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161 - Chapter 170

212 Chapters

제161화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과 밖, 경계가 아스라이 이어져 있었다.유하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린 남자의 시선과 마주했다. 방망이질하던 가슴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는다.“어떻게 온 거예요?”“엄마!”귀여운 라쿤 잠옷을 입은 재윤이 비틀거리며 달려와 안겼다. 흐느끼는 아이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병실 안에서 더 크게 울려 퍼졌다.왜 새벽 4시에 이 조카와 삼촌이 자기 병실에 있는 건지 따져 물을 겨를도 없었다. 유하는 먼저 몸을 낮추어 재윤을 품에 안고, 작은 소리로 울고 있는 재윤을 달랬다.재윤이 무슨 일에 놀랐는지, 얼마나 오래 울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금세 기진맥진한 듯 아이는 유하 품에서 잠들어버렸다.유하는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에야 남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에는 똑같은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유하가 입을 떼기도 전에 남진이 먼저 말했다.“깜짝 놀랐어요. 새벽 3시쯤 와봤는데 유하 씨가 안 보이고, 전화도 안 받아서 큰일 난 줄 알았어요. 경찰에 신고할까도 했습니다.”‘그쪽이야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고!’병실 안에 누군가 있는 걸 본 순간, 유하의 심장은 거의 멎을 뻔했다. 혹시 태준혁의 원수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인건가 싶어, 바로 도망칠 준비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게 남진과 재윤이라니.‘하아... 결국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네.’‘어떻게든 둘러대야 한다.’유하는 천천히 옆으로 걸어가 패딩을 벗었다. 안에는 여전히 환자복 차림이었다. 옷걸이에 무심하게 패딩을 걸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친구 배웅하러 나갔다가 차고에서 얘기 좀 나눴어요. 그런데 당신들 왜 갑자기 온 거예요? 재윤이는 또 왜 이래요?”‘거짓말 하나를 시작하면, 또 다른 수많은 거짓말로 그 거짓말을 덮어야 하는구나.’ ‘피곤하다, 정말...’다행히도, 유하가 전부터 ‘밤새 친구랑 그림을 그릴 거다’라고 말해둔 터라 남진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재윤 쪽을 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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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유하는 남진을 도와 재윤을 돌봤다. 그런데 남진이 오히려 승현을 재촉해 두 사람을 이혼시킨 꼴이 되었다.남진은 마음이 괜히 불편했다. 머릿속에서 수십 번 말을 고르고 또 골랐지만, 결국 입 밖에 나온 건 힘 빠진 한마디였다.“정말... 이혼하는 겁니까?”유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지금 얘기하는 건 당신 조카 문제라고, 배남진 씨!’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그건, 벌써 오래된 얘기인데요. 곧 재판 들어가요. 오승현이 친구들한테 말 안 했어요?”남진은 멍하니 되물었다.“오래된... 얘기라니, 언제부터예요?”유하는 미간을 찌푸렸다.“설 전부터요.”남진도 그제야 알았다. 다행히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승현이는 어쩌면 이렇게 속을 꼭꼭 감출 수 있을까?’‘늘 같이 만나면서 한마디도 흘리지 않았다니.’남진의 가슴은 답답하게 죄어왔다.반면 유하에게는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새벽까지 이솔의 차 문제를 처리하느라 한숨 못 잔 데다, 마음도 몸도 지쳐 있었다.유하는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잘랐다.“아무튼, 하루빨리 전문 심리치료사 찾아보세요. 제가 아는 분들 몇 명 있으니까 번호 보내드릴게요. 아니면 직접 알아보셔도 되고요.”사실상 내쫓는 말투였다.남진이 물러난 뒤, 유하는 핸드폰을 꺼내 그동안 알게 된 심리 상담 전문가들의 연락처를 남진에게 전송했다.시어머니 때문에 이미 이쪽 방면으로 알아본 게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남진이 벌써 준비했을 줄 알았다. 게다가 재윤이 요즘엔 학교도 잘 다니고 있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유하가 없으니 다시 무너져버린 거였다.유하는 여전히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가득했지만, 피로가 모든 걸 덮어버렸다.잠시 후, 그녀는 재윤 곁에 누운 채 깊이 잠들고 말았다....남진은 병원을 나온 뒤에도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곧장 핸드폰을 꺼내 승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하의 이혼과 출국 이야기를 묻고 싶었지만, 막상 연결되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초간 침묵하다가, 승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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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FK테크 사무실.몇 사람이 모여 앉아 각자 노트북을 붙잡고,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자료를 뒤적이고 있었다.“강이솔?”승현이 모니터 속 이름을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곧 태건을 바라보며 물었다.“강이솔도 그쪽에 있었어?”“누구야?”승현이 다른 여자 이름을 입에 올리자, 연우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유하 친구.”승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연우는 순간 멈칫하더니, 곧바로 자신의 화면에서 그 이름을 검색해 자료를 훑어봤다.태건이 덧붙였다.“제가 확인했어요. 강이솔 씨는 그날 근처에서 기업 분쟁 사건 중재 때문에 갔던 겁니다. 출동 기록도 경찰서에 남아 있고, 오늘 오전엔 차량까지 검사했는데 혈흔 반응은 없었습니다.”연우도 자료를 다 읽고는 흥미 잃은 듯 툭 내뱉었다.“이런 사람이라면 사람 숨길 배짱은 없겠죠.”‘소유하도 맨날 답답하기만 한데, 그 친구는 뭐 별 수 있겠어?’‘피 묻은 사람이라도 들이닥치면 기절부터 했을걸.’‘감히 사람을 숨긴다니, 가당치도 않지.’승현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자료를 넘기듯 화면을 스크롤 하다가 이솔의 항목을 지나쳤고, 곧바로 다음 사람의 정보를 열어보았다.한참을 뒤졌지만 오전 내내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런데 그 사이, 인터넷은 벌써 떠들썩해졌다. 마케팅 계정들이 떠들어대며 실검 순위는 난리가 났다.[TR그룹 대표이사 실종, 사망설까지!][TR그룹 주가 폭락! 대위기!][TR그룹 붕괴, 자본 재편 시작!][다음 신흥 재벌은 누구?][...]준범이 그 기사들을 보자마자 얼굴이 벌게졌다.“어느 미친 새끼가 헛소문 퍼뜨린 거야? 내가 잡기만 하면, 그 입을 찢어버릴 거다!”승현은 묵묵히 태건을 바라봤다.태건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곧바로 네트워크를 쫓아, 그 마케팅 계정들을 추적할 생각이었다.문제는 이 소문이 어디서 흘러나왔느냐였다.준혁이 사고를 당한 뒤, 승현과 준범은 곧장 소식을 철저히 봉쇄했었다.‘그런데도 벌써 이렇게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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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다행히도, 그동안 지켜본 바로 재윤은 약속을 잘 지키는 아이였다. 무엇보다 유하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재윤이가 고개 끄덕인 이상, 입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겠지.’이 주택 단지는 워낙 외진 곳에 있어 생활이 불편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집이 비어 있었고, 분양률도 시원치 않았다.한낮인데도 길 위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집 안으로 들어서자 유하는 재윤을 2층 침실로 올려보내고 애니메이션 영상을 틀어줬다.“금방 올게. 30분만 기다려.”약속을 남긴 뒤, 문을 반쯤 걸어 잠갔다. 그리고 다시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지하실.유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문을 밀어 열었다.순간, 벽에 기대앉아 있던 남자의 눈빛과 시선이 맞부딪쳤다.태준혁은 이미 깨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 그러나 눈동자에는 묘하게 번지는 웃음이 가득했다.“왔네요.”유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온 접이식 테이블을 펴고, 병원에서 사 온 영양식을 올려놓았다. 그 옆에 약봉지도 내려두고는 곧장 문가로 물러섰다.준혁은 허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식사하는 모습은 기묘하게 우아하고 빠르기까지 했다.곧 식사를 끝낸 그는 입술을 닦고, 알약을 아무렇지 않게 입안에 털어 넣었다. 씹으며 웃음을 머금었다.“그렇게 멀리 서 있으면 뭐 해요? 제가 사람 잡아먹는 맹수라도 된 줄 알아요?”‘맹수보다 더 위험한 게 당신이야.’유하는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새 약과 붕대도 가져왔어요. 직접 드레싱 갈 수 있죠?”준혁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궁금한 거, 없나요?”유하는 눈을 깜빡이며 맞받았다.“말해줄 생각은 있어요?”대답 대신 준혁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물었다.“우리 회사... 무슨 일 있었죠?”“네.”유하는 숨기지 않았다.“대표이사가 실종됐다는 소문이 돌아요. 죽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TR그룹이 곧 무너진다고들 하죠. 다들 태 대표님 집안 재산 나눠 먹을 생각뿐이에요.”“제법 시끄럽네요.”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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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지하실.준혁이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화면에 들어온 답신이 깜빡였다.[선 넘지 마.]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이 키패드를 가볍게 두드렸다.[알아, 알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근데 말이지, 사실 걱정할 필요 없을걸? 내가 손 쓸 것도 없이 벌써 마무리 다 돼 가던데.][이 정도 마음가짐, 이 정도 수단... 난 솔직히 초짜가 맞는지 의심스럽다니까.]화면은 잠시 조용했다. 준혁의 장난 섞인 농담엔 별 반응이 없었다.곧 다시 깜빡이며 글자가 떴다.[언제쯤 직접 나설 거야?]준혁은 키보드를 천천히 두드리며 답했다.[아직은 아냐.][준범으로는 회사 고위층을 제압 못 해. 바람이 더 거세져야 해. 그 틈에 고위층에서 날뛰는 늑대 같은 놈들을 먼저 도려내야지.]손가락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그리고 이번에 날 공격한 놈들 말인데...]준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력했다.[너희 팀하고 손잡으려는 세력이 많잖아? 누가 먼저 성급하게 칼을 휘둘렀는지는 알 수 없어.][어쩌면 이번 사건이 이렇게 빨리 터진 것도 뒤에서 부추긴 놈이 있어서일 거고. 네가 밖에서 명단만 챙겨둬.][내부 정리 끝내고 나면 내가 직접 하나씩 조사해서 처리할 테니까.]화면엔 고작 점 하나만 찍힌 메시지가 돌아왔다.[.]말은 여전히 짧고 건조했다. 준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야, 넌 네 그 ‘사랑하는 여자’ 보러 갈 생각은 없어?]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신이 왔다.[때가 아니야.]준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때가 아닌 게 아니라, 겁나서 못 가는 거 아냐? 당시에 잘못한 쪽은 분명 네 그 사람이잖아. 네가 뭐가 두려워?]한참 뒤, 화면이 깜빡이며 짧은 문장이 새겨졌다.[너랑 상관없어.]‘됐군.’준혁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내가 뭐 하러 참견하겠어.’‘둘이 다시 손잡고 잘 살든 말든, 나한테 돌아올 게 뭐라도 있겠냐고.’준혁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시계를 닫고 다시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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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태건이 몇몇 이름을 읊자, 승현은 낯선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거지?”태건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문제가 큽니다. 겉보기에는 아무 관련 없어 보이고, 대부분이 개인 투자자였어요. 그런데 우리 쪽에서 추적해 보니, 최종적으로 그 주식들이 흘러 들어간 계좌가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계좌 명의자가...”잠시 숨을 고르던 태건이 낮게 이름을 뱉었다.“조서민입니다.”승현의 눈이 순간 번쩍 뜨였다.“조서민? TR그룹 상무 아닌가?”‘이거... 흥미로운데.’대표가 실종된 상황에서, 대주주들은 회사 경영권 방어는커녕 주식을 던져버리고, 상무는 그걸 뒤에서 주워 담는다?‘이건 대체 무슨 수작이지?’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번뜩임이 스쳤다.‘아니... 수작이라고? 혹시 이게 전부...’승현의 여우 같은 눈매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곧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그는 태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밖에 파견 보냈던 사람들 전부 불러들이세요. 절차상 필요한 인원만 최소로 남겨두고.”태건은 순간 멈칫했다.“대표님, 그건 무슨 뜻입니까?”승현은 빙그레 웃었다.“태준혁... 제대로 판을 짠 것 같군. 동생까지 속이고, 이번 일을 크게 벌여서 회사 내부를 통째로 갈아엎으려는 거야.”“이번 판이 끝나면 TR그룹은 완전히 태준혁 손에 들어가겠지. 안정적으로.”태건은 그제야 눈이 크게 뜨였다.“혹시... 태준혁 대표님이 이미 구조돼서, 지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내부 정리 때문이라는 말씀입니까? 분산된 지분까지 한꺼번에 회수하려는 계산?”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가능성이 크지. 애초에 올해 TR그룹은 위험했어. 아직도 고위층엔 과거 불법 사업에 연루된 사람들이 남아 있잖아.”“그걸 정리하지 못하면, 윗선에서 칼을 들이댈 거고. 지금이 바로 기회야. 내부를 쓸어내고, 권력을 집중시킬 기회. 태준혁이 놓칠 리 없지.”승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솔직히 말해서... 이번 피습 사건 자체가 자작극일 수도 있다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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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였다.고리대학교 정문 앞.승환은 가방을 옆으로 비스듬히 멨다. 살짝 웨이브 진 머리끝에 노을빛이 스며들고, 단정한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누나, 내일 정말 가는 거예요?”유하는 승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그래. 내일 재판 끝나고 결과 나오면 바로 출국할 거야. 언제 다시 돌아올지는 나도 모르겠고.”오늘은 승환의 대학 입학일.유하는 이번에 떠나면 짧은 시간 안에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굳이 시간을 내 승환과 저녁을 함께했다.하필 오늘이 개강이라, 식사 후 직접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다음에 또 언제 볼 수 있을까?’그 생각에 유하의 마음도 괜히 먹먹해졌다.스무 해 넘게 살아온 땅을 떠난다는 건, 곧 오래 함께한 사람들과도 이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누나, 걱정 마요.”유하의 눈가에 짙은 슬픔이 스치자, 승환은 금세 환하게 웃었다.“나 공부 잘하잖아. 교수님이 맡겨주신 수학 과제랑 연구 잘 끝내면 유학 신청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 또 만날 수 있어요. 누나 매일 볼 수 있다고요!”유하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손을 들어 승환의 어깨를 다시금 가볍게 두드렸다.“우리 승환이, 꼭 힘내야 한다.”“네!”노을빛 아래, 유하는 손을 흔들며 승환과 작별했다.승환의 뒷모습이 멀어져 가자, 유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가슴을 차오르게 했고, 눈가가 뜨겁게 젖었다.차에 올라탔을 때, 옆자리의 재윤이 곁눈질로 유하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작은 팔을 벌려 유하에게 안겨 왔다.“엄마?”유하는 감정을 꾹 눌러 담고, 아이를 꼭 안아주며 미소를 지었다.“가자. 우리 재윤이 맛있는 거 먹으러.”지난 이틀 동안 ‘대나무숲’ 주택단지의 집에서, 재윤은 약속대로 얌전히 방 안에만 머물며 기다려주었다.‘이제는 보상해 줄 차례네.’유하는 아이의 등을 다독이며 차창 밖 붉은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유하는 차를 몰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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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밖은 이미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졌고, 유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태양 쪽을 바라봤다.찬란한 빛에 시야가 흔들리자, 마치 다른 세계에 서 있는 듯한 낯선 감각이 스쳤다.얼마간 멍하니 서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차에 올랐다.병원에서 법원까지는 차로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유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조금 일찍 법원으로 출발했다.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시간은 오전 7시 32분.재판 시작까지 아직 세 시간 남짓 남아있었다....같은 시각, 그린힐.승현은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수트를 입고 현관을 나섰다. 군더더기 없는 재단 덕에 한층 더 도도한 기품이 드러났다.승현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차에 올라탔다.오늘 운전석에는 태건이 없었다.잠시 뒤, 다른 차량 한 대가 함께 출발했다.창문이 내려가자, 그 안에서 태건의 얼굴이 드러났다.승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차 두 대는 간격을 유지한 채 나란히 도로 위로 나섰다.뒤차에 앉아 있던 태건은 곧 핸드폰을 꺼내 차갑게 지시했다.“시작해.”...법원으로 향하는 길은 유하에게 낯설지 않았다.증거 제출이며 각종 서류 처리로 이미 수차례 오간 길이었으니.출발한 지 10분도 안 돼, 유하의 차는 좁은 석조 다리에 들어섰다.다리를 지나면 바로 고속도로와 연결되는 구간이었다.오늘따라 마음이 비교적 차분했던 유하는 속도를 일정히 유지하며 조심스레 차를 몰았다.그런데 다리 중간쯤 올랐을 때였다.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 한 대가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곧장 돌진해 왔다.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듯, 그대로 정면으로 들이받을 기세였다.유하는 놀라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순간 귓가를 찢는 굉음이 터졌다.옆구리를 스치듯 달려온 차량 한 대가 그대로 유하의 차 측면을 들이받은 것이다.차체가 휘청거리며 옆으로 밀렸고, 그때 맞은편 차량이 정면으로 강하게 충돌했다.강렬한 충격 속에서 유하의 차량은 다리 난간 쪽으로 미끄러졌다.뒤따르던 차량도 급히 브레이크를 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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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견인차가 도착했다.사고 차들이 하나둘 치워지고 나서야 유하는 비로소 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그사이 다른 사고 운전자들도 대체로 합의나 사과를 마쳤다.앞에서 들이받았던 운전자는 유하에게 다가와 연신 사과하며, 유하의 핸드폰 번호를 받아두고는 나중에 보상 문제를 이야기하자고 했다.하지만 유하는 법원에 가야 할 시간이 급해, 대충 번호만 불러주고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가며 계속 택시 호출을 시도했다.차는 이미 운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차에 갇혀 있던 동안부터 지금까지, 호출을 수십 번 했음에도 택시가 단 한 대도 잡히질 않았다.‘이상하네... 어떻게 이렇게 안 잡히지?’조금 전에는 경찰에게 부탁해 다른 차를 얻어 타려 했지만, 다른 운전자들이 모두 ‘병원에 가야 한다’, ‘급한 일이 있다’며 자신들의 사정을 앞세웠다.유하가 ‘이혼 재판에 가야 한다’고 해도, 그 경찰들 눈엔 별로 급한 일로 보이지 않는 듯했다.결국 차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계되었고, 경찰은 ‘조금만 기다리면 차를 구해주겠다’고 말했지만, 유하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시계를 보니 이미 아홉 시가 훌쩍 넘었다. 재판 시작까지는 고작 한 시간 남짓.‘지금이라도 차만 있으면, 아직은 늦지 않아!’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낯익은 검은색 벤츠 한 대가 갑자기 급정거하며 유하 앞에 멈췄다.창문이 내려가자, 연우의 얼굴이 드러났다.입가엔 싸늘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타.”유하는 순간 멍해졌다.하지만 곧 머릿속이 돌아갔다.승현에게서 ‘이혼’ 이야기를 이미 들었을 연우.그리고 지금 누구보다도 자신이 이혼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 역시 연우일 터였다.‘하연우... 타이밍도 기가 막히네.’“안 탈 거야?!”연우가 성급하게 재촉했다.며칠 전 승현과의 대화에서 ‘이혼’ 이야기를 엿들은 이후, 연우는 직접 확인까지 했고 심지어 사람을 붙여 유하를 감시해 왔다.‘다행히 붙여놨네. 아니었으면 오늘 어쩔 뻔했어? 역시 쓸모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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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연우는 법원 정문과 작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차를 세웠다.유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로를 가로질러 달렸다.오가는 차량을 피해 몸을 비켜내며, 곧장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점점 가까워졌다.그런데 곁을 스쳐 지나가던 몇 대의 차량 중, 한 검은색 차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순간, 거친 손이 튀어나와 유하의 어깨를 사납게 잡아채더니 그대로 차 안으로 끌어들였다.머릿속이 ‘쾅’ 하고 울렸다.‘납치? 누구지? 미쳤나? 여긴 법원 앞이야!’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유하는 본능적으로 입을 열어 소리치려 했다.하지만 단단한 손이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다른 한쪽 팔은 유하의 허리를 거세게 감아올려, 몸이 꼼짝도 못 하게 죄어왔다.차 문이 천천히 닫히려 했다.‘안 돼!’유하의 눈동자가 커졌다.사력을 다해 몸부림치며 간신히 틈을 벌려내고는, 목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뱉었다.“살...”그러나 외침은 끝내 막혀버렸다. 입은 다시금 거칠게 봉쇄됐지만, 유하의 손은 이미 문틈을 움켜쥐고 있었다.차 문이 닫히지 못하게, 손톱이 벗겨질 듯이 파고들며 붉은 자국을 새겼다.‘이제 다 왔는데... 바로 법원 앞인데!’숨이 막혀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그럼에도 유하는 손을 놓지 않았다.마치 이 마지막 버팀목을 놓는 순간, 모든 게 끝나버릴 거라는 듯이.그리고 유하는 흐릿한 와중에도 깨달았다.‘역시, 이건 우연이 아니야.’...같은 시각, 고리대학교.승환은 인파로 붐비는 캠퍼스를 지나 지도교수의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오늘도 과제와 연구에 대해 상의하러 온 것이다.‘이번 과제를 더 빨리, 더 완벽하게 끝낼 수 있다면...’‘교수님이 해외 유학 허가를 더 빨리 내주실지도 몰라.’‘그래야 누나를 따라갈 수 있어. 누나 곁에 영원히 있을 수 있어.’‘누나의 가장 소중한 동생으로!’승환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평소 늘 어둡던 제자가 웃는 모습을 본 지도교수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수학적 재능만큼은 누구도 따를 수 없지만,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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