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271 - Chapter 1280

1410 Chapters

제1271화

최수빈은 핸들을 꽉 쥔 채 눈보라에 흐릿해진 앞길을 지그시 응시했다. 등 뒤로는 주민혁의 체온이 또렷하게 전해졌다.그는 최수빈의 뒤에 앉아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귓가에는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추격자들의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 고함은 눈보라를 타고 날아와 귀를 찢을 듯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저 사람들, 분명 우릴 노리고 온 거예요!”최수빈의 목소리는 바람에 휘날려 다소 떨렸다.“돌아가서 스노모빌 찾아왔는데 혹시 길 알아요? 빨리 방향 알려줘요.”허리를 감싼 힘이 살짝 느슨해졌다.곧 주민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는데 마치 바람 속에서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했다.며칠째 이어진 고열과 도망치는 동안의 에너지 소모로, 그는 이미 기력을 거의 다 잃은 상태였다. 때문에 지금은 말을 꺼내는 것조차 온 힘을 쥐어짜 내야 했다.“남서쪽으로. 거기 얼음 숲이 있어... 지형이 복잡해서 따돌릴 수 있어.”최수빈이 대답하려는 순간,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점점 힘이 빠지고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이마가 힘없이 그녀의 등에 기대왔다.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울컥하며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민혁 씨, 잠들면 안 돼요! 버텨요!”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백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주민혁의 숨결이 최수빈의 목덜미를 스쳤다.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식어가는 기운이 섞여 있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거의 사라질 듯한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잘 들어... 잠시 후에... 내가 진짜 못 버틸 것 같으면... 억지로 데리고 가지 말고 너 먼저 가...”“닥쳐요!”최수빈의 목소리톤이 훅 높아졌다.눈앞에는 온통 새하얀 설원뿐, 방향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를 악문 그녀는 한 손을 떼어 배낭 옆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둔 등산용 로프를 꺼냈다.거칠고 단단한 촉감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오히려 마음을 다잡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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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2화

“최수빈...”사포에 갈린 듯 거칠고 쉰 주민혁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숨소리는 어찌나 희미한지 눈보라에 그대로 삼켜질 것만 같았다.“이번 생에 너를 만나서... 후회는 없어.”그 한마디에 최수빈은 누군가에게 심장이 세게 움켜쥐어진 듯 숨이 막혀올 정도로 아팠다.이를 악문 그녀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추격자들도, 머릿속에 스치는 최악의 상황도 전부 애써 떨쳐내고는 코끝이 찡해진 채 겨우 말을 내뱉었다.“지금은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에요. 여기서 빠져나가고 나서... 그때 몇 번이고 해요. 다 들어줄 테니까.”그녀는 스로틀을 끝까지 비틀었다. 그러자 스노모빌이 속도를 확 끌어 올리며 눈 위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내달렸다.하지만 추격자들은 여전히 바짝 붙어 있었다. 그때, 선두에 선 사람의 고함이 또렷하게 들려왔다.“주 대표님,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나 봅시다!”최수빈은 이를 악물었다. 손바닥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핸들을 쥔 힘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이제 바로 앞이 얼음 숲이야. 저 복잡한 숲속으로만 들어가면 아직 기회는 있어.’그 순간, 뒤에서 낮게 비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선두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로 단단히 묶여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입꼬리에는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손에는 검은 권총이 들려 있었는데 눈에서 반사된 빛을 받아 차갑게 번들거리는 총구가 그들을 겨눴다.“탕!”총성이 눈보라를 가르며 터져 나왔다.최수빈의 몸은 순간 굳어버렸다. 심장이 그대로 얼음 속으로 가라앉은 듯, 속까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탄환의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죽음이 그대로 달려오는 소리였다.‘총까지... 가지고 있다고?’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온몸이 서늘하게 식으며 손끝과 발끝이 미세하게 떨렸다.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에 다시금 힘이 더해지더니 주민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해외라서... 합법이야...”말이 끝나자마자, 또 한 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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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3화

그의 숨결이 최수빈의 목덜미를 스쳤다. 따뜻한 기운 속에 짙은 피비린내가 함께 섞여 감돌았다.“애초에 한패야. 거기서 거기지.”최수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핸들을 움켜쥔 손가락은 어느새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07전투기 프로젝트... 그게, 그때의 진실이랑 연결돼 있어.”주민혁의 목소리는 바람과 눈에 휩쓸려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점점 가늘어졌다.“묻혀 있던 일들이... 이제 하나둘 드러나고 있어. 그 사람들도 위협을 느낀 거야... 그리고 최수빈, 너도.”그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남은 힘을 쥐어짜 내듯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그 사람들이 가장 탐내는 건 처음부터 기술 인재였으니까.”최수빈은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냉기가 훑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식어 붙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와 주민혁은 누군가의 도마 위에 올려진 먹잇감이었던 것이다.그때, 등 뒤 어딘가가 유난히 뜨거웠다.그건 체온 같은 게 아니었다. 옷감 너머로 스며드는 데일 듯한 뜨거움. 끈적하고도 섬뜩한 열기가 몸을 타고 퍼졌다.가슴이 서늘해지며 최수빈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미친 듯이 번졌다.떨리는 손으로 한 손을 뒤로 뻗었다.손끝에 닿은 건 축축하고 뜨거운 액체였다. 손을 들어 보니 새빨간 피가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민혁 씨!”최수빈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뒤의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에는 완전히 힘이 풀렸고 그의 몸 전체가 그녀의 등에 무겁게 기댔다.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 최수빈은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했다.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차체를 붙잡았으나 끝내 눈물이 쏟아졌고 시야는 금세 흐려졌다.그때 뒤쪽에서 추격자들의 확성기 소리가 눈보라를 뚫고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최수빈! 더 못 도망치니까 그만 멈춰! 지금 안 멈추면 오늘이 주민혁의 제삿날이 될 거야! 설령 도망친다 해도 소용없어! 그 사람 총에 맞았거든. 오래 못 버텨! 지금 멈추면 아직 우리한테 쓸모가 있을 거야. 여기 최고의 의료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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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4화

발을 헛디디는 순간, 두 사람은 그대로 눈밭에 세게 나뒹굴었다.차가운 눈이 순식간에 옷 속까지 스며들며 살을 파고들었지만 최수빈은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그녀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주민혁에게 달려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피에 젖은 그의 옷깃을 걷어 올렸다.상처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눈밭 위로 붉은 피가 넓게 번져갔다.주민혁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핏기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지마저 싸늘하게 굳어 있었으며 숨소리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그 붉은 피와 아무 반응도 없는 주민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최수빈의 가슴속에서는 애써 눌러왔던 공포와 절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는 주민혁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며 그녀의 울음소리를 휘감았다.얼음 절벽 아래, 바람을 막아주는 그 자리의 눈은 쇠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점점 식어가는 주민혁의 몸을 끌어안은 채, 끝없이 밀려오는 무력감과 절망이 최수빈을 집어삼켰다.마치 전생에 딸을 잃었을 때처럼,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꽉 쥐인 듯 아파서 감각마저 둔해지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운명은 늘 이랬다.최수빈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하나씩 벼랑 끝으로 밀어놓고 정작 그녀에게는 붙잡을 힘조차 남겨주지 않았다.떨리는 손으로 배낭을 뒤져 응급 키트를 꺼냈다. 곧 소독약과 거즈, 지혈 솜이 눈 위에 흩어졌다.손끝이 이미 보라색이 되어 감각이 무뎌져 있었지만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의 상처를 서툴게 처리하기 시작했다.피는 멈출 기미 없이 쏟아졌다. 거즈를 몇 겹이나 덧대도 금세 붉게 물들었다.거즈 위에 떨어진 눈물은 피와 뒤섞여 차갑게 식어갔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보았으나 신호는 겨우 한 칸 남짓, 위태롭게 깜박이고 있었다.“지안 씨! 도와줘요! 민혁 씨가... 총에 맞았어요, 피가 안 멈춰요!”울음이 섞인 목소리라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도 않았다.“여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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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5화

얼음 절벽 아래, 바람을 막아주는 자리에서도 찬 기운은 조금도 줄지 않고 뼛속까지 서서히 파고들었다.최수빈은 점점 식어가는 주민혁의 몸을 끌어안은 채 강지안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손끝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묻어 있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눈물이 다시 쏟아지려는 걸 억지로 눌러 삼키는 것이었다.‘지금은 무너질 때가 아니야. 이 세상에서 지금 민혁 씨를 살릴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야.’그녀는 전화로 들은 지시대로 다시 지혈 압력을 조절했다. 지혈제가 거즈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자 가슴에서 솟구치던 피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하지만 주민혁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얼굴은 얇은 얼음막을 덮은 듯 창백했고 숨결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최수빈은 떨리는 손으로 한 번, 또 한 번 그의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그럴 때마다 심장이 조금씩 찢겨 나가는 기분이었다.“성훈 씨는 아마... 아직도 그 사람들이랑 맞서고 있을 텐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최수빈은 코끝이 찡해진 채로 겨우 말을 꺼냈다.휴대폰 너머에서 차분하게 응급처치를 알려주던 강지안은 ‘장성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순간 말을 멈췄다.그러고는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장성훈? 그 사람도 남극에 있어요?”“네...”최수빈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더니 문득 의문스러워졌다.“몰랐어요? 갑자기 나타나서 우릴 도망치게 해줬어요. 덕분에 민혁 씨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 거고요.”휴대폰 너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무거운 숨소리만 조용히 이어졌다.최수빈은 그 순간, 상대방의 얼굴이 얼마나 창백해졌을지 떠올릴 수 있었다.강지안과 장성훈은 오랜 시간 얽혀 있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성훈이 약혼을 앞두고 완전히 강지안을 떠난다는 얘기가 돌았으니,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이 눈보라 속으로 들어올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위치 보내요.”잠시 후, 강지안이 낮게 말했다.“지금 바로 비행기 표 끊어서 갈 테니까.”최수빈은 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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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6화

심종연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차갑게 웃었다.“물론... 진짜로 이미 죽었을 수도 있지만요.”“닥쳐요!”최수빈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심 대표님, 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그녀가 심종연을 노려보며 말했다.“간단해요.”심종연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뿌연 연기 사이로 그의 눈빛이 흐릿해졌다.“그 사람 살리고 싶으면 나를 따라와요.”최수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가 원하는 건 애초에 최수빈 그녀 자신이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술, 07전투기 프로젝트의 핵심 기밀, 그리고 그해에 묻혀 버린 진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지금 주민혁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지라 최수빈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심종연은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낮게 웃었다.“날 따라오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좋게 말할 때 안 들으면,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그러자 눈밭 곳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날렵했고 움직임에는 빈틈이 없었다.그들은 곧장 주민혁을 향해 다가갔다. 최수빈이 막아섰지만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그를 눈밭에서 들어 올렸다.“안 돼요! 놔요! 그 사람 놔줘요!”최수빈은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지만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거칠게 어깨에 들쳐 업힌 주민혁의 머리가 힘없이 아래로 떨궈졌다. 꼭 생명 없는 물건처럼 축 늘어진 모습에 최수빈의 눈에서는 끝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심 대표님! 민혁 씨 건드리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심종연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둔 헬기 쪽으로 걸어갔다.그러다 매서운 바람을 타고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왔다.“데려가.”곧바로 누군가가 최수빈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상대의 힘을 이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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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7화

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심종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안에 담긴 냉담한 태도를 마주한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절망은 한층 더 짙어졌다.그녀는 알고 있었다.이 싸움은 자신이 남극 땅을 밟은 그 순간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걸.그리고 주민혁의 목숨은 그 위태로운 균형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조금만 잘못돼도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심종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인 척 연기해 왔다.애초에 두 사람의 만남은 미리 계획된 만남이었던 것이다.최수빈이 천공에 들어간 순간부터 아니, 국제 우주 정착 설계 대회 때부터 이미 모든 건 계획된 일이었다.그들은 늘 한발 앞서 움직였다.무슨 일이 닥치기도 전에 미리 수를 깔아 두고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음모로 사람을 옭아맸다.그래서 더 막기 힘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늦어 있었다.‘저렇게 사는 것도 참 피곤할 텐데...’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어두운 방 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는 그녀의 옷자락에는 아직도 주민혁의 선명한 피가 묻어 있었다.그러다 최수빈이 일말의 온기도 없는 눈빛으로 심종연을 올려다보았다.“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심종연은 손끝에서 라이터를 천천히 굴렸다. 그러자 금속 표면이 어둠 속에서 싸늘한 빛을 번뜩였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알잖아요. 07전투기의 핵심 자료를 넘겨요. 그리고 전에 임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도 공개적으로 해명해요. 모든 책임은 수빈 씨가 뒤집어쓰고.”이 말에 최수빈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어찌나 힘을 세게 주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날 정도였다.하지만 그녀는 심종연의 조건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대신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민혁 씨는 어떻게 됐어요?”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심종연은 비아냥거리는 눈빛을 한 채 노골적으로 피식 웃었다.“이 상황에서도 그 사람이 걱정돼요?”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도우미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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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8화

심종연이 떠난 뒤, 최수빈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그렇게 다음 날이 밝을 때까지도 그대로였다.몸에 묻은 피는 이미 다 말라 검붉은 딱지처럼 옷감에 들러붙어 있었고 비릿하면서도 달큰한 냄새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머릿속은 온통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수술실 불이 꺼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심장을 스치고 지나간 그 총알이 결국 주민혁의 목숨을 앗아갔는지도,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바로 그때, 갑자기 자물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며 숨 막히는 적막을 깨뜨렸다.심종연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몸에는 바깥의 차가운 기운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그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최수빈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읽히지 않는 목소리였다.“생각 정리는 다 했어요?”최수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저려 오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운 이내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그 프로젝트는 내 것이 아니에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핵심 기술 자료도, 접근 권한도 전부 민혁 씨한테 있어요.”그녀는 심종연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한 마디씩 또렷하게 내뱉었다.“그 사람이 살아 있어야 심 대표님한테도 쓸모가 있을 겁니다.”심종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뜻밖이라는 듯 낮게 웃었다. 다만 그 미소가 눈에까지 닿지는 않았다.“제법 머리가 돌아가나 보네요.”그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 앉더니 손가락 끝으로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아직 수술 중이에요. 총알이 심장 부근의 급소를 스치고 지나갔거든요. 조금만 더 빗나갔으면 그대로 죽을 뻔했어요.”잠시 말을 멈춘 그는 담담하게 덧붙였다.“평생을 서로 맞서 싸워 왔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리면... 나도 좀 아쉽긴 할 거예요.”최수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밤새 붙들고 있던 마지막 희망은 결국 안심으로 바뀌지 못했다.그녀는 급히 심종연의 앞으로 다가갔다.“그 사람만 살려 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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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9화

심종연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임하은 씨, 그 사람과 집안 사이에서 하은 씨는 하나만 선택해야 해요. 분명히 말해두죠. 주민혁에게 숨이 붙어 있는 한, 하은 씨의 집안은 영원히 그 밑에 깔려 살게 될 겁니다.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죠.”심종연은 시가를 한 번 빨아들인 뒤, 말을 이어갔다.“난 상관없어요. 어차피 나와 그 사람은 오래된 적이니까. 하지만 하은 씨는 잘 생각해 봐요. 주민혁의 손에 임씨 가문의 약점이 얼마나 많이 쥐어져 있는지.”임하은은 얼굴을 가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속이 뒤틀리는 듯 괴로웠다.“지금 상태는... 어때요?”“좋지 않아요.”심종연이 짧게 답했다.“그리고 그건 하은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이 말을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었다. 시가 끝에 맺힌 재가 바람에 흩날리며 차가운 바닥 위로 떨어졌다....그 시각.남극 빙원 가장자리에 있는 임시 기지, 폭설과 강풍은 여전히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장성훈은 텅 빈 설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검은 방한복에는 눈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음울하게 굳어 있었다.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심종연 측과 한참이나 맞붙은 끝에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돌아서 보니 최수빈과 주민혁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눈밭 위에는 이미 굳어 검게 변한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선명함이 오히려 더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부하가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에는 불안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누구나 알고 있었다. 장성훈은 해외에서도 막강한 세력을 쥐고 있고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으며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그런데도 이런 혹한의 땅에서, 그것도 눈앞에서 사람을 놓쳐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주먹을 꽉 쥐자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으며 매서운 바람이 장성훈의 얼굴을 세게 스쳐 지나갔다.곧 그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찾아. 땅을 다 헤집어서라도 반드시 찾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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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0화

강지안은 발걸음을 멈추며 얼른 뒤를 돌아봤다.멀지 않은 통유리창 앞에 한껏 꾸민 여자가 서 있었다.짙은 갈색의 롱 캐시미어 코트에 같은 계열의 머플러를 두른 채, 화장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완벽했다. 눈빛은 누가 봐도 안하무인의 눈빛이었다.시선이 마주친 순간에도 그 여자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이를 본 강지안은 단번에 미간을 찌푸렸다.낯선 타국의 경유 공항,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그 여자의 시선은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그래서 그녀는 캐리어 손잡이를 더 세게 움켜쥔 채 숨을 한 번 고르고, 직접 따져 묻기 위해 발걸음을 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익숙한 힘, 살짝 서늘한 체온, 너무도 익숙해서 뼛속에 새겨진 듯한 그 기척...강지안은 온몸이 그대로 굳어 서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역시나 장성훈이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검은 코트를 걸친 채, 그는 또렷한 눈빛을 띠며 꼿꼿하게 서 있었다.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쩐지 초조한 기색도 엿보이는 듯했다.그는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여기는 왜 왔어요?”강지안은 목이 턱 막혀 버린 것만 같았다.하고 싶은 말은 수없이 밀려오는데 정작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한때는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강지안의 곁을 지키며, 세상의 모든 비바람을 대신 막아 주던 그 남자를...“성훈 씨.”한 맑은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곧 조금 전 창가에 서 있던 그 여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천천히 걸어왔다.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장성훈의 팔에 팔짱을 꼈다. 몸까지 바짝 붙인 채 애교 섞인 말투로 웃기까지 했다.“안 올 줄 알았는데.”장성훈은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차갑게 굳어 있던 눈빛이 눈 깜짝할 사이 누그러졌고 그 대신 강지안조차 처음 보는 다정한 기색이 번졌다.그는 손을 들어 제 팔을 감고 있는 여자의 손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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