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951 - Chapter 960

962 Chapters

제951화

아이들은 대체로 예민하다.아이들은 생각이 단순해서 세상의 많은 이치를 알지 못하고, 어른들의 복잡하고 얽힌 마음과 관계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가진 지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이해 역시 아직은 좁고 얕다. 그러나 바로 그 단순함과 한계 때문에, 온갖 빛깔과 검고 희고 잿빛인 물감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의 물줄기는 여전히 맑다. 모든 것을 그대로 비춰 낼 만큼 맑다.그렇기에 아이들은 아직 이 세상을 향한 가장 예리한 감각을 간직하고 있다. 어른들이 듣지 못하는 도시의 새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길가의 들꽃을 볼 수 있다.지금 이 순간처럼, 바로 이때처럼.희은은 욕실 문 앞에 굳어 선 채, 안쪽에서 약그릇을 천천히 내려놓는 유하와 멀찍이 마주했다.실은 마주 보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보이지 않는데... 보이지도 않는데, 왜 약을 버리는 걸까?’‘왜 약을 마시지 않는 걸까?’이런 장면을 들켰는데도 어둑한 욕실 안, 유하의 담담하고 빛이 사라진 두 눈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희은을 향해 있었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표님께 말씀드려야 해...’희은의 머릿속에 본능처럼 그런 생각이 스쳤다. 바로 그때, 바깥에서 들려오는 외침과 발소리에 희은은 흠칫 놀랐다.윤해월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으며, 위층으로 올라오며 무슨 일이냐고 큰소리로 물었다.희은은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입을 열어 대답하려던 희은은 곁눈으로 욕실 안의 유하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감정이 없어 보이던 유하의 얼굴에 거센 파문 같은 감정이 번졌다가, 아주 짧은 틈 사이에 가라앉았다. 그 짧은 감정의 노출은 마치 착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희은의 살짝 벌어진 입이 그대로 멈췄다.잠시 기다렸지만, 유하에게서는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해월에게 들키는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 같았다. 윤해월이 알게 되면, 승현도 반드시 알게 될 텐데...‘사모님... 겁먹으신 건가?’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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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2화

희은이 문을 닫으려던 때였다. 고개를 들자, 단정한 어린이용 재킷 정장을 차려입은 재윤이 계단 입구에 서 있었다. 언제 올라왔는지, 어디서부터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희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뜻밖의 놀라움에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지만, 희은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희은과 재윤은 멀찍이 떨어진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몇 초가 흐른 뒤, 재윤은 몸을 돌렸다.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재윤의 뒷모습이 계단 입구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희은은 땀에 젖은 손바닥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희은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방 안은 고요했다.유하는 여전히 욕실 안에 서 있고 움직이지 않았다.희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이어서 서둘러 바닥에 엉망으로 뭉개진 케이크와 사방으로 튄 접시 조각들을 치웠다. 이런 일은 보육원에서 자주 해 보았기에, 희은의 손놀림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재빨랐다.바닥을 다 정리하고, 작은 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은지 확인한 뒤에야 희은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희은은 안쪽에 서 있는 유하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 이제 조각 없어요.”유하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희은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와 소파에 앉았다.이전에 승현의 부탁으로 유하를 만나러 내려왔을 때와는 너무 달랐다. 그때의 유하는 다정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걱정과 애정이 배어 있었고, 태건이 희은과 성찬에게 보여 주었던 자료 속 유하의 성격과도 완전히 맞아떨어졌다.하지만 지금은...유하가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희은은 조심조심 곁눈질로 소파에 앉은 유하를 살폈다.감정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은 조명 아래서 차갑게 빛났다. 유하는 그 자리에 고요히 앉아 있었다. 생기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정교한 인형 같았다. 조금 전까지 희은과 성찬에게 부드럽게 웃어 주며 말을 건네던 모습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그런데도 희은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 유하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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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3화

희은은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곧 깨달았다.유하는 아마 희은을 평범하게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보호받아야 하는 아이로 보고 있는 듯했다. 희은이 쓸데없는 생각을 할까 봐, 마음에 상처라도 남을까 봐,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오늘 밤 다이닝 룸에서 저녁을 먹을 때도 그랬다. 유하와 승현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을 때, 유하는 화를 참고 먼저 아이들을 내보냈다.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마음인 것 같았다.어쩌면 방금 유하가 말을 멈췄던 것도, 원래는 ‘감춰 주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말하려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아이에게 ‘거짓말’이라는 말은 너무 무겁다고 생각한 걸까?희은은 갑자기 어쩐지 막막해졌다.보육원 아이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개 일찍 철이 든다. 단체생활을 하는 환경 자체가 복잡하기도 했고, 아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직원들이 모든 아이를 세세하게 돌볼 수는 없었다. 균형과 질서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사소한 부분은 놓치게 마련이었다.아이들은 스스로 적응해야 했다.거기에 희은은 원래부터 눈치가 빠르고 조숙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비위를 맞추는 법을 더 잘 알았고, 그래서 늘 어른들에게 예쁨받는 아이였다.그런데도 희은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살펴지고 배려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단어 하나까지 최대한 부드럽게 고르려는 배려는 더욱 낯설었다. 마치 희은이 조금만 건드려도 깨질 도자기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하지만 희은은 그렇지 않았다.희은의 마음은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유하가 조금 전까지 아이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처럼, 희은 역시 다르지 않았다.희은은 무릎 위에 내려놓은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어쩌면 대표님이 주신 자료가 틀린 게 아닐지도 몰라.’‘그 자료에 적혀 있던 성격은 예전의 사모님 것이고...’‘지금의 사모님은... 달라진 거야.’희은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승현이 희은과 성찬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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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4화

공기는 오래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희은의 눈앞이 눈물로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을 때, 머리 위에서 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안해. 넌 나를 도와준 거잖아. 내가 고맙다고 해야 맞는데, 조금 망설였어...”“내가 고맙다고 말한 탓에 네가 거짓말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봐.”유하는 낮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말했다.“게다가 내가 한 일도 결국 하나의 거짓말에서 시작된 거야. 그러니 내가 너를 나무랄 자격은 없어.”“하지만 거짓말 한마디를 입 밖에 내면,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 수없이 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고통이 어떤 건지 나는 분명히 알아.”“나는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 해도... 내 행동 때문에 네가 거짓말이 옳다고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넌 아직 어려. 네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됐고, 아직 ‘어쩔 수 없는 때’에 이른 것도 아니야.”유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아주 가볍게 덧붙였다.“거짓말이 네 몸에 배도록 내버려두지 마. 그러면 너는 점점 다른 사람들에게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릴 거야.”아무도 희은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분명 예전에는 어른들 앞에서 거짓말을 해서...’‘어른들을 만족시키고 기쁘게 하면, 칭찬과 상을 받았는데...’희은이 멍한 기분에 잠겨 있을 때, 유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나 때문에 네가 거짓말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래도 고마워.”‘아니에요...’‘그런 게 아니에요...’희은은 고개를 저었다. 얼굴 위로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희은은 입술을 달싹였다. 부서지는 흐느낌 사이에서 가까스로 목소리를 찾아낸 뒤, 힘겹게 말했다.“저... 저 앞으로는 거짓말 안 할게요. 만약... 만약 대표님께서 물어보시면 저, 저는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그날 이후의 기억은... 많은 해가 지난 뒤 희은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희은이 기억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희은이 울음을 터뜨린 뒤, 유하가 아주 오랫동안 희은을 위로했다는 것. 그날 희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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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5화

밤빛은 고요하고 옅었다. 방 안은 어두웠고, 작은 수면 등 하나만 켜져 있었다.딸깍-방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낮고 느리게 가까워졌다. 소리보다 먼저 유하에게 다가온 것은 차가운 시더우드에 은은한 백단향이 감긴 향기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유하는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고, 그 향기는 더 짙어졌다. 그리고 뺨에는 부드러운 니트 너머로 전해지는 가슴의 온기가 닿았다.“희은이랑 무슨 얘기 했어? 애가 그렇게 서럽게 울던데.”유하의 가슴 안쪽에서 낮은 떨림이 전해졌다. 남자의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내려앉았다. 유하는 몸에 욕조의 차가운 기운이 닿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제 옷 단추를 풀려는 승현의 뜨거운 손가락을 붙잡았다.“뭐 하는 거야?”그 말투는 차가웠다.“목욕.”승현은 유하가 손가락을 붙잡게 두었다. 빼내려 하지도 않았고, 움직임을 멈추지도 않았다. 말투는 늘 그렇듯 당연하다는 듯했다.“나 혼자 씻어.”“너 안 보이잖아. 불안해서 그래.”“나 눈이 안 보이는 거지, 팔다리가 없는 게 아니야. 나가.”“하...”승현이 낮게 웃었다. 유하에게 붙잡힌 손가락이 조금 움직이더니, 되레 유하의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뜨겁고 나른한 손끝이 얽혀 들었다. 승현이 몸을 숙이자, 달아오른 숨결이 말과 함께 유하의 차가운 귓가로 스며들었다.“뭘 부끄러워해? 처음 씻겨 주는 것도 아닌데.”뜨거운 기운이 차가운 피부를 건드렸다. 유하는 귀 끝이 저릿해져 본능처럼 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생각이 스친 바로 그때, 유하는 몸을 단단히 붙들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유하는 되레 승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얽힌 손가락이 안쪽으로 살짝 힘을 주자, 승현은 그 움직임을 따라 몸을 기울였다. 얇고 부드러운 입술이 유하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숨마저 잠시 멎은 듯했다. 유하와 승현의 목덜미 피부가 서로 맞닿았다. 유하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흔들림 없이 안정되어 있었다.“나가라고 했어.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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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6화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는 거 아니야?”승현이 말했다.“게다가 희은이는 아직 어려. 천천히 이끌어 주면 되잖아.”“이끌어? 어떻게?”어째서인지 유하의 목소리에 갑자기 성난 기색이 섞였다. 유하는 머리카락을 닦고 있던 수건을 쳐냈다.“너처럼 거짓말이 버릇이 된 사람 눈앞에 두고, 뭘 어떻게 끌어 낼 수 있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유하와 승현은 서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아무도 전부를 식탁 위에 올려놓듯 꺼내지 않았다. 똑바로 말하지 않고, 확실히 밝히지 않은 채 이대로 덮으면, 아이들의 일은 계속 분명하지 않게 이대로 가만히 둘 수 있을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하지만 유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준서의 일은 흐릿하게 넘길 수 없었다.지나갈 수도 없었다.하필 이때 승현이 희은과 성찬을 데려왔다. 그런데도 승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지 못한다면, 유하는 지금까지 승현과 부딪혀 온 시간이 모두 헛된 셈이었다. 승현은 직접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희은을 빌려 암시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유하는 더는 적당히 속아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수건이 소리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수면 등은 누렇게 흐렸다. 아래로 내려온 승현의 앞머리 탓에 승현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승현은 욕실로 갔다. 새 수건을 가져온 승현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유하의 머리카락을 닦기 시작했다.승현의 말투마저 태연했다.“일단 머리부터 말리자. 감기 걸려.”승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낮게 덧붙였다.“준서... 내일 돌아와. 할아버지가 준서 때문에 지쳐서 못 견디시겠대.”‘역시...’유하는 마음속으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놀라지 않았다. 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어떤 문제들은 결국 마주 보고 풀어야 했다. 멈춰 서서 피하기만 하면, 일은 더 손쓸 수 없게 망가질 뿐이었다.게다가 이번에 유하는 애초부터 지난날 남겨진 문제들을 하나씩 정리하겠다는 결심을 품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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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7화

‘아이가 배우고 싶으면 배우는 거고, 배우기 싫으면 안 배우면 되지.’‘흥미야 앞으로 천천히 키우면 되고.’‘그래도 그림이라는 관심사는 하나 생겼잖아.’‘정 안 되면, 재윤이가 평생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내가 작은 제자 하나 못 지키고 못 먹여 살릴까.’유하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그럼 안 해도 돼.”“당분간은 마음껏 놀아. 내 눈이 나으면 그때 정식으로 시작하자. 그때는 먼저 보는 것부터 할 거야. 대상을 보는 눈을 먼저 길러야 하거든...”햇살은 따뜻했다. 유하는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있었다. 말투에도 산뜻한 기운이 묻어났다. 재윤도 화집을 품에 안은 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따금 낮게 대답을 보탰다.그러다 전화벨 소리가 둘 사이를 끊었다.재윤은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았다.“엄마예요.”‘배설아라니...’유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신가 보다. 받아서 스피커폰으로 해.”[유하 씨.]설아 특유의 오만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흘러나왔다.[유하 씨가 말한 두 사람, 내가 찾아갔어. 둘 다 동의했어. 언제 데려가면 돼?]“이렇게 빨리요?”유하는 놀라움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바로 되물었다.어제 막 상의한 일이었다. 그런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일이 끝났다니. 하지만 유하가 더 의외로 느낀 것은 따로 있었다. 설아가 유하의 부탁을 이렇게 금방 나서서 진지하게 처리했다는 점이었다.‘조금은 시간을 끌 줄 알았는데.’[그럼 뭐?]전화 너머에서 설아가 코웃음을 쳤다. 몹시 하찮다는 투였다.[그 두 사람이 뭐 대단한 인간들이라고. 내가 직접 갔는데 감히 거절해?]“말 좀 가려서 하시면 안 돼요?”유하의 목소리에 불편함이 묻어났다.[재윤이 옆에 있어?]설아가 혀를 찼다. 그래도 더는 험한 말을 잇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돌아왔다.[빨리 정해. 시간.]설아가 이렇게 일을 빠르게 처리할 줄 몰랐던 유하는 아직 구체적인 시간을 정하지 못했다. 유하가 잠시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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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8화

승현이 준서를 데리러 갔을 때, 오국수의 잔소리와 꾸중은 피할 수 없었다. 오국수는 회초리까지 들었다. 준서를 데리고 차에 올랐을 때, 승현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준서도 다를 바 없었다. 부자는 여러 날 만에 서로 마주했지만, 차 안에 앉은 두 사람의 표정은 신기할 만큼 닮았다. 둘 다 기분이 잔뜩 언짢았다.“왜 이제야 데리러 오셨어요?”준서가 분을 참지 못하고 따졌다.“엄마는요?”“집에 있어.”자기 아들을 대하는데도 승현의 태도는 서늘했다.“너 지금 태도가 왜 그래?”“아빠가 그랬잖아요. 엄마가 꼭 저 용서해 줄 거라고요!”준서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아빠는 저를 속인 거예요! 엄마는 떠나면서 다른 사람은 데려가고, 저는 안 데려갔잖아요!”마지막 말에 이르자 준서의 눈가가 붉어졌다. 준서는 울먹이며 원망을 쏟아 냈다.“다 아빠 때문이에요. 아빠가 저를 연우 이모, 아니... 그 아줌마 만나게 데려가지 않았으면, 엄마가 저를 싫어하지 않았을 거예요!”승현의 얼굴도 차갑게 굳었다.“내가 널 데리고 간 건 맞아. 그런데 내가 하연우 좋아하라고 너한테 강요했어? 내가 네 엄마한테 거짓말하라고 했어?”승현의 목소리는 점점 낮고 무거워졌다.“준서야, 네가 한 일은 네 선택이야. 후회는 할 수 있어. 하지만 네가 만든 결과는 네가 짊어지고 마주해야 해. 나는 너한테 일이 생기면 책임부터 떠넘기고 남 탓하라고 가르친 적 없어.”준서는 훌쩍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조금 지나 차 안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승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졌지만, 그렇다고 다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뭘 그렇게 울어. 너 아직 어려. 앞으로 실수할 기회도 많아.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별로 없어. 집에 가면 네 엄마 곁에 잘 있어라. 또, 앞으로 아무 때나 거짓말하지 마.”준서가 퉁명스럽게 받아쳤다.“어떤 일은 엄마가 알면, 엄마가 저를 더 싫어할 거예요.”‘너는 정말 네 엄마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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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9화

준서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준서는 고개를 돌린 유하와 단번에 시선을 마주쳤다. 다만 초점도 빛도 없는 그 두 눈 안에는 더 이상 준서의 모습이 담겨 있지 않았다.“엄마!”마음 밑바닥에서 번져 올라온 공포가 준서에게서 재윤을 신경 쓸 여유마저 빼앗아 갔다. 준서는 곧장 유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엄마...”준서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수많은 원망과 삐뚤어진 말들은 결국 한마디로만 남았다.“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이의 무게에 눌려 의자에 앉은 채, 멍해진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분명 몸 위로 느껴지는 무게는 아주 현실적이었다. 그런데 유하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마른 것 같아... 뼈가 이렇게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유하는 손을 들어 아이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등에 식은땀이 잇달아 배어 나왔다. 시야를 뒤덮은 어둠마저 어지럽게 흔들리는 듯했다. 하고 싶은 말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여보?”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건너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몸 위에 얹혀 있던 무게가 누군가에게 옮겨지는 감각이 전해지고 나서야, 식은땀에 젖은 유하는 겨우 숨을 들이마셨다. 유하는 의자에 축 늘어진 채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뒤늦게 서재로 들어온 승현은 준서를 유하에게서 떼어 안았다. 승현은 유하를 몇 번이나 불렀지만 유하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준서를 달랠 겨를도 없이 유하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서재를 나갔다.문밖에 엎드리다시피 안쪽을 들여다보던 성찬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곳에 있던 희은은 승현의 외침이 떨어지자마자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가 윤해월을 불렀다.대략 30분쯤 지나, 의사가 장비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을 때는 유하도 어느 정도 진정한 뒤였다.유하는 승현의 부축을 받아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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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0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승현은 알고 있었다.‘아이’라는 말은 유하에게 결코 단순히 자기 아이만을 뜻하지 않았다. 그 단어가 비추는 것은... 유하가 과거의 자신을 다시 보듬고 사랑해 주고 싶다는 바람이었다.유하는 자신이 만난 모든 아이가 잘 지내기를 바랐다.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더 나은 미래를 얻기를 바랐다.하물며 자기 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가장 많은 사랑, 가장 큰 기대.그 모든 것이 가장 무거운 배신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승현이 유하에게 꽂아 넣은 비수보다도 더 깊고 잔혹한 칼날이었다. 그 고통은 차가운 가을비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것보다 오래 이어졌고, 뒤늦게야 더 선명해졌다.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그 고통이 지금 이곳에서 몸이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승현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승현은 단지 ‘아이’가 유하에게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수가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 역시 아직 아물지 않은 유하의 상처를 다시 찌르는 칼이었다.승현은 늘 알고 있었다. 유하는 강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랬다. 어떤 일도 유하를 무너뜨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몇 번이고 배신당하고 다쳐도, 다음에 유하를 마주하면 유하의 얼굴에는 살아 있는 분노와 감정이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을 겪어도, 유하는 다시 바닥에서 사납게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 같았다.하지만 실제로는 어쩌면 유하 자신조차 몰랐을 것이다.유하가 단단하다고 믿어 온 마음은 이미 사방이 찢겨 바람이 새고 있었다. 조금 더 거센 바람이 불면, 그대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그 연약함은 너무도 조용해서 어쩌면 유하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 몰랐다.승현은 벽에 등을 기댔다. 허리와 등이 제멋대로 굽어졌다.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승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누군가 심장을 손으로 움켜서 꽉 쥐는 것처럼 부서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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