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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녀의 생존수칙: Chapter 321 - Chapter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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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1화

다음 날은 손기욱이 쉬는 날이라 연경과 함께 경양백 부인이 갇혀 있는 형부 감옥으로 향했다.이틀 후면 참수 날이었다.손기욱을 본 백부인은 평소의 오만함은 모두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며 애걸했다.“사돈, 저 좀 살려주십시오. 사돈, 제가 잘못했습니다!”손기욱은 그녀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연경을 난간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끌었다.“더 가까이 가지 말고 여기서 얘기 나누거라. 난 간수장과 논의할 일이 좀 있다.”그는 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준 후에야 느린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연경은 그녀와 경양백 부인에게 단둘이 얘기할 기회를 주고자 그러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주변 감방은 모두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전에 이미 얘기가 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연경도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그녀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경멸에 찬 눈으로 백부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경양백께서 친히 상소를 돌려 당신을 능지처참형에 처하도록 청하셨습니다.”경양백은 흠칫하더니 이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더니 웃음을 멈춘 후에는 울며 연경을 향해 손을 뻗었다.“연경아, 내 너를 무안 후작의 첩실로 올려준 걸 봐서라도 제발 나으리께 사정해서 목숨만 살려다오! 대신 형을 집행할 사람을 구해줘도 된다. 내 아버지가 원 각로로서, 휘하에 무수한 문생을 두고 있다. 내가 그자의 집안이 출세하도록 돕겠다!”연경은 냉소를 지었다.“당신은 곧 사형에 처해질 주제에 참 허황된 약속을 하시네요. 그 말을 대체 누가 믿을까요?”백 부인은 부들부들 떨며 한참을 통곡했다. 닭집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이미 정신은 피폐해져 미치광이가 따로 없었다.“저의 어머니께서는 경양백의 핍박에 의해 외실이 되었습니다. 당신도 아시겠지요. 그럼에도 당신은 경양백을 감싸고 오히려 저와 어머니를 괴롭혔죠.”연경은 백부인의 처지도 힘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분명 잘못이 경양백에게 있는데도 모든 잘못을 그의 옆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못했다.백부인은 울다 웃다를 반복했다.“단지 반반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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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2화

그 말을 들은 백부인은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렸다.이틀 후, 경양백 부인은 그렇게 소리 없이 생을 마감했다.경양백이 미쳤다는 소문이 경성에 떠돌기 시작하면서 그를 탄핵하는 상소문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에게 3개월의 금족령을 내리고 1년 녹봉을 삭감했다.경양백의 여러 아들들의 추악한 행실도 모두 까발려졌다. 유독 송육진만 수재라고 명성을 날리며 뭇 형제들 사이에서 가장 뛰어난 아이로 존재를 알렸다.손기욱은 이 참에 송육진을 세자로 올려 소년이 받은 정신적 충격을 보상해 주자는 상소를 올렸다.며칠 전 손기욱의 알현을 피한 것도 있고 경양백의 다른 아들들 중에 마땅히 세자로 올릴만한 아이도 없었기에 황제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손기욱이 저택으로 돌아가 희소식을 전하기도 전에 후작부는 귀빈을 맞게 되었다.유왕비였다.무안 후작가의 모든 사람들이 마중을 나갔고 그들 중에는 기요도 끼어 있었다.강씨 어멈은 연경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향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적어도 열흘은 걸릴 거라더니 왜 이렇게 빨리 도착한 거지?”연경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어쩌면 후작가가 대비도 못하게 일부러 앞당긴 거 아닐까요?”강씨 어멈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나으리께서 마음을 주신 여인들은 왜 다들 이렇게 눈치가 빠르지?’유왕비는 손기욱과 노부인에게 거절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서신에서 날짜를 미룬 것이 사실이었다. 노후작과 노부인은 그녀가 못마땅해도 왕비의 신분이니 대접에 소홀할 수 없었다.노후작은 집안에 향을 피우고 식솔들을 이끌고 대문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시종들은 공손히 그들의 등 뒤에 줄지어 섰다.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유왕비의 대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노부인은 굳은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옆에 있던 강씨 어멈이 조용히 팔꿈치로 언행에 조심하라고 충고를 주었다.또 한참을 기다리니 드디어 골목 저편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어찌나 느긋하게 오고 있는지 또 그렇게 한참이 지나갔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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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3화

“이 사람은….”유왕비는 연경을 빤히 바라보며 그녀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비단옷 차림으로 보아 시종은 아닌 것 같고 머리에 하고 있는 장신구도 꽤 비싸 보였다. 고개는 숙이고 있지만 하얗고 둥근 이마와 언뜻 보이는 자태로 보아 미인임은 확실했다.기요는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고 용의백부가 무안 후작가와 사돈을 맺을 의향이 있다는 것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유독 눈앞의 이 미인만 그녀가 모르는 사람이었다.노부인은 비웃음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기욱이가 애지중지 아끼는 첩실입니다. 올해 새로 들였지요.”연경은 하는 수없이 재차 유왕비에게 예를 행했다.“소첩, 왕비마마를 뵈옵니다.”은방울 굴러가듯이 청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어오자, 유왕비의 미소가 옅어졌다.분명 경성에서 연말을 보내고 돌아가기 전까지 그가 첩을 들였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저런 미인을 들였다니.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왕비는 웃으며 연경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자신이 하고 있던 비취옥 팔찌를 빼서 그녀의 손목에 끼워주었다.연경의 보드라운 피부가 유왕비의 손에 닿았다. 연경은 매향원에 들어와서 산 이후로 적절한 관리도 있었고 나이가 어려서 피부가 탱탱하고 부드러웠다.그에 반해 그녀보다 여덟 살 이상인 유왕비는 매일 피부관리를 해도 어린 연경을 따라갈 수 없었다.“나와 오라버니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지. 오라버니 신변에 시중들 사람이 없어서 너무 걱정했는데 정말 잘 되었구나.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 고개를 들고 얼굴을 보여주렴.”연경은 유왕비에의 말에서 묘한 적대감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수줍게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얼굴을 본 유왕비가 놀란 듯 물었다.“너는 후작부의 시종이 아니더냐?”말을 마친 그녀는 그제야 실수를 깨달았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연경은 일부러 침울한 표정으로 답했다.“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소첩은 한때 후작부의 시종이었지요.”노부인이 불쾌한 어투로 연경에게 말했다.“시종은 무슨! 너는 엄연히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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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4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멀지 않은 곳에 유왕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에게서는 예전과 같은 매화향이 났다.“어쩌다 오늘 돌아오셨습니까, 마마?”손기욱은 담담한 어투로 매화당이 있는 곳을 힐끗 바라보았다.유왕비는 잠시 멈칫하더니 미안한 어투로 답했다.“분명 서신에는 어머니께 최근 방문할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께 아무 얘기도 못 들으셨습니까?”손기욱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마마께서도 이미 혼인한 몸이고 저도 신변에 사람을 들였으니 오라버니라는 호칭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유왕비의 시종들은 일부러 먼 곳에 서 있었기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손기욱은 옛 기억이 떠올라 불편했다.유왕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오라버니, 어찌 저에게 이리 매정히 대하십니까? 저는 꼭 오라버니께 해명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이곳에서 한 시진이나 기다렸단 말입니다.”손기욱은 무덤덤한 어투로 말했다.“어머니와 강씨 어멈 모두 내 귀가 시간을 알고 계실 텐데.”“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유왕비는 눈시울을 붉히며 서럽게 말했다.“오라버니께서 변방으로 떠난 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후작가 사람들 모두 저를 냉대했지요. 사람을 시켜 물어봤는데 아무도 제게 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그럴 리 없습니다. 후작가의 시종들은 모두 강씨 어멈에게서 예절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니 왕비마마를 홀대할 리 없지요.”유왕비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오라버니는 변하셨군요.”“마마는 안 변했습니까?”“그때 저는 살기 위해서라도 유왕과 혼인해야 했습니다. 만약 제 말에 한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벼락 맞을 겁니다.”손기욱은 손을 들고 독한 맹세를 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가 닿기도 전에 다시 손을 내렸다.멀지 않은 곳 창가에서 연경과 서란은 조용히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연경은 가슴을 부여잡았다.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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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5화

연경은 어느새 손기욱과 함께 생활하면서 점차 말하는 것마저 그를 닮아가고 있었다.손기욱은 농담처럼 던진 말에 그녀가 반응이 없으니 그제야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녀는 굉장히 불안한 얼굴로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내 잘못이다.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게 아니었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네가 놀라는 일은 없도록 주의하마.”그는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연경은 예를 행하며 그에게 말했다.“소첩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송구합니다.”손기욱은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왜 그렇게 예의를 차리느냐?”연경은 차마 그와 유왕비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엿보지 않았다는 뻔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좀 전에 나으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마중을 나갔는데…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절대 일부러….”손기욱의 눈가에 이상한 희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빵빵하게 부풀린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쑤시며 물었다.“경아, 시기를 하는 것이냐?”“제가 어찌 감히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겠어요.”“그럼 왜 기분이 안 좋은 거지?”“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유왕비께서 나으리께 너무 친근하게 부르는 것은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입니다.”연경은 지금 이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질투가 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속에 신물이 올라오는 것처럼 쓰리고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하나같이 쓴맛이 느껴졌다.손기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경이가 입맛이 좀 쓴 것 같구나. 이럴 땐 달콤한 입맞춤이 약이지.”그 말과 함께 그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연경은 내키지 않는 티를 팍팍 내며 건성으로 응하더니 절대 입술을 열어주지 않았다.손기욱은 가벼운 입맞춤을 끝낸 후 진지하게 말했다.“역시 쓴맛이 나는구나.”연경은 속으로 코웃음치며 고개를 홱 젖혔다.손기욱은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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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6화

그제야 연경에게서 그가 바라던 말이 들려왔다.“별일 아닙니다. 다만 나으리처럼 철저하신 분이 유왕비의 손을 잡으려다 빼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을 뿐이죠. 이곳이 무안 후작부니 다행이지만, 다른 장소였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손기욱의 얼굴빛이 살짝 어두워졌다.“그건 내 잘못이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하지. 경아, 내 나이가 몇이지?”“스물여섯이요.”“이 나이를 먹고 아무도 마음에 품은 적이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변방으로 떠나기 전에 그녀는 내가 승전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준다고 약속했다. 내가 우리의 앞날을 위해 피 흘려 싸우고 있을 때, 그녀는 갑자기 황자에게 시집을 가버렸지.”“그땐 분하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경성으로 달려와서 따지고 싶었지만, 나를 따르는 수많은 병사들의 안위를 팽개칠 수 없었지. 한동안은 그렇게 마음이 붕 뜬 것처럼 싸웠고 어깨의 부상도 그때 입은 것이다.”사실 자세한 것들을 연경은 알고 싶지 않았다.알면 마음이 아플 것이고 다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앞으로 그가 유왕비와 더 이상 엮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그의 오랜 부상이 유왕비 때문이었다는 말을 듣자 그녀는 이유 모르게 코가 시큰거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를 위해 지압을 해주고 음식에 약재들까지 넣어가며 신경 써줬는데 알고 보니 옛사랑의 뒷치다꺼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매일 자신에게 더 이상 마음을 주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연경은 작은 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유왕비께서 매화를 좋아하시나요?”손기욱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그는 착잡한 얼굴로 연경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푹 숙인 그녀를 보고 한 걸음 물러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연경은 애써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분명 그분이 매화를 좋아하셔서 매화당에 매화나무만 심은 것이겠지요. 제 말이 맞죠? 저 똑똑하지요?”손기욱은 가슴이 꽉 막힌 듯했다.“경아, 울고 싶으면 울고 욕하고 싶으면 욕해도 좋다. 난 다 견딜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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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7화

“마마?”당직을 서던 시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자, 유왕비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별일 아니니 이만 물러가거라.”그녀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시절 그녀는 진심 어린 맹세를 할 때면 손을 위로 드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손기욱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는 손을 잡아주고는 했다.그녀는 오른손을 어루만졌다.그런 따뜻함은 그녀가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었다.만약 그가 후일에 이렇게까지 출세할 줄 알았다면 그녀는 절대 그를 배반하는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홍영아.”조금 전의 시녀가 침상 가까이로 다가왔다.“예, 마마.”“그 첩실에 대해 알아보라고 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무안 후작의 애첩은 연경이라고 합니다. 본래 금수원 시종이었으나 훗날 노부인께서 송학당에 데려다두었다고 합니다. 듣는 바로 변방에 나갔던 무안 후작은 그곳에서 깊게 사랑에 빠진 여인이 있었는데 설날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그분과 그 여인이 함께 거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면사포를 쓴 미인에 관한 소문은 유왕비도 경성을 떠나기 전에 어렴풋이 들은 바가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그 말을 믿지 않았다.손기욱이 변경에 간 이유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공적을 세우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일에만 몰두했을 텐데 언제 누군가와 깊은 정을 나눌 겨를이 있었겠는가.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왕비가 말했다.“내일 다시 사람을 시켜 그 첩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거라.”작년 겨울 수렵대회 때, 손기욱이 이 시종을 위해 매를 대신 맞은 적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오귀비에게 대놓고 반항한 것이라 했지만 정작 유왕비는 반신반의했다.그때까지도 그녀는 손기욱이 아직 자신을 잊지 못해 장가를 들지 않았다고 믿었다.만약 그가 그 시종에게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매질을 저지했을지라도 절대 대신 맞아주진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그 시종과 무척 닮았다는 신비의 여인.유왕비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일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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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8화

“그래요.”강씨 어멈은 유왕비가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신경 쓰지 않고 기요와 연경에게 가계를 정리하고 계산하는 법을 가르쳤다.유왕비는 줄곧 연경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청아한 목소리에 눈을 반짝이며 수업을 듣는 모습, 단정한 자태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유왕비는 어제 손이 닿았을 때의 촉감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매만졌다.거칠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연경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유왕비는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눈길로 연경을 잠시 관찰하다가 쉬는 시간을 틈타 강씨 어멈에게 다가갔다.“어멈, 연경 저 아이를 잠시만 빌릴 수 있을까요?”강씨 어멈은 불쾌한 말투로 대꾸했다.“연 이랑은 엄연히 나으리의 첩실입니다. 그렇게 대놓고 이름을 부르는 건 예법에 맞지 않아요.”유왕비도 성내지 않고 부드럽게 잘못을 시인했다.“일깨워 주셔서 감사해요, 어멈.”연경은 유왕비를 돌아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마마, 소첩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라면 소첩이 어멈께 허락을 구하겠습니다.”“내가 일전에 매화당에 두고 간 것들이 좀 있는데 자네와 함께 가서 가져왔으면 하네.”연경은 묘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언뜻 건방져 보이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유왕비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매화당은 손기욱의 처소이니 멋대로 들어간다면 안 좋은 소문이 들릴 테니 그녀를 찾아와 부탁을 한 게 틀림없었다. 어차피 거절하기 애매한 부탁이었다.연경은 어멈에게 고개를 숙이며 허락을 구했다.“어멈, 마마를 모시고 가봐야 할 것 같네요.”그러던 그녀는 갑자기 기요에게 고개를 틀더니 말했다.“내일이면 용의백부의 연회날인데 아씨도 같이 매화당으로 가셔서 제가 손수 만든 간식을 맛보시지 않으렵니까? 내일 연회 때 좀 싸가고 싶어서요.”기요는 순간 마음이 혹했다.그냥 구경만 하려던 참인데 손기욱의 처소로 초대라니 궁금증이 일었다.유왕비는 싸늘한 시선으로 기요를 힐끗 보고는 연경을 재촉했다.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기요는 얼굴을 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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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9화

서란은 기요를 매향원의 다락방으로 안내했다. 3층 높이로 된 누각의 맨 위층으로 매향원의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당연히 유왕비의 모습도 눈에 훤히 들어왔다.“아씨, 이건 저희 이랑께서 직접 만드신 과자이니 맛 좀 봐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은 이랑께서 아씨를 직접 접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다락방에서 매향원의 경치나 구경하시라고 이쪽으로 모셨어요. 마음껏 구경하셔도 됩니다.”말을 마친 서란은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라면서 밖으로 물러가고 다락방에는 기요와 그녀의 시종만 남았다.단순한 연하가 기요에게 조용히 귀띔했다.“아씨, 위로 올라가면 왕비께서 뭘 하시는지 보일 것 같아요.”“닥치거라.”기요는 연경이 일부러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내 유왕비의 행태를 엿보게 하려는 의도임을 뻔히 알고 있었다.이성과 호기심이 엇갈리는 사이, 결국 그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손기욱과 유왕비의 과거는 현재 아무도 감히 의논하지 못하지만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한때 얼마나 애절한 사랑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기요는 어머니에게서 얘기를 듣고 유왕비가 무척 부럽다고 생각했다.그러한 부러움은 면사포 미인이 준 충격보다 훨씬 컸다.그녀도 손기욱 같은 사내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고 싶었다.“아씨, 저기 보이네요.”기요는 연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유왕비가 매화나무 한 그루 앞에 멈춰서 연경과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유왕비는 눈앞의 매화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기욱 오라버니께서는 내가 매화를 좋아하는 줄 알고 천금을 들여 최상급의 매화나무를 공수해 오셨네. 그리고 그분이 직접 구덩이를 파고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이곳에 나무를 심었지. 이제 보니 그동안 오라버니가 이 나무들을 잘 돌봐준 모양이군. 한 그루도 죽지 않고 무성하게 자랐으니.”연경은 유왕비가 앞뒤가 전혀 다른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자신의 앞에서 일부러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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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0화

유왕비는 불쌍한 척하는 그녀의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기욱 오라버니는 약자들을 가련히 여기고 많은 도움을 주시던 분이었지.”‘이런 식으로 오라버니의 동정심을 유발해서 매화당까지 오게 된 거지?’연경도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예. 나으리는 원래 그런 분이시죠.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유왕비도 과거 이런 식으로 나으리를 이용했겠지?’두 사람은 대놓고 서로를 공격하진 않았지만 어느새 둘 사이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순진한 아민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유왕비는 연경의 영리함에 혀를 내둘렀다.곧이어 아현이 삽 두 자루를 가지고 돌아오더니 아민에게 하나 건네주고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그러나 한참을 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유왕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른 곳을 가리켰다.“어쩌면 저기에 묻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서 잘 기억이 안 나는군.”두 자매는 몰래 눈을 흘기고는 계속해서 삽질을 했다.유왕비가 피식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자넨 강씨 어멈 곁에서 예법을 얼마나 배웠는가? 어째 시종들이 이리도 분수를 몰라? 오늘은 우리밖에 없으니 조용히 넘어가겠지만 나중에 황실이나 다른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이런다면 눈알을 뽑아버릴 수도 있네.”아민은 반박하려는 아현을 다급히 말렸다.연경이 말했다.“저 아이들은 나으리께서 데려온 아이들입니다. 소첩은 평소에 저 애들을 동생처럼 대했지요.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한창 순수하고 장난기 많을 나이죠.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 마마.”유왕비는 비꼬려던 말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딱 봐도 무공을 아는 자들인데 손기욱이 일부러 이들을 연경의 곁에 두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그때 내 신변에도 이런 애들이 있었다면 노부인의 박대를 당하고만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장소를 세 번이나 옮겨서야 유왕비는 물건을 묻은 정확한 장소를 가리켰다.성격 급한 두 소녀는 일부러 흙을 파서 유왕비가 있는 근처에 뿌렸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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