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381 - 챕터 390

464 챕터

제381화

처음이었다.유하는 ‘개 같다’는 말이 늑대에게도 통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그 늑대는 영리했고, 딱 봐도 주인이 잘 길러 훈련한 게 분명했다.하지만 정말... 사람을 미치게 했다....늑대는 배를 채웠지만, 유하는 여전히 두려웠다. 눈만 감으면 당장이라도 늑대에게 갈가리 찢길 것 같았다.그래서 소파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면서도 억지로 버텼다.결국, 늑대가 잠든 걸 확인하고서야 유하는 겨우 눈을 붙였다. 너무 피곤했던 탓일까, 그건 잠이라기보다 거의 실신에 가까웠다.유하는 꿈을 꿨다. 자신이 식탁 위에 누워 있고, 늑대 한 마리가 의자에 앉아 흰색 식사용 앞치마를 두른 채, 칼과 포크를 들고 자신을 향해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안 돼... 오지 마...!’늑대의 발톱 끝에서 칼이 천천히 다가오는 순간, 유하는 비명을 삼키며 눈을 떴다.그리고 의식이 돌아오기 전, 시선이 먼저 마주쳤다.눈앞에는 황금빛 눈동자.그 늑대가 길게 혀를 내밀며 탐욕이 번진 눈으로 유하를 바라보고 있었다.뜨끈한 침이 유하의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비명 지르면, 죽는다.’유하는 숨을 고르며 소파에 등을 붙였다.창밖은 이미 훤히 밝아져 있었다.늑대가 점점 다가오려는 그때, 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어젯밤 늑대에게 밥을 주던 가정부가 들어왔다.이번엔 그 뒤로 또 다른 가정부가 따라왔다.앞선 가정부는 늑대의 식사를 차려주었고, 다른 한 명은 금빛 자수가 놓인 덮개로 가려진 쟁반을 들고 유하 앞으로 다가왔다.말 한마디 없이 고개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좋아, 늑대만 아니면 뭐든지 상관없어.’유하는 바로 따라나섰다.가정부는 그녀를 욕실로 이끌었다. 안은 상상보다 훨씬 넓었고, 가운데엔 커다란 욕조가 자리하고 있었다.가정부는 쟁반을 내려놓더니, 유하의 옷에 손을 뻗었다.“잠깐!”유하가 뒷걸음질 치기도 전에 가정부는 어디선가 꺼낸 권총을 유하의 이마에 겨눴다.말이 필요 없었다.그 눈빛엔 ‘명령을 따르라’라는 뜻만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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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2화

유하는 천천히 1층으로 내려왔다.시야를 가린 베일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저 손이 이끌리는 대로 걸었을 뿐이다.발밑에 단단한 바닥이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밖에 나왔어...’희미하게 풍겨오는 흙냄새와 꽃향기.눈앞이 흐릿한 채로도 알 수 있었다.고성을 벗어나, 꽃이 만발한 정원에 도착한 것이다.그러다 갑자기 손이 풀렸다.주변은 고요했다.멀리서 벌레 우는 소리와 새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왔다.평화로우면서도, 어딘가 음산한 정적이었다.유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누구 있어요?”답이 없었다.영어로도, D국말로도, 다시 영어로도 물어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정말 아무도 없는 건가?’조심스레 손을 들어 베일을 벗으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그 손목을 붙잡았다.검은 장갑을 낀 남자의 손이었다.힘을 주지 않았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유하는 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베일의 가장자리 틈 사이로 검은색 광이 도는 옥스퍼드 구두가 보였다.그 위로 곧게 떨어지는 고급스러운 검정 양복바지.‘남자야...’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남자의 오른손에 들린 짙은 흑단색 지팡이가 보였다.끝이 뾰족한 지팡이는 오래된 서양식 문양으로 세공되어 있었다.유하는 숨을 삼켰다.‘이런 지팡이... 본 적 있어. 오승현의 할아버지.’오씨 가문의 최고 권력자, 오국수.그 지팡이는 단순한 보행용이 아니었다.권력과 부, 명문의 상징이었다.한때 서양 귀족들 사이에 유행했던 습관이지만, 요즘 그런 걸 들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설마... 이 사람이 바로 이곳의 주인? 나를 납치한 그 남자?’유하는 베일 너머로 남자를 바라봤다.모든 게 흐릿하게 보였다.남자의 얼굴은 가려져 있었지만, 어깨까지 오는 부드럽게 웨이브 진 머리칼이 은빛 햇살에 반짝였다.그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려 옆의 화단에서 한 송이 꽃을 꺾었다.그리고 유하의 손을 들어, 그 위에 꽃을 살며시 올려놓았다.검붉은 빛이 감도는, 거의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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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3화

유하는 배가 너무 고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그때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은색 부조가 새겨진 손잡이 끝으로 테이블 위를 ‘톡’ 하고 건드렸다.그 끝이 닿은 곳은... 유하가 조금 전 벗어 두었던 실크 장갑이었다.‘진짜... 뭐야, 이 사람...’유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장갑 안 낀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봐? 결벽증이야 뭐야.’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었지만, 결국 순순히 장갑을 다시 꼈다.그러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그 쟁반을 밀어주었다.이번엔 진짜 먹어도 되는 것 같았다.유하는 조심스레 디저트를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달았다. 너무 달아서, 몸서리가 날 지경이었다.그런데도 유하는 눈을 감았다.‘살았다...’혀끝이 타들어 갈 정도로 단맛이었지만, 그저 먹을 게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유하는 예의를 지키려 애쓰며 조용히, 그러나 빠른 속도로 디저트를 해치웠다.금세 접시를 비웠다.그때 누군가 작은 커피잔을 건넸다.한 모금에 다 삼킨 순간, 쓴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유하는 미간을 찌푸렸다.‘진하다 못해 뭔가를 잔뜩 태운 맛이야.’솔직히 말해, 아직도 배고팠다. 조그만 케이크 몇 조각으론 하루 종일 쫓기고, 또 끌려온 몸에 아무 도움이 안 됐다.하지만 남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 다시 책을 펼쳐 들고 페이지를 넘겼다.꽃향기 가득한 정원엔, 고요만이 내려앉았다.두꺼운 베일 때문에 유하는 주변을 제대로 볼 수도 없고, 눈앞은 온통 색이 번진 듯 흐릿했다.그 와중에도, 검붉은 장미가 가장 많이 피어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그가 유하의 손에 쥐어준 그 장미였다.‘대체 뭐지, 이 사람...’‘날 납치해 놓고 죽일 생각도 없고, 돈이나 협박도 안 하고...’‘그렇다고 딱히 말하는 것도 아니고...’‘이건 뭐,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건가?’죽일 거면 죽이라고, 살릴 거면 살리라고, 차라리 명확하게 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남자가 책을 덮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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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4화

남자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바람에 섞여 간간히 들려왔다.유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이러다 얼마 못 버티겠어.’‘이렇게 굶기고, 걷게만 하면... 나중엔 도망은커녕 일어서지도 못하겠어.’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피로와 허기로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제발 말씀 좀 해주세요.”“무엇을 원하시는 건가요? 돈이라면... 드릴 수 있어요. 제가 가진 거 다 드릴 수도 있어요.”“그게 아니라면, 다른 거라도 말씀만 하세요.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보내주세요.”유하는 고개를 숙였다.“제가 죽으면 아무 이득도 없잖아요. 그냥 이렇게 괴롭히는 건 의미 없어요. 저는 도망치지도, 반항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저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그녀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도시인지, 시골인지, 나라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누가 나를 찾고 있을까?’‘아니, 찾고는 있을까?’유하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반항은 처음부터 포기했다.‘살려만 준다면, 뭐든 하자.’지금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즉, 살아남는 것.남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영어를 알아듣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유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남자의 억양과 생김새를 떠올리며 ‘D국 사람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했다.그녀는 더듬더듬 머릿속에 남은 단어들을 꺼내, D국말로 말을 이어갔다.반항하지 않겠다는 뜻, 보복도, 저항도 없다는 약속... 그저 살려 보내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다만 조용히 책장을 넘길 뿐이었다.‘그래도... 얼굴을 안 보여주는 게 다행이야.’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베일을 들치지 않았다.유하 입장에선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나를 죽일 생각이라면, 굳이 얼굴을 숨길 이유가 없을 테니까.’아직은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유하는 생각을 거듭했다.‘우리 고모할머니 쪽 사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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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5화

함께 지낸 며칠 동안, 유하는 이 늑대가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분명히 영물이었다.눈빛에는 계산이 있었고,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도,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놈이었다.유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이 외국 늑대가 우리말은커녕 영어라도 알아들을까?’‘애초에 말이 통해야 협상이 가능하지 않나?’그녀는 결국 몸짓으로 설명하기로 했다. 손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접시 안에 고기가 수북이 담긴 걸 상상하듯 두 손을 모았다.그리고 음식을 ‘먹는’ 흉내를 내며 입에 손을 대 보였다.‘같이 가자, 고기 먹으러.’이제 남은 건 운에 맡기는 일이었다.늑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황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이며 냉랭한 빛을 흘렸다.잠시의 정적.둘 사이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그리고 늑대가 고개를 내밀었다.‘끝났다.’유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 통할 리가 없지.’찌익-천이 찢기는 소리가 났다.뭔가가 유하의 허리를 세게 끌어당겼다.그녀는 눈을 뜨자, 늑대가 드레스 자락을 입에 물고 있었다. 끈적한 침이 천을 타고 흘러내렸다.유하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이 안 나왔다.늑대는 고개를 홱 젖혀 그녀를 문 쪽으로 질질 끌었다.침 흘리며 열정적으로.‘고기 먹자는 걸 이해한 거야?’‘아니면 그냥 내가 먹잇감이라 그런 거야?’하지만 유하는 곧 깨달았다. 늑대는 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밖으로.‘이건... 설마, 성공?’유하는 마음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좋아. 먹보 늑대, 마음에 들어.’온몸에 기운이 조금씩 돌아왔다.그리하여 밤중의 이곳, 한 여자와 한 마리의 늑대가 초라하고도 우스꽝스럽게 도둑질을 위한 행렬을 시작했다.늑대가 앞장서고, 유하가 조심스레 뒤를 따랐다.촛불이 드문드문 켜진 복도는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늑대의 그림자와 유하의 그림자가 마치 한 덩어리처럼 흔들렸다.‘분명 이놈이 나보다 훨씬 잘 알 거야. 주방 위치쯤은 익숙하겠지.’유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안 가득 침이 고이는 걸 느꼈다.‘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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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6화

“후...”유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꽉 붙인 채 숨을 죽였다. 가슴이 방망이질하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들켰나...?’고개를 내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유하는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것을 각오했다. 초마다 길게 늘어지는 시간 속에서, 귀를 곤두세운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삑’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못 본 건가?’조심스럽게 조금 더 기다리다, 유하는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멀지 않은 주방 문이 반쯤 열려 그 틈으로 안이 보였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주방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정말 못 본 거네.’유하는 그제야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하지만 곧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이 밤중에 주방에 들어간다고? 설마... 나처럼 배가 고픈 건 아니겠지?’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쾅!갑작스러운 굉음에 유하의 몸이 움찔했다.주방 쪽에서 난 소리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익숙한 소리였다.‘이건...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 뭔가를 써는 건가?’쾅!쾅!쾅!쾅!규칙적인 타격음이 이어졌다.‘이 시간에 요리를 한다고? 여긴 또 무슨 취향이야.’‘요리하는 데 저렇게 큰 소리가 필요할까?’유하는 먹을 걸 찾고 싶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래도 이상한 호기심이 생겨, 그녀는 조심스레 주방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틈 사이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주방은 넓었다.가스레인지 위 냄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붉은 잠옷을 걸친 남자가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남자는 손으로 잡은 묵직한 중식도로 도마 위의 생갈비를 세게 내리쳤다.쾅! 쾅! 쾅!칼날이 뼈를 깨며 내려앉을 때마다, 공기가 묘하게 진동했다.잠시 후, 남자는 갈비를 가지런히 잘라내고, 물에 헹군 뒤 냄비 속으로 던져 넣었다.그제야 유하는 긴장을 조금 풀었다.‘갈비찜 하려는 거였네.’하지만 곧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하필 이 시간에? 새벽에 갈비찜이라니, 무슨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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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7화

유하는 극심한 허기와 두려움에 떨었다.그렇게 꼬박 밤을 새운 끝에,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가정부가 평소처럼 나타났다.그녀는 언제나처럼 늑대를 먼저 챙겨 먹이고, 이번에도 유하를 욕실로 데려가 씻겼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입혀진 옷이 이전과는 달리, 순백의 시폰 원피스였다.얇고 투명한 천이 몸에 달라붙어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끼었다.‘왜 하필 이런 옷이야?’불편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유하에게 밀려왔다.유하의 머리에 다시 베일이 씌워졌고, 시야가 반쯤 가려졌다.가정부는 아무 말 없이 유하를 이끌었다.이번엔 정원이었다.정원에 들어서자, 커다란 나무 식탁 앞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그는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유하는 그 앞자리, 남자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식탁 위에는 김이 살짝 오르는 갈비탕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그걸 본 순간, 유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건 뭐지? 설마 내가 어젯밤에 돌아다닌 걸 들켰어? 경고하는 건가?’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가정부는 옆에서 손짓했다.“드시죠.”그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베일 너머로, 맞은편의 남자가 조용히 유하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시선이 꺼림칙했다.‘어쩔 수 없네... 안 먹을 수도 없잖아.’유하는 조심스레 그릇을 들어 올렸다.직접 마시기 전, 코를 가까이 대고 살짝 냄새를 맡았다.순간, 긴장이 조금 풀렸다.‘양갈비다.’그제야 유하는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국물은 놀랍도록 진했고, 고기는 부드럽게 풀어졌다.‘생각보다 맛있네.’하지만 이상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익숙한 맛, 어디서 분명히 먹어본 적이 있는 맛이었다.작게 씹으며 생각을 굴리던 유하는 갑자기 멈췄다.‘잠깐, 이 맛... 설마...’그녀는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맛은 분명... 오씨 가문의 본가에서 승현의 어머니 박영심이 끓여주던 갈비탕의 맛이었다.박영심은 평소엔 요리를 잘 하지 않았지만, 명절만 되면 직접 손을 걷어붙이고 갈비탕을 끓였다.직접 공수해 온 어린 양갈비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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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8화

어떤 끔찍한 확신이 들자 유하의 온몸을 얼어붙었다.심지어 숨이 막히는 듯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찰나의 정적 속, 차가운 금속이 유하의 뒤통수에 닿았다.총구였다.유하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움직이면... 죽는다.’손끝이 떨렸지만, 그는 그저 침묵을 지키며 버텼다.남자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대답해.”유하는 겨우 입을 열었다.“비슷합니다.”“비슷해? 아니면 달라?”남자의 중얼거림은 마치 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그리고 어깨가 천천히 돌아섰다.이제 막 자리를 뜨려는 찰나였다.유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그러다 본능적으로 외쳤다.“잠깐만요! 저를 왜 잡은 겁니까!”유하의 뒤통수에 닿은 총구의 압박감이 그대로 느껴졌지만, 두려움보다 절박함이 앞섰다.“혹시 오씨 가문을 협박하려는 거라면, 당신...”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하의 손끝이 베일을 건드렸다. 가슴까지 흘러내린 얇은 천이 손가락에 걸리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잡아당겼다.순간, 뜨거운 통증이 손바닥을 찔렀다.펑!“꺄악...!”총성이 공기를 찢었다.유하는 그대로 무너졌다. 왼손을 감싸 쥔 오른손에서 피가 쏟아졌다.살을 뚫은 탄환의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손... 내 손이...!”유하는 바닥에 몸을 뒤틀며 울부짖었다. 눈물과 피가 뒤섞여 하얀 베일을 적셨다.그때, 이미 몇 걸음 물러나 있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그는 다시 천천히 돌아와, 손에 든 검은 목제 지팡이로 베일의 끝을 들어 올렸다.그는 유하의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리듯, 천을 살짝 내리눌렀다.그리고 아주 짧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내 눈앞에 네 얼굴 보이지 마.”...붉은빛 시트로 둘러싸인 침대 위.유하는 조용히 누워 있었다.눈동자는 초점 없이 허공을 헤맸다.이제야 모든 이유를 알게 되었다.하지만 알게 된 순간, 오히려 절망이 깊어졌다.또다시 오씨 가문 때문이었다.‘또 그 집안이야...’유하는 더 이상 어떤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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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9화

유하는 마음을 굳혔다.‘이제부터는 무조건 살아남는 거야.’그 결심 이후 며칠 동안, 유하는 그야말로 얌전했다.이곳의 고용인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인사를 하고, 혼잣말을 이어갔다.대답이 없어도 상관없었다.‘괜찮아, 그냥 분위기라도 익혀야 해.’밤낮을 함께 보내는 늑대도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처음엔 그 존재만으로도 유하는 숨이 막혔는데,이젠 그녀가 조심스레 다가가 털을 한 움큼 쥘 정도로 익숙해졌다.아마 그날, 주방에서 몰래 야식 찾아다니다가 서로 들킨 ‘동병상련의 정’ 같은 게 생긴 걸지도 몰랐다.늑대를 볼 때마다 여전히 긴장은 됐지만, 늑대가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스치거나, 손등을 냄새 맡아도 유하도 이제 움찔하지 않았다.‘적응해야 해. 그래야 틈이 보여.’‘이 사람들 생활 패턴을 알아야, 도망칠 방법을 찾을 수 있어.’유하는 매일 똑같은 일과를 반복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두꺼운 베일을 쓴 채 정원으로 나가, 남자와 마주 앉아 조용히 식사했다.그녀가 만들어주는 음식은 늘 똑같았다.익숙한 향기, 익숙한 맛.모두 유하가 오씨 가문 본가에서 먹던 음식이었다.그리고 놀랍게도, 하나같이 박영심이 자주 만들던 것들이었다.식사 후엔 꼭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맛이, 그 사람 거랑 같아?”그럴 때마다 유하는 공손히 대답했다.“조금... 다릅니다.” “...”“비슷해요.”“...”그리고 억지로라도 조금 더 먹었다.남자가 만든 음식만은, 유하가 마음껏 먹어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다른 식사는 늘 누군가의 손짓 한 번으로 금세 치워졌으니까.그 결과... 유하는 늘 배가 고팠다. 며칠째 이어지는 허기 탓에, 유하는 점점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이러다 쓰러지면... 그땐 기회가 와도 도망칠 수 없겠지.’그 생각이 들어 그녀는 더 조용히, 더 철저히 몸을 다스렸다.그날도 가정부가 찾아와 평소처럼 유하에게 목욕을 시키고 상처를 덮은 드레싱을 갈아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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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0화

사람이 많았다.유하가 차에서 내리자, 잔잔한 현악 소리가 숲 사이에서 퍼져 나왔다.벌레와 새의 울음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여러 나라의 언어가 뒤섞여 귓가를 스쳤다.D국말, 영어, 불어... 그리고 유하가 모르는 언어들까지.분명 이곳에서는 숲속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남자가 유하의 손목을 가볍게 잡고 걸음을 옮겼다.그와 함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자, 주변이 순간 고요해졌다.곧이어 웅성임이 터졌다.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저 사람...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이곳에서 그 남자는 분명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는 듯했다.하지만 이상했다. 사람들은 놀라움 뒤에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몇몇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마치 그를 두려워하는 듯한 분위기였다.‘뭐야, 왜 다들... 피하는 거지?’유하는 고개를 숙인 채 순순히 그를 따라 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안에서는 남자들의 웃음소리와 탁자 위에서 패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그중 한 명이 고개를 돌려 보며 외쳤다.“코시오 왔네!”‘코시오...? 그게 나를 납치한 이 자의 이름인가?’유하는 조심스레 숨을 고르며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그때, 카드 게임을 하던 남자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며, 눈앞에서 까만 베일이 길게 드리워진 유하의 얼굴을 바라봤다.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유하의 손등에 입을 맞췄고, 입술이 닿은 자리에 미묘한 온기가 남았다.남자의 입에서 완벽한 D국 발음의 말이 흘러나왔다.“정말 아름답군요. 저를 위해 베일을 잠깐만 들어 올릴 수 있겠습니까?”유하는 당황했다.‘뭐야, 갑자기 이 분위기는 또 뭐야?’그녀는 가볍게 손을 빼고는 아무 말 없이 코시오의 뒤로 한 발 물러섰다.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거절의 뜻을 전했다.순간, 방 안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사람들은 그 남자를 놀리듯 폭소를 터뜨렸다.그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리고 근처 꽃병에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꺼내 유하에게 내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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