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Bab 281 - Bab 290

673 Bab

제281화

새벽까지 유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막 열이 내린 탓도 있었고, 좁디좁은 차량의 좌석이 온몸을 조여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자 근육이 뻐근하게 당기고 머리도 지끈거렸다.반대로 주성은 활기가 넘쳤다.열아홉살 대학생의 체력이란, 정말 화산 분출에 비유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게다가 인생 첫 장거리 자동차 여행이니, 모험심에 부풀어 들뜬 주성은 이른 아침부터 벌떡 일어나 휴게소에서 패스트푸드도 사 오고, 마실 물도 받아왔다.둘은 밥을 챙겨먹고, 약을 먹은 뒤 다시 길을 나섰다.유하는 핸드폰으로 노선을 검색해 시간을 대략 계산했다.오후나 저녁 무렵쯤이면 라온시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거기는 곧장 광명산으로 향하는 국도 7번의 입구였다.이 길은 ‘하늘이 내려준 길’이라 불릴 만큼 거칠고도 아찔하면서, 동시에 자연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길의 끝에는 사찰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고승들이 모여 사는 해선사가 자리한다.그 길을 밟아야만, 비로소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광명산에 들어가기 전, 라온시에서 장비도 준비해야 했다.점심 무렵, 차는 다시 휴게소에 들러 식사를 했다.운전을 계속하면 주성이 피곤해질까 싶어 유하는 자신이 운전하겠다고 제안했다.하지만 주성은 가차 없이 고개를 저었다.“형수님, 어젯밤에 제대로 못 주무신 거 아니세요? 방금도 꾸벅꾸벅 졸던데요. 이 상태로 운전하시다가 차를 도랑에 쳐박으면 우리 둘 다 끝장입니다. 좀 쉬시는 게 나아요.”유하는 밤새 잠을 설쳤다.정확히 말하면, 감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눈만 감으면, 사방이 막혀 숨조차 트이지 않던 그 시절이 꿈속에서 되살아날까 겁이 났다.‘그날 폭우가 쏟아지던 밤에야 알았다.’‘내 과거가 거대한 거짓말로 세워진 성이라는 걸...’‘사방은 높다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나는 그 안에 갇힌 채 허우적대던 죄수였다는 걸...’차는 다시 휴게소를 빠져나와 라온시를 향했다.한낮의 햇살이 앞유리를 뚫고 들어와 조수석에 반쯤 눈을 감은 여자의 얼굴에 스며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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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학부모 중 한 명은 결국 경찰에 신고하기에 이르렀다.하룻밤 사이, 유하는 과외판에서 악명 높은 인물이 되어 버렸다. 누구나 욕을 퍼부었다.한여름의 폭염 속, 유하는 경찰서에 앉아 있었다.“저 안 훔쳤어요, 아이도 안 때렸습니다.”같은 말을 수십 번 되풀이하느라 유하는 목이 타들어 갔고, 입술은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왔다.땡볕 아래인데도, 유하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몸은 자꾸만 떨렸다.결국 증거 불충분.유하가 물건을 훔쳤다거나 아이를 학대한 정황은 없다는 이유로 구속은 면했다.하지만 이미 파장은 심각했다.과외 규정 위반이라는 명목까지 붙어서, 유하가 지금껏 번 돈을 모두 돌려줘야 했고 벌금까지 물어야 했다.학교에서도 전화가 걸려왔다.유하에게는 경고 조치가 내려졌다. 그녀는 앞으로 과외를 절대 하지 말라는 엄중한 통보였다.그렇게 유하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심지어 빚까지 떠안게 됐다.마지막엔 결국 이솔이 달려와, 모자란 벌금을 대신 내 주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시끄러운 거리에서 유하는 무겁게 발을 떼며 걸었다.길가에는 삼삼오오 가족들이 아이 손을 잡고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엄마, 이거 사줘!”“아빠, 저거 타고 싶어!”“...”어른들은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아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며 웃음을 터뜨렸다.그 풍경이, 유하의 눈에는 기괴할 정도로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나... 그냥 없어져버릴까.’그 순간, 얼음처럼 차갑던 손을 누군가 따뜻하게 감싸쥐었다.이솔이었다.무심히 흐르는 인파 속, 유하의 눈물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이었다.“유하야?”숨 막히는 고요 끝에, 유하의 목소리가 떨리며 흘러나왔다.“이솔아, 나... 너무 힘들어.”‘나는 그저 평범하게, 깨끗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내가 바라는 게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힘든 걸까?’이솔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혼잡한 거리 한복판에서, 이솔은 무너져 가는 유하를 힘껏 끌어안았다.“걱정하지 마. 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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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세상에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하늘이 문 하나를 닫으면, 반드시 다른 문 하나가 열린다고.유하는 코앞에서 허술하게 웃고 있는 이솔을 바라보며 생각했다.‘내 인생 문은 이미 꽉 잠겨 버린 것 같아. 그래도 하늘이 날 완전히 버리진 않았구나.’‘내 앞에 창문을 열어 줬네, 그것도 커다란 창, 벽만큼이나 넓은 창문을.’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유하는 이솔의 웃음에 덩달아 어이없게 웃었다....과외를 더 할 수 없게 되자, 유하는 돈 벌 방법이 막막해졌다.빚도 갚아야 했고, 생활비도 필요했다.결국 선택한 건 가장 단순한 서비스업이었다.여름밤마다 북적이는 먹거리 골목, 한 버블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이다.유하는 얼굴은 예쁘고, 말투는 부드러웠으니 손님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대부분은 음료를 사러 온 게 아니라, 유하와 한 마디라도 대화를 나누려는 속셈이었다.전화번호를 달라는 손님도 많았지만, 유하는 번번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포기하지 않았다.유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장사가 잘되면 됐고, 사장도 덩달아 기뻐했다.가끔은 사장이 유하에게 보너스까지 얹어 주었다.그런데, 뜻밖의 손님이 나타났다.태건이었다.예전 주성 옆에 서 있던 그 태건.성인이 된 지 오래지 않은 듯 풋내가 살짝 남아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냉랭한 기운을 풍기는 남자.차가운 공기가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듯, 누구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그가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왁자지껄하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태건을 보는 순간, 유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예전에 승현 곁에서 본 적이 있던 얼굴이었다.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태건은 늘 승현의 말에 따랐다.승현이 있는 자리에 그림자처럼 늘 주변을 지켰고, 그래서인지 존재감이 상당했다.‘설마, 오승현의 지시로 온 건가?’유하는 속으로 마음을 졸였다.하지만 태건은 그저 카운터 앞에 서서 담담하게 주문을 내뱉었다.“여기 있는 버블티 종류 전부. 종류별로 각각 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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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그건 못 얻어서 더 들이대는 거야.”이솔은 단호하게 말했다.“네 얘기 속 남자 말이야, 여자가 안 받아 주니까 더 집착하는 거야. 좋아해서라기보다, 거절당했다는 수치심 때문에 포기 못 하는 거지. 사람 심리가 그래. 못 가지면 더 원하고, 결국 손에 넣으면... 오래 못 가.”그렇다면, 승현이 더는 유하를 괴롭히지 않으려면... 차라리 ‘얻게’ 해 줘야 한다는 뜻일까?‘말도 안 돼. 왜 그래야 해?’유하는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승현 같은 사람은 뭘 보든 가져야 직성이 풀리고, 안 되면 끝까지 옥죄는 사람이었다.손에 넣고 나면 쉽게 버려 버리고, 정작 본인은 잃는 것도 없는... 사물 다루듯 여자를 대하는 심리.‘이대로라면 미쳐 버릴 거야.’유하는 밤새 뒤척이며 생각했다.그리고 결국 결심했다.승현과 직접 얘기해야 한다.타협이든 뭐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학교 근처, 식당 구석 자리.“생각 다 했어?”승현은 딱딱한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마치 귀찮다는 듯 눈을 흘겼다.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유하의 눈빛은 불타고 있었다.유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또박또박 말했다.“나 안 팔아. 난 사람이야.”그 순간, 유하의 눈은 한여름 햇살처럼 맑고 강렬했다. 얼굴의 아름다움조차 잠시 가려 버릴 만큼, 영혼 깊숙이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눈부셨다.먼지 덮인 진주처럼, 숨길 수 없는 빛이었다.유하는 밤새 생각한 방도를 말했다.계약 연애.기간을 정해 두고, 그 시간 동안은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로 지내는 것.공개할 필요는 없지만, 선은 넘지 않는다.그리고 승현은 더 이상 유하의 일에 간섭하지 못한다.유하는 여자친구의 자격으로 잠시 옆에 있어 주는 것뿐.시간이 지나면, 승현은 분명 유하에게 질릴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잘난 여자들이 주위를 맴도니, 굳이 유하일 필요는 없었다.유하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승현은 그저 순간적인 흥미일 뿐.승현은 가만히 그녀의 눈빛을 들여다보았다.찬란하고 단단한 빛이 어찌나 선명한지,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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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라온시.깊은 밤, 차창 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도시는 소문처럼 뜨겁게 요동치고 있었다.여기에 오면 꼭 맛봐야 하는 음식은 바로 삼겹살과 김치찌개였다.특히 주성처럼 모험을 즐기는 타입은 미리 길에서 맛집 후기를 꼼꼼히 찾아보고, 라온시에 도착하자마자 휴식도 잊은 채 예약해 둔 고깃집부터 향했다.유하는 마음속으로 여러 번 주성의 활력에 감탄하곤 했다.정말이지 끝도 없이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유하는 좀 피곤했지만, 주성의 신이 난 모습을 보고 굳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나물이나 두부김치 같은 안줏거리를 몇 가지 시키자, 주성이 혀를 차며 웃었다.“형수님, 혹시 토끼예요? 풀만 드시네. 당근도 시켜 드려요?”유하는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 아이 앞에서는 대부분 무력해진다.“토끼도 고기는 먹어. 잡식성이거든.”“어, 그래요?”주성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금세 잊은 듯 다시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시끌벅적하게 주문을 외쳤다.곧 삼겹살이 불판 위에 올려졌다.둘은 입맛이 달라서, 주성은 양념갈비까지 추가해 굽기 시작했고, 유하는 담백한 냉면을 따로 시켰다.연기가 자욱해지고, 룸 직원이 나간 뒤에야 유하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차에서 내릴 때면 언제나 완전무장을 하고 다녔다.누구에게도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할 수 있는 만큼 조심해야 했다.이렇게 떠나왔지만 다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두려웠다.불판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시원한 냉면 한 젓가락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빗소리와 어울려 큰 위안이 되었다.피로가 씻겨 내려가듯, 온몸이 따뜻해졌다.곁에서는 주성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먹는 동안에도 그는 내내 특유의 자신감이 넘쳤다.핸드폰을 들이밀며 미리 찾아둔 맛집과 장비 목록을 보여주느라 잠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하지만 이상하게도,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 같은 주성의 소란스러움이 오히려 이 순간 유하에게는 묘한 안정을 주었다.뜻밖의 따스함이었다.식사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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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물론 예외도 있었다.승현의 아버지, 오광진.그는 아내에게 놀라울 만큼 다정했고, 그 지극한 정성은 유하가 봐도 놀라울 지경이었다.오씨 집안에서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그래도 승현에 비하면 주성이 훨씬 나았다.주성은 그냥 전형적인 ‘착한 남자애’였다. 다만 호기심이 많고, 남의 얘기에 관심을 조금 과하게 두는 오지랖퍼일 뿐.하지만 유하와 승현 사이의 일은... 주성한테 털어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쟤한테 얘기했다간, 하루도 안 돼서 집안 어른들까지 다 알겠지.’유하는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어른들 일은 애들은 몰라도 돼.”툭 내뱉은 농담이었는데, 주성은 금세 발끈했다.“형수님! 제가 뭐 애라서 그렇다고요?”투덜거림과 실랑이 끝에, 저녁 식사는 간신히 마무리됐다.두 사람은 예약해 둔 민박집으로 향했다.오늘은 차에서 자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씻고 나와 이부자리에 몸을 누이자, 유하의 의식은 이내 가라앉았다.‘오늘은... 그냥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깊은 피로가 밀려오고, 곧 꿈속으로 빠져들었다....고리대학교 체육관.경기가 끝난 직후, 남자 탈의실은 떠들썩했다.상의를 벗은 채 근육질 몸매를 드러낸 열댓 명의 선수들이 서로 밀치며 장난을 치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처음엔 오늘 저녁 뭐 먹을까 하는 이야기였지만, 곧 분위기는 삐딱하게 흘러갔다.입에 담기 힘든 농담들이 오가며, 온통 침대 위 얘기뿐이었다.그중 한 명이 라커 앞에 서 있는 승현에게 소리쳤다.“야, 승현! 너는 왜 옷도 안 갈아입고 멍하니 있냐? 오늘 밤 술 마시러 가자고!”승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오늘은 안 간다.”“뭐야, 너 요즘 왜 그래? 훈련 끝나자마자 바로 사라지고, 우리랑도 안 놀고. 설마... 여자친구 생긴 거 아니야? 진짜지? 언제 생겼는데? 왜 우리한테 소개도 안 해 주냐, 너무하네!”“야, 우리 승현이 눈에 찬다? 그럼 진짜 여신급이라는 건데?”“...”우르르 장난스레 떠드는 목소리가 이어졌다.승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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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변태...!’넥타이 아래에서 유하의 눈동자가 확 좁혀졌다.그녀가 몸을 뻗어 벗어나려는 순간, 등 뒤로 쿵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승현이 거칠게 밀어붙여 라커 벽에 부딪힌 것이다.유하가 숨이 막히기 전에 뜨거운 기운이 덮쳐 왔다.승현은 마치 삼켜 버릴 듯 가까이 파고들었다.유하는 본능적으로 버텼지만, 점점 몸이 굳어 갔다.유하의 옷자락이 거칠게 들려 올려졌다. 승현의 거친 손길이 옷깃 안쪽을 헤집으며 머물렀다. 짓누르듯 스며드는 감각에 유하의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했고, 숨결은 점점 가빠졌다.‘안 돼... 이러면 안 돼...’남자의 손길이 점점 아래로 향하는 걸 느끼는 순간, 유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격하게 몸을 비트며 저항하자 눈을 가리고 있던 넥타이가 툭 하고 풀려 떨어졌다. 유하의 시야가 터져 나오자, 그곳에서 보인 건...승현의 어깨 너머, 얼음처럼 굳은 얼굴로 서 있는 태건이었다. 얼마나 오래 지켜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다른 사람이... 있었다니!’유하의 머릿속은 하얗게 타들어 갔다. 온몸을 휘감은 공포와 당혹에 필사적으로 승현을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의 압박은 더 강해졌다. 숨조차 뺏긴 채 입술이 억지로 겹쳐오자, 유하는 마지막 힘을 짜내듯 이로 세게 물어버렸다.“뭐 하는 거야!” 그리고 안간힘을 다해 승현을 밀쳐냈다.“미쳤어?! 사람 있잖아!”승현은 두 걸음 물러나며, 차갑게 눈을 내리깔았다. 입술에 붉은 자국이 선명히 남았다.거친 숨을 몰아쉬던 유하는 떨리는 손으로 태건을 가리켰다.“방금 봤잖아... 네 뒤에 사람이 있었어.”승현은 태건을 힐끗 돌아봤다. 그러곤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래서?”승현의 말투는 너무도 태연했다.유하는 믿기지 않는 듯 소리쳤다.“너... 이 사람이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었어?”승현의 눈에 스쳐 간 건 오히려 조롱이었다.“그게 뭐 어때서.”그리고는 태건을 가리키며 냉정하게 내뱉었다.“저건 그냥 개야. 신경 쓸 필요 없지. 무시해.”유하는 숨이 막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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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유하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더 이상 뒤로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승현이 몸을 숙여 내려오자, 놀라 반쯤 벌어진 유하의 입술이 거칠게 막혔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강렬한 키스에 숨이 막히듯 휘둘렸다.유하의 등 뒤에서는 낯선 남자의 숨결이 닿았다.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등을 타고 전해져 왔지만, 그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유하의 앞에는 성을 공격하듯 몰아붙이는, 분노와 집착으로 가득한 ‘남자친구’가 있었다.유하의 머릿속에서 어딘가에서 팽팽히 버티던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겨 나갔다. 남은 건 타오르는 수치심뿐이었다.‘이건... 모욕이야.’유하는 숨 가쁘게 승현을 밀어내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담아 손바닥을 높이 휘둘렀다. 그러나 그 순간, 손은 허공에서 멈춰 섰다.태건이 그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세게 쥔 것도 아닌데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손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그마저 금세 제압당했다.유하는 순식간에 태건의 품 안에 갇혀 버렸다.승현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눈길에는 노골적인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러니까 말했잖아. 개라니까. 주인 말밖에 안 들어.”그 시선은 차갑고 잔인했다.‘주인을 지키는 칼은 연민 따위 갖지 않는구나.’그 말이 굳이 이어지지 않아도, 이미 공기 속에 뚜렷이 스며들어 있었다.유하는 승현의 품에 눌린 채 거칠게 입술을 빼앗겼다. 옷깃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끝내 흘러내렸다.물에 씻긴 듯 맑던 눈동자는 더 이상 빛을 잃고, 잿빛의 무력감만이 가득 번졌다.‘미쳐 버릴 것 같아... 이제 정말...’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흐트러진 단발머리가 흘러내린 승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흐릿하게 얽혀 있었고, 선명한 이목구비 위로는 알 수 없는 체념 같은 기색이 스쳤다.“왜 또 울어?”‘그래, 왜 이럴까...’‘왜 너만 만나면 이렇게 무너져 버리는 걸까... 왜 이렇게 아픈 걸까...’유하의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더 거세게 쏟아졌다.승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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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조금만, 금방 나가.”샤워를 마친 유하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대충 대답했다.밖에서 주성이 계속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자, 손놀림을 재촉하며 빠르게 움직였다.서비스 에어리어에서 급히 산 분홍·검정 배색의 경량 재킷으로 갈아입고, 젖은 머리카락만 수건으로 훑어내듯 닦은 뒤 문을 열었다.“가자.”문 앞에서 기다리던 주성이 눈을 크게 떴다.“머리가 왜 젖어 있어요?”“괜찮아. 일단 가서 장비부터 사자.”“안 됩니다. 밖에 아직 비 오고 있어요. 형수님 감기 막 나았고, 곧 광명산으로 들어가야 하잖아요. 거기 길은 여기보다 훨씬 험해요. 또 아프시면 어떡해요?”결국 주성의 완강한 태도에, 유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완전무장 하고 나니 겨우 함께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두 사람은 여행 정보를 미리 찾아보고, 등산·캠핑 전문 카페에서 유료 상담까지 받아 정리해 둔 체크리스트를 꺼내 들었다.라온시 근처에서 가장 큰 아웃도어 매장으로 곧장 향했다.목록에는 텐트, 침낭, 자외선 차단 선글라스, 구급약 세트, 트레킹 폴 같은 기본 장비들이 있었다.거기에 더해 간단한 식량, 물티슈 같은 생필품, 보조 배터리, 나침반도 필수였다.차량용 공구, 두꺼운 바람막이와 등산화, 모자까지 꼼꼼히 챙겼다.광명산은 해발 고도가 높고 날씨 변화가 심한 산이었다.체력 소모가 크다는 이야기에 대비해, 에너지 젤과 핫팩도 몇 개 넣었다.‘혹시 몰라서.’그 말이 습관처럼 따라붙었지만, 결국 안전을 위한 철저한 준비였다.준비를 마친 뒤, 라온시에서 간단히 마지막 식사를 했다.SUV 차량 상태를 점검하고,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했다.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오프라인 지도까지 다운로드했다....오후, 드디어 출발.넓은 국도를 따라 검은색 SUV가 힘차게 엔진음을 내며 나아갔다.운전석에 앉은 주성은 블랙 아웃도어 재킷 차림.옆자리의 유하도 같은 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주성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형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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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하지만 유하는 이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그리고 마음속 깊이 새겨 넣었다.차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협곡은 가팔랐고, 그 위로는 구름이 낮게 걸려 있었다.차는 빽빽한 숲 사이를 가르며 달렸다.유하 눈에 들어온 건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숲속 새와 벌레 소리와 어우러져 작은 교향곡처럼 들렸다.주성은 창밖을 찍고 있는 유하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형수님, 풍경만 찍지 마시고 제 모습도 찍어 주세요. 이번에 끝나면 인화해서 방 한쪽 벽에 붙여 둘 겁니다.”이번 여정은 주성 인생에서 첫 모험이었다.누가 집에 놀러 오면 자랑스럽게 보여 주고 싶었다.아버지도 칭찬해 줄 거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처음에 유하는 주성에게 대꾸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그러다 주성이 잠잠해지자, 갑자기 카메라를 돌려 연속으로 셔터를 눌렀다.주성은 곧바로 비명을 질렀다.“형수님! 왜 미리 말씀 안 하셨어요? 제가 제일 멋진 표정을 준비할 때까지 기다렸어야죠! 빨리 다시 찍어 주세요!”‘폼 잡을 만큼 잡아 놓고선.’유하는 웃음을 삼키며 일부러 대꾸하지 않았다. 표정에는 조금 여유가 떠올랐다.비 내리던 해안 마을을 지나온 길은 생각보다 단순했다.SUV는 곧 좁은 협곡을 뚫고 나와 다음 목적지인 강라시에 닿았다.국도 7번의 요충지라 불리는 곳이었다.오후 늦게 출발한 탓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가랑비가 흩날리고 있었다.피곤한 몸으로 더 달리는 건 무리였다.밤길 운전은 위험하기까지 했다.강라시는 예로부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두 사람은 더 고르지 않고, 눈에 들어온 여관으로 발길을 옮겼다.간단히 씻고 자리에 눕자,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유하는 금세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고리대학교, 연구소.넓은 공간은 칸막이로 나뉘어 있었고, 안쪽에는 커다란 모니터와 컴퓨터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지금 이곳에는 단 한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유하는 구석 칸막이에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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