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271 - Chapter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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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1화

유하는 머리가 무겁고 깨질 듯이 아팠다.귓가에 파고드는 목소리도 선명히 들리지 않았고, 시야도 흐릿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힘이 하나도 없었다.한참을 말없이 있자, 주성이 유하의 달아오른 볼을 보고 당황했다.손을 댄 이마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큰일 났네...”주성은 서둘러 집주인 아주머니를 불러왔다.유하는 고열이었다.약을 먹이고, 몸을 닦아내고, 다시 눕히는 한바탕 소동이 지나갔다.유하는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들었지만, 그 잠은 지독히도 괴로웠다.어렴풋이 깜빡이는 꿈속, 유하는 오래전으로 돌아갔다.그녀가 처음 승현을 만났던 순간.그것은 7년 전보다 더 오래된, 대학 시절의 기억이었다.한겨울, 눈으로 덮인 학교 캠퍼스.유하는 이솔과 함께 눈 덮인 오솔길을 걸으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포슬포슬한 눈송이가 유하의 머리 위로 쌓였다.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시야가 멈췄다.눈 덮인 건물 복도, 사람들 무리에 서 있는 한 남자.승현이었다.여러 사람 속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존재.타고난 기품과 눈부신 기세는 숨길 수조차 없었고, 매혹적인 눈매가 곧장 유하의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눈발 사이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그 순간, 바람이 불어 눈송이가 흩날렸다.유하의 마음이 흔들렸다.그리고 유하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허억... 허억...”유하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어둠만이 가득한 방 안에서, 유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왜 하필 지금, 과거의 일을 꿈꾼 걸까?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그때, 단 한 번의 시선.눈송이 흩날리던 그 짧은 순간의 설렘이...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자신을 끌어내렸다는 것을.그리고 그 끝은 지옥이었다....밤이 깊었다.서재에는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고, 희미한 불빛이 어둑하게 번지고 있었다.승현은 책상 뒤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한 장의 사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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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유하는 아직도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분명 자신이 빗속으로 뛰어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부터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낯선 방 구조, 몸에 걸쳐진 익숙지 않은 옷차림까지, 모든 게 낯설어 그녀를 멍하게 했다.그때, 방문이 덜컥 열리며 여섯,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뛰어 들어왔다.둘은 순간 멀뚱히 눈을 마주쳤다.“엄마, 엄마! 예쁜 이모 깼다!”아이가 목청껏 외쳤다.그러고는 나가지도 않고, 작은 얼굴을 치켜들어 유하를 빤히 쳐다보았다.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반짝이며 호기심 가득했다.유하는 그런 아이의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아가, 여긴 어디야?”“우리 집이요.”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저는 은미예요. 키 큰 오빠가 이모 데리고 왔어요. 이모 진짜 예뻐요.”“고마워.”유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막 아이에게 ‘키 큰 오빠가 누구냐’라고 물으려는 순간, 주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어, 깨셨네요?”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유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지난번 본가에서의 일 때문인지, 주성에 대한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설마 여기서 그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아까 은미 말로는,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 주성이라고 했다.“너...”유하가 묻기도 전에, 주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자신이 유하를 발견했는지, 비 맞으며 쓰러진 걸 구해왔는지, 그 과정 전부를 과장 반, 사실 반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듣다 보니 유하의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지만, 그제야 대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자신은 승현의 시선에서 벗어났다.그 사실 하나만으로, 유하는 비로소 편히 숨 쉴 수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무엇보다 승현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7년 전 그 일과 관련된 누구라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조금은 더 쉬어야 해.’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유하는 아직도 떠들고 있는 주성의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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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광명산? 거기까지 혼자서 차를 몰고 가겠다고요?”주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그는 유하가 승현이랑 맞서서 형을 곤란하게 만들 정도라면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대담할 줄은 몰랐다.“형수님...”주성이 일부러 말을 끌며 혀를 찼다.“거기까지는 꼬박 이틀은 달려야 하는 거리예요. 진짜 괜찮으시겠어요?”유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네가 못 가겠으면 차만 빌려줘도 돼...”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성이 손을 번쩍 들어 말을 잘랐다.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얼굴 가득 설레는 기색이 번졌다.“아뇨, 아뇨! 갑니다. 제가 모실게요!”열아홉 살 주성은 한창 뜨겁고 모험심으로 들끓는 나이였다.유하의 말은 정확히 그의 반항심과 ‘영웅이 되고 싶은 욕망’을 건드렸다.광명산까지 몇백 킬로미터를 내리 달린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지금 당장이라도 핸들을 잡고 싶었다.하지만...“근데 형수님 열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몸도 아직 허약하잖아요.”주성이 망설이며 물었다.“우리 이틀만 있다가 출발하는 게 어때요?”유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지금 바로 가야 해.”이미 결심한 일에는 머뭇거림이 있을 수 없었다.게다가 승현이 곧 추적해 올 거라는 불안감이 유하의 등허리를 세차게 몰아붙였다.한 번 붙잡히면, 다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그래서 반드시, 바로 떠나야 했다.주성은 유하의 속사정을 알 리 없었지만,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형수님, 진짜 멋있어요!”처음엔 유하가 드림일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도운 거였지만, 지금은 달랐다.주성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이런 결단을 단호하게 내리는 사람은 흔치 않다.게다가 방금까지 큰 충격을 겪었던 여자라면 더더욱.‘대단해...’주성의 마음이 진심으로 움직였다.유하가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제발, 형수님이라 부르지 마.”“알겠습니다!”주성이 크게 대답하곤, 들뜬 얼굴로 방을 박차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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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주성이 사 온 지도책.유하는 다시 한번 지도 위에 빨간 펜으로 표시된 경로를 손으로 짚어 따라가며 눈길을 옮겼다.W시에서 라온시를 거쳐 국도 7번으로 접어들면 광명산 해선사가 그 길 끝에 있었다.총거리는 800km 남짓.유하는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을 해봤다.빠르면 사흘, 여유롭게 잡아도 나흘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지도책을 덮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창 너머로 봄 풍경이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그 순간, 유하의 가슴이 텅 빈 듯 허전해졌다.‘나...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살아온 거지?’언제 마지막으로 순전히 여행자의 마음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기억조차 흐릿했다.늘 쏟아지는 일들에 휘말려 허덕이며 버티기만 했던 지난 세월.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피로가 몰려왔다.막 열이 내린 몸은 여전히 나른했고, 점심식사 후에 먹은 약도 졸음을 부추겼다.정신과 육체, 양쪽 모두의 피곤이 겹쳐지자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이 버거웠다.이내, 유하는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운전석의 주성이 흘깃 옆을 보았다.부드럽게 잠든 얼굴.그는 라디오 채널을 돌려 잔잔한 음악으로 바꿨다.엑셀에서 발을 조금 뗀 주성은 속도를 늦추며, 의외로 조심스러운 태도로 운전을 이어갔다.반쯤 꿈과 현실을 오가는 흐릿한 경계.유하는 또다시 과거의 어느 화면을 마주했다.대학 시절, 첫눈에 본 이후.그날의 ‘첫 설렘’.예상치 못하게, 그러나 피할 수 없이 찾아온 감정이었다.겨우 한 번 마주친 그 청년을 마음에 담아둔 채, 이후 유하는 저도 모르게 그의 흔적을 좇기 시작했다.승현에 대한 소문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오씨 가문의 자제라는 배경, 압도적인 학업 성적, 스포츠 실력까지.그는 대학 안팎에서 눈에 띄는 군계일학 같은 존재였다.더욱 놀라운 건, 그토록 완벽해 보이는 청년에게 단 한 번도 연애 스캔들이 붙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대신, 그를 둘러싼 수많은 여학생이 붙인 별명만 무성했다.‘연애 킬러’, ‘여자 절연체’...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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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노을이 들판 위로 길게 번졌다.검은색 SUV는 교외 고속 구간을 지나며 점점 한적해지는 도로 위를 달렸다.차량 그림자조차 보기 드문 길, 양옆으로는 연초록빛 보리가 바람에 일렁였다. 생기 넘치는 풍경이었다.그때, 유하가 눈을 떴다. 잠에서 막 깬 듯 눈동자가 멍했고, 아직 꿈의 잔향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얼굴이었다.‘왜 이럴까... W시를 나온 뒤로 자꾸 옛일이 떠오르네.’자신은 그토록 잊고 싶었던 과거.그걸 억지로 봉인해 두었건만, 얼마 전 그 서류 더미가 덮쳐오며 모든 걸 흔들어 놓았다.유하는 잊으려고 애쓰지만 잊히지 않고, 되레 하나씩 끄집어내어 머릿속을 뒤흔든다.마치 무언가를 상기시키듯.아니, 강제로라도 제대로 마주하고, 이제 청산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았다.과거를 외면할 수 없었다.이전 일들을 단칼에 끊어내야만 다시 미래를 시작할 수 있었다.“일어나셨어요?”운전석에서 핸들을 잡은 채, 주성이 힐끗 유하를 봤다.유하는 대답이 없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입이 풀렸다.“형수님, 아직 말 안 해줬잖아요. 형수님, 진짜 드림 맞죠?”“형수님 만화, 연재 계속돼요?”“로봇 날개 부러지고 떨어졌잖아요. 그거 죽은 거예요, 아니면 달을 계속 쫓아요?”“제발, 제발 죽이지 말아요. 제발!”“만약 로봇 죽였다간, 저 형수님 SNS 다 뒤집어엎을 거예요. 그동안 참아온 팬들이 칼 배달 하면 제 책임 아니에요!”“...”주성의 쏟아내는 말에 유하는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하아... 얘는 이 입을 언제 다물까?’머리가 아파서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에이, 또 자려고요?”불과 두어 마디 말했을 뿐인데, 유하가 다시 눈을 감자 주성이 버럭했다.‘뭐지? 드림 얘기만 꺼내면 입 닫아버려. 진짜 수상하다니까.’그러다 주성은 문득 며칠 전 화면이 떠올랐다.자신은 창밖에서 몰래 엿보다가 직접 본 화면.유하가 로봇을 집어 던져 승현에게 내리쳤던 그 순간.그때는 주성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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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봄 햇살이 따스하게 번지는 어느 날, 경기장은 여전히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유하가 경기보조원으로서 뒷정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관중석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검은 가방을 발견했다.승현의 것이었다.‘빠뜨리고 간 걸까?’주변을 두리번거려 봐도 승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유하는 가방을 들고 경기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그저 물건을 전해주고 싶었다.그것뿐인데, 마음속 깊은 헛된 바람까지 섞여 있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그때, 머리 위에서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내 가방으로 뭐 하려고?”유하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햇살을 온몸에 받고 선명하게 빛나는 청년이... 바로 위에서 유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승현이었다.눈에 익도록 봐온 얼굴인데도, 유하는 또다시 숨이 막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가슴이 제멋대로 두근거려 똑바로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저, 저는... 선배가 벌써 간 줄 알고, 두고 간 줄 알아서...”변명처럼 서둘러 내뱉던 말은 중간에 뚝 끊겼다.승현의 목소리가 그것을 베어냈다.“혹시 나 좋아해?”시간이 멎은 듯, 공기가 뻣뻣해졌다. 유하는 가슴속 깊이 숨겨 둔 감정이 단번에 올라왔다.그녀는 전신이 얼어붙은 듯 서 있었고, 머릿속은 하얗게 울렸다.승현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갓 운동을 마친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려 햇빛에 반짝였고, 청명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이 유하를 향했다.느리게 걷는 남자는 여유만만한 태도였지만, 시선은 날카롭게 그녀를 꿰뚫었다.“좋아한다고? 얼마나 좋아하는데?”미묘하게 올라간 청년의 말투는 아직은 서툰 미성숙함이 묻어 있었지만, 동시에 불길처럼 달아오르는 묘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유하는 그 순간 알 수 없는 용기에 휩싸였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좋아해요. 많이, 정말 많이.”말이 끝나자, 그녀는 가슴이 거의 터질 듯 뛰었고, 눈앞은 핑 도는 듯 어지러웠다.겨우 난간을 붙잡고 서 있었지만, 유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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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깊은 밤.캄캄한 고속도로 옆, 불빛이 깜빡이는 작은 휴게소 하나가 고립된 듯 서 있었다.넓은 공터엔 이미 여러 대의 차량이 멈춰 있었고, 따뜻한 불빛 아래 사람들의 발걸음이 오가며 그럭저럭 활기를 띠었다.잠시 후, 검은색 SUV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주성이 성급히 문을 열고 내려 휴게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이내 뜨끈한 보온병과 포장된 즉석 음식을 들고 돌아왔다.“형수님, 여기 밥이랑 약이요.”“고마워.”유하는 더 이상 주성의 ‘형수님’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형수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지만, 이 녀석은 대답만 하고, 정작 행동은 말과 다르게 제멋대로였다.결국 그녀는 체념했다.‘뭐 어때. 형수님이라고 부른다고 관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차 안은 조용했다.엔진이 꺼진 공기 속, 플라스틱 포장 뜯는 소리와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흘러나왔다.그런데 유하는 곧 느꼈다. 옆자리에서 주성이 자꾸 곁눈질로 흘끔거리는 것을.몇 번이고 시선을 옮기는 게 느껴져,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왜 자꾸 봐?”‘내 얼굴에 뭐 묻었나?’주성은 들킨 듯 코를 문질렀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물었다.“형수님, 아까 길에서... 악몽 꾼 거 맞죠?”주성은 유하가 깨어났을 때 보였던 공포와 절망이 섞인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순간, 꿈속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유하는 시선을 피하며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굳이 사실대로 다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응. 귀신 꿈꿨나 봐. 무서웠어.”“네?”주성이 두 박자 늦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러다 금세 믿은 듯, 가슴을 탁 치며 호언장담했다.“걱정 마요! 형수님 옆에는 제가 있잖아요. 제 양기가 얼마나 센데. 귀신? 절대 못 오게 막아드림!”유하는 의아하게 옆을 바라보다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역시 주성이는 아직 어리네. 철없고 말 안 통하는 중이병 같아도, 덕분에 숨통이 조금 트인다.’그날 밤, 두 사람은 차를 휴게소 구석에 세워 두고, 시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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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유하는 자신을 잠식해 온 원가족의 고통도, 한때 가슴을 흔들어 놓았던 그 마음도 잊었다.정확히 말하면, 잊을 수밖에 없었다.유하는 언제나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여서라도, 칼같이 잘라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그날 밤 이후, 유하는 농구장 보조원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사직서를 들고 책임자를 찾아갔을 때, 승현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책임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승현은 유하가 들어오자 힐끗 보긴 했지만, 유하를 흘끔 보는 것이 전부였다.유하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마음속에서 수술하듯 도려낸 감정은, 무표정 뒤에 차갑게 굳어 있었다.책임자는 유하의 사직서를 받으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그 시선이 무심히 옆의 승현에게 향하더니, 곧 서둘러 다시 돌아왔다.몇 번 만류했지만, 유하는 학업이 바쁘다는 이유를 댔다. 결국 더 이상 붙잡지 않았고, 그 일은 그렇게 끝이 났다.그 뒤로 유하는 농구장에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승현의 소식 또한 일부러 차단했다.철저하게, 완벽하게, 그 사람을 자신의 세계에서 지워내기 위해.사실 유하는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저 농구장에서 뛰는 승현을 보려는 것이 전부였다.결심이 서자, 이제 더 이상 다른 데에 한눈팔 이유가 없었다.유하는 곧장 학업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미친 듯이 파고들었다.머릿속이 코드와 알고리즘으로만 채워질 때까지,손끝이 무뎌지도록 키보드를 두드리며,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에디터 화면이 떠올랐다.결국 이솔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야, 너 이대로 가다간 진짜 돌겠다. 벌써 성적은 몇 계단이나 올랐고, 장학금도 확정됐으니까 이제 좀 쉬어. 오늘 술 내가 산다.”이솔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하의 노트북을 닫아버렸다.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팔을 잡아끌었다.“잠깐만! 코드 저장도 안 했는데!”“괜찮아, 안 날아가. 따라와!”허겁지겁 끌려 나가던 유하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아마... 이솔이가 아니었으면 나는 정말 무너졌을지도 몰라.’...이솔이 데리고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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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거래...?”술기운에 머리가 얼얼했던 유하는 무심코 되물었다. 그녀는 평소 술에 약한 체질이라 이미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물기 어린 눈동자가 흔들리며 승현의 시야 속으로 스며들었다.승현의 눈빛이 더 깊게 가라앉았다. 목울대가 미묘하게 움직이고, 저음은 한층 더 거칠고 낮아졌다.“그래. 생각해 봤는데, 네가 안정된 관계라야 안심할 수 있다면... 만들어 줄 수 있어. 하지만 연애는 안 돼.”유하는 순간 얼어붙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무심히 말을 이어갔다.“너 돈 필요한 거 알아. 내가 지원해 줄 수 있어. 한 달에 사천만 원. 내가 부르면 바로 와. 대신 바깥에 알리면 안 되고, 끝낼 땐 따로 보상도 해 줄 거야. 손해 볼 거 없잖아?”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승현은 몸을 낮추며 그녀의 입술을 물어 삼켰다.남자의 숨결이 뜨겁게 파고들었다.그리고 승현의 거친 손아귀가 유하의 허리를 휘감아, 마치 삼켜 버릴 듯 세게 끌어안았다.서툴고 무질서한 키스였지만, 욕망에 휩쓸린 힘은 잔인할 만큼 거셌다.유하의 온몸이 떨렸다. 정신이 돌아오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젖히며 안간힘을 다해 밀쳐냈다. 주먹으로 승현의 가슴을 치고, 필사적으로 버둥대며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유하는 겨우 빠져나와 몇 발짝 비틀거리며 물러선 순간,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쓰라렸다.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너...!”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목이 죄여 공기가 막히는 듯했다. 믿을 수 없었다. 방금 그가 입에 담은 말.‘나를, 돈으로 사겠다고?’유하의 주먹이 그의 턱을 스쳤고, 승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손끝으로 붉어진 턱을 문질렀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사천만 원으론 부족해?”승현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육천? ...팔천? 더는 없어. 그 이상이면 필요 없지.”팔천만 원.그건 승현이 자신의 욕망 하나를 위해 지불할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그는 그 금액이면 충분하다고, 그리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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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유하는 옆자리에 앉아 억지로 웃었다.‘권력의 바람’이 얼마나 거세게 사람을 꺾어 놓는지, 그날 처음으로 실감 났다.조금만 비뚤어져도, 바로 무너진다. ‘내가 지켜야 할 게 뭐였더라.’이솔이 분노에 차서 신고하자고 소리치던 순간, 유하의 핸드폰이 울렸다.모르는 번호였다. 유하는 망설임 없이 받자, 반대편에서는 승현의 느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네가 신청한 보조금, 심사는 끝났어. 다만 아직 지급은 안 됐지. 세상일은 늘 가능성이 있는 법이고... 소유하, 내일 밤 이 주소로 와.]호텔 이름과 호실 번호가 전해졌다.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유하가 반드시 올 거라 확신하는 어조였다. 전화는 덜컥 끊겼다.유하는 핸드폰을 쥔 채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이솔의 수다를 끊고 불쑥 물었다.“이솔아, 너희 집안이 오승현네랑 비교하면 어때?”이솔은 잠깐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더니 손으로 위아래를 재빨리 가리켰다.“오씨 가문은 최상위급이야. 우리 집안은 거기서 가장 낮은 칸. 오씨 가문이 항공모함이면 우리 집안은 장난감 비행기. 그 정도?”유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자신이 돈을 받으려면, 승현이 제시한 몫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했다.그 대가는... 자신의 몸이 되었다.유하는 그 밤을 통째로 생각했다.몇 번이나 손가락을 떨며 메시지 화면 앞에 멈춰 섰다.마침내 한 마디를 적어 넣었다.[보조금은 받지 않겠습니다.]보내자마자 차단하고, 번호를 휴지통으로 밀어 넣었다.유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 스스로 해 낼 수 있어. 여름에 알바를 더 해서 버티면 돼.’과거에도 그랬듯, 고된 날들을 견뎌낸 자신을 떠올렸다.몸을 파는 선택은 그녀가 넘을 수 없는 선이자 절벽이었다.한번 발을 들이면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질 것이다.‘나는 그렇게 살 수 없어. 깨끗하게, 정직하게 살아야 해.’결심은 단단했지만, 마음엔 한 줌의 쓰라림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유하는 손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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