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왕비는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가슴이 칼에 찔린 듯 아프기 시작했다.“오라버니는 귀가한지 얼마 안 된 거로 아는데 어찌….”“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태복이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정신을 차린 유왕비는 최씨 어멈이 있는 곳을 힐끗 보고는 해명하듯 말했다.“오라버니도 참, 이랑을 잠시만 빌려 간다는데 어찌 이리 야속할 수가. 가서 일 보게. 난 여기서 좀 더 기다리겠네.”태복은 우산을 받지도, 돌아갈 기미도 없는 유왕비를 한참 바라보다가 우산을 내려놓고 돌아갔다.굳이 여기서 같이 비를 맞을 이유는 없었다.또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안방에서 손기욱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녁상을 차리거라.”“나으리, 왕비께선 지금도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랑을 못 만나면 안 돌아갈 것 같은데요.”문이 열리고 손기욱이 똥 씹은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왕비는 대체 왜 자꾸 내게서 애첩을 빼앗으려 드는 거지?”태복의 입가에서 경련이 일었다.연경은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손기욱은 그래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란향을 향한 정은 이미 변방에 묻고 왔고 이번 생에는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가!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제 승리입니다, 나으리. 이긴 보상으로 나중에 제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게요.”손기욱은 고개를 숙이고 하얗고 보드라운 손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하나는 너무 적지. 더 요구해도 괜찮다.”연경은 눈을 깜빡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그럼 세 개로 할까요?”“그래.”말이 끝나기 바쁘게 연경은 그의 새끼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흔들며 신이 나서 말했다.“약속하신 겁니다? 번복하기 없어요! 앞으로 제 소원 세 개,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그래, 그래.”손기욱은 사랑스럽다는 듯이 연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연경이 말했다.“그럼 첫 번째 부탁을 들어주세요. 왕비마마를 만나고 오게 해주세요. 일국의 왕비께서 빗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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