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261 - Chapter 1270

1410 Chapters

제1261화

끝없이 펼쳐진 하얀 세계, 주민혁은 텅 빈 묘지 한가운데 서 있었다. 손에는 종이 두 장이 쥐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화장 통지서, 다른 하나는 이혼 합의서였다.종이 위의 글씨는 눈이 시릴 만큼 또렷했고 맨 아래에는 그가 직접 적은 사인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왜 그걸 썼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그저 최수빈이 없고, 율이도 없다는 사실만 분명했다.품 안에는 두 개의 유골함이 안겨 있었다. 작고 가벼운 그것들이 이상하게도 불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가슴을 짓누르며 타들어 가듯 시린 통증까지 남겼다.그는 한 걸음씩 앞으로 걸었다.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귓가에는 거칠게 몰아치는 바닷바람 소리가 들렸고 짠내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숨이 막힐 듯 목이 조여왔다.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아무도 찾지 못할 곳까지, 그곳에서 함께 머물며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파도가 거세게 밀려왔다.철썩, 철썩하며 끊임없이 해변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건 마치 최수빈이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울음 같기도 했고, 또는 율이의 부드럽고 어린 목소리 같기도 했다.“아빠...”“아빠, 나 좀 안아줘요.”“민혁 씨... 나 좀 봐줘요.”그 목소리들은 수없이 많은 바늘이 되어 주민혁의 심장을 찔러댔다. 숨이 막힐 듯 아파서 그는 몸을 웅크렸다.그 순간, 사방에서 바닷물이 한꺼번에 밀려왔다.차갑고 짠 물이 입과 코를 통해 들이닥쳤고 앞다투듯 밀려 들어와 숨통을 죄어왔다.결국 숨이 완전히 막혀버렸다.“컥!”거친 기침이 목을 찢듯 터져 나왔다.비릿하면서 달큰한 액체가 혀끝으로 차올라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자 하얀 베개 커버가 이내 붉게 물들였다.주민혁은 번쩍 눈을 떴다.동공이 급격히 수축하더니 눈에는 아직 공포가 가시지 않아 붉은 실핏줄이 가득 번져 있었다.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따라왔다.조금 전까지의 악몽이 머릿속을 미친 듯이 맴돌며 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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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2화

“우린 다 괜찮아요. 민혁 씨의 곁을 떠난 적 없어요.”그 말에 주민혁의 몸이 순간 굳었다. 최수빈을 끌어안고 있던 힘도 조금씩 느슨해졌다.그런데 팔이 풀린 바로 그 순간, 남자의 등이 갑자기 팽팽하게 굳어졌다.다음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거센 기침이 터져 나왔다. 아까보다도 훨씬 심하고, 훨씬 사납게 몰아쳤다.주민혁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그는 최수빈의 옷자락을 꽉 움켜쥔 채 놓지 않았는데 손가락 마디는 잔뜩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뜨끈한 액체가 그녀의 손등 위로 튀었다.짙은 피비린내가 섞인 달큰한 냄새였다.최수빈은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며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창백한 조명 아래, 눈에 박힐 만큼 선명한 붉은빛이 보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민혁 씨!”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부축하려 손을 뻗었지만 남자는 고개를 돌려 최수빈의 손을 피했다.그러고는 힘겹게 몸을 옆으로 틀어 그녀에게 등을 보였다. 어깨는 여전히 거칠게 들썩이고 있었다.기침은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한 번 시작된 기침은 또다시, 또다시 몰아쳤고 금방이라도 속에 든 것까지 모조리 토해낼 것처럼 처절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주민혁은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나... 괜찮아.”거의 끊어질 듯한, 너무 가벼워서 더 불안한 목소리였다.코끝이 시큰해진 탓에 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이내 시야에는 수척하게 야윈 그의 등이 들어왔다. 목덜미에 핏줄이 선명하게 돋아오른 것도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한 가지의 생각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지난번에도 피를 토했었지? 빙하 틈 속에서, 얼음벌판을 헤매던 그때도 분명 그랬어. 그때는 나도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우울증 때문에 이럴 리는 절대 없어. 동상에도 피를 토하는 증상은 없어.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병이 또 있는 건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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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3화

“말하지 마요.”최수빈은 주민혁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그냥 좀 쉬어요. 기운 아끼면서.”주민혁의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이 최수빈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불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고 눈 밑에는 옅게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며칠 내내 그의 곁을 지키느라 몸이 상한 게 분명했다.주민혁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목젖을 천천히 움직였으나 끝내는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응.”쉰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하지만 그의 마음속은 조용하지 않았다.무언가로 꽉 막힌 듯 답답했고 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시리고, 쓰리고, 아프고, 그러면서도 설명하기 힘든 따뜻함이 맨 밑바닥에 남아 있었다.최수빈은 잠시 자리에 앉아 있다가도 끝내 마음을 놓지 못했다.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이불 끝을 다시 정리해주고는 병실을 나섰다.고요한 복도는 비상등만이 희미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그녀는 옆방 몇 군데를 차례로 두드리며 혹시 기침약이나 목캔디를 가진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대원들 대부분은 주민혁의 부하들이었다. 때문에 최수빈의 얼굴만 봐도 병실 안 상황이 어떠한지 짐작한 듯, 모두 말없이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잠시 뒤, 최수빈의 손에는 서로 다른 브랜드의 기침약 몇 판과 목캔디 두 상자가 들려 있게 되었다.그녀는 짧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병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따뜻한 물을 한 컵 따라 약을 손에 쥔 채 주민혁에게 내밀었다.“약 먹어요. 조금이라도 나을 수 있잖아요.”주민혁도 알고 있었다. 이 약들이 자신의 병에는 별 소용이 없다는 걸.그럼에도 그는 조용히 턱을 조금 들어 올리고 그녀가 내민 약을 그대로 삼켰다. 이어 목캔디 하나도 입에 물었다.달콤하면서도 시원한 박하 향이 입안에 퍼졌지만, 목구멍 깊숙이에 배어 있는 비릿한 피 맛까지는 지워주지 못했다.밤은 점점 깊어졌고 병실 안에는 두 사람의 옅은 숨소리만 남았다.주민혁의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여전히 때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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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4화

남자는 목젖을 한 번 움직이더니 여전히 조금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훨씬 또렷한 소리였다.“깼어?”최수빈은 그 한마디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며칠째 팽팽하게 조여 있던 신경도 따뜻한 온기에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이불자락을 다시 여며주었다.“기침은 안 나요?”“원래 있던 증상이야.”주민혁은 한쪽 입꼬리를 씩 당기며 말했다.“이 정도는 혼자 버틸 수 있어.”그는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고 최수빈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창백하긴 해도 어제처럼 잔뜩 굳어 있지는 않은 그의 얼굴을 보며, 오래도록 불안하던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따라 건넸고 그는 그 물을 조금씩 천천히 마셨다.하지만 그렇게 찾아온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사라진 칩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기에 기지 회의실 안은 숨이 막힐 만큼 공기가 무거웠다.장병욱은 맨 앞에 선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사람들을 훑고 지나가더니 끝내 최수빈에게 멈췄다. 그 눈빛에는 노골적인 의심이 서려 있었다.“지금 기지 핵심 구역을 벗어난 사람은 최수빈 씨밖에 없습니다.”그는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칩이 사라진 날 밖에 나갔던 사람도 최수빈 씨 한 명뿐이었고 게다가 외부에서 파견된 인원이라 신분 자체도 완전히 믿기 어렵죠.”그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이 금세 술렁였다.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최수빈에게 쏠렸다.의심과 경계, 탐색이 뒤섞인 눈빛들이 가느다란 바늘처럼 그녀의 몸 위로 꽂혀 들었다.최수빈은 등을 곧게 피고 의자에 반듯하게 앉은 채 표정에도 아무런 동요가 드러나지 않았다.곧 그녀가 시선을 들어 장병욱을 똑바로 바라봤다.“의심하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증거를 가져오세요.”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칩 분실은 중대한 문제예요. 근거 없는 추측만으로 사람을 범인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증거요?”장병욱이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지금 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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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5화

과학기술원은 각 부처와 즉시 공조에 들어가 칩 회수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동시에 그들에게는 현 위치에서 대기하며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는 명령도 내려왔다.전화를 끊은 뒤, 최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통신실을 나서자마자 마주친 건 주민혁이었다.그는 손에 외투 한 벌을 들고 있었는데 곧 말도 없이 그것을 최수빈의 어깨에 걸쳐주었다.“바람 세니까...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최수빈이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주머니 속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지안이었다. 신호는 중간중간 끊겼지만 다행히 통화할 정도는 됐다.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수빈 씨, 거기 신호 다시 잡혔어요?”강지안은 곧바로 목소리를 낮췄다.“민혁이의 상태는 좀 어때요? 피까지 토했다면서요?”최수빈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주민혁을 한번 힐끗 본 뒤,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좀 나아졌어요. 기침도 멎었고. 강 선생님, 대체 무슨 병이길래 피까지 토하는 거예요? 우울증 때문에 이럴 리는 없잖아요.”휴대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그리고 이어진 강지안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심맥이 손상됐어요.”그 짧은 한마디에 최수빈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강지안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그동안은 계속 약으로 버텨왔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남극에서 무리를 했고,= 몸도 심하게 상한 데다 찬바람까지 맞았잖아요. 그래서 지병이 다시 도진 거예요. 피를 토한 건... 심맥 손상이 더 심해졌다는 뜻이고요.”최수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주민혁은 이 모든 고통을, 이 오랜 세월 내내 홀로 견디고 있었던 거였다.전화를 끊은 뒤, 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을 파고드는 시린 통증을 억지로 눌러 삼킨 뒤, 그녀는 천천히 주민혁의 방으로 향했다.그리고 문을 열어젖힌 순간, 최수빈은 그대로 멈춰 섰다.주민혁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앞에 두툼한 설계도 뭉치가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신호 좀 잡히자마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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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6화

주민혁의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듯했지만 최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리지 마요. 한 번 마음 먹은 건 절대 안 바꾸니까.”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선 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던 장병욱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주민혁의 성격도, 최수빈 역시 단호하게 결심을 내린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말해봐야 의미가 없었다.곧 기지에 남아 있던 다른 사람들도 짐을 정리하고 하나둘씩 주민혁과 최수빈에게 인사를 건넸다.오프로드 차량들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멀어지더니 이내 하얗게 뒤덮인 설원 너머로 사라졌다.텅 비어버린 넓은 기지는 순식간에 적막에 잠겼다. 남은 건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최수빈은 홀로 서 있는 주민혁의 가늘고 외로운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래도... 도시로 가서 진료 한번 받아보는 게 어때요? 몸 좀 회복되고 나서 다시 돌아와도 늦지 않잖아요.”주민혁이 돌아섰다.“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그는 담담하게 덧붙였다.“오래된 지병이야. 이틀만 쉬면 괜찮아지니까 호들갑 떨 필요 없어.”최수빈이 다시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눌러 말을 막았다.“걱정 마. 여기는 물자도 충분하니까.”그는 창고 쪽을 가리켰다.“통조림이랑 압축 식량, 식수까지. 반 달은 버틸 수 있어. 발전기도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난방이나 조명도 문제없고.”최수빈은 그의 시선을 따라 창고를 바라봤다. 그러자 반쯤 열린 문 너머로 가지런히 쌓인 물자들이 어렴풋이 보였다.그가 이미 이곳에 남을 준비를 끝내둔 상태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주민혁은 창가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눈밭을 바라봤다.“칩이 사라졌는데 아직 못 찾았어. 그래도 이 연구는 멈출 수 없어.”최수빈은 따뜻한 물 두 잔을 들고 다가와 그에게 한 잔을 건넸다.철수할 때, 말끝을 흐리던 대원들의 표정이 떠올라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 남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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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7화

최수빈이 고개를 들어 주민혁을 바라봤다.“나를 어린애로 보는 거예요? 그렇게 쉽게 속일 수 있을 것 같아요?”이 말에 주민혁은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스치더니 한동안 최수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가끔은... 네가 정말 그렇게 쉽게 속여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적어도 그랬다면 그녀가 이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테고, 이 눈보라 속에 남아 함께 버티지도 않았을 테고, 지금처럼 보이지 않는 위험 속으로 끌려들어 오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뒤이어 최수빈이 입을 열려던 순간, 주민혁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 내가 해줄게.”“아무거나요.”잠시 멍하니 있던 최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이곳에 있는 식재료가 많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때문에 따뜻한 밥 한 끼만 먹을 수 있어도 충분히 다행인 상황이었다.“재료가 많진 않아서 그냥 간단하게 두 가지 정도만 할게.”이렇게 말한 주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쪽으로 향했다.걸음이 살짝 흔들렸고 몸도 평소보다 훨씬 말라 보였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그래서 최수빈은 급히 따라 일어났다.“내가 도와줄게요.”“괜찮아.”주민혁이 뒤돌아보며 말했다.“앉아서 기다리기만 해. 괜히 무리하지 말고.”그는 혼자 주방으로 들어가 서툰 손길로 식재료를 찾기 시작했다.거실 의자에 앉아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주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최수빈의 마음은 복잡해졌다.주민혁이 요리를 하는 건 거의 본 적이 없었다.기억 속의 그는 언제나 말끔한 정장을 입고 각종 비즈니스 자리에서 사람들을 상대하던 ‘주 대표’였지, 이렇게 인간미가 묻어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주방 안에서는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고 가끔씩 애써 참는 듯한 기침 소리도 섞여 나왔다.그 소리를 듣는 순간, 최수빈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결국 참지 못하고 주방 문 앞까지 다가갔다.“민혁 씨, 그냥 좀 쉬어요. 무리하지 말고.”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주민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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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8화

문이 조용히 닫히는 순간, 실내의 온기와 함께 최수빈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안도감도 사라졌다.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불안한 눈빛으로 문 쪽만 바라봤다. 귓가에는 바깥에서 몰아치는 눈보라 소리만 가득했다.1분, 2분, 10분...시간은 조금씩 흘러갔지만 주민혁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마음이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는 나머지 최수빈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그래서 급히 외투를 집어 들고 문 쪽으로 달려갔다.문을 여는 순간, 정면에서 들이친 찬바람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밤하늘이 먹물을 풀어놓은 듯 어두웠는데 눈에서 반사된 빛 덕분에 시야는 어렴풋이 확보할 수 있었다.그렇게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바라보다가 최수빈은 이내 그대로 굳어버렸다.눈밭 위로 몇 사람의 형체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기지 쪽을 향해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걸음은 흔들림이 없었고 움직임에는 망설임도 없었다. 누가 봐도 준비를 갖추고 온 사람들이었다.극지 동물이 아닌, 저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을 노리고 온 것이었다.최수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발끝에서부터 솟구친 서늘한 기운이 단숨에 정수리까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서둘러 문을 닫으려 몸을 돌렸다.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놀라서 뒤돌아본 최수빈의 앞에는 다행히 주민혁의 어두운 눈빛이 보였다.그가 어느새 바로 뒤에 서 있는 것이었다.얼굴은 밤하늘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손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녀의 손목을 쥔 힘만큼은 놀랄 만큼 강했다.“당황하지 마.”주민혁은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말했다.“저 사람들은 우리를 노리고 온 거야. 안으로 들어가서 장비부터 챙기자. 지금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최수빈은 긴장감 어린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모든 걸 알아차렸다.‘저 사람들, 아마 칩이 사라진 일과 무관하지 않을 거야.’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곧 주민혁에게 이끌리듯 서둘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따뜻한 불빛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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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9화

주민혁은 차가운 손으로도 흔들림 없이 최수빈의 손을 꽉 붙잡은 채, 그녀를 이끌고 눈밭 위를 미친 듯이 달렸다.매서운 바람이 칼날처럼 얼굴을 후려쳤고 눈송이는 시야를 가려 앞에는 그저 희뿌연 설원만 어렴풋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잘 들어.”주민혁이 낮게 말했다.“조금 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너하고 따로 움직일 거야. 내가 놈들을 유인할 테니 너는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 그리고 칩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려야 해. 과학기술원 쪽에도 반드시 연락하고.”최수빈은 비틀거리면서도 주민혁의 걸음을 따라붙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짙은 어둠 속에서 드러난 남자의 옆얼굴은 차갑고 단호했으나 표정은 소름 끼칠 만큼 침착했다.마치 이런 상황을, 이런 결정을, 그는 이미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짚어본 사람 같았다.최수빈의 가슴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번져 들어왔다. 끝내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저 사람들은 민혁 씨 때문에 온 거예요, 아니면 나 때문에 온 거예요?”애초에 기지 사람들은 이미 철수한 상태였고 남아 있는 물자라고 해봤자 누가 목숨을 걸고 노릴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때문에 이 눈보라를 뚫고 끝까지 쫓아왔다는 건 분명 사람을 노리고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생각은 하지 마.”주민혁은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내 손 놓치지 말고 따라와.”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사람 수도 많고 준비도 철저해. 조금만 더 가면 갈림길이 나올 거야. 거기서 넌 빙하 틈 쪽으로 들어가. 그쪽은 지형이 복잡해서 쉽게 못 찾을 거거든. 나는 놈들을 다른 쪽으로 유인할 거야.”최수빈의 목소리가 떨렸다.“우리 둘 중 하나는 꼭 희생돼야만 하는 거예요?”가슴 한가운데가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답답하고 아팠다.그녀는 주민혁의 창백한 옆얼굴을 바라봤다. 달리는 내내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의 몸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몸도 아직 다 회복하지 않았으면서... 걷는 것조차 완전히 힘이 실리지 않는데 저런 무서운 사람들을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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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0화

“시간 없어!”주민혁이 이를 악물며 다시 최수빈의 손을 움켜쥐었다. 뼈를 으스러뜨릴 만큼 강한 힘이었다.“내 말 듣고 넌 빙하 틈 쪽으로 뛰어. 나는 놈들을 유인할게. 꼭 살아남아야 해. 그리고... 반드시 이 소식을 전해야 해.”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이 최수빈을 옆 갈림길 쪽으로 밀어냈다.“뛰어!”낮게 터져 나온 그 한마디가 고막을 울릴 만큼 거칠게 울렸다.최수빈은 휘청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눈앞에서 주민혁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달려나갔다.눈보라 속에서 그의 뒷모습은 점점 작아졌지만 끝까지 곧게 서 있었다.“민혁 씨!”가슴이 찢어질 듯한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소리는 바람과 눈 속에 그대로 삼켜졌다.눈물이 시야를 흐렸다.손전등 빛들이 하나둘 그가 달려간 방향으로 쏠렸고 추격하는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최수빈은 그 자리에 선 채 온몸을 떨었다.눈물과 눈송이가 함께 뒤섞여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탓에 차갑고도 아렸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의 선택을 헛되이 만들어선 안 된다는 걸.그래서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최수빈은 눈물을 닦아내고 몸을 돌려 빙하 틈 쪽으로 달려나갔다.눈보라에 섞인 얼음 조각이 얼굴을 후려쳐 살을 에는 듯한 통증이 쏟아졌다.그런데 얼마 못 가, 최수빈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기지에 스노모빌이 있었지?’이미 주민혁은 사람들을 반대 방향으로 유인해버린 상황, 지금 돌아가 차를 가져온다면 그를 태우고 함께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이게 두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최수빈은 이를 악물었다.그리고 방향을 틀어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다시 기지 쪽으로 내달렸다.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헤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시야는 흐려졌으므로 오직 기억에 의지해 방향을 잡아야 했다. 마침내 희미하게 기지의 윤곽이 눈앞에 드러났다.최수빈은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춘 채 벽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고는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인기척이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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