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371 - Chapter 1380

1406 Chapters

제1371화

“여긴 어떻게 왔어요? 회사에서 회의 중이랬잖아요.”“회의가 너보다 중요하겠어?”주민혁이 낮게 말했다.“걱정돼서 도저히 못 있겠더라. 회의는 진 비서한테 맡기고 바로 달려왔어.”서늘한 그의 손끝이 한껏 달아오른 자신의 뺨에 닿자 최수빈의 몸은 작게 떨렸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려 했지만 주민혁이 가볍게 턱을 붙잡고 억지로 시선을 마주하게 만들었다.그의 엄지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며시 쓸었다.“내가 있는데 누가 널 괴롭혀.”최수빈의 품에 안겨 있던 율이가 반쯤 잠든 얼굴로 눈을 비비며 깼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주민혁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웅얼거렸다.“아빠... 엄마 울었어요...”이 말에 주민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율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은 뒤, 이마에 손을 대보자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율이 아직 열 있네. 일단 병원부터 가보자. 괜히 더 늦으면 안 돼.”“괜찮아요. 학교 보건실에서도 미열이라고 했어요. 집에서 약 먹고 쉬면 된대요.”최수빈은 코끝을 훌쩍이며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딸을 내려다봤다.“다 내 탓이에요. 제대로 못 챙긴 데다 이런 일까지 보게 만들고...”“네 잘못 아니야.”주민혁은 그녀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내리고 대신 어깨를 감싸 안았다.그런 다음 최수빈과 율이를 함께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낮게 말했다.“그쪽이 선을 넘은 거지. 걱정 마. 이 일은 내가 처리할게.”그 말을 듣는 순간, 긴장으로 인해 팽팽하게 조여 있던 최수빈의 몸이 조금씩 풀려갔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주민혁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주민혁은 고개를 숙여 최수빈의 정수리에 턱을 살짝 문지르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울고 싶으면 울어. 참지 말고.”최수빈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그리고 그의 셔츠에 얼굴을 묻은 채, 가냘픈 어깨를 떨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된 최수빈이 고개를 들었다.그 붉게 젖은 눈가를 바라보자 주민혁은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려 더 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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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2화

“조심해.”주민혁이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인 뒤, 허리를 숙여 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 손끝이 우연히 주민혁의 손등을 스쳤고 두 사람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마주 보며 웃었다.“율이는 내가 안을게.”주민혁은 먼저 뒷좌석으로 돌아가 카시트 버클을 조심스럽게 풀고 아이를 품에 안아 올렸다.율이는 깊이 잠들어 작은 머리를 그의 목덜미에 기대고 있었다. 따뜻한 숨결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은은한 우유 냄새가 스쳤다.혹시라도 품 안의 아이가 깰까 봐 동작도, 발걸음도 한없이 조심스러웠다.최수빈은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곧게 선 등과 품에 작게 웅크린 율이를 바라봤다.조금 전 최진식 때문에 치밀어 올랐던 짜증과 불안이 그 순간 따뜻한 기운에 사르르 녹아내렸다.거실에는 이미 도우미들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세 사람이 돌아오자 곧장 다가와 말했다.“대표님, 수빈 씨. 죽은 냄비에 따뜻하게 데워두었습니다. 해열제도 의사 지시에 맞춰 준비해두었고요.”“네.”주민혁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췄다.“작은방 에어컨 맞춰둬요. 온도는 너무 높지 않게.”“알겠습니다.”도우미가 조심조심 앞장섰다.주민혁은 율이를 안고 작은방으로 들어가 부드러운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힌 뒤, 이불자락까지 꼼꼼히 덮어주었다.율이가 작게 칭얼거리며 몸을 뒤척이더니 무의식중에 그의 옷자락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주민혁은 침대 옆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혹시나마 아이가 깰까 봐 꼼짝도 하지 못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수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고는 다가가 율이의 작은 손을 살며시 풀어주며 낮게 말했다.“가요. 조금 더 자게 둬요.”그렇게 두 사람은 발소리조차 죽인 채 방을 나왔다. 문을 닫는 소리마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웠다.주민혁은 몸을 돌려 최수빈을 바라봤다.아직도 붉은 기가 도는 눈가를 보자 주민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손끝의 온기가 조용한 위로처럼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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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3화

다음 날, 주민혁은 한 연회에 참석했다.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접대해야 하는 자리였다.그는 최수빈에게 미리 일정을 알린 뒤 집을 나섰다.연회장.주민혁은 몸에 딱 맞게 재단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소나무처럼 곧고 반듯한 자세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외국 바이어들과 자연스럽게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유창한 외국어에, 때때로 유머러스한 표현도 섞어 쓰는 것이 여유롭고도 품격 있었다.작은 몸짓 하나에도 묵직한 존재감이 배어 나와 현장에 있던 여러 명문가 여성들의 시선이 은근히 그에게 향했다.“주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키가 크고 화려하게 꾸민 한 여자가 샴페인 잔을 들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다가왔다.그녀는 강렬한 붉은색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치맛자락이 흔들릴 때마다 희고 곧게 뻗은 다리가 드러났고 얼굴에는 계산된 듯 완벽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그녀를 소개한 사람은 유럽에서 온 협력사 대표였다.그가 주민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어눌한 한국어로 웃으며 말했다.“주 대표님, 이쪽은 에라 씨입니다. 저희 회사의 아시아 태평양 시장 총괄 이사이자 이번 협력의 핵심 인물 중 한 분이죠. 에라 씨가 예전부터 주 대표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꼭 한번 뵙고 싶어 했습니다.”에라는 곧바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먼저 손을 내밀었다.“주 대표님, 안녕하세요. 에라입니다.”부드럽고도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주상 그룹이 대표님의 지휘 아래 국제 시장에서 꾸준히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오늘 직접 뵈니, 그 명성이 괜한 게 아니었네요.”하지만 주민혁은 그녀가 내민 손을 담담히 쳐다보기만 할 뿐, 손을 잡아주지는 않고 그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차려 답했다.“과찬입니다, 에라 씨. 주상 그룹의 성장은 저 혼자 이룬 게 아니라 팀 전체가 함께 만든 결과예요.”분명한 거절의 뜻에 에라는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잠시 굳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정리했다.자연스럽게 손을 거둔 그녀는 샴페인을 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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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4화

에라는 얼굴에 걸린 미소가 조금 어색해진 채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네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주민혁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가고 있었다.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말이다.‘내 정도 조건이면 주민혁 하나 마음대로 못 할 리 없어.’한편 주민혁은 조금 전의 작은 소동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뒤였다.그는 통유리창 앞으로 걸어가 창밖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도심의 야경을 바라봤다.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어느새 밤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수빈이랑 율이는 이제 집에 도착했겠지? 율이의 열은 내렸을까? 수빈이 오늘 하루 종일 힘들었을 텐데... 제대로 쉬고는 있을까?’이내 주민혁은 휴대폰을 꺼내 최수빈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하지만 모녀의 휴식을 방해할 수도 있었기에 손끝을 멈칫했다.그렇게 잠시 망설이다가 주민혁은 결국 휴대폰을 다시 넣고 몸을 돌려 연회장으로 돌아갔다.그 시각, 신혼집 별장.율이의 손을 잡고 막 현관 안으로 들어선 최수빈의 코에 가장 먼저 은은한 음식 냄새가 스쳤다.도우미가 곧장 다가와 그녀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저녁 식사는 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대표님께서 따로 말씀하셔서, 율이 아가씨가 드시기 좋게 담백한 음식 위주로 준비했어요.”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숙여 율이의 이마를 만져보았다.다행히도 열이 이미 내려가 있어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율아, 배고파?”그녀가 부드럽게 묻자 율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네! 엄마, 저 오늘 학교에서 그림 그렸는데 선생님이 칭찬해주셨어요!”“그래? 우리 율이 정말 잘했네.”최수빈은 웃으며 율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아이의 손을 잡아 다이닝룸으로 들어갔다.율이는 작은 숟가락을 들고 죽을 크게 크게 떠먹었다. 오물오물 먹으며 볼이 부풀어 오른 모습이 꼭 귀여운 다람쥐 같았다.맞은편에 앉은 최수빈은 아이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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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5화

“와, 너무 좋다!”율이는 신이 나서 팔짝팔짝 뛰었다.그렇게 시후와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아이는 아쉬운 얼굴로 휴대폰을 최수빈에게 돌려주었다.최수빈은 휴대폰 너머의 진서령에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방학하면 저희가 시후 데리러 가서 같이 스키장 다녀올게요.”“그래, 그러렴.”진서령도 웃으며 대답했다.“너희끼리 재미있게 다녀와. 난 괜히 따라가서 방해하지 않을 거야.”전화를 끊고 난 뒤, 최수빈은 거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좋아하는 율이를 바라봤다.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어쩌면... 민혁 씨랑 상의해서 가족끼리 다 같이 스키장에 가도 괜찮지 않을까?’이러한 생각이 들자마자 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주민혁의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벨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음에도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휴대폰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며, 마음 한구석이 조금 허전해진 최수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바쁜가 보네.’오늘처럼 중요한 만찬 자리라면 당연한 일이었다.그때 율이가 달려와 그녀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 왜 전화 안 받아요? 우리랑 같이 스키 타러 가기 싫은 거예요?”최수빈은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아니야. 아빠는 지금 일하느라 바쁜 거야. 일 끝나고 전화 온 거 보면 꼭 다시 전화해주실 거야.”율이는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거실로 뛰어가 블록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최수빈은 식탁 옆에 앉아 천천히 어둠이 내려앉는 창밖을 바라보았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쓸쓸했다.그 시각 주민혁은 여러 협력사 관계자들에게 둘러싸여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휴대폰은 정장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고 무음으로 설정되어 있어 전화가 온 줄도 전혀 알지 못했다.만찬이 끝나고 마지막 손님까지 배웅한 뒤에야 그는 지친 숨을 길게 내쉬었다.묵직하게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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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6화

“무슨 일로 전화했어?”휴대폰을 쥔 최수빈의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율이가 이제 곧 겨울방학이라서 스키 타러 가고 싶대요. 시후도 같이 가자고 하고요. 그래서... 시간 괜찮으면 우리 같이 갈래요?”휴대폰 너머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웃음기 어린 주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좋지. 난 언제든 시간 돼. 너랑 율이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같이 갈게.”최수빈은 괜히 안도한 듯 웃었다.“다행이다. 바쁠까 봐 걱정했어요.”“아무리 일이 많아도 너희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런데 스키장은 정했어? 아직 안 정했으면 내가 알아볼게. 안전하고 재밌는 곳으로 제대로 준비해둘 거야.”최수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직이요. 그럼 민혁 씨가 알아서 해줘요. 민혁 씨의 안목은 믿으니까.”“알겠어. 나만 믿어.”주민혁은 바로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이따가 바로 알아볼게. 진짜 완벽한 여행으로 만들어줄 거야.”두 사람은 한동안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최수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봤다. 입가에 번진 미소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반면 전화를 끊은 주민혁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근처 스키장을 검색하기 시작했다....다음 날 아침.최수빈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가 급히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수빈 씨, 아래에 에라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유럽 쪽 협력사 관계자라고 하시는데, 상세한 협업 제안서까지 가져오셨어요.”그러자 최수빈은 펜을 쥔 손을 잠시 멈칫했다. 어젯밤 주민혁이 말했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그녀는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올라오시라고 해요. 바로 응접실로 안내하고요.”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최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치맛자락을 정리한 뒤, 응접실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하자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은 여자가 통유리창 앞에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풍성한 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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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7화

일행은 천공연구원 핵심 연구실로 향했다.연구실 안에서는 각종 정밀 장비들이 질서정연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은 데이터 기록에 집중하고 있었다.은은한 소독약 냄새와 차가운 기계 향이 뒤섞인 공간이었다.에라는 주변의 첨단 장비들을 둘러보며 더 이상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사실 처음에는 천공연구원이 그저 주상 그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성장한 회사라고만 생각했었다.하지만 직접 와서 보니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곳은 분명 제대로 된 기술력을 갖춘 기업이었다.“이건 저희가 자체 개발한 차세대 에너지 저장 소재예요.”최수빈은 작동 중인 장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말투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났다.“변환 효율이 시중 동일 제품보다 15% 이상 높고, 안정성과 친환경성 역시 업계 기준을 훨씬 웃도는 수준입니다.”에라는 몸을 살짝 숙여 장비에 가까이 다가가더니, 모니터 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데이터를 한참 들여다본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최수빈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수빈 씨, 천공연구원의 수준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이 정도라면 협업도 충분히 믿고 진행할 수 있겠어요. 협업은 결국 서로 윈윈해야 오래 가는 거니까요.”최수빈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이제 저희 쪽 역량은 어느 정도 확인하셨으니, 장소를 옮겨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겠네요.”어느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최수빈은 멀리서 온 에라를 위해 식사 자리를 먼저 제안했다.오후에도 협의를 이어가야 했기에 일부러 회사 근처에 있는 승마클럽 레스토랑을 예약해둔 상태였다.이곳은 조용하고 프라이빗해서 비즈니스 미팅 장소로 자주 쓰이는 곳이었다.적당히 여유로운 분위기까지 갖추고 있었고 레스토랑 뒤편으로는 넓은 마장이 펼쳐져 있어 가끔 잘 관리된 말들이 한가롭게 풀밭을 걷는 모습도 보였다.레스토랑에 도착해서 보니 육민성과 송미연은 이미 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현재 송미연은 천공연구원의 법률 자문을 맡고 있었다.에라가 최수빈의 뒤를 따라 들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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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8화

“제가 듣기로 승마는 사람의 담력과 품격을 알아보기에 아주 좋은 운동이라더군요.”말을 마치자마자 에라는 최수빈에게 시선을 돌렸다.눈빛에는 도발하는 듯한 기색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에라가 보기에 최수빈 같은 연구자 타입의 여자는 기껏해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데 익숙한 사람일 뿐이었다.평소에는 연구실에 틀어박히거나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을 게 뻔한데, 힘과 기술이 필요한 승마를 제대로 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이 기회를 빌려 사람들 앞에서 최수빈에게 망신을 주고 싶었다. 그래야 최수빈의 기세가 조금은 꺾일 테니 말이다.육민성과 송미연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 모두 에라의 속셈을 눈치챈 상태였다.송미연이 막 최수빈을 대신해 말을 꺼내려는 순간, 최수빈이 눈짓으로 그녀를 말렸다.최수빈의 승마 실력은 이미 프로에 가까운 수준이었기에 사실 이건 에라의 체면을 봐주는 것이기도 했다.이윽고 최수빈은 냅킨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한 눈빛으로 에라를 바라보며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좋아요. 마침 저도 한동안 못 탔는데, 오늘 에라 씨와 제대로 겨뤄보죠.”예상 밖의 대답에 에라는 순간 멈칫했지만 곧 코웃음을 치며 속으로 비웃었다.‘허세 부리기는. 조금 이따 말에서 떨어지고도 여유로운 척을 계속할 수 있는지 보자고.’그렇게 일행은 마장으로 향했다.마장 직원들이 신중하게 고른 말 몇 마리를 끌고 왔다.그중 온몸이 새까만 준마 한 마리가 특히 눈에 띄었는데 길게 뻗은 다리와 매끈한 근육선만 봐도 쉽게 보기 힘든 명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에라는 그 검은 말을 보자마자 마음에 든 듯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익숙하게 말 위에 올라탔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이 확실히 평소 승마를 자주 해본 사람의 움직임이었다.그녀는 고삐를 잡아당기며 높은 곳에서 최수빈을 내려다봤다. 입가에는 득의양양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수빈 씨, 아직 못 고르셨어요? 너무 오래 고르지는 마세요. 기다리다 지루해질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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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9화

처음에는 에라가 꽤 큰 차이로 앞서 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는 순간, 에라의 얼굴빛은 확 변했다.최수빈이 백마를 타고 점점 가까이 따라붙고 있는 것이었다.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에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저렇게 가녀려 보이는데... 승마 실력이 이렇게 뛰어나다고?’마장 가장자리에 서 있던 육민성과 송미연은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보자 더는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질렀다.흥분한 송미연은 주먹을 꽉 쥔 채 최수빈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최수빈, 파이팅! 추월해버려!”최수빈의 입가에 자신감 어린 미소가 번졌다.그녀가 다시 한번 말의 배를 힘주어 조이자 백마는 그 마음을 알아들은 듯 더욱 빠르게 달려나갔다.결승선을 코앞에 둔 순간, 최수빈이 탄 백마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최수빈은 가볍고 능숙한 동작으로 말에서 내려왔다. 호흡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에는 땀방울 하나 맺혀 있지 않았다.반면 에라는 시퍼렇게 굳은 얼굴로 결승선 앞에 말을 세웠다. 최수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분함과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자신이 그토록 깔보던 여자에게 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이윽고 최수빈은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띤 채 에라의 앞으로 걸어갔다.“에라 씨,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이제 보니 천공연구원 사람들은 연구실에서만 강한 게 아닌가 보군요. 마장에서도 꼭 밀리지 않는 걸 보면요.”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으나 에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자신이 완전히 당했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육민성과 함께 빠르게 다가온 송미연은 곧장 최수빈을 와락 끌어안았다.“진짜 멋있었어.”최수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고는 다시 에라를 바라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에라 씨, 협업 이야기는 다시 회의실로 돌아가서 제대로 나누죠. 진정으로 대등하고 서로에게 이로운 협업이어야 오래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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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0화

“그쪽 협력사에서는 이미 충분히 성의를 보였습니다. 부대표님을 보내도 충분해요. 요즘 몸도 안 좋으신데 대표님께서는 조금이라도 더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주민혁의 시선이 자신의 손목 위로 떨어졌다. 그곳의 피부는 유난히 창백했다.그는 눈을 내리깐 채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문질렀다.목소리는 한숨을 내쉬는 듯 낮았다.“반드시 가야 해.”진한수는 더 말하려다 단호한 주민혁의 눈빛을 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주민혁을 오랫동안 곁에서 모셔온 사람으로서, 그가 한번 결정한 일은 절대 바꾸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차 안에는 짧은 침묵이 내려앉아 바퀴가 도로 위를 굴러가는 단조로운 소리만 무겁게 이어졌다.주민혁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어쩌면 1년, 어쩌면 2년...아니, 그보다도 더 짧을지 몰랐다.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에 적어도 지금은 쓰러질 수 없었다.주상 그룹의 일들을 정리해야 했고 최수빈과 율이에게 흔들림 없는 미래를 만들어줘야 했다.또 그들을 노리는 자들이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유럽의 그 프로젝트는 단순한 사업 협력이 아니었다.그건 최수빈의 천공연구원을 위해 깔아두는 길이자 그녀를 지켜줄 방패였다.주민혁은 떠나기 전 모든 것을 정리해두고 싶었다.그래야 최수빈과 율이가 앞으로 걱정 없이 평온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아, 참.”주민혁이 입을 열었다.“내 명의의 지분 일부를 율이 앞으로 이전해. 절차는 최대한 빨리 진행하고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해.”진한수는 순간 멈칫했다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차는 병원에 도착했다. 주민혁은 양복 깃을 가볍게 정리한 뒤, 허리를 곧게 폈다.그리고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건강검진센터를 향해 걸어갔다. 곧게 뻗은 뒷모습은 소나무처럼 단단했다. 어디에서도 나약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그는 주민혁, 주상 그룹의 수장이자 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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