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291 - Chapter 1300

1410 Chapters

제1291화

주민혁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가슴을 감싼 붕대에는 선명한 붉은 피가 번져 있었다. 감정이 격해진 탓에 상처가 다시 터진 게 분명했다.그는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최수빈을 바라보는 순간, 깊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애틋함, 분노, 절망, 그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무력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그의 숨통을 조여 왔다.“민혁 씨.”임하은은 느긋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손에 들린 쇠채찍을 가볍게 들어 보인 그녀의 말투는 한없이 가벼웠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봐요. 민혁 씨의 여자는 지금 내 손에 있어요.”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최수빈의 목숨도, 민혁 씨의 목숨도 전부 내가 쥐고 있다고요.”주민혁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다.그는 싸늘한 얼굴로 임하은을 노려봤다.“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간단해요.”임하은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타오르듯 번들거리는 눈빛에는 비뚤어진 집착이 가득 서려 있었다.“최수빈이랑 완전히 관계를 끊어요. 그리고 나랑 약혼해요. 다시 임씨 가문의 사위가 되는 거예요. 민혁 씨가 고개만 끄덕이면, 난 당장 저 여자를 풀어줄 거예요. 다시는 손끝 하나 대지 않겠다고 약속하죠.”잠시 말을 멈춘 임하은은 잔인하게 웃었다.“하지만 거절하면 난 계속 저 여자를 망가뜨릴 거예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민혁 씨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여자가 내 손에서 어떻게 조금씩 죽어 가는지, 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줄게요.”“안 돼요!”최수빈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민혁 씨, 절대 받아들이지 마요. 그럴 가치 없어요. 난 죽으면 그만이에요. 나 때문에 민혁 씨가 그렇게까지 망가지는 건 싫어요.”최수빈은 임하은이 얼마나 집요한 사람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번 미쳐버리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약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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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2화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심종연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묘한 흥미를 드러냈다. 시선은 임하은에게 머물렀고 말투에는 감탄이 배어 있었다.“하은 씨, 나보다 더 독했군요?”그는 마치 흥미로운 연극이라도 감상하듯 가볍게 손뼉을 쳤다.“주씨 가문의 기반도, 주 대표님도 전부 다 갖겠다는 거네요. 욕심이 꽤 큰데요?”임하은은 고개를 돌려 심종연을 바라봤다.“내가 원하는 건 그 정도가 아니에요.”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때 임씨 가문이 빼앗긴 것들, 전부 하나씩 되찾아 올 거예요. 남김없이.”심종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피식 비웃었다.“주 대표님이 나중에 다시 일어나서 복수하러 올까 봐 안 무서워요?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텐데.”임하은은 주민혁을 바라봤다. 눈빛에 집착에 가까운 광기가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그녀는 피식 웃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이상할 만큼 단호했다.“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요?”그녀는 천천히 주민혁의 창백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그런 건 겁 안 나요. 민혁 씨를 내 곁에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민혁 씨가 오직 내 사람이 되는 걸 볼 수만 있다면, 지옥에 떨어져도 상관없어요. 영영 망가진다 해도 기꺼이 감수할 거예요.”주민혁의 시선은 최수빈에게 닿아 있었다. 눈빛에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했다.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내딛는 이 선택이 결국 눈앞의 갈증만 잠시 달래는 독이라는 걸.하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최수빈은 그런 주민혁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마음 한구석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주민혁이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임하은은 주민혁의 휠체어를 밀고 최수빈의 병실을 빠져나왔다.주민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수빈이 풀어줘.”그러자 임하은은 몸을 돌려 주민혁을 보더니 차갑게 웃었다.“뭐가 그렇게 급해요?”그녀는 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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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3화

임하은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다시 조용히 열렸다.심종연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경호원도 없이 혼자였다.몸에 걸친 검은색 코트는 흠잡을 데 없이 잘 재단돼 있었고 옷깃은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듯했지만 오히려 더 여유로워 보였다.손가락 사이에는 여전히 불도 붙이지 않은 시가 한 개비가 끼워져 있었다. 눈매에는 늘 그렇듯 여유로움이 돋보였다.그는 창가로 걸어가 병상에 누운 주민혁에게 등을 보인 채 멈춰 섰다.“하은 씨가 내건 조건이 듣기에는 꽤 괜찮더라고요?”먼저 입을 연 건 심종연이었다. 낮은 목소리로 병실을 울렸다.“약혼하고, 혼인신고까지 마친 뒤 해외로 떠난다. 그 뒤로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마음대로 살 수 있다... 나쁘지 않은 얘기 아닌가요.”주민혁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있었다.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심종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는데 눈빛에 온기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지금 그 여자 편들려고 온 거 아니잖아요.”묻는 말이 아니라 단정이었다.심종연과 임하은은 어디까지나 서로 필요해서 손을 잡은 사이일 뿐이었다. 거기에 무슨 의리나 정이 있을 리 없었다.심종연은 낮게 웃더니 몸을 돌려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값비싼 전리품이라도 감상하는 듯 훑어보는 눈빛이었다.그는 병상 옆 의자에 앉아 시가를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숨 막히는 병실 안에서 유난히 거슬렸다.“물론 아니죠.”심종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난 민혁 씨에게 다른 방법을 소개해주러 왔어요.”그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하은 씨의 말은 안 들어도 돼요. 대신 나랑 손잡읍시다.”주민혁은 아주 조금 미간을 찌푸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조건은 간단해요.”심종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민혁 씨가 알고 있는 모든 기밀을 내게 넘겨요. 07전투기 프로젝트에 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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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4화

“틀렸어요.”주민혁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나와 심 대표님은 애초에 같은 부류가 아닙니다.”그는 한 번도 권력에 정점에 서고자, 세상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판도를 손에 쥐고자 한 적이 없었다.그가 원한 건 오직 최수빈의 무사함, 묻혀버린 그해의 진실, 그리고 주상 그룹이 끝까지 떳떳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다.심종연의 얼굴에서 마침내 웃음기가 사라졌다.“그러니까...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건가요?”“네.”주민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난 심 대표님과 손잡지 않을 겁니다.”심종연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 주민혁의 말에 거짓이 섞여 있는지 끝까지 가늠하는 듯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그제야 심종연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고 서늘한 웃음을 띠었다.“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역시 끝까지 꺾이지는 않는군요.”심종연은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놓아둔 시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웠지만 끝내 불은 붙이지 않았다.그러더니 주민혁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 얼굴을 뼛속에 새겨두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말이다.“굳이 가장 험한 길을 고르겠다면, 어디 끝까지 한번 지켜보죠.”심종연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 선택, 나중에 후회하지 않길 바라요.”이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문이 닫히는 순간이 되어서야 주민혁은 천천히 눈을 감고 침대 머리에 기댔다.가슴의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만큼은 고요했다.심종연을 거절했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임하은에게 붙들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싸움은 더 힘들어질 테고 그가 견뎌야 할 시간도 길어질 것이다.그래도 다른 선택은 없었다.그는 최수빈의 안전을 걸고 모험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나라와 직결된 기밀까지 내던지며 이런 더러운 거래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한편, 도심 한가운데 있는 최고급 영화관.VIP 상영관 안은 숨이 막힐 만큼 어두웠지만 그 희미한 빛조차 민채영의 사랑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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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5화

“사람 붙여.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붙어.”장성훈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비서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딱딱했다.“무슨 일 생기면 바로 보고하고. 그리고 아가씨가 고용한 무장 인력들 신원도 전부 확인해.”통화를 끊은 뒤, 장성훈은 세면대 앞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 남자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그는 강지안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여도 속은 질길 만큼 단단한, 한번 마음먹은 일은 누가 말려도 절대 돌아서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녀가 기어이 남극 심부로 들어가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는 뻔했다. 바로 최수빈과 주민혁을 구해내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지금 그곳으로 들어가는 건, 제 발로 덫 안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강지안은 모르고 있었다.다음 날 새벽.하늘이 막 희뿌옇게 밝아오던 시각, 남극 인근의 중간 기지는 벌써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강지안은 두꺼운 극지 방한복을 입고 고글까지 착용한 채, 개조된 설상차 옆에 서서 장비를 하나하나 점검하고 있었다.그녀의 뒤로는 위장복 차림의 무장 인원 열댓 명이 따라붙어 있었다.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표정은 무뚝뚝했으며 허리춤에는 총까지 차고 있어 분위기부터 심상치 않았다.“아가씨, 장비는 다 준비됐고 가이드도 구해놨습니다.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선두에 선 남자는 카엔이었다. 이 근방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무장팀 대장이었고 강지안에게서 적지 않은 계약금을 받은 뒤 끝까지 안전하게 지켜주겠노라 큰소리쳤던 사람이었다.강지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배낭에서 달러 뭉치를 꺼내 카엔에게 건넸다.“남은 돈이에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면 추가로 더 드릴게요.”카엔은 손에 쥔 돈다발을 툭툭 두드려 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걱정 마십시오. 절대 실망시키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그렇게 일행은 길을 나섰다.설상차는 끝도 없이 펼쳐진 설원을 가르며 빠르게 달렸다. 바퀴가 두껍게 쌓인 눈을 짓이길 때마다 하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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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6화

하지만 카엔은 코웃음을 쳤다.“장성훈? 그게 누군데요? 여기선 우리가 법이에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놈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리고 강지안은 배낭은 물론이고 휴대폰과 손목시계까지 순식간에 빼앗겼다. 값비싼 장비들은 모조리 털린 것이다.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한 남자가 그녀를 거칠게 밀어 넘어뜨렸다.강지안은 두꺼운 눈밭 위로 나동그라졌다. 살을 에는 한기가 방한복을 뚫고 파고들어 순식간에 온몸이 굳어 갔다.“그냥 여기 버려둬.”눈밭에 쓰러진 강지안을 내려다보며 카엔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이 극지의 바람만큼이나 차가웠다.“이 날씨면 세 시간도 못 버틸 거야. 금방 얼어 죽겠지.”놈들은 그 말에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 다음 빼앗은 물건들을 챙겨 눈길용 개조 차량에 올라탄 뒤 그대로 떠나 버렸다.엔진 소리는 거센 눈보라 속으로 점점 멀어져 갔고 끝내 끝없는 설원 한가운데에는 강지안만 홀로 남았다.함박눈은 갈수록 거세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 대부분을 덮어 버렸다.매서운 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후벼 팠다. 얼굴은 얼얼하다 못해 점점 감각마저 흐려졌다.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온 힘이 바닥난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절망이 서서히 그녀를 집어 삼켜갔다.강지안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장성훈의 얼굴을 떠올렸다.늘 말없이 그녀의 뒤를 지키던 남자, 과묵했지만 그녀에게 위험이 닥치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오던 사람...결국 장성훈의 말이 맞았다. 이곳은 정말 위험했다.‘이제는 정말 다시는 못 보는 건가...’강지안의 의식은 점점 멀어졌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그대로 감겨 들어갔다.그런데 완전히 정신을 잃기 직전, 멀리서 희미하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점점 또렷해졌다. 꺼져 가던 마음속에 아주 희미한 희망이 다시 살아났다.하지만 이미 너무 지쳐 있는 탓에 몸은 완전히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눈앞은 점점 새까매졌다.그렇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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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7화

강지안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채 손끝으로 이불의 무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조금 전 부하가 내뱉은 ‘없었습니다’라는 한마디에 강지안은 그제야 완전히 깨달았다. 자신이 장성훈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장성훈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저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 옛 인연, 윗선의 지시로 지켜야 하는 대상, 딱 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강지안이 낮게 말했다.이런 부탁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부하가 잠시 멈칫했다.잠깐 망설이던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도련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문이 조용히 닫히고 병실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강지안은 창밖만 바라봤다.얼마나 기다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기계음은 계속 같은 간격으로 울렸고 그 소리조차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감각 없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그러다 병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차례로 안으로 들어왔다.먼저 들어온 사람은 장성훈이었다.검은색 코트를 입은 그는 여전히 반듯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매와 굳은 인상은 여전했지만 늘 차갑기만 하던 얼굴이 오늘따라 조금은 부드럽게 느껴졌다.그리고 그의 옆에서 팔짱을 낀 사람은 민채영이었다.민채영은 정갈한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단정한 화장에 다정한 미소까지 더해지니 마치 한겨울에 핀 하얀 장미 같았다.그녀는 강지안을 보자 장성훈의 팔에서 손을 풀고 앞으로 두 걸음 다가왔다. 말투는 친근한 척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깔린 뜻은 너무도 분명했다.“지안 씨,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성훈 씨가 아는 사람 문병을 간다고 해서 저도 같이 왔어요. 불편하진 않으시죠?”예의 바른 말처럼 들렸으나 한마디 한마디가 은근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강지아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괜찮아요.”담담한 목소리, 하지만 그녀는 민채영을 보지 않고 곧장 장성훈에게 시선을 주었다.안부를 묻지도, 따지지도, 서운하다는 기색조차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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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8화

말을 하며 민채영은 강지안을 바라봤다. 말투에는 걱정하는 척하는 기색이 묻어 있었지만 어딘가 얄팍했다.“지안 씨, 제 생각에는 그냥 빨리 국내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남극은 너무 위험하잖아요. 여자 혼자서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예요.”그러나 강지안은 민채영의 말을 아예 듣지 않는 사람처럼 넘기고 장성훈에게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했다.“장성훈, 수빈 씨는 내 가장 소중한 친구야. 너라면 방법이 있다는 거 알아. 너만 도와주면...”“도와줘요?”장성훈이 말을 끊어 버렸다. 눈빛에 담긴 비웃음은 한층 더 짙어졌다.“제가 왜 도와줄 거라 생각하시죠?”그러고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더니 차갑고도 잔인할 만큼 또렷한 눈빛으로 강지안을 내려다보았다.“우리의 관계는 진작 끝났어요. 아가씨는 더 이상 제 의뢰인이 아니고 전 아가씨의 경호원도 아니에요. 그러니 아가씨의 친구가 살든 죽든,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그는 강지안의 창백한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더구나 본인 처지가 지금 이런데, 대체 누구를 구하겠다는 겁니까? 제가 제때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면 아가씨는 벌써 저 설원 어딘가에서 얼어 죽었을 거예요.”이 말은 칼날처럼 강지안의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후벼 팠다.강지안은 장성훈과 그의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민채영을 함께 바라보았다.그러다 문득 웃었다.“알겠어.”강지안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고 다시 침대 머리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너무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괜히 불렀네.”저 차가운 얼굴도, 가차 없이 내리꽂는 저 말들도 더는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았다.민채영은 장성훈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듯 그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목소리에는 연인다운 애교가 묻어 있었다.“성훈 씨, 우리 이제 가자. 여기 소독약 냄새 너무 심해서 싫어.”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억지로 눌러 삼키듯 장성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지안을 한 번 바라봤다. 눈빛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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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9화

소정윤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조용히 내려놓았다. 찻잔과 받침이 부딪치며 맑은소리가 울렸다.“민성아, 육씨 가문의 인맥을 못 쓰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네 작은아버지들이나 큰아버지들이 줄곧 집안 주도권을 노리고 있잖니.”육진수는 시가의 재를 가볍게 털어 내며 매서운 눈빛으로 육민성을 바라봤다.“육씨 가문의 힘을 쓰게 해 줄 수는 있다.”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되돌릴 수 없는 거래를 못 박는 것처럼 무거웠다.“대신 송미연과 결혼해라. 혼인 신고까지 하고. 그러면 육씨 가문의 실권은 네게 넘기마.”육민성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너무나 갑작스러워서, 그 말이 가진 무게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송미연과의 약혼은 애초에 집안끼리 이해관계가 맞아 이뤄진 정략혼에 가까웠다.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육진수는 혼인 신고 한 장을 대가로, 육씨 가문을 이끌 자격과 최수빈을 구할 기회를 동시에 내걸고 있었다.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슴 한복판을 누군가가 거칠게 틀어쥔 것처럼 답답했다.한쪽에는 친구의 목숨이, 다른 한쪽에는 아무 온기도 없는 결혼이 놓여 있었다.너무나 잔인한 두 선택지에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바로 그때, 거실문이 조용히 열렸다.송미연이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와인빛 롱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채, 얼굴엔 흐트러짐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거실에 감도는 무거운 분위기를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녀는 망설임 없이 육민성의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감쌌다.“아버님, 어머님, 할아버지.”목소리는 맑고 또렷했다. 송미연은 모두를 한 번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육진수를 바라봤다.“저, 오빠랑 결혼할게요. 식은 당장 못 올려도 괜찮아요. 혼인 신고는 지금이라도 할 수 있어요.”육민성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송미연을 돌아보았다.하지만 송미연은 그런 시선을 전혀 못 본 척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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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0화

육민성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송미연을 바라보다가, 묘하게도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은 덜어진 걸 느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좋아요, 그럼 내일 동사무소에서 봐요.”...다음 날 오전, 혼인 신고를 하러 온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육민성과 송미연은 나란히 안으로 들어가 서류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30분도 채 되지 않아 혼인 신고가 일사천리로 처리된 것이다.송미연은 혼인신고서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보았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집안끼리 맺어진 혼담 때문에 머리가 아팠는데 하루 만에 육민성의 법적인 아내가 되어 있었다.변화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멍해질 지경이었다.동사무소를 나섰을 때는 햇살이 한창 눈부실 때였다. 쏟아지는 빛에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어려웠다.육민성은 혼인신고서를 그녀에게 건네며 차분하게 말했다.“미연 씨, 이 결혼이 어떤 이유로 시작됐든... 오늘부터 나는 남편으로서 할 일은 다 할 거야.”그는 송미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씩 분명하게 덧붙였다.“나중에 미연 씨가 이혼을 원하거나, 자유를 찾고 싶다고 해도 전부 받아들일게. 절대 붙잡지 않을 거야.”송미연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웃었다. 그리고 혼인신고서를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걱정 마요. 당장 이혼할 생각은 없으니까. 육씨 가문 며느리라는 자리도 들어보니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두 사람은 차를 타고 육씨 가문 소유의 별채로 향했다. 서재에는 이미 심종연과 임하은에 대한 자료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육민성은 벽에 걸린 지도를 마주한 채 남극 쪽에 손끝을 짚었다. 미간은 깊게 찌푸려져 있었다.“심종연의 핵심 거점은 남극에 있어. 임하은도 그쪽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고. 원래는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정면으로 들이쳐 구해낼 생각이었는데...”송미연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지도를 훑어본 뒤, 임씨 가문 계열사와 플라잉 테크의 재무보고서 한 부를 집어 들었다.서류를 넘기던 그녀의 입가에 싸늘한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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