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공기는 조금 전 팽팽했던 대치의 순간에 그대로 멈춰 있었고 강석우가 던진 호통은 고요한 수면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지듯 파문을 일으키며 모두의 숨통을 가로막았다.장성훈은 제자리에 선 채 주먹을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짓눌리도록 힘을 주었다.그는 입을 열어 과거의 그 무수한 거짓말과 어쩔 수 없었던 사정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녀를 지켜왔던 세월을 한 자 한 자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하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보인 강지안의 눈동자 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극심한 피로, 그리고 거부감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그녀는 기억 상실증 환자였다.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더 많은 진실을 주입하는 건 잔인한 짓이었다.강지안은 말문을 열려다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과 부모의 침울한 표정을 바라보며, 머릿속 복잡한 실타래가 사정없이 꼬여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관자놀이가 쿵쾅거리며 아팠다.부탁이니, 경호원이니, 약혼녀니, 위장 결혼이니, 보살핌이니, 죄책감이니... 그따위 소리들은 전부 듣고 싶지 않았다.단 하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스스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인생을 타인의 손에 등 떠밀려 억지로 수용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별안간 솟구친 짜증과 서러움이 머리끝까지 차올랐고 그녀는 홱 고개를 들어 장성훈을 매섭게 노려보며 거의 찢어지는 듯한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당장 나가요! 당신들이 하는 말, 단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나 혼자 있게 해 줘요! 어서 나가란 말이에요!”느닷없이 터져 나온 날 선 고함에 강석우와 문성희마저 가슴을 쓸어내리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강지안은 가슴을 가쁘게 들썩이며 붉어진 눈시울로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그 누구도 믿고 싶지 않았다. 진실이 무엇이든, 과거가 어땠든, 사랑이든 원망이든 그 무엇도 그녀에겐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었다.장성훈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그는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애틋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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