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속 연경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다급히 상자벽을 두드렸으나, 주변의 소리가 너무 혼잡하고 빗소리까지 섞여서 한참을 두드려도 그가 다가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무의미한 발악을 멈추고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유왕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게 더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왜 유왕과의 혼인을 택했는지조차 묻지 않았다.손기욱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시 한구절이 생각나는구나. 성문 앞 풍경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연경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성문 앞 풍경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도화꽃만 여전히 봄바람을 맞아 만개하였네. 역시 오라버니는 과거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시간이 참 오래 흘렀지요. 앞으로는….”손기욱은 짜증스럽게 유왕비의 말을 끊었다.“네게 해주고 싶은 말은 전 구절뿐이다. 확대해석하지 말거라.”유왕비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성문 앞 풍경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그녀가 미처 그 속에 숨은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연경은 웃음을 터뜨렸다.손기욱은 시를 빗대어 유왕비에게 넌 이제 사람도 아니라고 욕하고 있는 거였다.뒤늦게 말뜻을 알아차린 유왕비가 냉소를 지으며 쏘아붙였다.“역시 대경 유일의 문무 장원답군요. 그런 말주변으로 이야기꾼을 했으면 대박이 났을 텐데 말이죠! 그렇게 그 아이를 총애한다면 과거의 일은 어디까지 얘기했나요? 설마 사실만을 말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저도 못 믿으니까요!”연경은 한참 귀를 기울였지만 손기욱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내게 거짓말한 게 있는 걸까?’“그때….”“참 말이 많아. 원래 이리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돌아가기 싫으면 후작가로 돌아가 계속 머물거라. 그때 가서 내 하나하나 너한테 따져줄 테니.”말문이 막힌 유왕비는 그를 힘껏 노려보고는 가림막을 내려버렸다.잠시 후, 두 내관이 맨 뒤쪽 마차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손기욱의 앞에 대령했다.유왕비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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