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361 - Chapter 1370

1406 Chapters

제1361화

“수빈아, 너희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시후는 출생 배경이 워낙 복잡한 아이잖아. 너희는 그 아이가 계속 율이랑 붙어 지내다가 나중에 혹시라도 진실을 알게 됐을 때 둘 사이에 앙금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지.”최수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서령이 이렇게까지 훤히 꿰뚫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동안 최수빈과 주민혁도 그런 걱정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주시후가 워낙 착하고 의젓하게 구는 모습을 보면 차마 내칠 수가 없을 뿐이었다.진서령은 망설이는 최수빈의 눈빛을 보고는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 정말 안됐잖니. 심종연이 저지른 죄를 그 아이가 짊어질 필요는 없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시후를 데려다 키우면 어떨까 싶구나. 나는 따로 지내고 있으니 조용하기도 하고 그 아이도 잘 돌볼 수 있어. 보고 싶으면 언제든 와서 봐도 되고. 그렇게 하면 아이도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고 너희 걱정도 덜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니?”최수빈의 마음이 완전히 흔들렸다.진서령의 말은 하나하나가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겨냥한 말이었으니 말이다.창밖을 내다보니 율이와 주시후가 정원에서 서로를 쫓아다니며 장난치고 있었다. 두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봄날의 풍경처럼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한참을 침묵하던 최수빈이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이 일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없어요. 시후 본인에게도 물어봐야죠.”진서령은 눈빛이 밝아지더니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아이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지.”두 사람이 서재를 나섰을 때, 마침 율이가 주시후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며 밖에서 들어오고 있었다.진서령은 앞으로 다가가 몸을 낮추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주시후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시후야, 할머니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주시후는 발걸음을 멈추고 진서령을 바라보더니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 말씀하세요.”“할머니랑 저택에 가서 한동안 지내볼래?”진서령의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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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2화

거기에 최수빈이 나중에 따로 만든 담백한 반찬 몇 가지까지 더해져 식탁이 제법 푸짐했다.주민혁은 최수빈에게 등 떠밀리듯 서재에서 끌려 나왔다.막 해외 화상회의를 끝낸 참인지, 이마에는 옅게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반듯하게 다려진 실내복 차림이었지만 눈가에 밴 피로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그는 식탁에 앉아 최수빈이 건네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제야 목 안쪽의 메마른 기운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상석에 앉아 있던 진서령은 그런 주민혁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했다.“일이 아무리 바빠도 몸은 챙겨야지.”“진짜 쓰러지기라도 하면 수빈이랑 애들은 어떡하려고 그래?”주민혁은 별말 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어 나물을 한입 집어 먹었다.최수빈은 그의 옆에 앉아 보양탕 한 그릇 떠주며 조용히 말했다.“천천히 먹어요. 오후 내내 푹 고아서 국물이 진해요.”옆자리에는 주시후와 율이가 앉아 있었다. 두 아이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주시후는 저택에 있는 토끼가 얼마나 귀여운지 이야기했고, 율이는 학교에서의 블록놀이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신나게 떠들어댔다.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집 안에 감돌던 묵직한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풀어주고 있었다.진서령은 눈앞의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젓가락을 내려놓고 맞은편의 주민혁과 최수빈을 바라봤다. 목소리에는 어느새 진중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참, 나 할 말이 하나 있는데.”주민혁은 아무 말 없이 반찬을 집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최수빈 역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너희 둘, 재혼은 언제 할 거니?”진서령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또렷하게 두 사람에게 닿았다.“지금이야 같이 살고 있고 누가 보면 그냥 한 가족 같긴 하지. 그래도 결국 혼인신고 하나 없는 건 사실이잖아. 그 종이 한 장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막상 중요한 순간엔 큰 힘이 되는 법이야.”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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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3화

“하지만 이런 일은 정말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진서령이 다시 뭐라 말을 꺼내려던 순간, 주민혁이 손을 들어 조용히 말을 막았다.그는 진서령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재혼 문제는 저랑 수빈이가 알아서 잘 결정할게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희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진서령은 그의 표정을 보더니 더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고개를 저으며 다시 젓가락을 들었지만 이미 입맛은 떨어진 뒤였다.그렇게 식사는 어딘가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식사 후 진서령은 주시후에게 내일 짐 잘 챙겨두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그렇게 직접 저택으로 데리러 오겠다는 말까지 남긴 뒤에야 빈 도시락통을 들고 돌아갔다.현관문이 조용히 닫히자 거실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주민혁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은 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최수빈은 식탁을 정리한 뒤, 국화차 한 잔을 타서 그의 옆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두 사람 모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뒤에야 주민혁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옆에 앉은 최수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재혼은... 전부 네 뜻대로 할게.”잠시 말을 고른 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그때는 내가 잘못했어. 너무 독선적이었고 내 생각만 옳다고 믿었지. 그래서 결국 네 마음에 상처를 줬어. 그런데도 다시 너랑 함께할 수 있게 됐고 율이랑 네 곁을 지킬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난 이미 충분해. 혼인신고서는 나한테 있어서 있으면 더 좋은 거지, 꼭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야. 네가 원하면 하러 가는 거고, 원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살아도 난 괜찮아.”최수빈의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가슴 한쪽을 무언가가 살짝 건드린 것처럼 잔잔한 파문이 번져갔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민혁을 바라봤다. 눈가에 서린 피로와, 그 안에 담긴 진심이 선명하게 느껴졌다.최수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가만히 감쌌다. 손끝에 닿은 그의 손바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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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4화

아침을 먹은 뒤, 최수빈은 율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학교 앞에는 이미 학부모와 아이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차들이 오가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활기가 넘쳤다.최수빈이 율이의 손을 잡고 교문 앞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뒷모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지규원이었다.그는 캐주얼한 정장 차림으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한 손에는 어린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바로 그의 아들 지민준이었다.민준이와 율이는 같은 반 친구였는지라 평소에도 꽤 친하게 지냈다.곧 지규원도 최수빈을 발견하고는 웃으며 다가왔다.“좋은 아침이에요, 수빈 씨.”“좋은 아침이에요.”최수빈도 미소로 인사한 뒤, 민준이에게 시선을 내렸다.“민준이 오늘 아주 멋지게 입었네.”민준이는 율이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웃을 때 드러나는 작은 덧니가 유난히 귀여웠다.“율이야, 오늘 우리 같이 미끄럼틀 탈래?”율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좋아!”두 아이는 손을 꼭 잡고 재잘거리며 한쪽으로 달려갔다.지규원은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최수빈을 바라봤다.“참, 천공이랑 주상 그룹이 협력하는 해외 프로젝트 말인데요. 어제 보내주신 기획안을 봤는데, 몇 가지 세부 사항은 다시 논의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더라고요.”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저도 몇 군데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특히 공급망 쪽 리스크 평가는 더 세분화해야 할 것 같아요.”“맞아요.”지규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해외 세력 쪽이 일단은 눌리긴 했지만 잔당이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요. 가능한 모든 위험 요소를 다 고려해야 합니다. 조금의 틈도 줘서는 안 돼요.”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십여 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프로젝트 세부 내용부터 이후 배치 계획까지, 대화는 온통 일 이야기뿐이었다.업무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지규원은 손목시계를 흘끗 보고 말했다.“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저는 민준이 들여보내야겠습니다.”“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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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5화

최수빈은 휴대폰을 꼭 쥔 채 차분하게 말했다.“엄마, 너무 불안해하지도 말고 겁먹지도 마요. 엄마가 바람피웠다고 주장하려면 아빠 쪽에서 증거를 내놔야 해요. 증거도 없이 떠드는 건 법원에서 인정 안 해줘요. 그리고 재산 문제도 그래요. 그건 엄마랑 아빠 공동 재산이잖아요. 아빠 혼자 다 가져가는 건 절대 불가능해요. 걱정 마요. 제가 제일 좋은 변호사 붙여서 꼭 도와드릴게요.”전화기 너머는 한동안 조용했다.한참 뒤에야 이혜정이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떨리고 있었다.“수빈아... 엄마가 미안하다. 괜히 너까지 이런 일에 신경 쓰게 해서.”최수빈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엄마,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우린 모녀인데 제가 엄마 안 도우면 누가 도와줘요? 일단 집에 계세요. 아빠랑 괜히 부딪치지 말고. 저도 일 정리되는 대로 바로 가볼게요.”전화를 끊은 뒤에도 최수빈은 한동안 차 안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최진식이 막무가내로 나올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치졸하게 굴 줄은 몰랐다.재산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이혜정의 명예였다.최진식은 아예 끝장을 보겠다는 듯이, 작정하고 이혜정을 망가뜨리려 하고 있었다.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예상되자 최수빈은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이내 그녀가 시동을 걸자 차는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와 출근길 차량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그날 저녁.최수빈은 율이를 데리러 간 뒤, 아이와 함께 이혜정의 집으로 향했다.오래된 아파트 복도에는 군데군데 센서등이 나가 있었다. 율이는 최수빈의 손가락을 꼭 붙잡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외할머니 집 계단 너무 어두워요...”최수빈은 아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무서워하지 마. 거의 다 왔어.”문이 열리자 희미한 불빛 아래 선 이혜정의 모습이 드러났다.빛바랜 면 잠옷 차림에 대충 묶어 올린 머리, 눈가의 주름은 지난번보다 훨씬 깊어져 있었다.마치 며칠 사이에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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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6화

“엄마, 이 일은 이제 신경 쓰지 마세요.”최수빈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제가 최고의 변호사 찾아서 그 사람이 한 짓들 증거 전부 모을게요. 재산이 그렇게 갖고 싶다 했죠? 그럼 단 한 푼도 못 가져가게 만들 거예요. 엄마의 명예를 망치고 싶다 했죠? 그럼 제가 모두가 알게 만들 거예요. 그 사람이 대체 어떤 인간인지.”이혜정은 딸의 단호한 눈빛을 바라보자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했다.‘어느새 다 컸구나. 이제는 혼자서도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됐구나.’그때, 최수빈의 휴대폰이 울렸다. 다름 아닌 주민혁이었다.그녀는 잠시 멈칫했다가 전화를 받았다.“어디야?”“엄마 집이요.”최수빈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창밖을 흘끗 바라봤다.“무슨 일 있어요?”“별일은 아니고. 이제 막 일 끝났는데, 아직 안 들어왔길래 걱정돼서.”최수빈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뒤이어 ‘곧 갈게요’라고 말하려는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문은 누군가에 의해 가볍게 두드려졌다.가장 먼저 달려간 건 율이였다.그리고 문을 열고 밖에 선 사람을 본 순간,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아빠!”최수빈과 이혜정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문밖에는 주민혁이 서 있는 것이었다.양손에는 큼직한 봉투들이 들려 있었다. 보양식, 과일, 포장이 고급스러운 간식 상자까지 한가득이었다.검은 정장 차림에 머리카락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지만 눈가에는 여전히 피곤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요?”최수빈이 다가가며 놀란 듯 물었다.‘분명 구체적인 주소는 말한 적이 없는데...’주민혁은 안으로 들어오며 집 안을 훑어봤다.어질러진 거실을 보는 순간, 그의 눈빛에 차가운 기운이 스쳤으나 곧 다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그는 들고 온 것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이혜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오랜만에 뵙습니다.”이혜정은 주민혁을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그녀에게 주민혁은 여전히 마냥 편한 사람이 아니었다.예전 그가 아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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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7화

주상 그룹 본사.최수빈은 도시락통을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비에 들어섰다.프런트 직원은 그녀를 보자마자 공손한 미소를 지었다.“수빈 씨, 오셨군요. 대표님은 아직 최상층 회의실에 계세요. 한 10분 뒤에 끝나실 거예요.”“알아요.”최수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냥 올라가서 기다릴게요. 따로 알리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익숙한 걸음으로 전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그런데 손끝이 막 버튼에 닿으려던 순간, 뒤쪽에서 낮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저 사람이 최수빈이지? 자주 와서 대표님한테 뭐 갖다주는 사람.”말을 꺼낸 건 행정팀의 임세린이었다. 그녀는 서류 더미를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최수빈의 뒷모습에 붙어 있었다.“그러게. 예전에 주 대표님이랑 인연이 있었다던데, 지금 다시 어떻게 해보려는 건가?”옆에 있던 여직원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묘한 질투가 섞여 있었다.“대표님 같은 사람이면 명문가 아가씨들이 줄을 설 텐데. 저렇게 틈만 나면 찾아오는 거,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야?”“대체 무슨 배경이 있는 거야? 대표님이 저 사람한테는 확실히 태도가 다르긴 하더라. 지난번에 서류 갖다줬을 때도 대표님이 직접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잖아.”최수빈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그 말들은 가볍게 그녀의 귓가를 스쳤으나 마음에는 별다른 파문을 일으키지 못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리자 최수빈은 안으로 들어가 꼭대기 층의 버튼을 눌렀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정성껏 끓여 온 보양탕을 바라보고 주머니 속 약을 살짝 만졌다.강지안이 특별히 신신당부한 약으로 주민혁이 식후에 꼭 챙겨 먹어야 한다고, 더는 미루면 안 된다고 했었다.어젯밤에도 서재에서 늦게까지 서류를 들여다보던 주민혁의 모습이 떠오르자 최수빈의 눈가에는 걱정이 스쳤다.엘리베이터는 부드럽게 올라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문이 열리자 비서실 직원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수빈 씨 오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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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8화

“다들 모르시죠?”비서 장우빈이 슬쩍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진 비서님한테 들었는데, 대표님이랑 수빈 씨 예전에 부부였대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혼했고... 지금은 대표님이 다시 수빈 씨를 쫓아다니는 중이라던데요?”“진짜요?”누군가 눈을 크게 떴다.“어쩐지 수빈 씨만 오면 대표님이 무조건 시간 비워서 같이 있더라니까요. 지난번에는 수빈 씨 배웅하려고 몇백만 규모 계약 미팅까지 미뤘다던데요? 그거 임원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얘기잖아요.”열린 문틈 사이로 그런 이야기들이 사무실 안까지 흘러 들어왔다.최수빈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주민혁과 눈이 마주쳤다.눈가에 번진 웃음 때문인지 심장이 괜히 한 박자 늦게 뛰었다.“언제 왔어요?”주민혁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이마 앞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정리해 줬다.손끝의 온기가 닿자 최수빈의 몸이 살짝 떨렸다.“방금 왔어.”최수빈은 한 걸음 물러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 도시락통을 가리켰다.“국 아직 따뜻하니까 얼른 먹어요. 약도 꼭 챙겨 먹고. 지안 씨가 특별히 당부했어요. 이 약은 식후에 하루 세 번 꼭 먹어야 한대요. 빼먹으면 안 되고.”주민혁은 낮게 웃으며 소파에 앉아 도시락통 뚜껑을 열었다. 곧 진한 보양탕 향이 순식간에 사무실 안에 퍼졌다.그는 숟가락으로 한입 떠먹은 뒤, 눈빛에 웃음이 가득 번져서 최수빈을 바라봤다.“맛있네. 전문 레스토랑 셰프보다 훨씬 나은데? 오늘은 얼마나 끓인 거야?”“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어요.”최수빈은 맞은편 1인용 소파에 앉아 약통을 건넸다.“세 시간 동안 약불로 천천히 끓였어요. 맛있으면 내일 또 해줄게요.”“그렇게까지 무리하지 마.”주민혁은 약을 받아 따뜻한 물과 함께 삼켰다.“주방 사람들한테 배우라고 하면 되니까 넌 집에서 쉬기만 해.”“그분들이 만든 게 내가 만든 것만큼 정성이 들어가겠어요?”최수빈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런데 그 순간 주민혁이 그녀의 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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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9화

주민혁은 붉어진 최수빈의 눈가를 바라봤다. 눈빛에는 다정함이 흘러넘칠 듯했다.최수빈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기다릴 시간은 충분하기에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그녀가 과거를 완전히 내려놓을 때까지, 그리고 진심으로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이내 주민혁은 고개를 숙여 최수빈의 머리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연인에게 속삭이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알았어. 다 네 말대로 할게.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수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벨소리가 사무실 안의 고요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탓에,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학교 선생님이었다.최수빈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선생님.”“율이 어머님, 안녕하세요.”선생님의 목소리에는 미안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율이가 오늘 오후에 미열이 좀 있고 컨디션도 별로 안 좋아 보여서요. 괜찮으시면 데리러 와주실 수 있을까요?”“네,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최수빈은 전화를 끊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정리했다.“율이 데리러 가야겠어요. 애가 좀 아프대요.”“같이 가.”주민혁도 곧바로 일어나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재킷을 집어 들었다.“아니에요.”최수빈은 얼른 그를 막아서더니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서류를 가리켰다.“민혁 씨는 할 일 아직 많잖아요. 오후에 해외 화상회의도 있다면서요. 나 혼자 가면 돼요.”“회의는 미루면 돼.”주민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그녀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에 놓이지 않는 듯했다.“떼쓰지 마요.”최수빈은 손을 들어 그의 찌푸린 미간을 살며시 펴주었다.“회사에서 얌전히 일하고 약 제때 먹어요. 저녁에 전화해서 확인할 거니까. 또 몰래 밤새워 일한 거 들키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둬요.”주민혁은 걱정 어린 그녀의 눈빛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조심해서 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언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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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0화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있잖아.”최수빈은 율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목소리에도 날 선 냉기가 배어 있었다.“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내가 못 찾을 줄 알았어?”최진식은 비웃듯 피식 코웃음을 치고는 몇 걸음 만에 최수빈의 앞으로 다가왔다.그의 시선이 최수빈과 율이에게서 오갔다.그러다 마지막으로 최수빈이 들고 있는 빈 도시락통에 꽂히자 마치 꼬투리라도 잡은 듯 눈빛이 번뜩였다.“좋아, 최수빈. 너 아주 대단하구나! 내 돈 들고 밖에서 남자나 챙기고 국까지 갖다 바쳐? 부끄럽지도 않아?”그 말이 떨어지자 아직 떠나지 않은 몇몇 학부모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수군거리는 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최수빈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율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말조심하세요.”그녀는 최진식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를 피하려 두 걸음 물러났다.“제가 쓰는 돈은 전부 제가 번 돈이에요. 아빠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리고 여긴 학교예요. 난동 부리고 싶으면 본인 집에나 가서 하세요.”“내가 난동을 부려?”최진식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목소리가 더 커지자 경비실에 있던 경비원까지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최수빈, 똑똑히 들어. 네 엄마랑 이혼해 줄 수는 있어. 대신 재산은 반으로 나눠야 해! 안 그러면 나 매일 여기 와서 너 기다릴 거야. 네가 어떤 딸인지, 어떤 여자인지 모두에게 알려주지!”말을 마친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최수빈의 팔을 잡으려 했다.그러나 최수빈은 재빨리 율이를 안은 채 몸을 틀어 피하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감히 저 건드려보기만 해요.”“내가 못 할 것 같아?”최진식은 그녀의 태도에 더 화가 난 듯 다시 달려들었다.“오늘 나한테 제대로 답 안 해주면, 아무도 못 가!”바로 그 순간,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길가에 조용히 멈춰 섰다.차가 멈춤과 동시에 주민혁은 차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다가와 최진식의 손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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