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Bab 971 - Bab 980

1021 Bab

제971화

“씨X, 소유하! 네가 일부러 그런 거잖아. 일부러 나한테 복수하려고!”“이 개 같은 년...!!”승현이 들어서는 바로 그때, 하루 종일 팽팽한 압박 속에서 이겼다 졌다를 반복하며 감정이 널뛰던 박건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정신까지 몇 번이고 짓눌린 박건은 경호원 둘에게 붙들린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제 처지도 잊은 듯 유하를 향해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하지만 욕설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곧 박건은 승현이 손을 들자마자 경호원들의 손에 화투패로 입이 틀어막힌 채, 테이블 앞에 끌려가 세워졌다.승현은 유하 뒤로 걸어가 의자 등받이에 두 손을 짚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몸을 살짝 숙여 유하에게 물었다.“놀고 싶었으면 나한테 말하지. 내가 사람 몇 더 불럿 보냈으면 되잖아. 이런 천박한 것들을 왜 불러서 귀를 더럽혀.”“야, 야!”설아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테이블을 쾅 두드렸다.유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옅은 웃음이 걸려 있었고, 손끝에는 화투패 한 장이 흔들림 없이 쥐어져 있었다.유하는 그 말을 듣고도 태연하게 대답했다.“네 친구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 마침 이 둘은 아는 얼굴이라 불렀어.”“친구?”승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몇 번 본 게 다고, 말도 섞은 적 없는데 무슨 친구야.”그러고는 다시 물었다.“네가 저것들을 어떻게 알아?”예전의 승현은 유하를 친구들 모임에 거의 데리고 가지 않았다. 사적으로는 승현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지만, 승현의 아내를 직접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말로 꺼내는 일조차 드물었다.유하를 데려가기 싫어서가 아니었다.그저 누구에게도 자기 아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안 됐고,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그런데 박건과 차준은 대체 어떻게 유하를 알게 된 걸까?승현이 그 질문을 던지자 방 안은 곧장 조용해졌다.차준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방금 전까지 이성을 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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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2화

“물론이지.”승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그것도 네 거잖아.”“난 네가 진작 나를 이사회에서 빼버린 줄 알았는데?”유하가 미소 지었다.유하는 MB그룹에 보유하고 있던 자산 대부분을 승현이 돌아와 그룹을 넘겨받은 뒤로 거의 넘겼다. 유하는 그때 이사회에서도 물러났고, 일부 유하에게 부득이하게 남긴 지분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이후로는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 인감도장이 아직 효력을 가지는지 알 수 없었다. 효력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인감도장 자체는 진짜였으니까.지금 승현에게 확답을 들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었다.“그럼 됐어.”유하는 웃으며, 조금의 미안함도 없이 말했다.“미안한데 나 다 잃었어. 되찾고 싶으면 한 판씩 이겨서 가져가.”말을 마친 유하는 승현이 어떤 표정을 짓든 신경 쓰지 않았다. 곧바로 몸을 돌려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를 떠났다....경호원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돌아온 유하는 윤해월이 곁에 있는 가운데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오늘 잡아둔 화투판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집 안이 조용할 리 없었다. 그래서 유하는 아침 일찍 윤해월에게 아이들을 모두 3층에서 방음이 가장 잘되는 홈시어터룸으로 데려가게 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그곳에서 밥을 먹고, 놀고, 영화를 봤다.처음에는 아이들이 가만히 있어 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지만, 윤해월의 말로는 다들 생각보다 얌전했다고 했다.씻고 나온 유하는 곧장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오후부터 화투는 거의 아무렇게나 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유하는 오늘 오후의 신경전으로 탈진할 지경이었다.여기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쳐 있었다.그렇게 눈을 감고 잠들었다가, 새벽에 설아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시간을 묻고 나서야 벌써 새벽 3시가 넘었다는 걸 알았다.유하가 떠난 뒤에도 아래층 화투판은 새벽까지 이어졌다.“아깝다. 네가 직접 봐야 했는데.”설아가 침대맡에 앉았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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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3화

설아가 두 사람의 벗은 꼴까지 보고 싶지는 않다고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다면, 박건과 차준에게 몸에 걸친 마지막 옷가지마저 지켜지지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너도 봤잖아.”차준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오승현이 변호사까지 불러서 그 자리에서 서명 확인 다 받아 갔어. 이제 와서 물릴 방법 없어.”“그럼 어쩌라고! 이 꼴로 집에 가서 뭐라고 설명하냐고!”박건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증오와 두려움에 뒤틀린 표정으로 박건이 악을 쓰듯 으르렁거렸다.“소리 지르면 뭐가 달라져? 그럴 힘 있으면 예전에 소유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나 떠올려 봐. 어떻게든 사과하고 빌어. 그러면 뺏긴 재산의 일부라도 돌려받을지 모르지.”거기까지 말한 차준의 표정도 싸늘하게 굳었다.“따지고 보면 나는 네 일에 휘말린 거야. 우리 집안이 하연우 쪽이랑 조금 엮여 있긴 해도, 그런 더러운 짓에 끼어든 적은 없어. 기껏해야 모른 척했을 뿐...”말끝을 흐리던 차준은 박건의 사람 같지 않은 원망 어린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괜히 이 머리 빈 미친놈을 더 자극했다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차준은 속으로 욕을 삼키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저택 단지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한참 떨어진 뒤, 박건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차준은 그제야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 진동이 울린 핸드폰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문자가 떠 있었다.「잘했어요. 이번 일이 지나가면 오늘 뺏긴 집안 자산은 다시 돌려줄게요. 손해 본 만큼 따로 보상도 할 거고... 그러니, 오늘 일은 잊어요.」차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문자를 지운 뒤, 차준은 주택단지 밖 골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골목 안에는 차준을 집까지 데려다줄 차가 서 있었고, 차 위에는 얇게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설아는 방금 메시지를 보낸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졸음에 잠긴 유하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제는? 다음엔 뭐 할 건데?”유하가 고개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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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4화

“박건은 제 손님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저를 방 안으로 억지로 끌고 들어갔어요. 저한테 나쁜 짓을 하려고 했고, ‘오승현은 하연우 만나러 갔다. 너한테 관심도 없어. 차라리 이혼하고 나한테 와라’ 같은 멍청한 말까지 했죠.”거기까지 말한 유하가 짧게 웃으며 설아를 바라봤다.“배 대표가 보기에도 박건은 참 멍청하죠?”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하가 대강 넘기듯 말했지만, 설아는 알 수 있었다. 그날 박건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지금 유하가 담담하게 옮긴 것보다 훨씬 더 더럽고 끔찍했을 것이다.유하는 잠시 웃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저는 그때 몸부림치고 소리도 질렀어요. 그런데 거실에 있던, 박건이랑 같이 온 친구들은 다 고개 숙이고 게임만 하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못 본 사람들처럼요. 화장실에 갔다던 제 손님도 끝까지 나오지 않았고요.“다행히 제가 오래 옷을 만들면서 힘쓰는 일도 꽤 했잖아요. 팔힘이 아주 약한 편은 아니라서, 벽장 안에 있던 도자기를 집어 박건 뒤통수를 내려쳤어요. 아랫도리도 걷어찼고요...”유하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낮고 느리게 덧붙였다.“배 대표는 아마 제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를 거예요. 저는 정신없이 도망쳐서 한참 멀리 간 뒤에야 피투성이가 된 제 손을 보고 무서워졌어요.”“그런데 제가 두려워한 건 이런 거였어요. ‘박건이 죽었으면 어떡하지? 나를 고소하면 어떡하지? 시댁에서 알게 되고 나를 버리면 어떡하지?”“그리고... 손님 집에 있던 그 도자기, 왠지 귀한 골동품 같았는데. 나, 그거 물어줄 돈 없는데.’과거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던 건지, 유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침실 안에는 유하의 웃음소리만 흘렀고, 설아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유하는 한참을 웃은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아마 제 몸에 걸쳐져 있던 오씨 가문의 작은 사모님이라는 껍데기가 그때만큼은 조금 쓸모가 있었나 봐요.”“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벌벌 떨면서 지냈는데,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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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5화

하루 종일 화투판을 벌인 데다 새벽에는 설아가 불러서 깨우기까지 해서, 다음 날 유하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잠에서 깬 뒤에도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식사는 평소처럼 방 안 작은 테이블에서 했다.유하는 승현이 뭔가 물어볼 줄 알았다. 어제 MB그룹 인감도장을 들고 장난처럼 멋대로 써 버린 일에 대해.하지만 식사가 끝날 때까지 승현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묵묵히 유하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챙기기만 했다.유하가 바란 건 이런 태도가 아니었다. 유하는 승현이 성격 좋은 남편인 척, 계속 참고 넘어가게 만들려고 그런 일을 벌인 게 아니었다.“나한테 물어볼 거 없어?”유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유하의 식사를 다 챙긴 뒤에야 승현은 식기를 들고 자기 몫을 먹기 시작했다. 요 며칠 내내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유하의 물음에도 승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크림수프를 떠먹었다.“물어보면 네가 말해 줄 거야?”승현이 유하가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다만 유하가 자신에게 말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지난 세월 동안 너무 많은 신뢰와 대화가 비어 있었다.“당연하지.”유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난 네가 어젯밤 그 자리에 앉아서 화투판을 이어 갔을 때, 이미 내 대답을 들은 줄 알았는데.”승현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유하를 바라봤다.간밤에는 큰 눈이 내렸다. 안방의 작은 거실은 발코니와 가까웠고, 지금은 속 커튼이 걷혀 있었다. 닫힌 유리문 너머로 난간에 쌓인 눈이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반짝였다.햇살이 비스듬히 방 안으로 들어와 유하의 몸 위에 내려앉았다. 햇빛을 받은 유하의 몸은 금빛으로 감싼 듯했고, 핏기 없이 창백한 낯에도 따스한 빛이 얹혔다.부드럽게 웃고 있는 유하를 보며 승현은 잠시 멍해졌다. 오래전으로 되돌아간 듯했다.그날, 큰눈 속에서 마주했던 웃음.승현은 침묵에 잠겼고, 유하도 그 고요를 깨지 않았다. 한참 뒤, 공기 속에 다시 숟가락이 도자기 그릇에 닿는 소리만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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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6화

유하는 재윤이 화집을 보면서 문득문득 던지는 질문에 가끔 대답해 주었다. 원래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이 없는 준서도 오늘은 평소와 달리 옆에 앉아 있었다. 유하를 한 번 보고, 재윤을 한 번 보며 말 한마디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다.준서의 눈은 점점 더 서운한 빛이 짙어졌다.아마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준서도 버틸 만큼 버틴 모양이었다. 준서는 잠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발소리를 크게 내며 서재를 나갔다.서재 문이 쾅 닫혔다.재윤은 유하의 표정을 살피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화집을 넘겼다. 공기 속에 침묵이 한동안 머문 뒤, 재윤이 불쑥 입을 열었다.“스승님은 준서가 많이 싫으세요?”“어?”유하는 멍해졌다. 바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스승님은 아마 준서를 싫어하는 건 아닐 거예요.”재윤이 스스로 말을 이었다.화집장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 팽팽하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지고, 유하의 어깨와 등이 덜 굳어지는 것을 본 뒤에야 재윤은 계속 말했다.“제가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 사람이 제 앞에 있어도 그냥 무 하나가 놓여 있다고 생각해요. 아예 없는 사람처럼 취급해요.”재윤은 조곤조곤 설명했다.“그런데 준서가 있을 때마다 스승님은 눈이 안 보이시는데도 준서가 옆에 있는 걸 아시는 것 같아요. 계속 집중 안 되고, 딴생각하시잖아요.”재윤의 시선이 화집 한쪽 구석에 적힌 화가의 이름에 닿았다.“방금 스승님이 알려 주신 저 그림 화가 이름도 틀렸어요.”유하는 민망한 듯 코끝을 만졌다.“미안. 아마, 아마 내가 헷갈렸나 봐.”“스승님이 요즘 기억력이 좀 안 좋으시긴 한데요.”재윤은 유하가 얼버무릴 틈을 주지 않았다.“이 질문, 어제도 제가 했어요. 어제 스승님이 하신 대답은 맞았어요.”‘이 녀석, 언제 이렇게 사람 말을 떠보는 법까지 배운 거야.’유하는 속으로 난감해하면서도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으며 모르는 척했다.다행히 재윤은 더 캐묻지 않았다.한동안 공기 속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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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7화

재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유하는 한동안 재윤을 돌보았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됐다. 재윤이 밤마다 악몽에 놀라 깨어난다는 것을. 여러 방법을 써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밤, 재윤이 또다시 악몽에서 깨었을 때 유하는 문득 예전에 부르던 그 동요를 낮게 흥얼거려 보았다.그날 밤, 재윤은 아주 편안하게 잠들었다.이후 많은 일이 있었다. 유하는 재윤을 미처 챙기지 못할까 봐, 일부러 자신이 흥얼거리는 동요와 잠자리에서 들려줄 이야기를 녹음했다. 유하가 곁에 없어도 재윤이 그걸 들으면서 잘 잠들 수 있도록.지금은 더 이상 그런 녹음이 없어도 재윤은 악몽에 놀라 깨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유하에게 매달렸다. 같이 자 달라고, 잠들기 전까지 이야기해 달라고, 동요를 불러 달라고.유하는 가능한 한 재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유하는 재윤이 곁에 있는 감각을 좋아했다.유하의 인생이 가장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던 시절에 곁으로 다가온 아이. 재윤은 유하 마음속에서 늘 특별한 자리를 차지했다.그 감정을 굳이 말로 옮기자면, 깊은 바닷속에서 하늘이 내려 준 꽃 한 다발을 건져 올린 기분과 비슷했다. 유하는 그저 물속에 깊이 가라앉은 꽃을 건져 올려 햇볕 아래 놓았을 뿐인데, 비바람에 휩쓸려 말라붙었던 마음속 방 전체가 향기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유하를 아는 사람들은 늘 유하가 재윤을 구했다고 생각했다. 재윤이 자기 어머니가 남긴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유하라고 여겼다.하지만 유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재윤은 본래 보석이었다. 아름다운 꽃이었다. 유하는 그저 운이 좋았다. 보석 위에 먼지가 내려앉았을 때, 꽃이 잠시 고개를 숙였을 때, 마침 옆에서 손을 내민 것이 전부였다.그 정도에 불과했는데도 유하는 마음속 어딘가,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던 빈자리가 꽃향기와 보석의 빛으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끝내 아물지 않을 것 같던 상처도 꽃잎이 떨어져 쌓이는 동안 서서히 아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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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8화

의료실 안에서 승현은 긴급으로 받아 든 보고서를 넘기고 있었다. E국에서 온 의사는 곁에서 보고서에 적힌 수치와 상태를 E국말로 설명했다.검사 결과는 분명했다.승현은 오래 걸리지 않아 유하의 현재 몸 상태를 파악했다. 그러다 보고서는 마지막에 페이지에서 멈췄고, 승현은 같은 페이지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그곳에 적힌 것은 유하의 눈 검사 결과였다.승현은 그 몇 장의 보고서를 바라본 채,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곁에서 설명하던 E국 의사도 점점 말을 줄였다.승현은 한동안 더 보고서를 들여다보다가 다시 E국말로 의사에게 몇 가지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의료실을 나섰다.문밖으로 나온 승현은 기다리고 있던 직원에게 담담히 지시했다. 의사들을 미리 잡아 둔 호텔로 모시고 가 쉬게 하라고. 의료진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당분간 이곳에 머물 예정이었다.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던 승현은 준서가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준서는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뒤쫓아오던 희은은 승현을 보고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 승현이 묻기도 전에 준서의 방으로 들어갔다.승현은 준서의 방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두 아이가 달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서재 쪽이었다.잠깐 생각하던 승현은 준서를 찾아가지 않고 서재로 들어갔다.서재 안은 조용했다.통유리로 막힌 발코니에 유하는 담요를 덮고 긴 의자에 몸을 웅크린 채 잠든 듯했다. 재윤은 맞은편 긴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 작은 의자를 하나 가져와 유하 곁에 붙여 두고 앉아 있었고, 한 손은 담요 밖으로 나온 유하의 손을 잡고 있었다.승현이 들어오자 재윤은 고개를 들어 한 번 바라봤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승현은 유하에게 다가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뺨의 온기를 확인했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자 손을 거두고 옆에 앉았다.“무슨 일이야?”승현의 질문은 모호했다. 누구를 지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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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9화

준서는 장식품을 손에 움켜쥔 채, 던지려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희은은 용기를 내어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도련님이 사모님께서 도련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단정한다면, 더 걱정할 게 뭐가 있어요? 조금만 더 솔직해져도, 조금만 더 있는 그대로 보여 드려도,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 있나요?“왜 한 번 시도도 해 보지 않아요? 도련님은 겁쟁이가 아니잖아요.”망가진 욕실 난방기 쪽에서 물이 계속 떨어졌다. 준서의 머리와 얼굴은 흠뻑 젖어 있었다. 준서는 적을 앞에 둔 어린 짐승처럼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는 희은을 노려봤다.한 걸음, 또 한 걸음.둘 사이에는 이제 한 걸음 정도의 거리만 남았다. 희은은 준서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준서가 높이 치켜든 장식품을 붙잡았다.준서의 손에서 장식품을 잡아당겼지만 처음에는 빠지지 않았다.다시 힘을 주자, 준서가 손을 놓았다. 준서는 마음 한구석에서 이미 희은의 말을 조금 믿기 시작했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물었다.“확실해?”“물론이죠!”장식품을 빼앗아 든 희은은 속으로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준서의 물음에 연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며칠 전 유하와 단둘이 있었을 때의 일도 이야기했다. 다만 유하가 약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뺐다.사실 희은이 유하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것도 그날 밤이었다.특히 그날 밤, 재윤이 혼자 희은을 찾아와 물은 뒤부터였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유하와 준서를 지켜봤고, 희은은 그 추측이 점점 더 확실하다고 느꼈다.유하가 싫어했던 것은 처음부터 준서가 아니었다.승현이 시킨 일에는 아직 희망이 있었다.물론 지금은 유하와 준서가 화해할 수 있는지에 예전만큼 마음을 쏟고 있지는 않았다. 희은은 더 이상 유하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재윤이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았고, 기꺼이 재윤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희은은 사실 유하를 돕고 싶었다.진짜 희은을 유일하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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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0화

다음 날, 유하가 일어났을 때 승현은 보이지 않았다. 말했던 대로 이른 아침 회사로 출근한 뒤였다.회사에는 밀린 일이 꽤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 뒤 며칠 동안 승현은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왔다. 늦게 일어나 일찍 잠드는 유하는 매일 승현을 보는 것도 어려웠다. 승현이 언제 나갔는지도, 언제 돌아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마주치지 않으니 싸울 일도 줄었다.유하의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아이들과 자주 놀고, 영화도 함께 봤다. 덕분에 집 안의 분위기도 한결 가벼워졌다.반면 MB그룹 대표실 쪽 공기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졌다.회의 하나가 끝났다. 참석자들은 숨소리조차 낮춘 채, 상석에 앉은 승현이 뿜어내는 보이지 않는 압박을 견디며 조심조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문밖으로 나오자 창백하게 질린 얼굴들 위로 그제야 해방감이 떠올랐다.원래 얼마간 휴가를 쓰겠다던 승현이 갑자기 회사로 돌아온 뒤, 승현과 직접 마주해야 하는 임원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도대체 오 대표 휴가 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휴가를 접고 돌아온 것도 모자라, 성격까지 하루가 다르게 날카로워졌다.회의 중에는 누구에게나 냉기를 뿜어냈고, 업무 보고는 거의 심문을 받는 것과 다름없었다.사무실 안 근무자들에게는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모두 승현 몰래, 단톡방에서 온갖 추측과 소문, 하소연을 쏟아내는 식이었다.사람들이 모두 나간 뒤, 회의실에는 승현과 태건만 남았다.태건은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를 보고하다가, 자연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박씨 집안에서 또 사람이 왔습니다. 그날 화투판에서 박건 씨가 사모님께 무례한 말을 한 일로 사과드리고 싶다고 합니다.”“안 만나.”승현은 태건이 건넨 서류를 넘기며 고개도 들지 않았다.“박씨 집안은 계속 압박해. 그쪽과 친하게 지내던 집안들에게도 전해. 박씨 집안을 돕고 싶으면, 그 뒤로 닥칠 결과까지 감당할 수 있을 때 움직이는 게 좋을 거라고.”승현은 박씨 집안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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