’유하는 차갑게 병실 문을 가리켰다.“더 할 말 없으면 나가봐.”싸늘한 태도에도 태건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그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 앞에 다다르기 직전 불쑥 몸을 돌려 유하를 바라봤다.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사모님, 지금 드리는 말씀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충고입니다.”“이혼 소송, 조용히 취하하시죠. 살던 대로 사시면 됩니다. 괜히 맞서 싸우다 손해 보실 건 사모님 쪽일 테니까요.”‘손해?’유하는 순간 피식 웃어버렸다. 정확히, 웃음이라기보다 기가 막혀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뭐야, 또 날 가둬 두겠다는 거야? 나 비서, 그쪽은 정말 사람이 맞긴 해?”7년 전 일이 뇌리를 스치자 유하의 가슴속에서 서늘한 분노가 치밀었다.“너희가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난 그 7년을 헛되게 살았어. 이번엔 다르니까... 나가!”낮게 깔린 유하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태건은 말없이 유하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병실을 나갔다.살짝 흔들리며 닫히는 문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유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때 작은 손길이 팔꿈치에 닿았다.“엄마?”재윤이 침대 곁에 기대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진하고 맑은 눈동자가 유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유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는 걸 느꼈다. 그리고 아이의 따뜻한 손을 꼭 쥐자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츰 진정됐다.‘그래, 난 이제 7년 전 아무것도 못 하던 그 소유하가 아니야.’‘이번엔 반드시 해낼 거야.’...태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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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화

“돈 뜯어내는 것 말고 네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다고!”유하는 유민의 말을 더 듣고 싶지도 않았다. 유민이 잡은 손을 뿌리치려 했다.유민은 남들 앞에서는 체면을 조금 차리지만, 주연의 실망한 눈빛과 욕설이 더 겁났다. 그래서 도저히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누나, 지난번엔 내가 잘못했어. 밀치면 안 됐는데... 근데 누나도 내 머리 찍었잖아. 이걸로 우리 퉁치자!”유민은 아직 붕대가 감겨 있는 머리를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쳤다.유하는 헛웃음이 나왔다.“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리 와, 한번 보자.”그녀가 손을 뻗어 붕대를 잡으려 하자 유민은 몸을 홱 빼고 재윤이 누워 있는 옆 침대로 피했다.재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 뒤로 물렸다.“거기 서!”낮게 쏘아붙이는 유하의 목소리에,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기억이 유민을 덮쳤다. 몸이 절로 굳고,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이리 와!”재윤과 거리를 두게 한 뒤, 승환에게 재윤을 달래라고 시키고 유하는 차갑게 유민을 노려봤다.시선을 피한 유민이 작게 중얼거렸다.“누나... 또 그 예물 얘기인데, 이번만 좀 도와줘. 20억이 좀 많긴 한데... 누나랑 매형은 돈이 없지 않잖아. 나 진짜 돈 벌면 누나한테 다 갚을게.”“말이 되는 소리를 해.”유하는 단칼에 잘랐다.‘소유민이 돈을 번다고? 그리고 갚는다고?’‘그럴 바엔 돼지가 나무 타고, 수퇘지가 새끼 낳는 게 더 빠르겠다.’사람 앞에서 돈 얘기하다 면전에서 거절당하니 유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다급해진 유민이 목청을 높였다.“누나! 이번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돼? 주연이 뱃속에 내 애도 있어! 결혼만 하면 다시는 안 찾아올게!”‘연애에 미쳐 사리분별 못 하는 이 바보 같은 동생...’유하는 말문이 막혔다.“네가 언제 말한 걸 지킨 적이나 있니?”“다시는 안 온다고?”“넌 이미 밑 빠진 독이야. 그런 애까지 데리고 살겠다고? 그럼 바닥이 있긴 하겠어?”“또 기어 오면 난 널 맞으러 왔다고 생각할 거야.”유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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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화

유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무작정 유하 앞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승환이 목덜미를 움켜쥐듯 잡아끌더니 병실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문이 ‘철컥’ 닫히는 순간.문틈 사이로 보인 건,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유하의 얼굴이었다.‘왜... 왜 이렇게 무섭지?’유민은 설명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여 허둥지둥 손잡이를 붙잡으려 몸부림쳤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왔다.“누나...”그러나 유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동생을 쳐다보지 않았다.철컥-문이 완전히 닫혔다.유민은 승환에게 질질 끌려 계단참으로 내던져졌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승환은 한쪽 발로 유민의 가슴을 거칠게 짓밟으며 몸을 숙였다. 잘생긴 얼굴에 번지는 건, 햇살같이 환한 미소였다.“소유민 맞지? 다시는 우리 누나 앞에 나타나지 마라. 내가 우리 누나처럼 참을성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냉정한 사람도 아니거든. 내가 한번 미치기 시작하면, 솔직히 나도 내가 뭘 할지 장담 못 해.”유민은 기침을 몇 번 터트리다 화를 내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순간, 허리께에 번개처럼 통증이 치고 들어왔다. 곧이어 몸이 공중에 들리더니, 그대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위에서 내려다보던 승환은 다리를 한번 툭 차 보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감히 우리 누나 기분을 상하게 해?”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승환의 웃음은 더 깊어졌다. 그는 느릿한 어조로 중얼거렸다.“아, 맞다. 미안해, 미안해. 사실은 고맙다고 해야겠네.”승환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왔다. 유민을 일으켜 세우려 손을 내밀었다.온몸 뼈마디가 부서질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유민은 눈앞의 사람이 다가오는 순간 기겁했다. 혼비백산해 땅을 짚으며 비틀거리고, 사력을 다해 아래층으로 내달렸다.‘미쳤어... 매형도 그렇고, 이놈도 똑같은 미친놈이야!’승환은 혀를 차며 아쉬운 듯 고개를 저었다.“아이, 왜 그렇게 도망쳐? 아직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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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병원 1층.주연이 초조하게 한참을 왔다 갔다 하며 발끝을 구르다가, 결국 지쳐 갈 때쯤에야 유민이 나타났다.흐트러진 옷차림에, 걸음걸이는 비틀거렸으며, 멍하니 생기 없는 얼굴이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려! 어떻게 됐어? 돈 받아냈어, 못 받아냈어?”주연이 다급하게 달려가 묻자, 유민은 말없이 멍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주연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손바닥이 번쩍 들리더니 그대로 유민의 뺨을 후려쳤다.“대답하라니까, 말해!”찰싹 소리에 유민이 비로소 정신을 조금 차린 듯했지만, 그가 내뱉은 건 엉뚱한 말뿐이었다.“우리 누나... 나 버렸어. 누나가... 나 버렸어...”유민의 뇌리에는 아직도 병실 문틈 사이로 보였던 그 눈빛이 아른거렸다.핏발 선, 차갑게 절망으로 가득한 눈.한 번도 자신을 그렇게 바라본 적 없는 누나였다.‘누나가... 이번엔 정말 나를 미워하게 돼버린 건가?’유민의 가슴이 묘하게 저렸다. 눈가가 붉어지더니, 순간이라도 다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유하에게 해명하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왔다.하지만 동시에, 승환의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그놈 얼굴... 너무 무서워. 매형이랑 똑같아. 둘 다 위험해... 난 진짜... 무서워.’유민의 풀 죽은 얼굴만 봐도, 결과가 어땠는지는 뻔히 짐작할 수 있었다.주연은 곧바로 이를 악물며 분노를 터뜨렸다. 유민의 귀를 비틀어 쥐고, 길 한복판에서 다시 한번 뺨을 휘갈길 기세였다.‘쓸모없는 인간! 반반한 얼굴 말고는 쓸만한 구석이 게 뭐가 있어!‘지 누나가 돈 많고 힘 있는 놈이랑 결혼하지 않았으면...’‘누가 이런 쓰레기랑 결혼해 주겠어?’‘고작 병원에 누워 있는 여자 하나랑 꼬맹이 하나뿐인데...’‘그게 뭐가 어려워! 얼렁뚱땅 겁만 줘도 돈은 알아서 굴러들어 올 텐데!’‘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유민은 여전히 멍하니 서 있었고, 주연의 손길을 피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그러나 그 뺨은 끝내 때리지 못했다.주연의 핸드폰이 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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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전화기 너머, 이장국 교수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진주연 씨, 어머님은 요즘 상태가 안정적이에요.]주연은 순간 얼어붙었다.“뭐라고요? 방금 저한테 메시지 왔어요. 우리 엄마가... 숨이...”[메시지요? 무슨 말씀이신지...]설명을 들은 이장국은 의아한 듯 잠시 침묵했다가, 직접 핸드폰을 확인했다.[아니에요. 저는 계속 환자들 보느라 바빴습니다. 누구에게도 메시지를 보낸 적이 없어요.]주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그녀는 몇 차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교수에게 다시 한번 어머니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한 뒤, ‘이상 없다’라는 확답을 듣고 나서야 전화를 겨우 끊었다. 하지만 등줄기는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했다.‘상대방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분명해.’‘내 주변을 다 꿰뚫고 있다는 거.’‘원하면 언제든 내 엄마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거.’주연의 손끝이 떨렸다.‘젠장... 대체 누구야!’불안과 분노에 휩싸여 있던 주연은 문득 곁에 서 있는 유민을 스쳤다. 여전히 멍한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이었다.‘잠깐... 이 타이밍?‘오늘 내가 유민을 부추겨 유하한테 돈 뜯으러 보냈는데, 바로 이런 메시지가 온다고?‘이건... 우연치곤 너무하잖아.’하씨 가문의 누군가라면 이런 방식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오승현? 아니야. 그 자식은 원하면 직접 나서지. 이런 짓까지 하지 않는 애야.’‘그럼... 설마... 소유하?’주연은 코웃음을 치듯 속으로 내뱉었다.‘말도 안 돼...’‘자기 남편 하나도 제대로 못 붙잡는, 힘도 없는 여자가 어떻게 이런 짓을 해?’하지만 끓어오르는 불안과 직감 때문에 차마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주연은 결국 마음을 굳혔다. 병동으로 올라가 당장 유하를 직접 만나려 했다.그러나 그 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화면을 내려다본 주연의 등줄기가 싸늘하게 굳었다.[멈춰.]주연의 몸이 얼어붙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꼼짝할 수가 없었다.‘지금까지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던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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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화

W시에 있는 임시 숙소로 정한 호텔.주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 장롱, 커튼 뒤까지 모조리 확인했다. 방 안은 금세 엉망진창이 됐다.유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주연아, 너 대체 뭘 찾는 거야?”진주연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샅샅이 확인한 끝에 간신히 카메라나 도청 장치가 없는 걸 확인한 듯했다. 그러자 곧장 유민을 소파에 앉히고, 다급하게 쏘아붙였다.“네 누나. 네 누나에 대해 아는 거 다 말해.”“뭐?”유민은 멍하니 얼어붙었다. 주연이 갑자기 왜 누나 이야기를 묻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헛소리 말고 빨리!”주연이 재촉하자, 유민은 순간 주저했다. 그 모습을 보자 주연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유민은 기겁하며 몸을 움찔 뒤로 빼다가, 아직 제대로 아물지 않은 상처가 욱신거려 얼굴이 찡그려졌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치밀었지만 감히 반항할 수는 없었다.“주연아, 너 임신했잖아. 너무 흥분하지 말고—”“빨리 말해!”주연의 손끝이 높이 들린 채 내려오려는 순간, 유민은 결국 고분고분해졌다.‘아... 오늘 병실에서 누나가 날 보던 눈빛...’‘그 핏발 선 눈빛이 자꾸 떠올라. 너무 아프다, 마음이.’유민은 가슴을 억누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우리 누나는... 진짜 똑똑해.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해서 결국 고리대학교까지 들어갔지.”“근데... 부모님은 이상할 정도로 누나를 싫어했어. 나한테는 잘해줬는데도 말이야. 내가 어릴 때 몸이 약했잖아.”“한번은 열이 너무 올라서 거품 물고 쓰러진 적 있었는데, 그때 누나가 울면서 동네 어른들 붙잡고 살려달라고 뛰어다녔어...”“그만! 감성팔이 말고, 누나 얘기만 하라고 했잖아!”주연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유민은 움찔했다.“아... 알았어.”유민은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사실 누나에 대해 자신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누나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집에서 도망쳐 나갔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거의 연을 끊다시피 했다. 최근 몇 년은 아예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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