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351 - 챕터 360

464 챕터

제351화

“죄송해요.”유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숨을 삼키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내가... 미안해. 그때 내가 좀 더 강했으면 달랐을 텐데...”청산이 단호하게 잘랐다.“아니에요.”유하는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지도 몰라요. 그럼 선배는 이런 일 겪지 않았을 거고, 손도...”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산의 손이 유하의 입을 살짝 막았다.청산의 눈가가 희미하게 붉어졌다.“그런 말 하지 마.”그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유하야, 우리 어릴 때 처음 만났던 거 기억 안 나? 그때부터 난 네가 선명했어. 후회한다면, 왜 더 일찍 다시 만나지 못했을까, 그거 하나뿐이야.”청산의 시선이 멀어졌다.“지난 7년 동안 해외에 있으면서, 내가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이 그거야. 그때 부모님 따라서 W시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내 이름을 너한테 말했더라면... 모든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잠시, 바람이 지나갔다.청산의 안경 너머 눈빛이 흔들렸다. 슬픔과 미련이 그 안에서 조용히 뒤섞였다.“하지만 유하, 세상에 ‘만약’은 없어.” 청산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우리 아직 이렇게 살아 있잖아. 그리고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더 많아. 늦지 않았어. 절대.”유하는 붉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그래. 이제는 과거에 매여있을 이유가 없어.’‘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고, 길이 있어.’청산은 잠시 미소를 머금었다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이제 나 피하는 거 그만해. 응?”유하의 눈이 커졌다.“선배, 알고 계셨군요?”“어제 대나무숲에서 밤새 기다렸거든. 너 안 오길래 알았지. 다 알아버렸구나.”그는 살짝 웃었다.“괜히 혼자 생각만 많아질까 봐, 아침부터 그냥 찾아왔어.”유하는 괜히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죄송해요. 나도 선배 보러 가려고 했는데... 선배가 선수 쳤네요.”청산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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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2화

봄바람이 살짝 불어와, 발코니의 커튼이 흔들렸다.청산의 목소리는 분명 부드러웠다.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유하의 마음속 어딘가를 싸늘하게 스쳤다.‘왜 이렇게 서늘하지?’“선배.”유하가 조심스레 불렀다.청산은 갑자기 웃었다. 햇살에 미소가 번지고, 봄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스쳤다.“유하, 겁먹지 마. 난 오승현처럼 굴진 않아.”남자의 말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말 속엔 단단한 결기가 있었다.“그냥 예를 든 거야. 오승현 같은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을 쉽게 놓지 않아. 그런 사람은 뼈가 시리도록 아파봐야 비로소 손을 뗄 수 있거든.”유하는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이미 해봤어요. 그 사람한테 상처를 줘도, 아무 소용 없더라고요.”‘가슴에 칼이 닿을 뻔했는데도, 그 사람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어.’‘그건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지...’유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정말 아프지 않았을까?’‘아니면... 미친 사람은 고통조차 즐기는 거야?’청산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안경 렌즈에 아침 햇빛이 스치며 번뜩였다.남자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그래...”낮고 잔잔한 목소리.“그럼 며칠만 기다려보자.”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다시 ‘대나무숲’으로 돌아가. 우리 예전처럼 이웃으로 지내자. 며칠 안에 오승현이 어떤 반응 보일지... 그걸 먼저 확인하는 게 좋아. 진짜로 뒤집을 생각이면, 바로 그때 드러날 테니까.”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반응이 있으면요?”“그땐 바로 출국하지. 걱정 마.”청산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엔 철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그는 이미 모든 경우의 수를 정리해 둔 듯했다.유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혹시 경호원 좀 더 둘 수 있을까요? 선배 쪽에 부담이 되진 않겠죠?”“그래, 해.”청산은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편해야 나도 편하지. 아무 상관 없어.”그 한마디에 유하는 조금 안심했다.‘그래... 이제 정말, 편하게 숨 좀 쉴 수 있을까.’청산의 계획대로 하기로 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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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3화

밤.화려한 조명이 은은하게 퍼지는 레스토랑 앞.주황빛 벤틀리 컨티넨탈이 부드럽게 멈춰 섰다.운전석 문이 열리고, 초록빛 벨벳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내렸다.실루엣을 따라 은은한 윤광이 흘렀고, 그 위에 흰 니트 숄이 살짝 걸쳐져 있었다.빛 아래에 있는 여자는 마치 봄비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처럼 우아하고도 아련했다.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녀에게 머물렀다.하지만 누구도 쉽게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그녀의 뒤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거대한 경호원 세 명이 묵직하게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까.‘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어.’유하는 시선을 낮추고, 고요히 안으로 들어섰다.그녀의 발끝이 레스토랑 문턱을 넘자, 밖에서는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와... 셀럽인가?”“아니야, 저런 사람 본 적 없어.”“근데... 방금 나 본 거 맞지?”“꿈 깨라, 나 봤어.”“사진 찍었냐?”“깜빡했어.”“...”문이 닫히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멀어졌다.유하는 그런 반응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비록 알았다 해도, 그냥 피식 웃었을 것이다.요즘 세상에 이런 시선쯤이야,이젠 익숙해진 지 오래니까.다만, 오늘 이 자리에는 유하도 꼭 경호원이 필요했다.‘오씨 집안 사람이 있는 자리야.’‘그게 아무리 준서 앞이라도, 절대 방심할 수 없어.’유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기던 순간,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엄마, 여기요!”유하는 걸음을 멈췄다.준서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하지만 그 옆자리에... 승현이 있었다.그는 팔꿈치를 식탁 위에 올리고,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유하를 보고 있었다.그리고 입가엔 얕은 미소가 걸려 있었고, 시선은 천천히 유하의 허리선을 따라 흘렀다. 그 눈빛엔 익숙한, 불쾌할 만큼 느릿한 집착이 섞여 있었다.‘역시 올 줄 알았어. 이래서 경호원 데려온 거야.’유하는 눈썹을 찌푸렸다. 숨을 고르고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왜 왔어?”승현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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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4화

준서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작은 손이 유하의 손을 꼭 잡았다.그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엄마, 여행 가서 제 선물 사오셨어요? 엄마 아직 저한테 선물 하나 빚졌어요.”유하는 잠시 말이 막혔다.‘없다고 하면 또 울겠지...’“다음에 줄게.”그 말이 떨어지자 준서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엄마는 맨날 ‘다음에’래요! 지난번에도 다음에 준다고 했잖아요! 엄마, 또 거짓말했죠! 엄마가 말했잖아요, 거짓말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엄마 나빠요!”레스토랑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이쪽으로 향했다.유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제발, 준서야... 지금은 안 돼.’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달랬다.“준서야, 엄마가 요즘 좀 바빴어. 그치만...”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서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유하는 그제야 두통이 밀려왔다.‘또 이렇게 되는구나...’그때, 맞은편에서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서.”승현이었다.단 한마디.그 한마디에 준서의 울음이 순식간에 멈췄다. 입술이 꾹 다물어지고 눈물이 고인 채로, 고개를 숙였다.유하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항상 이래. 이 아이는 내 말은 절대 듣지 않아.’‘아무리 달래도, 아무리 애써도... 아빠 한마디면 끝이야.’승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울고 떼쓰는 걸로 원하는 거 얻는 거 아니다. 그건 아빠가 가르친 방식 아니잖아.”준서가 입술을 깨물었다.“죄송해요, 아빠.”승현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엄마한테 사과해야지.”준서는 억울하다는 듯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끝내 작게 말했다.“죄송해요, 엄마.”유하는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뭔가... 이상해.’그냥 아이의 버릇을 잡는 게 아니었다.승현의 말투엔 감정이 없었다. 마치 아이에게 명령을 내리듯, 복종을 훈련하는 느낌이었다.‘이건 교육이 아니라 통제야.’준서는 그 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밥을 먹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손으로 젓가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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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5화

준서가 고개를 갸웃했다.“근데 아빠랑 엄마는 딱히 진짜로 싸운 적도 없잖아요.”유하는 잠시 멍해졌다.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어른의 감정을 아이의 언어로 풀어내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이건 싸움이 아니라... 증오에 가깝지.’‘그런데 그걸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아이에게 상처만 남길 게 뻔했다. 괜히 어른들의 복잡한 관계를 들려줘봤자, 그건 아이의 세상까지 어둡게 만들 뿐이었다.유하는 숨을 고르며 말을 골랐다.“준서야, 그건...”그때, 멀리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이어 곧, 한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엄마!”순간, 유하의 품에 뭔가가 확 들어와 안겼다. 작은 팔이 유하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뭐야?’정신이 채 돌아오기도 전에 옆에 앉아 있던 준서가 벌떡 일어났다.그리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너 뭐야!”준서가 아이의 팔을 잡아 뜯으며 소리쳤다.“우리 엄마를 왜 끌어안아?! 우리 엄마야! 우리 엄마라고!”“아니야! 거짓말이야!”품에 안긴 아이가 더 세게 매달렸다.“우리 엄마야! 우리 엄마라고! 이 손 안 놔! 절대 안 놔!”“놓으라니까!”“싫어!”“빨리 놔!”“안 놔!”“...”두 아이의 목소리가 얽혀 터져나왔다.레스토랑 안이 순식간에 뒤집혔다.사람들의 시선이 몰렸고, 유하의 머리는 순간 하얘졌다.‘잠깐만... 이 목소리... 설마 재윤이?’유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재윤이었다.얼마 전, 조용히 사라졌던 아이.재윤의 불안정한 상태를 생각하면, 이런 방식의 재회는 너무 갑작스러웠다.‘이러면 안 돼. 재윤이가 더 흔들리면...’유하는 허리를 뒤로 젖히며 재윤의 등을 다독였다.“재윤아, 괜찮아. 일단 손 좀 놓을까? 응? 엄마 여기 있어.”하지만 유하의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재윤의 그 작은 팔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힘이 느껴졌다.그 순간, 옆에서 준서가 고함을 질렀다.“엄마, 왜 저 애한테 그렇게 말해요!”유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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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6화

병원.의사가 유하의 오른쪽 손등을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 붕대를 감았다. 몇 마디 주의 사항을 남기고 나가자 병실에는 유하와 준서, 둘만 남았다.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준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죽여 우는 소리를 냈다.유하는 그런 준서를 보면서도 아이를 위로할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이 아이, 겁난다.’식당에서 그 순간, 준서가 접시를 들고 던졌던 그 짧은 찰나에, 유하는 착각했다.그 모습에서 승현이 보였다.너무나 닮았다. 행동 하나까지도 자기밖에 모르는 그 태도까지.한참을 침묵하다가, 유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를 최대한 차분하게 눌렀다.“준서야, 너 아까 뭐 한 건지 알아? 네가 던진 그 접시가 재윤이 머리에 맞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 봤어?”“근데 재윤이가 먼저 그랬잖아. 왜 걔가 내 엄마한테 엄마라고 불러?!”준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아니면... 엄마, 밖에 다른 애라도 있는 거예요?”“없어. 재윤이는 엄마 친구 아이야.”유하는 조심스럽게 설명했지만, 준서의 표정은 더 험악해졌다. 또다시 감정이 폭발할 조짐이 보여서 유하는 이마를 눌렀다.‘이럴 땐 그냥 기다려야 해. 진정할 때까지.’하지만 준서는 듣지 않았다.“난 잘못한 거 없어요. 사과 안 할 거예요. 사과는 그 애가 해야죠. 남의 엄마한테 엄마라고 부르는 게 이상한 거잖아요!”준서의 논리는 단단했다.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유하는 막막했다.‘이 아이... 정말 오승현을 닮았어.’예전엔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조금 계산적이어도, 영리하고 표현이 서툰 거라 여겼다.그런데 지금은 달랐다.‘오승현과 똑같아. 남을 생각할 줄 모르고, 마음이 너무 차가워.’유하는 숨이 막혔다.패배감, 좌절, 그리고... 깊은 실망.오씨 가문에서 유하에게는 언제나 말할 권리가 없었다.아이의 교육 문제도 마찬가지였다.그래서 유하는 준서 곁에서 작은 부분이라도 바꿔보려 했다.하지만 돌아온 건 거부감뿐이었다.잔소리라고,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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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7화

“엄마!”준서는 정신이 퍼뜩 들자 병실 밖으로 뛰어나왔다.하지만 문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이 재빨리 아이를 끌어안았다.유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준서를 본가로 데려가 주세요.”그곳은 준서의 진짜 집이었다.“엄마! 엄마!”준서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몸부림치며 경호원의 팔을 벗어나려 애썼다.그때, 낮고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울려왔다.“오준서.”순간, 아이의 움직임이 멈췄다.준서가 고개를 들어 그쪽을 봤다. 붉게 충혈된 눈이 흔들렸다.“아빠...”승현이 다가오며 짧게 말했다.“집에 가자.”“하지만...”“집으로 가.”두 번째 말은 냉정하고 단단했다.그 한마디에 준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태건이 다가와 아이를 안아 들자, 준서는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승현이 유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손은...”그가 다가가려 했지만, 경호원 두 명이 가로막았다.유하는 그 뒤에 서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표정은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채였다.입술도, 움직임조차 없었다.짧은 침묵이 흘렀다.그때, 옆 병실 문이 열리며 배남진이 나왔다.피곤한 얼굴이었다.“오승현, 우리 이야기 좀 하자.”승현은 잠시 남진을 보았다.다시 유하를 봤다.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었다.승현은 입술을 한 번 다물고, 더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준서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유하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비로소 가슴 깊은 곳까지 공기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그녀는 이마를 짚고, 잠시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다가 가방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여행 중 한의사가 건넸던 약.‘병이 도질 때 먹으라’라던 그 약이었다.작은 알약 하나를 꺼내 삼켰다. 곧 머릿속을 찌르던 통증이 잦아들었다.정신이 조금 맑아졌다.유하는 경호원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리고, 조용히 옆 병실로 들어갔다.그러고 나서 침대 옆에 앉았다.재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의사는 말했다.이번 충격이 너무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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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8화

유하는 재윤의 손을 잡고 침대 옆에 엎드린 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문 쪽에서 발소리가 나자 유하가 고개를 들었다.남진이 손목을 살짝 움켜쥔 채 들어오고 있었다.“손목은... 괜찮으세요?”유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남진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재윤이는 아직 안 깼죠?”유하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앉았다.서로 다른 의자에, 하지만 묘하게 닮은 자세로.병실의 공기 속엔 기계음만 또박또박 울렸다.잠시 후, 유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번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전에 재윤이를 돌봐달라며 주셨던 보수는 이미 전부 다시 송금해 드렸어요. 앞으로의 치료비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정말, 죄송해요.”남진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그저 낮게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말했다.“소유하 씨 잘못이 아닌데... 왜 사과하세요.”“준서가...”“그 일도, 당신 탓은 아닙니다.”그 목소리엔 피로가 배어 있었다. 이마를 짚던 손이 잠시 멈췄다.그러다 뜻밖의 질문이 나왔다.“이제, 해외로 나가실 건가요?”유하는 잠시 놀란 얼굴로 남진을 봤다.이런 때, 그런 질문이라니.그래도 솔직히 대답했다.“네, 아마 한 달쯤 후요. 아니면 조금 더 일찍일 수도 있고요.”“그때... 재윤이와 함께 갈 수 있을까요?”남진의 말이 끝나자 공기가 멈춘 듯 조용해졌다.유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이 상황에... 또 아이를 맡기겠다고?’‘나를 아직도 믿는 건가...’“하지만, 지금 재윤이의 상태가...”유하는 말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이어갔다.“지금은 의식도 불안정해서, 제가 함부로...”남진이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은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소유하 씨가 불안한 거 알아요. 하지만, 소유하 씨가 사라졌던 며칠 동안 재윤이 상태는 더 나빠졌어요. 오늘 일이 없었어도... 결국 이렇게 됐을 겁니다.”그는 피곤하게 웃었다.“제가 가진 PS그룹 지분 5퍼센트를 바로 넘기겠습니다. 서류는 준비돼 있어요. 소유하 씨가 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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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9화

승현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준서는 등을 돌린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주변엔 부서진 비행기 조각, 부러진 날개, 찢긴 색종이 조각들과 함께작은 동물이 그려진 연등의 남은 종잇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승현은 그 연등을 기억했다.남진의 조카, 재윤이 막 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준서와 제법 잘 어울려 지냈고,그때 그 아이가 준서에게 선물로 건넸던 작은 연등.그 위의 동물 그림은 아마 유하가 직접 그려 넣었을 것이다.준서는 그걸 참 아꼈다.상자까지 따로 마련해 소중하게 넣어두던 아이였다.‘그걸 찢어버렸다는 건... 이번엔 정말 상처가 깊구나.’승현은 다가가 위로의 말 한마디 없이 옆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의자 다리가 마루를 긁는 소리가 났다.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등을 보이는 아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울었냐.”“안 울었어요.”바로 튀어나온 대답, 하지만 목소리는 울먹였다.“속상하지?”“속 안 상해요.”“속상하면 울어도 돼. 이번엔 괜찮아.”“저... 안 울 거예요.”준서는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조그마한 어깨가 들썩였다.콧날이 붉어졌고,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잠시 후, 아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빠, 엄마가... 저 싫어하시는 거예요? 저 이제 필요 없는 거예요?”승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아주 짧게, 담담히 말했다.“그럴 리 없다.”“근데 엄마는 저 위로도 안 해주시고, 다른 애... 그 재윤이한테 가서, 그 애만 위로해 주고, 감싸줬어요. 저, 재윤이 싫어요.”승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그래도 너는 그 여자의 아들이잖아.”준서가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 끝이 바닥의 조각들을 건드렸다.부서진 비행기 날개 하나가 또 부러졌다.“근데... 재윤이는 우리 엄마한테 ‘엄마’라고 불렀어요.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 애를 안아주고, 울면 달래주고... 아빠, 엄마가 우리를 배신한 거 아니에요?”승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시선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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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0화

“승현, 준서... 아이고.”문이 열리자, 연우가 급히 들어왔다.부드러운 웨이브 머리가 어깨에 흘러내리고, 은은한 금빛의 롱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쳤다.방 안을 둘러본 연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준서 다친 데는 없어요?”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모델 조각 사이로 다가가 주저앉아 준서를 안았고, 스커트 자락이 바닥의 먼지에 닿았지만 개의치 않았다.“어디 보자. 손은 괜찮고... 얼굴은...”연우가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조심스레 살폈다.준서는 연우의 따뜻한 목소리에 금세 울컥했다.하지만 조금 전 아빠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약해지면 안 된다.’그래서 울지 않았다. 눈가만 붉어진 채, 작게 말했다.“이모...”“그래, 이모 여기 있잖아.”연우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뺨을 손끝으로 쓸었다.그 눈이 너무 빨갛게 물들어서 마음이 애처로웠다.“속상하면 울어도 돼. 울면 좀 나아질 거야. 괜찮아, 이모가 여기 있잖아.”“아니에요...”준서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연우는 그런 아이를 살짝 안은 채, 의자에 앉아 조용히 지켜보는 승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준서가 왜 이러는 거야?”“직접 물어봐.”승현이 짧게 말했다.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그래서 무슨 일이야?”연우는 잠시 머뭇거렸다.준서를 품에 안은 채로,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승현이 자리를 뜰 기색이 없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 임... ‘유산’ 프로젝트 말이에요. 협력 깨진 거 알잖아? 새 연구팀을 찾아야 해서... 해외에 오래된 팀 하나가 있는데, 자금난으로 해체 위기래.”“내가 조금 알아봤는데, 기술개발 방향이 우리랑 거의 같아서 인수나 지분 투자를 검토해 보면 어떨까 싶어.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은데, 승현, 너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해외라...”승현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응. 좋은 기회야. 이런 팀 다시 찾기 힘들어.”연우는 가방에서 준비해 온 자료를 꺼내 내밀었다.“이거 봐.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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