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961 - Chapter 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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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1화

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공기 속의 분위기는 갑자기 팽팽하게 조여 들었다.유하가 왜 병원에 가는 일을 그토록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승현은 걱정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유하를 자극할 수는 없었다. 결국 승현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다른 거 하자는 게 아니야. 그냥 종합검진만 받자.”“나 안 가.”유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단호한 세 글자뿐이었다.“여보!”유하가 자기 몸을 이렇게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토록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자 승현의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유하가 이를 악문 채 차갑고 완고한 표정으로 버티고 있는 것을 보자, 승현의 목소리는 결국 누그러졌다.“이유를 말해 줄 수는 없어? 그냥 병원 가서 검사만 받자는 건데, 대체 뭐가...”“의사도 말했잖아. 잠깐 감정이 올라온 데다 몸이 허해서 그런 거라고.”유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그럼 쉬면 되잖아. 잠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정말 잠깐 감정이 올라와서 그런 거라면 얼마나 좋겠어.’승현은 실제 상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유하에게 숨기기로 한 탓에 답답함만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말로 설득하자니 통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정말 유하를 들쳐 업고 병원에 갈 수도 있었다. 어차피 유하는 힘으로는 승현을 막지 못할 테니까.하지만 승현이 정말 그렇게 했다가는 유하가 또 생각이 막다른 곳까지 몰리고, 감정에 휩쓸려 그 자리에서 쓰러질지도 몰랐다.승현은 그게 두려웠다.다만 승현에게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 근심의 거의 아홉은 돈으로 해결된다는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까.이미 생각을 정한 승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네 뜻대로 할게. 병원 안 가.”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조금 더 자. 아이들은 내가 가서 안심시킬게.”유하가 침대에 다시 눕는 것을 확인한 뒤, 승현은 방 안에 조금 더 머물렀다. 얼마쯤 곁을 지키다가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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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2화

승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조금 옮겨 준서를 향했다.준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말하려 하지 않았다. 재윤이 손을 뻗어 준서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고 나서야 준서는 고개를 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네. 저 공부 열심히 할 거예요. 엄마가 나아지면, 그때 다시... 다시 보러 갈 거예요!”말을 마친 준서는 승현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준서는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한 권 뽑아 들고, 발코니에 놓인, 유하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준서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책을 읽는 척했다. 준서가 손에 든 책은 거꾸로 들려 있었다.재윤은 승현을 향해 해맑게 웃었다. 재윤도 화집을 품에 안고 준서 옆에 앉았다.두 아이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조용하고 학구적인 풍경이었다.승현은 문가에 기대어 한동안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재윤이 대체 무슨 일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가장 말을 듣지 않는 준서가 이렇게 얌전히 앉아 있다니, 이상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다행한 일이었다.이 집은 당분간 더 흔들릴 여유가 없었다.승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발코니의 두 아이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두 아이에게 붙일 개인 교사를 알아보러 갔다.승현의 머릿속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설아 누나 아이인데, 성격은 엄마를 닮지 않았네.’‘섬세하고 눈치도 빠르고, 누나보다 훨씬 침착해.’문이 닫히자마자, 발코니에서 책 읽는 척을 하던 준서는 거꾸로 든 책을 곧장 내려놓았다. 준서는 재윤을 노려보았다.“너... 나 속이는 거 아니어야 해.”“물론이지.”재윤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난 거짓말 안 해.”“그게 무슨 뜻이야?”준서는 바로 날카롭게 반응했다.“넌 나보다 운이 좋아.”재윤은 화집을 덮고 준서를 바라보았다.“넌 스승님 아이잖아. 넌 태어날 때부터 스승님 마음속에 누구도 지울 수 없는 자리를 갖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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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3화

유하는 실제로 배가 고팠다. 오래 잔 탓에 온몸에 힘이 빠져 말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승현이 자신을 품에 안은 채 조금씩 먹이는 대로 가만히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하지만 배가 고팠음에도 유하는 몇 숟가락 먹고 나자 금세 더는 삼키기 어려워졌다. 승현에게 떠밀리듯 조금 더 먹기는 했지만, 갈수록 짜증이 올라왔다. 결국 유하는 참지 못하고 승현을 손톱으로 한 번 할퀴었다. 그제야 겨우 식탁 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진짜 고양이 같네. 내 얼굴을 할퀴면, 나중에 넌 뭘 보고 살려고...”승현은 유하를 다시 침대 위에 눕히며 투덜거렸다.유하는 승현을 상대할 기력도 없었다.그때 마침 윤해월이 달여 온 약을 들고 들어왔다. 전신 검사를 하기 전까지는 눈을 치료하는 약을 계속 먹어야 했다. 게다가 그 약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울적함을 풀어주는 약재도 들어 있었다.하지만 약을 먹을 때가 되자 유하는 또다시 버티기 시작했다. 쓰다며 싫어했고, 승현이 먹여 주는 것도 거부했다. 버둥거리던 중에는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까지 깨뜨렸다.방 안의 분위기가 꼼짝없이 굳어 버렸을 때, 아래층에서 저녁을 먹고 올라온 재윤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재윤은 방 안에 내려앉은 무거운 기운을 느끼지 못한 아이처럼, 바닥에 흩어진 조각들을 피해 침대 곁으로 와 앉았다.“스승님, 약이 쓰다고 하셔서 제가 복숭아정과 가져왔어요. 달아요. 예전에 제가 약 먹기 싫어했을 때, 스승님이 저한테 이런 거 주셨어요.”재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약그릇을 집어 들었다.“그때 스승님이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약을 먹으면 몸이 나아지고, 아프지 않게 되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요.”침대 머리맡에 웅크린 채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 있던 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만 재윤 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였다.재윤은 승현을 돌아보았다.“삼촌, 제가 여기서 스승님이랑 있을게요. 준서가 방금 아래층에서 삼촌 찾았어요.”그때의 승현은 검은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차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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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4화

다만 유하는 승현이 먼저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다.승현을 상대할 때라면, 유하에게는 얼마든지 받아칠 말이 있었다. 뜻밖에도 희은이 먼저 알아차렸을 때도 유하에게는 나름대로 준비해 둔 말이 있었다.하지만 재윤에게는... 유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재윤은 언제나 유하를 지나칠 정도로 배려하고,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아이였다. 유하가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재윤이 스스로 말을 이어 갔다.“스승님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거죠? 그 일이 스승님이 약을 드시는 것과 관련이 있고요.”“맞아.”유하는 결국 대답했다.“그럼 스승님은 알고 계세요? 약을 안 드시면 스승님 눈이 낫지 않는다는 거요?”재윤은 계속 물었다.“스승님은 지금 스승님 몸을 해치고 계신 거예요.”“알아.”이번 대답은 조금 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하지만 내가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재윤은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물었다.“그럼 스승님 눈은 나을 수 있어요?”“나을 수 있어.”유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생각한 뒤, 덧붙였다.“내가 해야 할 일에 기한을 정해 놨어. 그 시간 안에서는 괜찮을 거야. 만약 한계에 다다랐는데도 내가 하려는 일이 결과를 내지 못하면, 난 포기할 거야. 그러면 먼저 내 눈부터 치료할 거고.”유하는 정말로 자기 몸을 걸고 도박할 생각은 없었다. 일이 이뤄질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유하는 먼저 눈을 치료할 생각이었다.“낮에 엄마가 전화로 말한 일이에요?”유하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저었다.“그건 시작에 불과해.”“알았어요.”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제가 스승님을 도울게요. 앞으로는 제가 스승님께 약을 가져다드릴게요... 그러면 승현 삼촌은 모르실 거예요.”재윤은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하지만 재윤은 원래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게다가 오씨 집안에 머무는 이상,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스승님이 하려는 일은 분명 승현 삼촌을 향한 일이야.’“안 돼!”유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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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5화

며칠째 가느다란 눈발이 흩날리더니, 시간은 금세 다음 주 화요일에 닿았다.요 며칠 동안 유하는 몸 상태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보냈다. 식사도 방에서 했다. 다만 매일 꼭 해야 하는 산책 시간에만 아이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놀았다.드물게 평온한 나날이었다.승현이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유하가 준서와 이따금 마주쳤음에도 그날처럼 심각한 신체화 반응을 다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유하가 갈수록 잠이 많아진다는 사실을 승현은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그래서 화요일 이른 새벽, 태건에게서 E국 정신의학연구원 의료팀이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자, 며칠째 집에만 머물던 승현은 아침 일찍 직접 공항으로 나갔다.그런데 차가 한참 달리던 중, 집에 있던 윤해월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흩어진 앞머리 아래, 길게 뻗은 눈매를 느리게 들어 올린 승현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희끄무레한 설경을 바라보는 승현의 이어폰 속으로 윤해월의 보고가 흘러나왔다.[일은 그렇게 됐습니다. 배설아 대표님이 손님 두 분을 모시고 오셨어요. 사모님과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하시고요. 제가 보기에는 대표님 예전 지인분들 같았습니다. 박씨 집안과 차씨 집안 그 두 분이요.]‘박씨 집안? 차씨 집안...’승현은 잠시 생각한 뒤에야 두 사람을 떠올렸다. ‘박건과 차준...’친구라고 부르기보다는 술자리에서 몇 번 어울린 사람들에 가까웠다. 승현과 그 두 사람은 딱히 친하지 않았다. 예전 사교 모임에서 몇몇 지인들이 판을 키우려고 사람을 불렀을 때, 몇 번 마주친 자리의 곁다리 같은 존재들이었다. 별다른 무게감도 없었다.그래서 승현은 한참을 더듬고 나서야 기억 구석에서 흐릿한 인상을 끌어낼 수 있었다.‘왜 갑자기 저런 사람들을 집으로 불렀지?’‘손님으로... 아니, 잠깐. 차준. 이 사람은...’승현은 잠시 더 생각했지만 끝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승현은 앞에 놓인 노트북을 열어 태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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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6화

“왜?”설아는 곁눈질로 박건을 흘끗 보았다. 얼굴에 경멸이 가득했다.“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그냥 맞고 무릎 꿇어 고맙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나한테 감히 대들어?”설아의 전적은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남편을 죽이고 감옥까지 다녀온 사람이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게다가 배씨 집안의 힘을 생각하면, 설령 맞았다 해도 박건은 속으로 재수 없었다고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박건은 집안의 3대 독자였다. 어릴 때부터 귀하게만 자랐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었다. 이런 모욕을 당해 본 적이 있을 리 없었다.박건은 절대로 말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이를 화투패로 맞아 올라오는 치통을 참으며 더듬거렸다.“내, 내가 틀린 말 했어? 나는 오 대표님 초대로 온 손님이야! 오 대표님은 어디 계십니까? 오 대표님!”박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승현에게 기대어 설아를 눌러 보려는 속셈이었다.설아가 웃었다. 손에 쥔 화투패를 심심하다는 듯 만지작거렸다.“너를 여기로 부르면, 그게 다 오승현이 부르는 줄 알았어? 누가 그러는데?”박건은 멈칫했다.옆에서 차준이 필사적으로 눈짓을 보내고 있었지만, 박건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차준의 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박건은 곧장 고함을 질렀다.“네가 그랬잖아! 오 대표님이 사업 이야기하려고 부르셨다고, 자산 계약 서류도 챙겨 오라고 네가 말했잖아... 너 나 속였어!”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박건은 손을 뻗어 탁자를 엎으려 했다.쾅!바닥에서 막 들리려던 탁자가 설아의 손에 짓눌려 다시 제자리에 박혔다. 탁자 위의 화투패가 와르르 흐트러졌다. 다음 숨이 이어지기도 전에 박건은 자리에서 일어난 설아에게 걷어차여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설아는 의자 옆에 세워 두었던 야구방망이를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었다. 설아는 방망이를 끌고, 배를 부여잡고 신음하는 박건 앞으로 걸어갔다.둔탁한 소리와 함께 야구방망이가 박건의 뺨 가까운 바닥을 찍었다. 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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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7화

차준의 어머니가 보기엔, 차씨 집안과 하연우 사이에는 어쨌든 피가 이어져 있었다. 관계가 가볍다고 치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하와 하연우 사이에는 오래된 원한이 있었다. 이런 때 유하가 차씨 집안 사람들을 이곳으로 부른 것이라면, 열에 아홉은 지난 일을 따져 물으려는 자리라고 봐야 했다.과거 승현과 유하가 결혼 생활을 하던 몇 해 동안, 승현이 유하를 대하는 태도는 모호했고 은근히 배척하기도 했다. 거기에 당시에는 하연우까지 있었다. 그래서 사교계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유하를 마주했을 때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물론 차씨 집안이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차갑게 지켜본 정도였다. 하지만 박건 같은 성정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오늘 이 판이 유하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면, 아무리 봐도 좋은 뜻으로 부른 자리는 아니었다.지금의 유하가 가진 힘이라면, 승현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차씨 집안과 박씨 집안을 정리하는 일쯤은 말 몇 마디 정도로 충분했다. 실은 유하가 어떤 태도를 보였다는 소문 하나만 흘러도 충분했다.그렇기에 사정을 아주 잘 아는 차준은 문을 들어서자마자 자세를 낮췄다. 조심스럽게 굴었고, 유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썼다.하지만 박씨 집안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집을 들어서자마자 여전히 거만하게 굴던 박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박씨 집안 어른들은 아마 정말로 승현이 박건을 부른 것이라고 믿은 듯했다.하지만 제아무리 기세등등한 박건이라도, 설아의 야구방망이 앞에서는 잠시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사각 테이블 위의 화투패는 불려 들어온 윤해월이 새것으로 다시 바꿔 놓았다. 패를 섞고, 자리를 정리하고, 모든 준비가 끝난 뒤였다. 유하는 눈을 한 번 천천히 깜박이고 미소 지었다.“시작하기 전에 먼저 묻겠습니다. 제가 준비해 오라고 한 것들은 모두 준비해 오셨습니까?”차준은 잠시 멈칫했다. 곧 뜻을 알아차리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전부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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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8화

유하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오씨 집안에서 이미 함구해 온 일이었다. 담당 주치의를 제외하면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았다.그래서 차준과 박건은 유하의 상태를 알지 못했다. 처음 마주했을 때 유하의 눈빛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누구도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다.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집으로 다른 사람을 불러 화투를 치겠는가? 그것도 이렇게 큰 판을 벌이면서.하지만 유하는 바로 그 일을 벌이고 있었다.차준은 창백한 낯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박건은 ‘미친 것들’이라고 욕을 내뱉으며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설아의 완력과 경호원들의 압박 앞에서 도망칠 길은 없었다. 결국 박건은 다시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첫 번째 판은 박건이 변호사를 불러 고소하겠다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와중에 시작됐다.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화투를 치겠는가?얼마나 제대로 칠 수 있겠는가?당연히 유하는 판마다 졌다.패가 보이지 않아 손끝으로 더듬어 확인해야 했고, 그마저도 제대로 짚지 못해 빠뜨리기 일쑤인 유하는 세 판을 치는 동안 세 판을 내리 졌다.유하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한 판을 이긴 차준은 울상이 되기 직전이었다. 차준은 어떻게든 패를 흘리고 일부러 져주려 애썼다. 그런데 유하는 운도 없는 데다 앞까지 보이지 않았다. 차준이 아무리 져주려 해도 유하는 이길 수 있는 판마저 엉망으로 만들었다.이길 가능성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차준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전략을 바꿨다. 설아가 이기도록 패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어쨌든 설아는 유하를 대신해 사람을 불러온 쪽이니, 설아가 이기는 것도 유하가 이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설아의 실력은 더 형편없었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좋은 패를 산산이 망치는 수준이었다. 설아는 그대로 세 판을 연달아 졌다.세 판이 끝났을 때, 차준은 어쩔 수 없이 한 판을 이겼고, 박건은 두 판을 이겼다.유하는 농담으로 이 판을 벌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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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9화

박건의 분노를 마주하고도 유하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들었다.“흥분하지 마세요. 게임이 너무 빨리 끝나면 재미없잖습니까. 저는 조금 더 놀고 싶었을 뿐입니다.”“재미는 무슨...!”박건이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아무튼 이번 판은 제가 이겼습니다. 계약서 주세요. 저는 지금 가야겠습니다.”“그건 곤란합니다.”유하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달라지지 않았다.박건은 바로 조용해졌다. 술과 유흥에 절어 무뎌진 박건의 머리로도, 응접실 안 공기가 갑자기 달라졌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박건은 곁눈으로 뒤에 선 경호원 둘을 훑어보았다. 두 사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무슨 뜻입니까?”“이겼다고 바로 나가는 규칙은 없습니다.”유하는 손안의 패를 가볍게 돌리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앉으세요. 계속하죠.”박건은 움직이지 않았다. 박건은 차갑게 웃었다.“소 회장님한테 아직 잃을 판돈이 남아 있습니까?”박건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렀다.“아, 맞다. ‘Splendid’까지 걸면 아직 더 칠 수 있겠군요.”“‘Splendid’는 안 됩니다.”유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다음 판부터는 돈을 빌려서 치겠습니다.”박건의 눈이 가늘어졌다.“누가 빌려줍니까?”“나.”중간중간 몇 번 이겨 아직 판돈이 남아 있던 설아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우리 배씨 집안의 모든 자산, 소 회장한테 빌려줄게.”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손에는 이제 한 번 더 질 수 있을 만큼의 판돈밖에 남지 않았다. 빌려주고 싶어도 빌려줄 것이 없었다. 앞으로도 차준은 계속 유하의 판에 맞춰 앉아 있어야 했다.오전 내내 화투를 치며, 차준은 어렴풋이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오늘 이 놀이의 목적은 아마 차준에게 있지 않았을 것이다.차준의 시선이 조용히 옆으로 움직였다. 아직도 서 있는 박건에게 닿았다.‘오늘 표적은 박건인가.’결국 박건은 다시 앉았다.박건에게 거절할 여지는 없었다. 그는 마음속 불안을 억누르며 짜증스럽게 패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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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0화

설아는 유하를 한 번 바라보았다. 설아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한층 더 환해졌다.박건은 더 거칠게 몸부림쳤다.“게다가 정말 공평을 따지고 싶으시면, 박 대표도 눈을 찔러 멀게 만든 뒤 저와 치시겠습니까?”유하는 손을 가볍게 들어 경호원에게 놓아주라는 뜻을 보였다.경호원이 손을 풀자마자, 박건은 얼굴에 눌어붙은 화투패가 떨어지기도 전에 으르렁거리며 테이블 너머로 유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유하의 목을 조를 듯한 기세였다.쾅!야구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박건은 묵직한 충격을 받고 바닥으로 처박혔다. 자리에서 일어난 설아가 박건을 내려다보았다.“얌전히 있어, 쓰레기.”박건은 다시 의자에 거칠게 눌려 앉았다.이미 판돈이 바닥난 차준도 설아가 빌려준 판돈을 받아들였다.화투판은 계속됐다.그 뒤로 판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졌다. 차준이 보기에, 이것은 더 이상 화투가 아니었다. 박건 한 사람을 겨냥한 놀림이자 정교하게 짜인 공연이었다.박건이 패를 내기만 하면 유하가 이겼다. 패가 어떤 모양이든 상관없었다. 유하는 무조건 이긴다고 했다.박건은 반항할 수도 없었다. 판이 거듭될수록 박건은 거대한 압박과 불안에 깎여 나갔다. 초췌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두 눈은 붉게 충혈됐고, 정신은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건은 모든 판돈을 잃었다. 박씨 집안의 자산까지 전부였다. 반대로 유하의 손가에는 두꺼운 서류 더미가 쌓였다.“도대체 뭘 하고 싶은 겁니까?”박건은 핏발 선 눈으로 유하를 노려보았다. 목소리는 이미 기운을 잃어 있었다. 이쯤 되니 아무리 둔한 박건이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유하는 박건을 겨냥하고 있었다.“게임을 하고 있지요.”유하는 웃으며 말했다.“계속하시죠.”“저는 이제 판돈이 없습니다.”오랜 시간 긴장 속에서 화투를 쳤고, 물 한 모금 밥 한 숟갈 제대로 대지 못한 박건에게는 더는 소리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괜찮습니다. 제가 빌려드리겠습니다.”유하는 손가에 놓인 계약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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