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371 - 챕터 380

464 챕터

제371화

유하는 따라오겠다는 이솔을 말릴 구실이 딱히 없었다.이솔이 필사적으로 따라가겠다고 나서자, 유하는 곧장 재윤의 외삼촌 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며, 이번에 해외로 나가는 건 위험하니 재윤을 데리고 갈 수 없겠다고 단호히 말했다.당장 와서 아이를 데려가 달라고 남진에게 이야기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남진은 밤길을 달려왔다. 손에는 재윤에 관련된 각종 서류가 들려 있었다.그는 유하를 보자마자 짧게 말했다.“괜찮아요. 데리고 가세요.”“제 어머니, 그러니까 재윤이 외할머니께서 해외에 계십니다. D국에 계시지만 제가 미리 말씀드렸어요. 어머니께서 사람을 붙여서 아이를 잘 돌보실 겁니다.”유하가 다시 고개를 저으려 하자, 남진이 덧붙였다.“그리고... 소유하 씨 일이 아니었어도, 조만간 재윤이를 해외로 보낼 생각이었어요.”유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남진은 머쓱하게 코를 긁으며 말했다.“누나, 그러니까 재윤이 엄마가 곧 출소해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요.”‘그래서... 그랬구나.’유하는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이번에 돌아왔을 때 남진이 왜 그렇게 재윤을 유하에게 맡기려 했는지, 왜 서둘러 해외 이야기를 꺼냈는지, 심지어 유하에게 아이를 입양하라는 말까지 꺼냈는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그 사람... 그 악명 높다는 ‘용감한 아내’가 곧 출소하는구나.’남편을 살해하고도 법정에서 뻔뻔하게 웃던 그 여자.유하가 잠시 침묵하자, 남진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소유하 씨가 재윤이를 입양하길 바란 건 진심이에요. 아이도 소유하 씨를 정말 좋아하고...”유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럼... 외할머님 쪽에 사람을 더 붙여달라고 말해주세요. 우리가 도착하면 곧바로 재윤이를 맡기죠.”지금 유하의 주변은 너무 혼란스러웠다.‘배남진 이 사람도 참... 대담한 건지, 아니면 너무 날 믿는 건지...’어쨌든, 일은 그렇게 결정되었다....얼마 후, 청산 쪽에서 연락이 왔다.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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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2화

원이정은 병원에 있었다.소성란의 건강 상태가 급박해, 유하를 만나러 움직일 수 없었다.“고모할머니는... 어떠세요?”유하는 제일 먼저 소성란의 상태를 물었다.평소보다 목소리가 한층 낮고 조심스러웠다.화면 너머에서 원이정이 답했다.[수술은 무사히 끝났어요. 다만 아직 의식이 없고, 상태가 불안정해요. 의사 말로는... 깨어나기만 하면 괜찮으실 거라고 합니다.]“언제쯤 깨어나실까요?”유하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원이정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확실치 않아요. 며칠일 수도 있고, 보름이나 한 달이 될 수도 있어요. ...아니면 더 걸릴 수도 있다고 하네요. 지금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요.]‘며칠, 보름, 한 달... 어쩌면 더...’유하는 막 놓았던 마음을 다시 꽉 움켜쥐는 기분이었고, 손끝이 저릿했다.그 옆에서 이솔이 유하의 손을 잡았다.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야, 걱정 마. 고모할머니가 어떤 분이야? 그분은 진짜 강철이야. 웬만한 일로 안 쓰러져. 수술도 잘 됐다며? 그럼 분명 괜찮으실 거야.”유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응, 고마워.”그때, 졸린 눈으로 꾸벅꾸벅하던 재윤이 고개를 들었다.“엄마, 고모할머니 아프셔?”“응.”유하는 조심스레 대답했다.“조금 아프셔. 근데 곧 괜찮아지실 거야.”재윤은 유하의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엄마, 슬퍼하지 마. 내가 엄마 옆에 있을게.”그러더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작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중얼거렸다.“하나님, 고모할머니 건강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엄마는 계속 행복하게 해 주세요.”‘이 아이는...’유하는 웃음을 터뜨릴 뻔하다가, 눈가가 살짝 시큰해졌다.이솔이 재윤을 껴안으며 웃었다.“야, 누가 그런 거 가르쳐줬어? 벌써 하나님께 기도드릴 줄도 아네?”“외삼촌이요.”재윤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외삼촌이 그러셨어요. 그렇게 기도하면 진짜 이루어진다고. 매번 나를 못 찾을 때마다 그렇게 기도하면 꼭 나를 찾을 수 있었대요.”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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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3화

“고모할머니... 제발, 이제 일어나셔서 저 좀 보세요...”“...”비록 유하도 고모할머니가 아무런 대답도 없을 거고, 의식이 없다는 걸... 유하는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멈출 수 없었다.그 말이 마치 주문처럼 입에서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고모할머니... 제발요...”유하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며 숨이 막히듯 끊기고 이어졌다.‘이렇게 조용한 우리 고모할머니가 아니잖아요...’‘항상 제 앞에서 당당하고, 강인하셨잖아요...’‘왜 이렇게 가만히 누워만 있어요...’다리가 풀려 버린 유하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유하는 차가운 방호복 너머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소성란의 깊게 주름진, 세월이 고스란히 새겨진 손을 살며시 감쌌다.하지만 방호복이 두 사람 사이를 단단히 가로막고 있었다.익숙했던 피부의 온기, 그 미묘한 촉감은 느껴지지 않았다.닿는 건 오직 낯설고 차가운 방호복 한 겹뿐이었다.그 순간, 유하는 무너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숨죽인 울음이 터져 나왔다.이와 동시에 어깨가 작게 떨리고, 호흡이 엉켜 들이쉬는 숨마다 목이 탔다.그리고 가슴이 쿵쿵거려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밖에서 지켜보던 의사가 급히 방호복을 입고 들어왔다.그는 유하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유하의 방호복을 벗기며 짧게 지시했다.“일단 숨부터 고르세요. 천천히. 그대로... 네, 그렇게요.”몇 번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한 끝에야 유하는 겨우 안정을 찾았다.“지금은 좀 괜찮아요?”단정하게 묶은 포니테일, 깔끔한 정장 차림의 여자가 물었다.원이정이었다.유하는 원이정이 건넨 물병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제 괜찮아요.”목소리는 여전히 거칠었다.잠시 숨을 고른 유하는 자신을 다잡듯 말을 이어갔다.“그냥... 순간적으로 감정이 좀...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앞으로는 안 그럴 거예요.”“알겠어요.”이정은 병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저도 회장님을 오래 모셨거든요. 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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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4화

“분명 경호에 빈틈이 없을 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우리가 여기 도착한 지 고작 하루예요, 하루! 그런데 유하가 사라졌다고요?”“그것도 원 비서님이 그렇게 강조하던 ‘경비가 철통같은 병원 최상층’ 에서요? 지금 와서 모르겠다고 하시면, 그게 말이 돼요?!”병원 최상층의 복도는 새벽부터 소란스러웠다.이솔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분노와 불안이 뒤섞인 그 눈빛이 원이정을 향했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겨우 첫날인데.’이솔은 재윤을 회장님의 저택에 맡겨 두고 병원으로 달려왔다.전화로 ‘유하 씨가 사라졌다’라는 말을 들은 순간, 이솔의 머릿속이 하얘졌다.‘첫날이야! 겨우 도착한 첫날 밤인데, 누가, 어떻게 이런 짓을...’그것도 이정이 자신 있게 말하던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라니.스무 층이 넘는 건물의 꼭대기 층이다.‘설마 창문으로 타고 올라와 사람을 데려갔다는 거야?’‘스파이더맨이라도 된다는 거야?’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이솔의 시선이 매섭게 이정을 꿰뚫었다.‘아니... 설마 이쪽이 짜고 치는 건 아니겠지?’불신이 고개를 들었다.이정은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짧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이솔 씨, 저도 어젯밤 확인했어요. 병원 전체의 CCTV가 동시에 먹통이 됐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우연일 리 없어요. 분명 준비된 움직임입니다.”이 설명은 단단했지만, 피로가 묻어 있었다.“이미 인원을 전부 투입해서 찾고 있습니다. 교통 당국에도 협조를 요청했어요. 병원 주변 도로와 근처 건물의 외부 카메라 영상까지 전부 확보 중입니다.”하지만 이정의 얼굴엔 여전히 의심과 분노가 남아 있었다.“한가지 이해 안 가는 게 있어요.”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낮게 말했다.“전 처음엔 그쪽의 목표가 회장님인 줄 알았어요. 원한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찾아온 줄 알았죠.”“그래서 병실 쪽을 계속 지켜봤어요. 근데 결국 사라진 건 유하 씨예요. 그쪽의 말대로라면, 목표는 애초에 회장님이 아니라 유하 씨였단 얘기네요?”“유하 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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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5화

“어제 이미 말씀드렸잖아요!”이솔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이번 일은 유하 때문이라고요.”이정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하지만 이솔 씨도 말씀하셨잖아요. 유하 씨는 여기서 원한을 살 만한 사람도 없다고. 그렇다면 저는 여전히... 하연우가 이런 일을 꾸밀 능력은 없다고 봅니다.”“그럼 원 비서님은 뭐라고 생각하세요?”이솔은 억눌린 한숨을 토해냈다.‘이 얘기만 벌써 몇 번째야... 같은 자리에서 계속 맴도는 느낌이야.’원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솔 씨, 하연우가 해외 쪽에서 무슨 원한을 샀을 가능성은요?”“없어요.”이솔은 단호했다.“확실합니다.”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피로감이 몰려왔다.서로의 말을 반복하며 평행선을 달릴 뿐, 실마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결국은 밖으로 나간 사람들의 보고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도대체 언제쯤 소식이 올까... 이러다 시간만 흘러가겠네.’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이솔은 짧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돌렸다.“전 이만...”그때, 이솔 뒤에서 이정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그럼... 오씨 가문은요?”이솔의 발걸음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뭐라고요?”이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했다.“오씨 가문이요.”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이마를 짚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유하 씨가 해외에서 원한을 살 리는 없고, 상대가 회장님을 노린 것도 아니라면... 남는 건, 유하 씨와 밀접하게 얽힌 쪽뿐이에요. 그게 바로 오씨 가문이죠.”“유하 씨는 어디까지나 오승현 대표의 아내잖아요. 혹시 상대가 오씨 가문을 겨냥한 게 아닐까요?”이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정은 말을 이어갔다.“오씨 가문은 해외에서 석유, 광산, 군수 관련 산업까지 손을 대고 있죠. 일부는 무기상들과의 거래도 있습니다.”“그만큼 경쟁자도, 원수도 많아요. 만약 누군가 그 관계를 알고 있다면... 유하 씨를 노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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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6화

‘유하는 오씨 가문이랑 엮인 뒤로 살면서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어.’이솔은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만약 유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오씨 가문도, 오승현도, 하연우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래도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는 범위는 확실히 좁혀졌네요.”이정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내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어 담당자에게 지시를 내렸다.새롭게 설정된 수색 구역과 인원 배치, 경호 인원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정확했다....국내, W시.“전용기 준비해. 바로 출국할 거야.”승현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낮게 말하면서 표정은 짙게 그늘져 있었고,서류를 정리하던 태건은 눈치를 챈 듯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무거운 공기가 사무실을 짓눌렀다.통화 내용을 들은 태건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네, 알겠습니다.”그저 짧게 남기고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문이 닫히자, 승현은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이번엔 오광진에게였다.“아버지, 잠시 해외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회사 일은... 아버지가 당분간 맡아주세요.”[무슨 일이지?]전화기 너머로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승현은 짧게 숨을 삼켰다.“준서 엄마가... 해외에 나갔습니다.”잠시, 수화기 너머로 의자 끄는 소리와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잠깐의 정적 끝에 오광진의 눌러 담은 목소리가 이어졌다.[어떻게 된 거냐? 누가 데리고 나간 거야? 왜 막지 못했어?]“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승현은 고개를 숙였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낮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지금... 준서 엄마가 실종됐습니다. 아버지, 만약 그 사람이... 그 사람까지 건드렸다면...”처음이었다.언제나 완벽히 통제하던 승현의 목소리가 흔들린 건.[그럴 리 없다.]오광진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내려왔다.[넌 잘 알잖아. 그놈의 목적은 유하가 아니라, 우리 집안이야. 그리고...]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놈이 목표를 이루기 전까진, 유하는 절대 죽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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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7화

“으...”어두운 붉은색 침대시트가 드리워진 원형 침대 위, 검은 실크 이불 속에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새하얀 실크 슬립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눈꺼풀이 몇 번 가볍게 떨리더니, 낮은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길게 뜬 눈매에 잠시 혼란이 스쳤다.막 깨어난 유하는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여긴... 어디지?’주위를 둘러보려 했지만, 낯선 공기와 묘한 향기가 머릿속을 더 흐리게 만들었다.잠시 침대 위에서 멍하니 있다가, 유하는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병실이 아니야. 누가... 나를 습격했었지.’그녀는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급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주위를 살폈지만, 보이는 건 바닥까지 늘어진 어두운 붉은색의 시트가 전부였다. 밖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모할머니의 원수들이 날 잡아온 건가?’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내가 이렇게 쉽게 잡힐 리가 없는데...’‘분명 경계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그리고 또 다른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고모할머니는 괜찮으신가? 그 사람들이 혹시...’유하에게는 불안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상황이 불분명한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유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로 다가가더니, 손끝으로 커튼 한쪽을 살짝 들었다.틈 사이로 보인 건, 어둑한 노란 조명이 비추는 화려한 방이었다. 서양식으로 치장된 벽면에는 가시 돋친 검은 장미들이 뒤엉켜 그려져 있었고, 그 호사스러움 속엔 묘하게 불길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유하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살그머니 캐노피 밖으로 나왔다. 맨발로 밟은 카펫 역시 검은 장미 무늬가 수 놓인 부드러운 촉감이었다.‘이게 뭐지...? 정말 납치라면 이렇게 고급스럽게 대접할 리가 없는데...’혼란스러운 생각이 유하의 머릿속을 뒤엉켰다.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유하는 창가로 다가가 두꺼운 검은 커튼을 확 젖혔다.순간, 눈부신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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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8화

유하는 눈으로 벽에 걸린 초상화들을 찬찬히 훑었다.금빛 갈색 곱슬머리에 초록빛 눈동자를 한 사람들.시대마다 복식은 달랐지만, 얼굴선이 어딘가 닮아 있었다.‘이건... 한 가문의 사람들인가 봐.’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게다가 꽤 오래된 집안이야.’‘수백 년, 어쩌면 천 년 가까이 이어진 명문가일지도 모르지.’‘이런 규모의 고성이라면 혈통과 전통을 엄청 중시하는 가문일 가능성이 커.’평소 서양사에 관심이 많은 유하는 자연스레 머릿속으로 추리를 이어갔다.‘이 정도면 유럽의 대귀족 가문일지도 몰라.’‘그런데 피부색이나 눈동자 색을 보면 Y국 쪽은 아닌데...’‘북유럽? 아니면 서유럽일 가능성도 있겠네.’그렇게 생각하며 복도의 끝까지 걸어간 순간, 유하는 발걸음을 멈췄다.마지막에 걸린 초상화가 이전 것들과 전혀 달랐다.그림 속에는 긴 흑발을 늘어뜨린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눈, 코, 입... 그 어떤 윤곽선도 없었다. 그저 흐릿한 붓자국만이 여자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었다.옷차림과 화풍을 보아 오래된 그림은 아니었다.‘왜 얼굴이 없지?’유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이 사람은 누구야?’‘온통 금갈색 머리의 초상화들 사이에 혼자만 이렇게 다른데...’‘게다가 제일 눈에 띄는 자리에 걸려 있다니.’그림을 바라보던 유하는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 여자가 묘하게 낯익었다.‘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이상해... 오히려 따뜻하다고 해야 하나? 이상하게... 친근해...’유하는 무의식중에 그림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뒤쪽에서 낮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목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였다.순간, 유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뭐지?’그녀는 숨을 멈춘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점점 가까워지는 거친 숨결, 바닥을 스치는 발톱 소리.유하는 고개를 아주 조금만 돌려 옆을 훑었다.그때 시야 한켠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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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9화

가정부는 유하를 쓱 보면서, 아무 말 없이 돌아서 걸어갔다.“뭐야?”유하의 입이 떡 벌어졌다.‘아니, 납했으면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지!’‘이대로 늑대한테 물려 죽으면 누가 책임질 건데?’황당함이 분노로 바뀌었다.그런데 유하는 이상했다. 늑대는 여전히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달려들지 않았다.‘뭐지... 이놈, 설마 사람은 안 먹는 늑대야?’‘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죽을 거면 움직여나 보자.’유하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움직였다.하지만 한 발짝 내딛자마자, 이빨이 종아리를 꽉 물었다. 피부는 간신히 뚫리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더 움직였으면 바로 다리를 물어뜯었을 것이다.‘지금은 피가 안 나서 그렇지, 한 번이라도 피 냄새 맡으면 끝장이야.’유하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늑대와 대치한 채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시간이 마냥 흘러갔다.길게 이어진 회랑에는 수십 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그 한가운데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유하가 서 있었다.황금빛 눈을 번뜩이는 늑대 한 마리가 유하의 주위를 맴돌았다.부드럽게 빛나는 털과 냉혹한 눈빛, 그리고 여인의 하얀 다리.한 폭의 기이한 그림 같았다.아름답고도 잔혹한, 야수와 여인의 정물화.늑대는 종종 유하의 종아리를 콱 물었다가 다시 놓았다.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다리는 이미 온통 늑대의 침으로 젖어 있었다.유하는 점점 다리에 감각이 없어져 갔다.시간이 좀 지난 후, 복도의 불빛이 어두워지고, 벽에 걸린 촛불이 하나둘 켜졌다.그동안 여러 명의 가정부와 고용인들이 유유히 지나갔지만, 그 누구도 유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늑대 역시 그들을 무시한 채, 오직 유하만을 노려보고 있었다.‘뭐야, 내가 늑대를 위한 특별식이라도 되는 거야?’‘아니면 내가 제일 잘 맛있어 보이나?’지쳐버린 유하가 결국 입을 열었다.“너, 대체 날 물 거야 말 거야?”늑대의 귀가 살짝 움직였다.유하는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안 잡아먹을 거면 나 간다? 나 이제 진짜 못 서 있겠어.”하얀 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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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0화

‘물러서라고?’유하는 1층 계단 위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아래층에 선 금발의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짧은 정적이 흐른 뒤, 유하는 용기를 내 영어로 말을 걸었다.“Wait, I just...”탕!총성이 대답 대신 돌아왔다.유하 옆에 있던 나무 난간이 총탄에 산산이 부서지며 파편이 얼굴과 팔에 튀었다.뜨겁고 날카로운 조각이 피부를 스쳤다.‘미친... 진짜 쏘는 거야?’유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지만, 그 순간 다리에 부드럽고 따뜻한 털이 스쳤다.뒤에는 늑대가 서 있었다.늑대의 숨결이 다리를 타고 올라오자, 유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앞에는 총, 뒤에는 늑대.그 어떤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없었다.남자는 다시 총구를 들었다. 이번엔 유하의 머리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총을 든 남자의 눈빛이 차갑게 깔렸다.이 행동은 이미 경고이자 명령이었다‘뒤로 가라... 명령이네.’유하는 숨을 삼키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한 걸음, 두 걸음...그러자마자 늑대의 단단한 몸에 다시 부딪혔다.늑대는 묵직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유하는 감히 더 뒤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그때, 아래층에서 가볍고 짧은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아주 느긋하고 여유로운 음이었다.늑대가 움직였다.잠시 유하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유하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홀 안으로 돌렸다.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눈을 채 맞추기도 전에...탕!또 한 번의 총성이 터졌다.이번엔 스커트 끝자락이 뜯겨나갔다.뜨거운 탄환의 열기가 다리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경고야. 더 보지도 말라는 거네.’유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계단을 올라갔다.뒤에서 늑대의 발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따라왔다.방에 들어서자, 늑대도 자연스럽게 함께 들어왔다.문을 닫을 틈도 없었다.유하는 문 쪽을 흘끗 쳐다보다가 결국 손을 내렸다.‘괜히 문 닫았다가 짖기라도 하면 끝이지.’그녀는 소파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두 팔로 무릎을 감싸 쥔 채, 정면에 있는 늑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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