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681 - Chapter 1690

1766 Chapters

제1681화

정면으로 들이닥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계속 기다리기만 한다면 결정적인 정보를 놓칠 수도 있었다.그러던 바로 그때, 반대편 복도에서 다소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검은 조끼를 입고 술이 담긴 쟁반을 든 종업원 하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르게 걸어오는 것이었다.쟁반 위에는 위스키와 얼음통, 생수 몇 병, 간단한 안주가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엘리아스가 있는 룸으로 가져가는 술이었다.순간 눈빛이 가라앉으며 주민혁은 곧바로 결정을 내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복도 한가운데 섰다.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침 종업원이 지나가려는 길을 정확히 막고 있었다.화들짝 놀란 종업원은 급히 걸음을 멈췄다.“저... 죄송하지만 조금만 비켜주시겠어요? 술을 가져가야 해서요.”주민혁은 비켜주는 대신 눈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마치 이 바닥 사람인 것처럼 그는 무심한 말투로 덧붙였다.“안에 있는 손님이 술을 다른 거로 바꾸라고 하던데.”그러자 종업원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술, 술을 바꾼다고요? 전 그런 연락을 받은 적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민혁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팔꿈치를 살짝 움직였다.하지만 그 움직임은 정확하게 종업원의 겨드랑이 쪽을 강하게 찔렀고, 종업원은 순간적인 통증에 손에 힘이 풀렸다. 그 덕분에 쟁반은 그대로 주민혁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주민혁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내는 동시에 엄지로 종업원의 목 옆,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가볍게 눌렀다.강한 충격은 아니었으나 상대를 순간적으로 어지럽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이내 종업원이 눈빛이 흔들리더니 몸을 휘청거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주민혁은 재빨리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반쯤 부축하고 반쯤 끌어당기듯 옆쪽의 사용하지 않는 창고 안으로 데려갔다.그 과정은 매우 빨라 누군가 봤다면 그저 순간적으로 사람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정도였다.걸린 시간은 고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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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2화

룸 안의 조명은 테이블 위 좁은 공간만 비추고 있었다. 주변은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엘리아스는 상석에 앉아 손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낮에 보였던 온화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의 얼굴에는 사업가 특유의 냉정함과 경계심만이 남아 있었다.맞은편에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 두세 명이 앉아 있었다.그들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 은밀하게 대화를 이어갔으며 장소를 언급할 때조차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고 모두 돌려 표현했다.주민혁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을 그저 술이나 나르는 종업원으로 철저히 위장했다.감히 주변을 훔쳐보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며 천천히, 그리고 안정적으로 잔을 하나씩 정리했다.하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후드티 안쪽, 가슴 부분에 부착된 초소형 핀홀 카메라가 조용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그것은 룸 안의 사람들, 목소리, 분위기까지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었다.주민혁은 불필요한 움직임을 전혀 하지 않았다.끼어들지도, 고개를 들지도, 괜히 머물지도 않았고 그저 기록할 뿐이었다.역시나 그들의 대화는 철저하게 감춰져 있었다.거래 내용은 단 한마디도 직접 언급하지 않았고 물건의 이름조차 모두 암호명으로 대신했으니 말이다.그중 주민혁의 귀에 들어온 유일한 핵심 내용은 단 한 문장이었다.“내일 아침, 늘 만나던 부두에서 봐. 그때 자세히 이야기하지.”‘늘 만나던 부두...’그곳은 바로 오늘 최수빈과 엘리아스가 물건을 확인했던 국경 인근 부두였다.순간 주민혁의 표정이 굳었다.‘역시 그랬던 거야. 낮에 확인했던 물자는 그저 눈속임에 불과했어. 진짜 중요한 거래는 내일 진행되는 거군.’그는 마지막 생수병을 제자리에 내려놓더니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이제 나가겠다는 듯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그런데 바로 그때...“잠깐.”엘리아스의 부름에 주민혁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발걸음을 멈췄다.심장이 순간 팽팽하게 조여 왔지만 겉으로는 조금도 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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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3화

최수빈은 곧장 걱정 가득한 눈빛을 한 채 주민혁에게 다가갔다.“어떻게 됐어요? 들킨 건 아니죠?”“아니.”주민혁은 고개를 젓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상황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그는 몸에 숨겨뒀던 초소형 카메라를 꺼내 휴대폰에 연결했다. 그리고 조금 전 녹화된 영상을 빠르게 확인했다.화면은 어둡고 음성도 선명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모습과 대화 속 핵심 내용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엘리아스 씨가 안에서 밀거래를 하고 있었어.”주민혁은 빠르게 설명했다.“정확히 뭘 거래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물자는 절대 아니야. 내일 아침 일찍 부두에서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했어.”이에 최수빈의 표정이 굳어졌다.“부두요? 그럼 내일 우리는...”“내일은 가면 안 돼.”주민혁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가면 그대로 국경을 넘나드는 대형 사건에 휘말리게 되니까.”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덧붙였다.“이제 단순한 개인적인 원한이나 사업 경쟁의 문제가 아니야. 국경을 사이에 둔 불법 거래가 걸려 있어. 반드시 신고해야 해.”최수빈이 놀란 듯 물었다.“누구한테요?”“국정원.”이미 휴대폰을 꺼낸 주민혁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암호화된 연락처를 찾아냈다.과거 몇몇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정원 측과 협력한 적이 있었는지라 긴급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연락망도 있었다.국경 안보와 관련된 지하 거래라면,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곳은 그들뿐이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주민혁은 불필요한 말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저 주민혁입니다. 현재 국경 항구 쪽에 있는데 방금 국경을 넘나드는 불법 거래 현장의 영상과 음성 자료를 확보했습니다. 상대는 외국인 사업가 엘리아스예요. 내일 새벽 5시, 동삼 부두에서 물품 인수인계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즉시 현장 배치 요청합니다.”휴대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으나 곧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돌아왔다.“그 정보, 확실합니까?”“제가 직접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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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4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강지안의 비서로, 울음을 참지 못한 듯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장 대표님! 빨리 병원으로 와주세요! 강 선생님이... 강 선생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그 순간, 장성훈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어느 병원입니까?”감정이 격해지면서 허리의 상처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순간 눈앞이 흐려졌지만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상태는 어때요? 많이 다친 겁니까?”“현재 태산제일병원에 있습니다! 사, 사고 직후에도 의식은 있으셨어요. 다리를 부딪쳐서 다쳤는데... 의사 선생님이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대형 트럭에 치였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조금만 늦었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말에 장성훈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공포가 단숨에 머리끝까지 치솟았다.강지안, 그녀는 장성훈이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은 사람이자 빛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었다.그녀를 위해 그는 민채영을 감옥에 보냈고, 민씨 가문을 완전히 무너뜨렸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가로막던 모든 장애물을 치워왔다.그런데도 결국 강지안은 다친 것이다.“지금 바로 갈게요.”장성훈은 이를 악물고 짧게 내뱉은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차 키를 움켜쥐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허리 옆 상처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퍼뜨렸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았지만 그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바로 강지안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부두도, 엘리아스도, 심종연도, 그 거래도,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장성훈은 차를 몰고 미친 듯이 질주했다.평소의 냉정하던 모습, 잔혹할 만큼 치밀했던 계획도 모든 계산도 강지안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 앞에서는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지금 그에게 남은 건 가장 본능적인 두려움뿐이었다.‘만약 그 차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만약 아가씨가 피하지 못했다면... 그렇다면 난...’생각하는 것조차 두려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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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5화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 한 통이 화면 위에 떠올랐다.그리고 화면 위로 시선이 스친 순간, 장성훈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누가 보냈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로 민채영의 부모였다.[장성훈, 네가 이 문자를 보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오늘 사고는 그저 경고일 뿐이야. 우리 딸을 감옥에서 꺼내주지 않으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을 거다. 죽는 한이 있어도 강지안까지 끌고 가서 우리 가족과 함께 끝장을 볼 거야.]순간, 장성훈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더니 차갑고 서늘한 살기가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았다.검은 눈동자 안에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분노와 살의가 번뜩였다.알고 보니 민씨 가문의 민채영의 부모가 감옥 밖에서 미친 듯이 복수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감히 아가씨에게 손을 대?’장성훈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며 천천히 휴대폰을 움켜쥐었다.당장이라도 휴대폰을 부숴버릴 기세였다.그는 그동안 민씨 가문의 사업을 막고 돈줄을 끊어버리는 정도로 끝내 더 이상 날뛰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하지만 설마 그 가족이 이 정도까지 미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감히 은산시 시내 한복판에서 일부러 사고를 일으키고 강지안의 목숨을 노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똑같이 문자 내용을 확인한 강지안도 안색이 살짝 창백해지더니 무의식적으로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장성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 눈빛에 서려 있던 날카로운 분노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억지로 가라앉았다.그 대신 남은 건 강지안을 향한 깊은 안타까움과 죄책감뿐이었다.모두 자신의 탓이었다.자신이 민채영을 감옥에 보냈고 자신이 민씨 가문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 결국 강지안까지 다시 위험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아가씨.”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잠겨 있어 한마디 한마디가 무겁게 내려앉았다.“죄송해요.”“제가 아가씨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강지안은 그를 바라봤다.“그게 성훈 씨랑 무슨 상관인데요?”이윽고 장성훈은 굳은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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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6화

강지안이 나직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요?”장성훈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친 것을 보니, 그녀가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던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전 괜찮습니다.”장성훈은 그녀가 걱정하지 않도록 최대한 담담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본능적으로 대답했다.“안색이 무척 창백해요.”강지안은 거짓 없는 올곧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지난번 골목길에서 피를 아주 많이 흘렸잖아요.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을 텐데, 계속 여기 서서 날 지켜줄 필요는 없어요. 난 정말 괜찮으니 이제 돌아가서 쉬어요.”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하지만 장성훈에게는 이 차분한 축객령이 그 어떤 모진 비난보다도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그녀는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모든 기억을 잃었어도, 자신에게 상처를 입었어도,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상처를 살피고 몸 상태를 걱정하며 그가 지치지 않았는지를 염려하고 있었다.본능 깊은 곳에 새겨진 그녀의 다정함이 그의 가슴을 시리도록 저미게 만들었다.장성훈은 몇 초간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쇳소리가 섞인 나직한 목소리였다.강지안은 일어서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순간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곁에 있던 소중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분명 제 손으로 가라고 밀어냈고 두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이 정답이라 믿었음에도, 장성훈이 정말 돌아서는 순간 정체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그 허망한 상실감은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었지만 지독하리만치 선명했다.장성훈은 더 이상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 번 더 눈길을 주면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기에 그는 돌아선 채 조용히 병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문이 아주 살며시 열렸다가 이내 부드럽게 닫혔다.찰칵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병실에는 오롯이 강지안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그녀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굳게 닫힌 문을 멍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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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7화

강지안은 장성훈을 바라보며 찰나의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장성훈은 침대 곁으로 다가와 종이 쇼핑백을 하나씩 열고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다.소화가 잘되도록 정성껏 조리한 부드러운 죽과 밑반찬, 그리고 촉촉하게 찐 딤섬까지 온통 환자에게 안성맞춤인 음식들뿐이라 그의 세심한 배려가 고스란히 묻어났다.“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장성훈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며 온기가 남아 있는 따스한 죽 한 그릇을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조금이라도 먹어요.”강지안은 그가 건넨 죽과 그의 깊은 눈 속에 담긴 감출 수 없는 피로와 다정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고 이전처럼 차갑게 밀어내지도 않았다.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죽을 받아들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읊조렸다.“고마워요.”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덧붙였다.“같이 먹어요.”장성훈은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녀가 기억을 잃은 뒤, 먼저 함께 식사를 하자고 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경계심도, 밀어내려는 거부감도, 미움도 전혀 묻어나지 않는 말투였다.마치... 세상에서 지극히 평범한 연인들처럼 다정한 모습이었다.그는 목이 메어 거의 신음 같은 대답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 없이 그저 묵묵히 음식을 들었다.병실 안은 더없이 따스했고 불빛은 온화했으며 음식은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이 순간만큼은 피비린내 나는 복수도, 음모도, 어둠도, 얽히고설킨 해묵은 은원도 모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그저 그와 그녀, 단둘만이 고요히 앉아 한 끼 식사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강지안은 아주 천천히 수저를 움직였다. 따뜻한 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얼어붙어 있던 마음마저 포근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강지안은 슬쩍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장성훈을 훔쳐보았다.그는 우아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음식을 비워내고 있었는데, 정말 피곤하고 허기가 졌던 모양이었다.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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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8화

그 한마디가 허공으로 흩어지자마자, 넓은 병실 안은 일순간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법한 정적이었다.장성훈은 돌처럼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마른침을 깊게 삼키며 한참 동안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어색하게 얼어붙었다.강지안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장성훈 역시 그 딱딱하게 굳어버린 자세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머릿속은 하얗게 포맷되어 버린 상태였고 병실 안의 공기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무겁게 가라앉아 버렸다.강지안의 뺨은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 뜨겁게 달아올랐고 속눈썹을 가늘게 파르르 떨며 그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한 채 온몸을 이불 속으로 파묻고 싶어 했다.그녀 역시 무수한 인체와 질병을 보아온 의사였기에 머리로는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생리 현상임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은 이성과 따로 놀았다. 과거가 안개처럼 흐릿하고 관계마저 미묘한 데다 제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는 이 남자 앞에서 이런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마치 살갗이 벗겨져 나가는 듯 쓰라린 수치였다.장성훈이 한참 동안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지안의 마음속에는 부끄러움과 조급함이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쳤다.그녀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겨우 쏘아붙였다.“화장실 갈 건데... 설마 이것까지 같이 가줄 건 아니죠?”그 말에 장성훈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목젖을 크게 일렁이며 눈동자 깊은 곳에 가라앉은 어지러운 감정들을 억누른 그는 그녀가 더 무안해하지 않도록 시선을 피하며 나직이 말했다.“간병인을 불러올게요.”그는 거의 도망치듯 방을 나섰는데,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황급하고 어설퍼 보였다.몇 분 뒤, 경험 많고 차분한 인상의 여자간병인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며 병실로 들어왔다.장성훈은 뒤따라 들어오지 않고 복도 끝에 홀로 서서 꼿꼿한 자세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불편해할 만한 모든 거리를 철저히 계산해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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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9화

다들 모두 자신처럼 온통 어둠으로 얼룩진 존재와는 아주 미세한 접점조차 두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장성훈은 아주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 정적이 얼마나 길었는지 강지안은 그가 이대로 입을 닫아버릴 것이라 믿었을 정도였다.결국 그는 아무런 반박도, 해명도, 곁에 남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알겠습니다.”짓눌린 마음을 대변하듯 가벼운 한 마디였지만 그 속에 담긴 무게는 감당하기 어려웠다.그는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고요한 걸음으로 소파로 다가가 조용히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침묵에 잠겼다.그는 떠나지 않았다.강지안은 순간 멍해졌다.분명 돌아가라고 밀어냈고 신세 지기 싫다고 선을 그었으며 경계를 명확히 그어 놓았음에도 그는 그저 자리만 옮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 병실 안에 머물며 그녀의 눈길이 닿되 그녀가 꺼려하는 거리 밖에서 묵묵히 곁을 지키고 있었다.참으로 이상한 남자였다.강지안은 가슴속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으나 더 이상 그를 모질게 몰아세우지는 않았다.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버렸던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려 지그시 눈을 감았으나 어지러운 머릿속은 온통 장성훈의 잔상으로 가득 차오를 뿐이었다.그의 말 없는 보살핌, 창백한 안색, 그리고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그녀의 식성...그가 사 온 죽은 온도도 맛도 더없이 적당했으며 대파를 싫어하고 너무 단것을 피하며 심심한 맛을 즐기는 그녀의 까다로운 취향까지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흡사 실제로 십 년, 아니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 같았고 그녀의 미세한 습관 하나까지 그의 골육에 새겨진 느낌이었다.하지만 상황이 이럴수록 그녀는 더 갈팡질팡했고 가슴이 떨렸으며, 잃어버린 그 기억들을 하루빨리 움켜쥐고 싶어 안달이 났다.도대체 자신과 그는 어떤 사이였을까.둘 사이에 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걸까. 왜 그는 자신에게 이토록 헌신적이면서도 그토록 철저히 자신을 절제하는 것일까.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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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0화

강지안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장성훈이 홀연히 미세하게 몸을 움직였다.이내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시야가 겨우 선명해지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눈을 비비거나 찌뿌둥한 몸을 펴는 것이 아니라 곧장 침대에 누운 그녀를 바라보며, 잠이 덜 깬 쉰 목소리로 초조함과 걱정을 한껏 담아 다급하게 물었다.“깼어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물부터 마실래요? 아니면 식사부터 할까요? 아가씨가 좋아하는 걸로 사 올게요...”그가 쏟아낸 질문들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온통 그녀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흡사 밤새 불편하게 웅크려 겪은 피로와 고단함이 눈을 떠 그녀를 마주한 순간 눈 녹듯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강지안은 그의 눈동자에 가득 찬 숨김없는 염려를 바라보자 가슴 한구석이 다시금 말랑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불편한 데 없어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차분하고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저 오늘 퇴원해요.”장성훈은 흠칫 놀랐다.“다리가 아직...”강지안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타박상일 뿐이에요.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내장이 다친 것도 아니니 집에 가서 쉬어도 된다고 의사 선생님도 말씀하셨어요. 병원은 사람도 많고 시끄러우니 집에 돌아가서 조용히 요양하는 게 회복이 더 빠를 거예요.”그녀는 더 이상 이 병실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아무런 명분도 없이 이렇게 그의 보살핌을 받고 싶지 않았고 모호한 이끌림과 선 긋기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팡질팡하고 싶지도 않았다.장성훈은 흔들림 없는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바라보며 아무런 반박도, 설득도 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덧붙였다.“퇴원 수속 밟고 올게요.”그의 움직임은 무척 신속했고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서류 절차가 깔끔하게 완료되었다.의사는 퇴원 후 자택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몇 번이고 거듭 당부했고 그는 단 한 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머릿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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