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391 - 챕터 400

464 챕터

제391화

박영심은 병이 도질 때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었다.하지만, 만약 코시오가 말한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온 ‘20년 전의 흑발 미녀’가 정말 박영심이라면...그리고 그가 말한 ‘놀았다’라는 한마디까지 사실이라면...유하는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어머님이 정말 산후 우울증 때문에 정신병을 앓게 된 걸까?’그 따뜻한 미소, 품 안의 온기, 친딸보다 더 아껴주던 시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유하의 친어머니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자상했던 시어머니.유하는 자신이 진심으로 친어머니처럼 따랐던 그분을 떠올리며, 심장의 중심에서부터 서서히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그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 전신을 덮쳤다.소름이 끼치고 몸이 떨렸다.그리고 문득, 유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오씨 가문 같은 명문가라면 해외여행쯤은 흔한 일이었을 텐데, 생각해보니 승현을 제외하고는 본가 사람들 중 누구도 한 번도 해외에 나간 적이 없었다.여행조차 항상 국내였다.그런데도 오씨 가문은 해외에도 수많은 사업체를 두고 있었다.‘이상하다...’연결되는 기억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그동안 오씨 가문에서 느꼈던 자잘한 의문들이 점점 선명해졌다.유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안 돼, 그만 생각해. 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어!’박영심이 어떤 사람인데?박씨 가문은 대대로 학자와 관료를 배출한 명문이었다.듣기로는 박영심은 열여덟에 승현의 아버지, 오광진과 약혼했다고 했다.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 사랑하고 결혼해, 세상 부러운 것 없는 부부였다.둘의 금슬은 세상에서도 이름난 이야기였다.오씨 가문과 박씨 가문은 모두가 고개 숙여 인사하는 지역의 대표 가문이었다.그런 가문의 여인이, 그런 지위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누군가에게...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아니야. 절대 아니야.’유하는 스스로를 다그쳤다.‘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머님을 의심하다니...’‘생각하지 말자. 도망칠 방법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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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2화

숲속 연회가 끝난 뒤, 유하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채 다시 방으로 끌려왔다.몸에 걸친 드레스는 너무 꽉 조였고, 천도 무겁기 짝이 없었다.걸을 때마다 숨이 막혔다.게다가 더 괴로운 건...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연회장에서 겨우 한 입, 작은 디저트 하나 먹은 게 전부라는 사실이었다.‘한두 개만 더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하지만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유하는 풀이 죽은 얼굴로 가정부가 드레스를 벗기는 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쇠사슬처럼 몸을 옭아매던 붉은 시폰 드레스가 벗겨지고, 대신 부드러운 실크의 흰색 슬립으로 갈아입자, 온몸이 풀리듯 가벼워졌다.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유하는 힘없이 물었다.“저녁밥은... 있나요?”가정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묵묵히 유하의 왼손에 약을 새로 바르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그렇지, 오늘도 밥은 없겠지.’유하는 한숨을 내쉬었다.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 코시오라는 인간은 도대체 뭐야? 자기 기분 좋으면 웃고, 나쁘면 벌주고...’‘내가 말하면 화내고, 말 안 하면 또 밥도 안 주고. 뭐 어쩌란 거야, 진짜!’이 괴상한 곳에서 하루라도 더는 버티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섰다.방 안에 오직 유하와 늑대 한 마리와 단둘이 남게 되자, 유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파 틈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짤랑-은은한 소리와 함께 금빛 포장지 두 개가 손끝에 닿았다.그건 연회장에서 코시오가 한눈판 틈에 몰래 챙긴 초콜릿이었다.단 두 개뿐.포장지를 코끝에 대자, 달콤한 향이 밀려왔다.순간, 텅 빈 위장이 꼬르륵 울렸다.‘하... 진짜, 이 향만으로도 살 것 같다.’유하는 천천히 침대 안으로 들어가, 그중 하나를 베개 밑의 나무 틈새에 숨겨두었다.그리고 나머지 한 개의 포장을 살짝 뜯었다.입안에 반쪽만 넣자, 초콜릿이 천천히 녹아내렸다.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입안 가득 번지는 향에, 잠시나마 현실의 공포가 잦아드는 듯했다.푹-그때, 침대가 내려앉았다.유하가 고개를 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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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3화

유하가 알고 있는 서양 귀족 집안의 전통에 따르면,이런 긴 복도에 걸린 초상화들은 모두 직계 혈통 중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었다.가문의 역사를 대표하는 존재들,대대로 최고 권력자나 큰 공헌을 남긴 사람만이 이런 자리에 초상화를 남길 수 있었다.국내로 치면 마치 종갓집 사당에 위패를 모시는 것과도 같았다.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공간에 본가 사람도 아니고 다른 나라 사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그 자체로도 이례적인데, 무엇보다 이상한 건 그 여인의 얼굴이 없다는 점이었다.‘이 정도 자리에 걸릴 정도라면, 분명 가문에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이겠지.’‘그런데 왜 얼굴을 안 그렸을까?’‘얼굴도, 이름도 지운 채 이렇게 걸어두다니...’‘중요하지만 언급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인가?’‘이상해. 너무 이상해.’유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지금은 그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시간이 얼마 없었다.게다가 늑대가 계속 치맛자락을 물고 끌며 재촉하고 있었다.“알았어, 알았다고...”유하는 작게 중얼거리며, 늑대를 따라 아래층으로 향했다.계단 중간쯤에서 늑대가 성큼 내려가는 걸 보고, 그제야 유하는 조심스럽게 뒤따랐다.복도를 지나 거대한 거실을 통과하자 곧 주방 문 앞에 도착했다.문에는 전자식 비밀번호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하... 역시.’유하는 잠시 그 앞에 서서 숫자패드를 바라보다가 바로 시도하진 않았다.대신 늑대를 돌아보며 손짓했다.“기다려. 나 비밀번호 좀 찾아올게. 문 열면 고기 줄게.”늑대는 이해한 듯, 꼬리를 한 번 흔들더니 자리에 앉았다.그제야 유하는 숨을 한 번 내쉬었다.‘좋아, 이제 좀 찾아보자.’유하는 커다란 거실을 샅샅이 뒤졌다.배는 고팠지만, 비밀번호를 엉뚱하게 누르다 경보라도 울리면 끝장이었다.‘일단 다른 단서부터 찾아야 해.’그리하여 유하는 성당만큼 넓은 거실을 돌아다녔다.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허탈했다.틱- 탁-낡은 태엽 시계가 고요한 공간에 혼자 소리를 내고 있었을 뿐, 그 외엔 현대적인 물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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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4화

유하는 마지막까지 꼼꼼했다.채소 선반 위의 빈자리를 들키지 않도록 겉면의 잎들을 다시 가지런히 정리하고, 냉동칸에서는 얼음 밑에 고기 몇 덩이를 꺼내 겹겹이 쌓아 빈자리를 가렸다.겉보기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보였다.‘이 정도면 들키진 않겠지.’확인까지 마친 뒤, 유하는 치맛자락으로 음식들을 감싸안고 늑대와 함께 재빨리 주방을 빠져나왔다.문을 닫자마자, 거의 뛰다시피 계단을 올랐다.방에 도착했을 때, 심장은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휴... 살았다.’그녀는 우선 챙겨온 음식들을 옷장 깊숙이 밀어 넣었다.그리고 냉동육 한 덩이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녹이고 헹구느라 한참이 걸렸다.그렇게 손끝이 얼얼해질 때쯤, 유하는 늑대를 욕실 안에 들여보내고 문을 닫았다.“천천히 먹어.”잠시 후, 안에서 고기를 씹는 소리와 늑대의 낮은 숨소리가 섞여 들렸다.그제야 유하는 다시 방으로 나왔다.작은 케이크와 채소들을 조금씩 나눠, 커튼 뒤, 침대 밑, 서랍 틈새 등 눈에 잘 띄지 않는 곳마다 감춰두었다.‘이 정도면 며칠은 버틸 수 있겠어.’몸의 기운이 조금씩 돌아왔다.하지만 더 이상 위험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오늘 하루는 그냥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늑대가 고기를 다 먹고 만족한 듯 몸을 말아 바닥에 엎드려 잠들었을 때, 유하는 욕실로 들어가 흔적들을 모두 지웠다.물기를 닦고, 포장지를 처리하고, 냄새가 새나가지 않게 했다.완벽했다.‘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그렇게 한숨을 돌린 뒤, 유하는 잠시 눈을 붙였다....아침.유하는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정부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었다.몸이 아직 허약한 척, 발걸음을 조심히 떼며 가정부의 뒤를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늘 그렇듯, 시선은 음식 쪽에 닿을 때마다 자연스레 머물렀다.‘배고픈 사람처럼 보여야 해. 그래야 의심 안 하지.’정원 의자에 앉은 코시오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그 평온한 표정을 보자, 유하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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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5화

유하는 아무 말 없이 숨을 고르며 코시오를 바라보았다.‘진짜...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오승현도 성질 더럽지만, 이 사람은 한술 더 뜨네.’‘진짜 똑같은 인간들이야.’물론, 그 말은 감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유하는 억눌린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조심스럽게 스푼으로 케이크를 한 입 떠서, 손끝을 떨며 코시오 앞에 내밀었다.코시오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더니, 천천히 몸을 숙여 그걸 입에 물었다.순간, 주방이 완전히 고요해졌다.숨소리조차 들릴 듯한 정적.유하는 온몸이 굳었다.‘제발... 맛만이라도 제대로 맞았길...’코시오의 얼굴을 살피던 유하의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그다음은 상상하기도 싫었다.잠시 후, 코시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케이크 접시를 받았다.그제야 유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됐다. 괜찮은가 봐.’하지만...찰칵-유하의 손끝에서 힘이 빠지며 접시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쨍그랑!하얀 접시가 산산이 부서졌다. 케이크는 흩어졌고, 장미 향과 버터 냄새가 공기 중에 섞여 흐트러졌다.유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그때, 코시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예?”코시오의 눈빛이 깜빡였다.그리고 차분하게, 그러나 잔혹하게 이어졌다.“그 사람은 나한테 먼저 케이크를 먹여준 적 없어.”“어젯밤 일은 용서 못 해. 넌... 벌받아야 해.”유하는 숨이 턱 막혔다.‘뭐라고? 뭐가 틀렸다고? 그 사람? 그 사람이라니? 설마 어머님?’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진짜 미쳤나 봐. 나를... 나를 오승현 어머니로 착각한 거야?’‘대체 어디가 닮았다고 그래!’유하는 이를 악물었다.‘그래, 들켰어. 벌받을 거야. 그럼 어쩌라고.’‘차라리 이제는... 더는 참지 말자.’그동안 눌러왔던 말이 터져 나왔다.“저를 왜 잡아온 겁니까? 오씨 가문을 협박하려고요? 그럼 헛수고예요. 오승현 씨는 절 전혀 신경도 안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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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6화

코시오의 입에서 나온 ‘벌’이라는 말이 절대로 좋은 의미일 리 없었다.박영심의 정신 상태를 생각하며, 유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절대, 그 벌은 받아선 안 돼.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유하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이대로 끌려가면 끝이다.자신이 숨이 가빠지고, 이성이 끊어지기 직전, 유하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그래서 그 사람이 널 떠난 거야! 너 같은 변태, 미친놈이랑 누가 같이 있겠어! 그 사람은 평생 네 곁으로 안 돌아와!”탕!유하의 귀가 먹먹해졌다.이어서 강한 충격이 어깨를 덮쳤다.그녀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고, 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아아아아악...!”비명과 함께 유하의 온몸이 떨렸다.그리고 어깨를 감싸 쥔 손끝에 끈적한 피가 스며들었다.심지어 숨이 막히고 시야가 흔들렸다.‘됐어... 차라리 다쳤으니까.’‘이게 낫다. 차라리 이렇게 끝나는 게.’코시오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검은 구두 끝이 유하의 시야에 들어오더니, 다음 순간, 무겁게 그녀의 어깨 위를 밟았다.“으... 악!”상처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유하는 비명을 삼켰지만, 결국 억눌러지지 않았다.코시오는 그런 유하를 내려다보며 얼굴에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똑똑하네.”“이번엔 이렇게 넘어갈게. 하지만 다음은 없어.”그 말만 남기고 코시오는 돌아섰다. 피 냄새와 총탄의 잔향이 방 안을 뒤덮었다....붉은 천이 드리워진 침대.유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피로 얼룩진 드레스를 갈아입히고도,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늑대는 피 냄새에 미쳐 날뛰었다가 결국 하인들에게 끌려 나갔다.남은 건 고요뿐.유하는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이제야 알겠네...’숲속 연회에서, 코시오의 친구들이 웃으며 했던 말들.코시오랑 엮이면 다칠 거라는 말.코시오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 그 말들이 전부 사실이었다.‘다치는 정도가 아니야. 코시오... 완전히 미쳤어.’유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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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7화

“그래도... 함께라서 다행이야.”오광진은 곁에서 잠든 아내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가의 잔주름, 마른 입술, 숨소리마저 미약했다.오광진의 표정에 깊은 근심이 어렸다.요즘 들어 박영심의 상태가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약 때문인지, 하루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다.박영심은 깨어 있을 때조차 정신이 또렷하지 않았고, 대화도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이대로면... 다시 그때처럼 될 수도 있겠어.’의사는 이미 경고했다.약효는 거의 사라졌고, 더는 버티기 어렵다고... 오랜 세월 복용한 탓에 몸에는 내성이 생겼고, 이제는 그 어떤 약도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그나마 그녀를 진정시킬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약’인 유하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오광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승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되도록 빨리 돌아와라. 네 엄마 상태가 좋지 않다.]메시지를 보낸 후, 그는 다시 아내를 품에 안았다.꽃향기 가득한 온실 속,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잠에 들었다....유하는 아직 어깨에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휴식’이 허락되는 일은 없었다.상처가 덧나든, 피가 스며나오든... 낮 동안 유하는 반드시 코시오 곁에 있어야 했다.코시오 곁에서 미소 없는 인형처럼, 그가‘손에 쥔 장난감’처럼.불편한 드레스를 입고, 코시오의 식사에 동석해 맛을 보며 박영심의 말투와 자세를 흉내 내야 했다.‘이제 진짜 완전히 길들었네.’‘아프다고, 피 흘린다고 봐주는 일은 없으니까.’유하는 순순히 따랐는데, 베일 아래서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코시오는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드는 듯했다.다행히도 결벽증이 심한 코시오는 유하에게 직접 손대는 것은 극도로 꺼렸다.그래서 유하는 연극 무대의 배우처럼 연기했다.말없이, 조용히, 그가 원하는 ‘박영심’이 되어주었다.‘무대 위 배우라고 생각하자. 그럼 버틸 수 있어.’이따금, 그 연기가 보상을 가져올 때도 있었다.코시오의 기분이 좋으면, 식사 자리에서 유하에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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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화

정원 한쪽, 하얀 베일을 쓴 유하가 옆으로 앉아 있었다.그 맞은편에서 코시오는 붉은 입매를 가볍게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그의 손놀림은 우아했다.식탁 위의 스테이크를 가지런히 썰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잘 먹어야 상처도 빨리 낫지.”‘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드레스 자락 아래, 유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팔에 힘이 들어갔지만, 겨우 참았다.정말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위선자!’“어깨 아파서 그래? 그럼 내가 먹여줄게.”코시오가 포크로 고기 한 조각을 들어 천천히 베일을 살짝 들어 올렸다.고기 한 점이 유하의 입 앞으로 다가왔다.유하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순순히 받아먹어. 화나게 하지 말고.”코시오의 웃음소리가 낮게 떨어졌다.그 웃음에는 묘한 여유가 섞여 있었다.‘진짜 어이없다. 바닥도 이런 바닥이 있나.’유하는 그대로 두면 더 귀찮아질 것 같아서 재빨리 손을 뻗어 포크의 손잡이를 잡았다.“내가 먹을게.”그녀의 손끝이 닿자 코시오는 잠시 포크를 붙잡고 있다가 곧 가볍게 손을 뗐다.“그래.”그는 유하를 더 건드리지 않았다.유하는 그제야 조심스레 포크를 들어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따뜻한 고기 냄새와 지방의 맛이 입안을 채웠다.양은 적었지만, 텅 비어 있던 위가 조금은 살아나는 듯했다.‘살았다... 진짜 조금은 숨이 트인다.’식사를 마친 뒤, 유하는 오늘도 늘 그렇듯 정원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우게 되겠거니 생각했다.하지만 코시오는 갑자기 테이블 위의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그리고 코시오의 손끝이 유하의 손목을 스쳤다.“오늘은... 널 그릴 거야.”유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하지만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코시오의 변덕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었다.그래서 유하는 순순히 따랐다.가정부들이 그림 도구를 가져와 정원 중앙, 꽃밭 옆에 화판을 세웠다.유하는 부드러운 쿠션 의자에 앉았다. 왼쪽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게 오른쪽으로 기울여 기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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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9화

박영심은 정말로 누군가의 초상을 그리지 않았다.적어도 유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그때, 뒤따라오던 고용인이 소리 없이 다가와 긴 벤치를 내려놓았다.코시오가 유하를 부축해 앉히고는, 아무 말 없이 그림을 응시했다.정적만이 흘렀다.잠시 후, 유하는 왼쪽 어깨가 갑자기 무겁게 짓눌리는 걸 느꼈다.지금까지 조용히 그림을 보던 코시오가 고개를 떨구더니,그대로 유하의 어깨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았다.“으...!”유하는 이를 악물고 숨을 내쉬었다. 너무 아팠다.‘상처에 눌렸잖아! 이 미친놈!’반항할 수도 없었다.아픈 걸 참고 있는데, 코시오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가 술에 취한 건지, 잠든 건지 알 수 없었다.유하가 한참을 기다려도 여전히 움직임조차 없었다.호흡이 점점 고르게 변하자, 유하는 조심스럽게 베일의 한쪽 끝을 들어 올렸다.그리고 마침내 눈앞의 그림을 또렷이 바라보았다.그 순간, 유하의 눈에 놀라움이 번쩍였다.그림 속에는 검붉은 장미가 한가득 피어나 있고, 그 중심에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의 얼굴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햇볕에 그을린 듯한 갈색 곱슬머리가 어깨 위로 흘러내렸고, 선이 깊고 뚜렷한 이목구비 아래로 반쯤 감긴 눈꺼풀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연녹색 눈동자는 투명하게 빛났다.차가운 듯 선명한 그 시선은, 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할 정도였다.붉은 입술은 피를 머금은 듯 짙게 물들어 있었고, 그사이에 검은 장미 한 송이를 느슨하게 물고 있었다.입가의 미소는 우아했지만, 묘하게 불길했다. 마치 오래된 성당의 조각상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처럼 현실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었다.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끝엔... 어딘가 위험하고, 피 냄새가 섞인 매혹이 피어 있었다.더 기이한 것은... 남자의 창백한 목덜미에 식칼이 꽂혀 있었다.핏물이 흘러내려 어두운 옷자락을 적셨는데도,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연녹색 눈동자는 한곳을 향해 깊게, 광기와 사랑이 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유하는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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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0화

유하는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가정부가 다친 어깨를 소독하고 새 붕대를 감는 동안, 코시오는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아 유하의 어깨에서 스며나오는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미안. 내가 네 상처 눌렀지? 왜 말 안 했어.”유하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닥쳐, 제발.’정말... 말이 안 나왔다.약을 갈고 나자 방 안엔 짙은 장미 향기가 퍼졌다.그 향기에 어지럽고 피로가 몰려왔다.유하는 결국 눈을 감은 채,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잠들어버렸다....유하가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캄캄했다.그녀는 한참 멍하니 천장을 보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어 벌떡 일어났다.‘나... 잠들었던 거야?’그리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깨달았다.자신은 두껍고 무거운 드레스 대신, 가벼운 잠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창가로 흘러드는 달빛을 따라 방 안을 둘러보던 유하의 시선이, 벽 한쪽의 낯익은 그림에서 멈췄다.얼굴 없는 여자.복도에 걸려 있던 그 그림과 비슷했다.다만 이건 훨씬 밝고 화사한 색감이었다.그래서 오히려 이 화려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더 낯설게 떠올랐다.‘여기... 코시오의 안방이구나.’그 생각이 드는 순간, 유하는 꼼짝도 못 했다. 소파에 앉은 채 조심스레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달빛이 희미하게 흘러내렸다.검은 커튼을 두른 침대 옆 바닥에는 늑대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그럼... 코시오는 안에 있는 거야?’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가느다란 붓질 소리가 들려왔다.사각- 사각- 너무 작아서 숨소리와 구분도 안 될 정도였다.유하는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한 발, 두 발... 숨을 죽이며 소리의 근원을 향해 다가갔다.침실 구석, 화실로 이어진 작은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틈새로 희미한 불빛이 한 줄기 새나왔다.‘누가 있어...’잠시 망설이다가 유하는 탁자 위 은쟁반에 놓인 흰 베일을 집어 들었다. 머리부터 푹 눌러쓰고, 얼굴을 가린 채 조심스레 화실 안으로 들어섰다.그러자 붓질 소리가 뚝 멎었다.화실 안, 화구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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