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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돌이킬 수 없는: Chapter 81 - Chapter 90

100 Chapters

제81화

진도현은 조그만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러나 마음속엔 아직도 꽁하게 쌓인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활동이 끝난 뒤, 그가 넘어진 얘기를 들은 친구들이 하나둘씩 달려와 걱정해 주었다.“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대장! 그 예쁜 누나 대장 엄마 아니었어? 근데 왜 다른 애랑 같이 경기에 나간 거야?”진도현은 대꾸하지 않았다.“...”별일 아니라고 넘기려 했는데 그 말에 마음 한켠이 무언가에 콕 찔린 것처럼 아팠다.마침 그때, 상을 받은 강시연이 양진우의 손을 잡고 이쪽으로 걸어왔다.진도현 무릎에 난 상처를 본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이게 무슨 일이야?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그녀의 걱정 가득한 눈빛과 마주한 진도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울음을 참았다. 그러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은 결국 주르륵 흘러내리고 말았다.“흐어엉... 엄마...”그는 강시연의 품에 와락 안기더니 어린아이답게 억울함과 서러움을 한껏 쏟아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강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어린 시절처럼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진도현은 결국 그녀 품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그 무렵, 학부모 회의를 마친 진수혁이 밖으로 나왔고 포옹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미묘한 안도감을 느꼈다.그러나 머지않아 그의 시선은 피범벅이 된 상처에 닿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강시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선생님이 먼저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진수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시연아, 나 그 여자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걔가 올 줄 나도 몰랐어...”강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심하은과의 관계엔 관심조차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 말로는 상처에 물이 닿으면 안 된대요. 며칠은 잘 돌봐줘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진도현을 넘기려 했지만 아이의 작은 손이 그녀 옷자락을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진수혁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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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진수혁은 기대가 가득 서린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그러나 강시연은 열쇠를 받지 않았다. 눈동자 속엔 알 수 없는 혼란이 스쳤다.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때 목숨까지 내던질 만큼 사랑했었는데 그 시간에 정작 그는 무심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걸 놓아버리기로 결심한 순간, 진수혁은 돌연 태도를 바꾸며 그녀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그동안 그녀도 진수혁과 진도현의 미묘한 변화를 느꼈다. 하지만 강시연은 다시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그녀의 눈빛엔 지친 기색이 어려 있었고 말투엔 간절한 체념이 묻어났다.“진수혁 씨,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면 어떤 여자든 가질 수 있잖아요. 굳이 저 아니어도 되잖아요.”두 사람은 오랜만에 이렇게 담담하게 마주 앉아 말을 주고받았다.진수혁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넌 다른 사람이랑 달라. 난 너랑만 함께하고 싶어.”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시연이 물었다.“내가 도현이 친엄마라서 그래요?”“아니야!”진수혁이 곧장 부정했다. 목소리는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그런 이유 아니야. 도현이랑은 상관없어. 난 그냥 강시연, 너를 좋아해.”오늘에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지난 7년 동안, 조금씩 스며든 감정은 어느새 사랑이 되어 있었다.그 순간, 별장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숨소리조차 낯설 만큼 정적이었다.강시연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당신이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누군가가 당신에게 아무 대가 없이 모든 걸 바치길 바라는 거죠. 예전의 나처럼요.”진수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반박하려던 찰나, 강시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수혁 씨, 우린 이제 돌이킬 수 없어요. 저도 이젠 제 일이 있고 예전처럼 당신과 도현이만 바라보며 살 순 없어요.”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꼬리가 씁쓸하게 올라갔다.“이 집도 마찬가지예요. 당신들한테나 다정한 추억이 깃든 곳이겠지만 저한텐 그저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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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가로등 불빛 아래,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 절반은 어둠에 가려져 표정을 가늠할 수 없었다.하지만 강시연을 본 그는 금세 밝아진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오셨네요? 진료소에 갔었는데 없더라고요.”“오늘 좀 일이 있었어요.”강시연은 별다른 설명 없이 짧게 말하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죠?”한정훈은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차마 꺼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그때, 뒤에서 한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일은 우리 아빠 환갑이에요. 오빠 여자 친구인 척하고 같이 집에 가달래요.”한정훈의 얼굴엔 잠시 민망한 기색이 스쳤고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시연 씨, 불편하시면 안 하셔도 돼요.”강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원래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요?”그녀와 한정훈은 가짜 연인 행세를 하기로 했었다. 진수혁 부자에게 확실히 선을 긋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동시에 그의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한정훈은 속으로 안도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그럼, 내일 뵙겠습니다.”“어르신들 취향 같은 건 있으세요?”직업정신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강시연은 늘 맡은 역할에 충실했다.한정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단정하고 부드러운 얼굴에 시선을 두며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까다로운 분들은 아니세요. 시연 씨만 오셔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강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그래요. 최대한 민망하지 않게 잘해볼게요.”그렇게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강시연은 피곤함이 밀려와 인사를 건넨 뒤 방으로 들어갔다.별장 입구에서 한민주는 한정훈을 힐끔 바라보며 입을 비죽였다.“안 좋아한다며? 언니가 요 며칠 진수혁이랑 좀 가까이 지내니 바로 본색을 드러내고 들이대네?”한정훈은 그녀를 노려보며 조용히 경고했다.“쓸데없는 말 마.”하지만 한민주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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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정리를 마치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섰다. 계단이 꺾이는 지점에 발을 디딘 순간, 시선이 자연스레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한정훈에게로 향했다.그는 짙은 남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가 돋보였고 긴 팔다리와 곧은 자세가 슈트 아래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단정했지만 고급스러웠고 차분하면서도 위압감이 있었다.강시연이 그를 바라본 찰나,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정훈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게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그 자리에서 뚝 멈춘 듯했다.그 정적을 깨뜨린 건 한민주의 들뜬 목소리였다.“내가 뭐랬어요! 이 드레스, 시연 언니한테 딱 맞다니까! 우리 오빠랑 나란히 서니까 진짜 커플 같아요!”강시연은 연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정훈의 짙은 남색 슈트와 나란히 섰을 때 왠지 모르게 딱 맞춘 커플룩처럼 어울렸다.약간의 어색함이 올라왔지만 애초에 오늘은 가짜 연인 행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최대한 자연스러운 얼굴을 지으려 애썼다.한정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케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눈빛엔 어쩌면 놓치기 쉬운 작은 미소와 숨겨진 호감이 번졌다.“예뻐요. 정말 잘 어울려요.”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강시연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 뜨거운 눈길을 피했다.“가, 가요.”그제야 세 사람은 차에 올랐다. 한씨 가문의 본가는 같은 용성에 있긴 했지만 외곽 쪽이었다.한정훈의 부모님은 원래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은퇴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텃밭을 가꾸며 살아가는 중이었다.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려온다고 하자 집안은 아침부터 전쟁통처럼 복작거리기 시작했다.“그 지저분한 것들 얼른 치워! 며느리 될 사람이 보면 기겁하겠어.”한정훈의 어머니 동지안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껏 굳은 얼굴로 남편을 몰아세웠다.그 말에 겁을 먹은 한진욱은 잽싸게 낚시용 지렁이들을 바깥으로 던져버리며 중얼거렸다.“아직 오지도 않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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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집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치워져 누가 봐도 미리 손을 본 티가 났다.강시연은 동지안에게 이끌리듯 거실 소파에 앉게 되었다. 동지안은 이런저런 말로 그녀의 안부를 챙기며 살갑게 다가왔다.“시연아, 이 차 괜찮니? 아니면 주스 줄까? 너 뭐 좋아해? 말만 해, 정훈이한테 당장 사 오라고 할게.”그 다정함에 강시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연신 두 손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저는 그냥 생수면 충분해요.”그녀가 막연히 상상했던 한씨 가문은 이런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격식 있고 다소 차가운 분위기일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전혀 달랐다. 진씨 가문에서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은 아예 없었다.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녀도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동지안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훨씬 즐거웠다.“민주한테 들었어. 시연이가 걔 심리 상담해 줬다며? 덕분에 많이 좋아졌다고.”“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지만 예전보단 훨씬 안정됐어요.”강시연은 조심스럽게 답했다.그러자 동지안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눈동자엔 진심에서 우러난 고마운 감정이 피어올랐다.“민주 걱정 참 많이 했는데 시연이 덕분에 한시름 놨어. 나도 요즘 가끔 가슴이 두근거리고 좀 불안하더라. 우리 집에서 며칠 지내면서 나도 좀 봐줄래?”그 말에 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머니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짐작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엄마, 시연 씨는 심리상담사예요. 내과 의사가 아니라고요.”동지안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곤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그게 그거지, 뭐.”거실엔 어느새 웃음꽃이 피었다.강시연은 무심결에 미소를 지었다. 눈빛엔 묘한 감정이 일었다. 아주 옅은 부러움과 그리움이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이런 집, 이런 가족, 이렇게 편안하고 단단한 분위기, 참 좋았다.점심은 한정훈의 본가에서 함께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그들은 곧장 포시즌 호텔로 향했다.한정훈은 아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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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그러나 주이정은 이미 정신을 가다듬은 상태였다. 격렬하게 치솟던 감정을 억누른 채 입꼬리를 비틀며 냉소를 흘렸다.“지금 내 입에서 뭐라도 캐내고 싶은 거예요?”강시연의 눈빛에 잠시 아쉬움이 스쳤다.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이정은 완전히 평정심을 되찾고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여유롭고 냉담한 태도로 돌아갔다. “시연 씨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도희성의 죽음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거든요. 못 믿겠으면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봐요.”그 말을 끝으로 주이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그 자리에 남겨진 강시연은 여전히 그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곱씹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동지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연아, 빨리 와. 케이크 자를 시간이야.”원래 이런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은 한씨 가문의 사람뿐이었다.하지만 동지안은 유난히 강시연을 아꼈고 그 덕에 그녀도 함께 무대 위에 서게 됐다.“넌 그럴 자격이 있어. 우리 남편이랑 아무 관련 없다고 해도 넌 민주를 살린 은인이니까.”강시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녀를 따라갔다. 한편으론 민망했지만 또 한편으론 알게 모르게 뭉클해졌다.진씨 가문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온기였다. 그래서일까, 이 호의가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강시연은 무대 위에서 기뻐하는 동지안을 바라보다가 문득 걱정이 밀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만약 이 모든 게 거짓이라는 걸 그녀가 알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잠시 고민한 끝에 강시연은 얼굴을 굳히고 한정훈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용히 말을 건넸다.“할 얘기가 있어요.”“하하, 두 분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옆에 있던 협력업체 대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눈치껏 자리를 비켜줬다.한정훈은 시선을 내리며 그녀를 바라봤다.“무슨 일인데요?”그는 와인을 두 잔쯤 마신 상태였다. 부드러운 눈빛에는 어딘가 위태로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강시연은 입을 열었다가 근처에 아직 머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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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허공에 걸린 달은 은은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두 사람은 나무 아래 마주 서 있었다. 짙은 그림자 속에서 두 눈빛이 얽히자 강시연은 먼저 입을 열었다.“한정훈 씨, 그 약속 이젠 그만했으면 해요.”처음엔 그냥 연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연인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었기에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일은 점점 커져 버렸다. 특히 동지안의 지나친 호의는 그녀에게 점점 더 큰 부담이 되어갔다.한정훈은 눈썹을 찌푸리며 재빠르게 되물었다.“왜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었잖아요.”강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냥 이제 더는 아주머니를 속이고 싶지 않아요. 언젠가는 다 알게 되실 테니까요.”한정훈은 술을 몇 잔 마신 상태였다. 지금쯤이면 약간 취기가 올라올 참이었다. 그는 무심결에 술기운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럼 진짜로 만들면 되잖...”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맺어지지 못했다.강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 눈빛에는 혼란과 경계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한정훈은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두 사람 사이엔 더 이상의 여유가 없었다.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낮고 진하게 스며들었다.“그러니까 내 말은...”그 순간, 공기는 끈적하게 요동쳤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는 이미 되돌릴 수 없게 변해버렸다.강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본능적으로 한정훈을 밀쳐낼 준비를 했다. 그때, 시야 끝으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스쳤다.몸이 반응하기도 전에 손목이 누군가의 크고 단단한 손에 붙잡혔다.곧바로 그녀는 중심을 잃고 뒤로 휘청이며 단단한 가슴팍에 안겨버리고 말았다.코끝에 스며든 건 익숙한 시더우드 향이었다.고개를 들자 진수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굳게 닫힌 입술에 어두운 눈빛까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다.“한정훈 씨, 나랑 시연이 아직 이혼 안 했으니 선 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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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곧 부딪칠 듯 위태로운 순간, 진수혁의 동공이 찰나의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반응했다. 강시연을 와락 끌어안으며 품 안으로 감쌌다.쿵... 쿵... 쿵...단단하고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귓가에 깊숙이 파고들었다.그러나 말을 꺼낼 틈도 없이 그는 곧장 팔을 풀었다. 억눌린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며 감정을 수습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늦었어. 내가 데려다줄게.”강시연은 순간 얼어붙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 속엔 복잡한 무언가가 얽혀 있었다.그는 달라져 있었다. 예전과는 분명히 달랐다.이전의 진수혁이라면 감정이 격해진 상황에서 그녀 따윈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다친 그녀를 길 한복판에 남겨두고선 자신은 혼자 차를 몰고 떠났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강시연의 눈빛이 짙어졌다. 잠시 후, 차는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진수혁은 미간을 짚더니 피로가 실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한정훈이랑 가짜 연인 행세 좀 그만하면 안 될까?”늘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던 그가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엔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강시연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알겠어요.”진수혁이 말을 꺼내지 않았어도 그녀는 진작에 그만둘 생각이었다.진수혁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이윽고 다정함이 감도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푹 쉬어.”강시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막 소파에 몸을 기댄 순간 문이 다시 열렸다. 한민주였다.강시연은 곧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한민주의 낯빛이 심상치 않았다. 무너진 감정을 억지로 꾹 누른 흔적이 역력했다.“무슨 일이야?”강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한민주는 고개를 저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보였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애써 웃어 보였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먼저 들어갈게요.”그러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강시연은 가만히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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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뭔데?”강시연이 곧장 물었다.“그 사람, 꽤 많은 빚을 졌더라고. 근데 공교롭게도 그 채권자가 바로 성남 제약 대표인 정황민이야.”서아름의 목소리가 천천히 꽂혔다. 말끝에는 묘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시연아, 일이 점점 더 꼬이는 느낌이야. 더 파고들다간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우리 그냥 여기서 멈추는 게 어떨까...”하지만 서아름의 말은 곧 끊기고 말았다.“아름아!”그녀의 표정은 단호했고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나는 끝까지 확인해야 해. 우리 아빠는 아직도 감옥에 있어. 아무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이젠 알고 있는데 모른 척하고 살 수는 없잖아. 아무 이유 없이 20년을 그렇게 버티게 둘 수는 없잖아.”말이 끝나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말 그대로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다.한참을 침묵하던 서아름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어.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해.”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강시연의 머릿속은 아까 들은 말로 가득했다.성남 제약의 정황민, 예전에도 몇 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적 라이벌이었다.사실 저번에 바에 간 것도 그를 미행하기 위해서였다. 결국엔 허탕을 쳤고 오히려 자신이 위험에 빠질 뻔했다.그 일을 떠올리며 강시연은 이번엔 좀 더 준비를 단단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호신용 스프레이와 전기 충격기를 챙겼다. 그리고 휴대폰엔 정해진 시간에 자동으로 전송되는 메시지를 설정해 뒀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최소한 누군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모든 게 괜한 걱정으로 끝나길 바랐다.심호흡을 한 번 한 그녀는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 다시 매영 바로 향했다.아직 해가 지기 전이라 그런지 안은 휑했고 손님도 적었다.강시연은 구석진 자리 하나를 골라 앉았다. 그리고 묵묵히 기다리기 시작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안에는 하나둘 사람들로 채워졌고 술과 담배 냄새가 뒤섞여 공기는 점점 탁하게 변해갔다.강시연의 외모는 늘 문제였다. 일부러 눈에 띄지 않게 차려입었지만 소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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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역시 강 대표 따님이시군요. 그렇게까지 캐낼 줄은 몰랐네요. 다만 한 가지는 틀리셨어요.”강시연은 잠시 멈칫했다.“뭐가요?”정황민은 느긋한 태도로 시가를 물고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그때 강성 그룹을 무너뜨린 건 내가 아닙니다.”“무슨 말씀이세요?”강시연의 눈엔 의아함이 번졌다. 질문은 곧바로 튀어나왔다.“그럴 리 없잖아요. 우리 집안이 무너졌을 때 가장 이득 본 쪽은 분명히 성남 제약이었는데요.”정황민은 어깨를 으쓱였다.“이쯤 됐으면 굳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죠. 그리고 잘 생각해 보세요. 진짜로 내가 가장 이득을 본 최대 수혜자가 맞나요?”강시연의 이마가 깊게 찌푸려졌다.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이 일렁이기 시작했다.“정 대표님, 좀 더 명확히 말씀해 주세요.”그러나 정황민은 몸을 뒤로 젖히더니 팔을 소파에 걸치며 강시연을 흘긋 바라보았다.“강시연 씨.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거래로 움직입니다. 나는 당신한테서 얻을 게 없어요. 그런데 왜 굳이 내가 입을 열어야 하죠?”침묵이 가라앉았다. 숨소리조차 무겁게 느껴졌다.강시연의 얼굴엔 뚜렷한 불쾌함이 스쳤지만 그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원하시는 게 뭐죠?”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정황민은 실눈을 뜨고 그녀를 천천히 훑어보며 목울대 깊숙한 곳에서 웃음을 토해냈다.“남자들이 바깥일 하는 이유야 뻔하죠. 권력이든 돈이든 아니면 여자든 그 셋 중 하나 때문이죠. 한번 스스로한테 물어보는 게 어때요? 나한테 줄 수 있는 게 뭔지.”그 순간, 강시연의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권력과 돈은 감히 정황민 같은 사람과 겨룰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단 하나였다.답답하고 숨 막히는 공기가 방 안에 퍼져 있을 무렵, 갑자기 문이 열렸다.밖을 지키던 경호원 둘은 온데간데없었다.“정 대표님. 제가 이 대화에 낄 자격은 될까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진수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겁고 날카로운 기운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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