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251 - Chapter 1260

1410 Chapters

제1251화

주민혁도 몸을 낮춰 최수빈의 곁에 쭈그려 앉아 함께 주변을 살폈다.“가능성이 낮아. 이 틈 안은 바람이 약해서 눈이 그렇게 많이 쌓이진 않거든. 만약 칩이 떨어졌다면 진작 보였어야 해.”그의 시선이 어둠 속 깊은 곳을 훑었다. 이마에 잡힌 주름이 점점 더 깊어졌다.“어쩌면... 칩을 가져간 사람은 애초에 이 틈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어. 일부러 흔적만 남겨서 우리를 헷갈리게 한 거지.”최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얼어붙은 손을 비벼댔다. 가슴 한쪽이 푹 꺼진 것처럼, 실망과 불안이 뒤섞여 밀려왔다.칩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쓸 만한 단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가 고개를 들어 틈 위를 올려다봤다.희미하게 내려오던 빛은 어느새 더 어두워진 듯했고 원래도 거세던 눈보라는 한층 더 사나워진 느낌이었다. 얼음층이 ‘쩍’ 하며 갈라지는 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이상해... 빨리 올라가야 해.”그 순간, 주민혁은 표정이 확 굳더니 급히 최수빈의 손목을 붙잡았다.“폭풍이 올 거야.”말이 끝나기도 전에 빙하 전체가 거칠게 흔들렸다.위쪽에서는 굉음이 터져 나왔고 쌓여 있던 눈과 자갈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 틈을 따라 쏟아지더니 얼음벽에 부딪히며 귀를 찢는 듯한 소리를 냈다.강한 빛을 비추던 손전등은 흔들림 속에서 꺼졌고 순식간에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남은 건 몰아치는 눈보라 소리와 얼음이 부서지는 섬뜩한 파열음뿐이었다.“꽉 잡아.”주민혁의 숨이 가빠졌다. 그는 최수빈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며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그렇게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나서야 쏟아지는 돌들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눈과 돌은 끊임없이 위에서 떨어져 내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틈의 출구 대부분이 막혀버렸다.겨우 사람 하나 통과할 수 있을 만큼의 좁은 틈만 남아 있었는데 그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아래쪽의 온도는 급격히 떨어졌는지 차가운 공기가 칼날처럼 얼굴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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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2화

바깥의 눈보라는 여전히 거셌고 부서진 돌들이 굴러떨어지는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하지만 주민혁은 느낄 수 있었다. 폭풍의 기세가 아주 조금씩, 정말 조금씩 꺾이고 있다는 걸.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1분 1분이 마치 한 세기처럼 길게 느껴졌다.최수빈은 그의 품 안에서 반쯤 의식을 잃은 채 버티고 있었다.정신이 들었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단 하나 분명한 건 있었다.바로 주민혁의 따뜻한 품과, 흔들림 없이 뛰는 심장 소리 말이다.그 심장 소리는 마치 그녀를 붙들어주는 마지막 힘처럼, 끝까지 정신을 놓지 말라고 다그치고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몰아치던 바람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돌이 떨어지는 소리도 점점 뜸해졌다.주민혁은 눈빛을 번뜩이고는 품 안의 최수빈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최수빈. 최수빈, 정신 좀 차려.”최수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아직도 눈빛은 흐릿했고 목소리도 잠긴 듯 갈라져 있었다.“바람... 멎었어요?”“거의 멎었어. 이 기회에 얼른 올라가야 해.”주민혁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운 뒤, 방한복을 다시 단단히 여며주었다.“밖에는 눈이 엄청 쌓였을 거야. 올라가는 게 쉽지 않을 테니까, 무조건 내 손 놓치지 마.”최수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흐려지는 정신을 억지로 다잡으며 주민혁의 손을 꽉 잡았다.뒤이어 두 사람은 갈라진 빙하 위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발밑의 얼음이 매우 미끄러운 탓에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주민혁은 앞장서서 몸으로 길을 열었다.휴대하고 있던 도구로 앞을 가로막는 돌과 눈을 치워가며 최수빈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다.그렇게 절반쯤 올라왔을 때, 최수빈의 발이 갑자기 미끄러지며 몸이 아래로 쏠리더니 추락하듯 꺾였다.“조심해!”주민혁이 순식간에 최수빈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위로 끌어올렸다.그 와중에 날카로운 바위 모서리에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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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3화

최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대로 주민혁의 품에 뛰어들더니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마치 자기 자신을 그의 몸속에 파묻어버릴 듯,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가녀린 몸이 작게 떨렸고 뺨은 차가운 주민혁의 옷깃에 닿았으며 코끝에는 그의 체취가 맴돌았다.늘 그에게서만 느껴지던 맑고 서늘한 향기, 하지만 안에 눈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뒤섞여 있었다.이런 품을, 최수빈은 너무나도 오래 잊고 지냈었다.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렇게 주민혁에게 안겨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이었는지조차 희미해질 만큼 말이다.품 안에 닿은 최수빈의 온기가 너무도 선명한 탓에 주민혁은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의 체온만이 가슴 깊은 곳을 뜨겁게 건드리곤 했었다.얇은 옷자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민혁은 최수빈의 심장 소리를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어느새 그 심장박동이 자신의 심장박동과 조금씩 겹쳐지고 있다는 것도...곧 주민혁의 손이 천천히 허공으로 올라가더니 손끝이 미세하게 말려 들어 갔다.그녀를 다시 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감정이 가슴속에서 미친 듯이 부딪혀 끝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품에 더 세게 끌어안으면 또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 것 같기도 했다.“난 괜찮아.”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잠겨 있었다.최수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더 깊이 고개를 숙여 주민혁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힘 있게 뛰는 주민혁의 심장 소리도, 굳어 있는 그의 몸도, 그리고 허공에 머문 채 끝내 내려오지 못하는 손도...최수빈은 이 모든 걸 듣고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눈가가 더더욱 뜨거워졌다.칩이 사라진 뒤 의심을 받고, 그를 따라 이 얼음벌판까지 왔고, 빙하 틈에 갇혀 죽을 뻔한 순간까지...그녀는 억울하지 않은 게 아니었고 무섭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억눌러왔던 감정은 그제서야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그래도 최수빈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주민혁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소리 내 울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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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4화

“안 되겠어.”주민혁의 표정이 굳었다.“눈보라가 또 오려나 봐.”말이 끝나자마자 아까보다 훨씬 거센 돌풍이 몰아쳤다.바닥에 쌓인 눈이 한꺼번에 휘말려 올라가며 하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순식간에 눈앞은 온통 뿌옇게 흐려졌고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최수빈은 몰아치는 바람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어 몸까지 휘청이며 중심을 잃을 뻔했다.그 모습을 본 주민혁은 곧바로 몸을 돌려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따라와.”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한쪽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최수빈은 주민혁에게 이끌려 비틀거리며 뒤를 따라갔다.그렇게 몇 분쯤 뛰었을까, 눈앞에 사람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한 동굴 하나가 나타났는데 입구가 눈에 거의 절반쯤 덮여 있었다.주민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 자리에 동굴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었다.“여기 동굴이 있어.”주민혁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입구를 막고 있던 눈을 힘껏 밀어냈다.“보통 테스트 요원들은 긴급 상황이 생기면 여기로 대피하지.”그는 최수빈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발을 들이자마자 밖에서는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거센 바람이 눈알갱이를 몰아와 동굴 입구의 바위에 세차게 내리치는 바람에 둔탁한 충돌음이 연달아 울렸다.동굴 안은 바깥보다 훨씬 나았다. 적어도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은 직접 닿지 않았으니 말이다.주민혁은 최수빈의 손을 놓고 돌아서더니 눈과 돌을 끌어모아 숨 쉴 틈만 남겨둔 채 입구 대부분을 막았다.그제야 그는 겨우 차가운 바위벽에 등을 기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최수빈의 시선은 다시 주민혁의 손으로 향했다.언제 꺼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그 손이 어느새 밖으로 나와 있었다.상처 위는 이미 얼음과 눈에 흠뻑 젖어 있었고 피는 얇은 얼음막처럼 굳어 있었다.손 전체가 시퍼렇게 얼어 있었는데 손가락 마디는 하얗게 질린 것으로 보아 감각마저 둔해진 것처럼 보였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최수빈은 급히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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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5화

동굴 밖의 눈보라는 조금도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안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바위틈 사이로 스며드는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의 관절이 시릴 만큼 추웠다.최수빈은 시퍼렇게 얼어버린 주민혁의 손을 감싸 쥔 채 계속 문질렀다.손바닥의 온기를 아무리 불어넣고 비벼도 그 손에 밴 깊은 냉기를 도무지 녹일 수가 없었다.남자의 손가락은 굳은 채 어색하게 오므라들어 있었고 피부 아래 혈관은 어느새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 누가 봐도 동상이 온 상태였다.“소용없어.”주민혁이 천천히 손을 빼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다.힘없이 아래로 늘어진 손끝은 감각을 잃은 얼음 조각처럼 보였다.“진작 감각이 없어졌어. 아무 느낌도 안 나.”최수빈은 텅 빈 그의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답답하게 한숨을 삼켰다. 가슴 한가운데가 뭔가로 막힌 것처럼 먹먹했다.그녀는 시선을 돌려 동굴 안을 둘러봤다. 그러다 구석에 쌓인 마른 나뭇가지 무더기를 발견한 순간, 눈빛이 달라졌다.“저기 나뭇가지가 있네요. 불부터 피웁시다. 혹시 라이터 있어요?”주민혁은 고개를 저었다. 최수빈과 함께한 뒤로 담배를 끊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담배는 물론이고 그 냄새가 밴 것들까지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됐던 것이다.“내가 할게.”그는 몸을 낮춰 적당한 굵기의 나뭇가지 두 개를 골라 들었다.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다용도 군용 칼을 꺼내 한쪽 나뭇가지에 얕은 홈을 만들었다.마찰로 불을 붙이는 건 야외 생존에서 기본에 속하는 기술이었다.문제는 체력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거라 지금 그의 몸 상태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최수빈은 고개를 숙인 채 집중하고 있는 주민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힘을 줄 때마다 다친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여 그녀의 미간이 금세 찌푸려졌다.“내가 도와줄까요?”“괜찮아.”주민혁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넌 앉아 있어. 더 얼면 안 돼.”움직임이 썩 능숙하진 않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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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6화

눈 녹은 물이 서서히 녹아내리며 가느다란 김을 피워 올렸다.동굴 안의 온도도 조금씩 올라가 따뜻한 기운이 두 사람을 감싸며 잠시나마 바깥의 눈보라를 막아 주고 있었다.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에 최수빈은 조심스럽게 주민혁의 손을 잡아넣었다.손끝은 이미 동상으로 인해 검게 변해 있었고 따뜻한 물에 닿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주민혁은 그저 미간만 살짝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작이 얼마 안 남았어요.”최수빈은 깨끗한 천으로 그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며 낮게 말했다. 시선은 점점 줄어드는 나뭇가지 더미를 향해 있었다.“밖이랑 연락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리고... 이 눈보라도 빨리 그쳤으면 좋겠고요.”주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숙인 채 상처를 닦고 있는 최수빈을 조용히 바라봤다.불꽃이 흔들리며 그녀의 얼굴 위로 어른어른 빛을 드리웠고 평소의 고집스러운 인상도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문득 그는 어쩌면 이 절망적인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동굴 밖에서는 여전히 눈보라가 끝이 없을 것처럼 거세게 울부짖고 있었다. 주황빛 불꽃은 점점 약해졌고 마른 가지가 모두 타고 나자 어둡게 식어 가는 재만 남았다.동굴 안의 온도도 서서히 내려가더니 다시금 차가운 기운이 두 사람을 파고들었다.최수빈은 바위벽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의식이 흐릿해지고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몸을 웅크렸음에도 떨림을 참을 수 없었는지 가느다란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호흡도 점점 가빠졌다.이 이상함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주민혁이었다.주민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댔다. 그러자 곧 손끝에 전해진 뜨거운 열기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는 급히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보온 내피를 벗어 최수빈을 감싸 주고 그녀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자신의 체온으로 얼어붙은 그녀의 몸을 녹이려는 듯 말이다.“최수빈... 최수빈, 정신 차려.”그러다 주민혁은 가방을 뒤져 남아 있던 해열제를 꺼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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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7화

동굴 밖의 눈보라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주민혁의 품에 웅크린 최수빈은 내내 몽롱한 의식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뜨겁게 달아오른 이마는 그의 서늘한 목덜미에 닿아 있었고 뜨거운 숨결은 내쉴 때마다 열기를 품고 흩어졌다.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아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온몸을 주민혁의 품속에 묻은 채 가느다란 팔로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이 마지막 온기마저 사라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말이다.주민혁은 차가운 바위벽에 등을 기댄 채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최수빈을 단단히 품에 감싸 안았다.그의 손은 몇 번이고 그녀의 뜨거운 이마를 쓸어내렸다. 손끝에 닿는 열기가 너무 뜨거워 가슴 한복판까지 조여 오는 듯했다. 주민혁의 눈빛도 점점 더 어두워졌다.품에 안긴 사람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정작 그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어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창백한 얼굴, 축축이 젖어 눈가에 달라붙은 긴 속눈썹, 고통스러운 듯 잔뜩 찌푸린 미간까지...최수빈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휴대폰 화면에는 여전히 ‘신호 없음’ 표시만 떠 있었다.푸른 불빛이 주민혁의 굳게 다문 턱선을 비추었는데 표정이 보기 드물게 굳어 있었다.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눈보라는 멈출 기미가 전혀 없었다.때문에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최수빈의 고열만 더 심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사실 주민혁에게 이 빙원은 그리 낯선 곳이 아니었다.출발 전 직접 팀을 이끌고 주변 지형을 살펴본 적이 있었고 이 동굴이 기지의 남서쪽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중간에 빙하와 설원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직선거리로 따지면 아주 먼 편은 아니었다.하지만 문제는 눈보라였다. 사방이 하얗게 뒤덮이면 방향을 잃기가 너무 쉬웠다.밤이 짙어질수록 빙원의 기온은 영하 40도 아래로 곤두박질쳤다.주민혁은 최수빈을 자신의 방한복 안쪽 깊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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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8화

주민혁은 최수빈을 업은 채 끝없이 펼쳐진 빙원을 한 걸음씩 옮겨 갔다. 걸음을 뗄 때마다 몸이 더 무거워지는 듯했다.발밑에는 눈이 두껍게 쌓여 있어 한 발은 깊이 빠지고 한 발은 미끄러졌다. 잠깐만 방심해도 그대로 넘어질 것 같았다.손은 이미 상처투성이인 데다 동상까지 와서 퍼렇게 질린 채 감각도 무뎌져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최수빈의 다리를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등에서 미끄러질까 봐서였다.최수빈은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의식은 두꺼운 솜에 싸인 것처럼 흐릿하고 멀어져 갔다.귓가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으며 몸 아래로는 남자의 체온이 전해졌다. 그리고 점점 거칠어지는 그의 숨소리도 또렷하게 들려왔다.그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는 물론 최수빈도 알고 있었다.“민혁 씨...”그녀는 온 힘을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하도 약해 거의 바람에 묻혀 버릴 정도였다.“고마워요...”‘나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이 눈밭을 끝까지 나를 업고 걸어 줘서. 아직도 내 곁에 있어 줘서...’주민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말하지 말고 힘 아껴. 곧 도착해.”하지만 정작 주민혁 자신도 그 ‘곧’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했다.눈보라가 온 사방을 뒤덮고 있어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은 전방 1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주변 건물도, 방향을 가늠할 기준도 죄다 눈에 파묻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그래서 오직 기억과 감각에만 의지한 채, 대충 짐작한 방향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얼마나 걸었을까, 온몸의 기운은 이미 다 빠져나간 것 같았고 팔다리는 꽁꽁 얼어 감각이 사라질 지경이었다.어깨 위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데 등에 업힌 사람의 체온은 오히려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그 열이 전해질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리듯 아팠다.입술은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왔고 목구멍은 불덩이가 걸린 것처럼 타들어 가 숨을 쉬는 게 고통스러웠다.그럼에도 주민혁은 한 걸음도 멈춰 설 수 없었다.멈추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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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9화

“수빈 씨, 일어나셨습니까?”문가에서 장병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에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는데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눈빛에도 놀라고 불안한 기색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수빈은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민혁 씨는요? 어디 있어요?”죽을 들고 있던 장병욱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표정이 묘하게 굳었다가 그는 이내 그릇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 대표님은... 아직 의식을 못 찾으셨습니다. 지금 옆방에 계세요.”그 말을 듣는 순간, 최수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몸이 제대로 가누어지지도 않는 상태였지만 이불을 걷어차듯 밀어내고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비틀거리는 걸음에 침대 옆 의자에 걸려 넘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장병욱이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붙잡아주었다.“수빈 씨, 이제 막 열이 내리셨습니다. 좀 천천히...”하지만 최수빈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거의 뛰다시피 옆방으로 향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가슴속 불안함이 점점 더 커져 갔다.그렇게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주민혁은 침대 위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얼굴은 핏기가 전혀 없는 것이 거의 투명해 보일 정도였다. 원래도 마른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더 야위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입술은 갈라져 있었고 눈을 감은 채 미간을 깊이 찌푸리고 있었다. 잠든 와중에도 고통을 견디고 있는 듯했다.다친 손에는 깔끔하게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그 사이로 희미하게 배어 나온 피가 눈에 들어왔다.최수빈은 그 자리에서 발이 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녀는 손을 들어 주민혁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다.하지만 괜히 그를 깨울까 두려워 손을 공중에 멈춘 채 미세하게 떨기만 했다.“여기 오는 길이 눈보라 때문에 완전히 막혔습니다. 외부 차량은 아예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에요.”등 뒤에서 장병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짙은 무력감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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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0화

장병욱은 그녀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최수빈은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 주민혁의 곁을 지켰다.병상 옆에 앉아서는 차가운 물수건을 손에 쥔 채 그의 이마에 밴 식은땀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는데 손길이 아주 조심스러웠다.해 질 무렵, 장병욱이 한 번 더 찾아와 조심스럽게 말했다.“수빈 씨, 이틀 밤낮을 꼬박 지키셨습니다. 이러다가는 수빈 씨의 몸이 먼저 버티지 못하겠어요. 대표님 쪽은 저희가 보고 있으니, 정말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하지만 최수빈은 대답 대신 시선을 내리깔고 주민혁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그 손은 한때 정교한 기계를 다루던 손이었다. 수백억 원짜리 계약서에 서명하던 손이기도 하고,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율이의 머리를 묶어 주던 손이기도 했다.그런데 지금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이 온기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장병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죽 그릇을 침대 머리맡에 조용히 내려놓은 뒤, 발소리마저 죽인 채 문을 닫고 나갔다.방 안은 다시 적막에 잠겼다.남은 건 두 사람의 숨소리와 창밖으로 눈발이 흩날리며 부딪히는 자잘한 소리뿐이었다.깊은 밤이 되자 스며드는 한기는 바늘처럼 옷깃 사이를 파고들어 뼛속까지 시리게 했다.최수빈은 몸에 걸친 커다란 방한복을 더 꼭 끌어당겼다.이는 주민혁의 옷이었다. 어쩐지 아직도 그에게서 나던 서늘하고 맑은 체취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그녀의 시선은 한순간도 주민혁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잔뜩 찌푸린 미간,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 시간이 갈수록 더 맺혀 오는 이마의 식은땀까지...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눌어붙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그러다 최수빈은 문득 송미연과 육민성이 떠올랐다.한참 전, 카페에 마주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날.그때의 그녀는 율이를 데리고 은산시에 막 돌아온 직후였다.주민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본능적으로 표정이 굳힐 만큼 그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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