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401 - Chapter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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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1화

손에 든 붓끝이 춤을 췄다.까마귀가 흩어지며 멀리 날아가고, 마른 나뭇가지들이 발톱처럼 뒤엉켜 흩날렸다.달은 먹구름에 삼켜져, 화폭 위에는 음울한 밤의 풍경이 펼쳐졌다.그것은... 박영심의 그림이었다.유하는 그저 박영심의 마음을 상상하며, 그녀의 붓끝을 따라갔다.박영심 마음속에 자리한 절망과 두려움을, 한 획 한 획 되살려 코시오에게 전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림 속 이미지가 말보다 더 깊이 영혼을 베기도 한다.희미한 조명 아래, 베일을 쓴 유하가 코시오의 손에서 붓을 놓았다. 마치 실이 끊긴 인형처럼 움직임을 멈춘 채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코시오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그는 멍하니 손을 들어, 그림 속 날개를 퍼덕이는 까마귀 위로 손가락을 멈췄다.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낮고 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자기야, 슬퍼?”코시오는 유하의 그림을 읽었다.유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그 말이 자신에게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대답이 필요한 질문이 아니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코시오의 말처럼... 정말 슬펐다.오씨 가문에 시집오던 날, 박영심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였다.‘어머님의 영혼은 상처투성이구나’유하는 박영심의 미소 너머 감정을 단번에 느꼈다.처음엔 유하도 그 이유를 몰랐다.하지만 이곳에 머문 지 며칠 만에 유하는 그 고통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이해할 수는 없어도 알 수는 있었다.그리고 확신했다.눈앞의 이 남자가... 바로 그 고통의 원죄였다.유하는 다시 붓을 들었다. 붓끝이 까마귀의 목덜미를 스쳤다.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느낀 듯 코시오가 여자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그러나 유하는 멈추지 않았다. 남자의 힘에 손목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그 고통을 꾹 참고 까마귀의 목덜미에 짙은 선을 그었다.즉, 까마귀의 머리와 몸이 갈라졌다.이와 동시에 붓이 바닥에 떨어지며 작은 소리를 냈다.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코시오의 분노가 쏟아질 그 순간을 기다렸다.오래 후, 유하 손목의 통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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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2화

식사를 마친 뒤, 코시오는 느닷없이 유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그는 말했다.“자기가 요즘 그렇게 힘든 건, 집에만 있어서 그래. 바람 좀 쐬자. 숲으로 소풍이라도 가자.”유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굳이 반박할 이유도 없었다.‘그래, 나도 이 집 공기엔 질렸으니까.’차는 굽이진 길을 따라 내달렸다.도심을 벗어나 해안가 숲이 우거진 곳에 멈췄다.유하가 입은 금빛 시폰 드레스가 바람결에 스쳤다.긴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앞서 걷는 코시오의 손에 이끌려 따라 걷기 시작했다.남자의 네이비색 리넨 재킷 자락이 풀잎을 스쳤다.풀밭 끝엔 작은 개울이 있었다.그곳엔 이미 몇 명의 고용인들이 와서 서 있었다.아무도 말이 없었다.식탁보, 바구니, 잔, 접시.모든 것이 이미 완벽히 준비되어 있었다.유하는 그들의 손에 이끌려 부드러운 의자에 앉았다.보이지 않아도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개울물이 돌에 부딪히며 흐르는 소리.숲속에서 울어대는 새와 벌레 소리.풋풋한 풀 냄새가 짙게 감돌았다.바람이 불어 꽃잎 몇 장이 유하의 치맛자락 위에 떨어졌다.그제야 팽팽하게 눌려 긴장하던 마음이 조금은 느슨해졌다.햇살이 시폰 위에 스며들어, 금빛으로 반짝였다.그 반대편, 개울가에 앉은 코시오가 붓을 들고 있었다.그가 무엇을 그리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분명 나를 그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유하는 고개를 돌렸다.‘도대체 저 인간은 무슨 생각으로 하루를 사는 거야?’코시오는 늘 한가로워 보였다.유하가 깨어 있는 시간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늘 어딘가 멍하니, 현실에서 반쯤 떠 있는 듯한 얼굴로.‘그는 날 이렇게 두고, 언제까지 이 섬에 가둬둘 셈일까?’...시간이 흘러, 따뜻한 햇빛 아래에서 과자 몇 조각을 집어먹자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유하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개울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코시오가 유하를 보고 다가왔다.남자의 손이 유하의 팔을 받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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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3화

분명 좋은 일일 터였다.하지만 다가오는 결혼식 때문인지, 유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아니, 오히려 답답함이 극에 달했다.이틀째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건 진짜 아니야. 더는 못 참아.’유하는 결국 코시오와 얘기를 하기로 결심했다. 아니, 꼭 해야 했다.‘결혼이라니, 미쳤나 봐.’‘어떤 이유로든 그건 안 돼. 절대 안 돼.’저녁 식사를 마친 뒤, 유하는 방으로 돌아와 코시오를 한참 기다렸다.그리고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그래서 늦은 시각, 복도를 따라 걸어 올라갔다.유하가 2층 안방 앞에 멈춰 서서, 얼굴에 베일을 다시 눌러썼다.문 앞에 선 그녀는 조심스레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었다.다시 한 번, 두 번...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화실에 있나?’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발길을 돌렸다.화실 앞에 다다르자, 문틈이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안쪽에 희미한 불빛이 번졌다.‘역시... 안에 있구나.’유하는 잠시 망설였다.‘지금 들어가면... 화낼까?’하지만 결국,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베일을 살짝 들어 올리고, 안쪽을 엿보는 순간, 유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눈이 커졌다.숨이 막혔다.화실 안은 엉망이었다.하얀 천으로 덮여 있던 그림들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천은 바닥에 흩어져, 그 아래 감춰졌던 그림들이 드러나 있었다.유하는 그중 한 점을 봤다.그림 속의 여자는 나체였다.가녀린 몸 위로 수많은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그 실들은 살을 파고들 듯 팽팽히 당겨져 있었고, 창백한 남자의 손이 그 실을 잡아, 여자의 목덜미를 세게 끌어당기고 있었다.남자는 여자의 눈물을 무시한 채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있었다.비슷한 그림이 한두 점이 아니었다.더 노골적이고, 더 혼란스러운 것들도 있었다.남자와 여자가 뒤엉켜 있는 장면, 여자 혼자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웃고 있는 그림...그리고 모든 그림 속 남자는 코시오였다.단 한 번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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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4화

생각이 정리되고 나자, 유하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결혼식이란 단어에도 예전처럼 질색하지 않았다.이제 밤마다 뒤척이며 잠을 설칠 일도 없었다.물론 알고 있었다.‘이 결혼식이 내게 의미 있는 이유는 딱 하나야.’‘그날,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열려야 해.’‘그래야 도망칠 수 있어.’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코시오가 평소처럼 자리를 뜨려 하자, 유하는 남자의 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아무 말 없이 그저 손끝으로만 붙잡은 채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요즘 들어 코시오는 아침 식사 후면 곧장 어디론가 사라졌다.늦은 밤에야 돌아왔다.그게 오히려 편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코시오가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손이 유하의 손 위로 포개졌다.말투는 늘 그렇듯 부드럽고,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자기야, 나 못 가게 하려는 거야?”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의 소매를 잡은 채 고개만 숙였다.“자긴 여전히 부끄럼이 많아. 붙잡고 싶어도 말은 못 하고.”코시오가 짧게 웃으며 속삭였다.“괜찮아. 어차피 난 자기를 너무 사랑하니까.”그 한마디에 유하는 숨을 삼켰다.‘사랑이라니, 웃기지 마.’결국 코시오는 그날 집에 남았다. 목적을 이룬 유하는 곧장 손을 빼냈다.화실에서 본 그 끔찍한 그림들 이후로, 유하는 더 이상 이 남자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겉으론 점잖고 품위 있는 척하지만, 그 내면은 썩어 문드러진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손끝이 닿는 것조차 역겨웠지만 참아야 했다.코시오는 그런 유하의 몸짓을 ‘수줍음’으로 착각한 채 낮게 웃었다....한낮의 정원.오늘은 화실 대신 햇살이 가득한 바깥에서 그림을 그렸다.화폭 앞에는 코시오가 아니라 금빛 시폰을 걸친 유하가 앉아 있었다.베일 한쪽을 들어 올리고, 붓을 들었다.이번엔 색이 달랐다. 늘 그리던 어두운 그림자 대신, 밝고 맑은 색들이 번졌다.캔버스 위에 장엄한 성당이 세워졌다.푸른 잔디 위에 햇살이 비쳤고, 화면 한쪽에는 붉은 태양이 걸렸다.그 풍경은 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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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5화

유하는 코시오에게 손목을 꽉 붙잡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 위로 붉은 점 몇 개가 떨어지고, 붓은 허공에서 멈췄다.코시오가 조금 더 힘을 주자 붓이 바닥에 떨어졌고, 유하는 그대로 품에 끌려 들어갔다.등 뒤로 전해지는 뜨거운 심장 박동, 머리 위로 느껴지는 거친 숨과 불안정한 목소리.“자기야, 생각해봤는데... 우리 결혼이 영원하다는 걸 교회에서 증명하자.”‘분명 내가 원하는 대로 됐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나지?’유하는 눈앞의 그림을 찢어버리고 싶었다.그림이 너무 감정적이었다.한참이나 숨을 고르고 나서야 유하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그래도 목적은 달성됐다.결혼식은 바다 한가운데의 섬, 교회에서 치르기로 했다.아마 유하의 연기가 너무 완벽했거나, 코시오가 너무 깊이 빠져 있었거나 혹은 그토록 그리던 사람이 스스로 결혼식에 참여하길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코시오는 유하에게 결혼식 장식과 구성을 전부 맡겼다.정원 한가운데, 유하는 커다란 화첩을 품에 안고 있었다.그 안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웨딩 디자인 도안들이 가득했다.유하는 그걸 보며 조금 놀랐다.이런 일을 해보는 건 처음이었다.비록 너무나도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는 결혼식이지만...그래도 이곳에서만큼은,유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생겼다.바로 바깥에서 온 웨딩 디자이너였다.“이게 전부인가요?”유하가 몇 장만 대충 훑어보다가 화첩을 덮었다. 맞은편에 앉은 갈색 곱슬머리 여자가 긴장한 듯 손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실례지만, 선생님은...”“리사예요, 사모님. 저는 리사라고 합니다.”리사가 조심스레 대답했다.“리사 씨, 이름이 참 예쁘네요.”유하가 미소 지었다.“저는 소유하예요. 그냥 유하 씨라고 부르세요.”리사는 유하의 뒤편에 서 있던 가정부를 힐끔 보았다. 그녀가 아무 반응이 없자 그제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유하 씨, 그럼 이 디자인들은... 마음에 안 드시나요?”“그건 아니에요.”유하는 결혼식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굳이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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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6화

“네그로니 두 잔.”바람막를 걸친 남자가 선홍빛 술이 든 잔 두 개를 받아 들고, 그중 한 잔을 바에 딱 붙어 반쯤 취해 있는 붉은 머리 남자 옆으로 밀어 놓았다.“좀 정신 차려.”붉은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천천히 고개를 들자 물처럼 맑은, 그러나 취기로 초점이 흐려진 파란 눈이 보였다.프랑시스는 반쯤 바에 엎드린 채로 밀려온 술을 마구 들이켰다. 파란 눈은 더 흐려졌지만,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승현의 손에 든 다른 잔을 낚아채려 했다. 그때 승현이 술잔을 살짝 피하자 프랑시스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젓는다.승현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차가운 눈빛을 드러냈다.“프랑시스, 또 이러기야?”“진짜 차갑네.”프랑시스가 툴툴대며 중얼거렸다.“승현, 오랜만이다? 넌 친구한테 인사도 이렇게 하냐, 술 한 잔까지 아까워하고, 너 참 구두쇠다, 구두쇠!”“계속 이러면 네 와인 셀러 태워버릴 줄 알아.”승현은 프랑시스의 횡설수설을 들을 인내심이 없었다.“너도 참 야박하다.”프랑시스는 투덜대며 비틀거리다 주머니에서 구겨진 초대장을 꺼내 승현에게 던졌다.“봐라, 코시오 저 늙은 괴물이 이번엔 진심이래. 네가 사랑하는 그 여자, 저 늙은 놈한테 시집간대... 하하하하하, 응당 그래야지! 늘 숨겨놓고선... 구두쇠!”초대장 위에는 신랑 이름이 선명히 ‘코시오’로 적혀 있었다. 이상하게도 신부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승현도 왜 이름이 빠져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저 늙은 놈이 아직도 우리 엄마를 생각하고 있네.’‘이제는 내 여자까지 눈독을 들이다니... 말도 안 돼.’승현은 속에서 분노의 불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프랑시스의 취한 투덜거림이 귀에 들려오자 참을 수 없어 울컥 일어나 주먹으로 한 방 먹였다.‘진짜 이럴 수가 있어...’그리고 손을 뻗자 프랑시스는 비틀거리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으윽...”프랑시스가 머리를 붙잡고 바 카운터 옆에 쪼그려 앉아 울부짖듯 욕을 해댔다.“오승현, 이 XX야, 아파 죽겠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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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7화

승현은 끝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이번 일은 단순히 유하를 되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코시오와의 대결이기도 했다.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정면으로 충돌한 건 대학 시절이었고, 그때 승현은 코시오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거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패배는 처절했고... 그 대가는 컸다.이번에는 달라야 했다.이번엔 승현이 반드시 이겨야 했다. 아니, 무조건 이겨야만 했다.승현이 술집 문을 나서자, 같은 검은 코트를 입은 태건이 조용히 옆으로 다가왔다.낮게 깔린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렀다.“모든 준비 끝났습니다.”“응.”잠시 생각하던 승현이 덧붙였다.“프랑시스 좀 감시해. 그 망할 결혼식 시작하기 전까지 술 못 마시게 해. 괜히 일 그르치지 않게.”“알겠습니다.”그때,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매혹적인 몸짓으로 다가왔다.허리를 살짝 흔들며 손끝에 매단 얇은 담배에서 연기를 내뿜고, 눈을 가늘게 뜨고 승현의 얼굴을 훑었다.그녀는 담배를 건네며 대담하게 미소 지었다.“잘생긴 오빠, 아까부터 바에서부터 눈에 띄더라. 오빠가 내 마음에 쏙 들어. 오늘 밤 약속 있어?”이어서 붉은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적시며, 의미심장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미안. 나 와이프 있어.”승현은 그녀가 건넨 담배를 밀어내며 담담히 말했다.“집에 있는 와이프가 담배 냄새 싫어해서, 오래전에 끊었어.”“아깝네...”여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짧게 답하고 웃고는 천천히 뒤돌아 걸어갔다.승현은 조금 전의 일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저 멀리 섬 한가운데로 돌렸다.그곳, 산꼭대기에 웅장한 고성이 우뚝 서 있었다.그 안에는... 승현이 사랑하는 여자... 승현의 아내 유하가 있었다....결혼식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왔다.유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불안과 초조가 커졌다.‘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딱히 근거라고 할 것도 없는 예감이었지만, 그 불길한 감각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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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8화

유하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몸을 확인하는 것이었다.다행히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잠깐, 설마 또 날 가둔 건 아니겠지?’그 생각이 들자마자 유하는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문으로 달려갔다.손잡이를 돌리자, 문은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밖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동안 자신을 감시하던 늑대 같은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이게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하지?’유하의 불안이 더 커졌다.코시오가 자신을 기절시킨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대체 왜 날 그런 식으로...’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유하는 곧장 욕실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옷을 벗어 던졌다.이어서 거울 앞에 서서 온몸을 샅샅이 살폈다.혹시 모르게 새겨진 상처나 흔적, 주사 자국이라도 있을까 봐...‘저 미친놈한테 뭘 기대한 게 잘못이지.’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몸은 전과 다를 바 없었고, 통증도 없었다.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럼... 왜 그랬던 거야?’유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도대체 코시오는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그날 저녁, 유하는 밥 한 입도 넘기지 못한 채 코시오의 손을 붙잡으며 입은 열지 않았지만, 두려움과 의문은 그 눈빛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코시오는 베일 너머 유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걱정 마, 자기야. 난 널 사랑해. 절대 나쁜 일은 하지 않을 거야. 그냥... 조금만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었을 뿐이야.”‘그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유하는 속으로 절규했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그리고 눈빛은 너무 확신에 차 있었고, 그 환상을 깨뜨리는 건... 지금의 자신에겐 너무 위험했다.그날 이후 며칠 동안, 유하는 신경이 곤두선 채로 하루하루를 버텼다.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겨우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하지만 마음속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도망치면 바로 병원부터 가야 해.’‘전신 건강검진을 받아야 해.’‘그렇지 않으면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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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9화

꽃잎과 노랫소리가 흩날리며 길을 채웠다.곧 검은 장미가 가득 피어 있고, 흰 비둘기가 원을 그리며 나는 성당 앞에 멈췄다.초대받은 하객들뿐 아니라, 소식을 듣고 몰려온 인파까지.너무도 화려하고 성대했다.비록 이 결혼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연극인지 알고 있었지만, 유하는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처음으로 신부 자격으로 서는 자리였다. 아무리 허울뿐인 결혼식이라고 할지라도.유하는 무거운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 흰 장갑을 낀 남자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들려온 코시오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자기야, 꽉 잡아.”착각일까... 그 웃음 섞인 말 속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마치... 울고 있는 사람처럼.‘코시오가 울고 있다고?’그 생각에 유하는 숨이 멎는 듯했다.그토록 잔혹하고 냉담한 남자가 눈물을 흘릴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아니야, 내가 잘못 들은 거야.’하객들의 환호와 축하가 너무 요란했으니까.유하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코시오의 손이 강하게, 너무도 강하게 유하의 손을 움켜쥐었다.마치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이상하게 슬퍼...’꽃으로 덮인 붉은 카펫 위를 걸으며,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유하는 맞잡은 손끝에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하나... 둘... 셋...쾅!붉은 카펫의 끝, 텅 빈 성당 안에서 폭발음이 터졌다.땅이 크게 흔들리고,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이어졌다.코시오의 손이 잠시 느슨해졌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하는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그리고 바로 베일을 벗어 던지며, 다른 손으로 허리끈을 잡아당겼다.별처럼 반짝이던 무거운 드레스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안에는 가벼운 흰색 원피스가 드러났다.유하는 마침내 얼이 빠진 코시오와 마주했다.그제야 그녀는 처음으로 코시오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시간은 코시오에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박영심의 그림 속 코시오와 한 치의 차이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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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0화

바닷바람이 불고, 음악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사람들의 함성이 뒤섞인 가운데, 오렌지색 오픈카 위, 흰 드레스와 베일을 쓴 유하가 선글라스를 낀 승현의 목을 감고 있었다.고동치는 유하의 심장이 아직 진정되기도 전에, 승현의 낮고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그 순간, 세상이 고요해졌다.‘뭐야, 이 타이밍에?’정신이 번쩍 든 유하는 곧 불붙듯 화가 치밀었다.‘지금이 장난칠 때야?!’분노와 공포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유하는 아무 생각 없이, 목에 걸쳐 있던 팔에 힘을 주며 몸을 끌어올렸다.그리고 그대로 머리로 승현의 이마를 세게 들이받았다.“미친놈!”승현은 피하지 않았다.부딪히는 순간,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낮고도 여유로운 웃음이었다.“여보.”“야, 오승현! 진짜 친구면 멋 부리지 말고, 그냥 도망치자고 좀!”옆자리에서 퉁명스럽고 시끄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유하가 고개를 돌리자, 운전석에 앉은 빨간 머리 남자가 보였다.그는 핸들을 세게 돌리며 뒤쪽을 확인하더니, 유하의 시선을 느끼고 입꼬리를 올렸다.“안녕, 예쁜 아가씨. 난 프랑시스라고 해.”쾅!승현이 바로 프랑시스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휘갈겼다.“운전이나 해, 일단 이 섬에서 벗어나자고!”“젠장, 여자만 눈에 보이면 정신을 못 차리네.”프랑시스가 욕을 내뱉었지만, 여기가 코시오의 섬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바로 잡힐 게 뻔했다.그는 재빨리 카 퍼레이드용 확성기를 집어 들고 외쳤다.“얘들아, 튀어!”“오!”화려한 꽃과 리본으로 장식된 퍼레이드 차들에서 환호가 터졌다.쿵쿵! 팡팡!차에 타고 있던 밴드가 북을 두드리며 리듬을 맞춰 갔다.퍼레이드 행렬이 돌기 시작했다.도망치는 듯 보였지만, 곧 원형으로 돌며 인파와 차량 사이를 막아섰다.그리고 그 틈을 뚫고 오렌지색 오픈카가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나갔다....유하는 승현의 품에 안긴 채 얼굴에 스치는 바닷바람을 느꼈다.그리고 뒤를 돌아보자, 사람들로 북적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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