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의 모든 챕터: 챕터 591 - 챕터 600

603 챕터

제591화

곧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경림연으로 쏠렸다.애초에 경림연은 과거에 급제한 인재들을 위해 황제가 베푸는 어연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력 가문의 부인들이 혼기를 맞은 딸들을 데리고 참석하기 시작했고, 명문가 자제들까지 길한 기운을 나눈다는 명목으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그렇게 세월이 지나자, 경림연은 어느새 혼담이 오가는 자리로 더 유명해졌다.연회는 예를 갖춰 차례대로 진행됐다. 스승을 맞이한 뒤 축시를 받고, 급제한 학자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의관을 바로잡은 채 예를 올렸다.이어 무희들의 화려한 춤과 비파 연주가 펼쳐지며 연회장은 한층 더 흥겨운 분위기로 물들었다.윤수혁은 예왕과 함께 연회장에 들어섰다. 이번 춘시의 주시험관을 맡았던 예왕은 당연히 경림연에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다만 자신은 아직 젊은 데다 이번 춘시의 주시험관을 맡게 된 것도 왕숙인 왕야의 뜻이었던 만큼, 그는 상석을 왕야에게 권했다.하지만 이도현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오늘은 나 역시 손님일 뿐이다. 신경 쓰지 말고들 즐기거라.”그는 오늘 이 자리에 온 목적이 따로 있었다. 눈앞의 연회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신수빈에게 향했다.신수빈은 서하랑, 그리고 다른 규수 한 명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청하가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고, 신수빈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문득 윤수혁 쪽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을 지켜본 이도현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잠시 뒤 신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가장자리로 향했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청하를 나무랐다.“평소 내가 무엇이라 가르쳤느냐.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말을 전하면 어쩌자는 것이냐. 누가 보고 괜한 오해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청하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사죄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큰 도련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님께서 윤씨 가문을 떠나신 뒤로는 좀처럼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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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2화

신수빈은 마음이 무거워졌다.궁녀를 더 다그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가게 한 뒤, 시녀들과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왔다.이처럼 격식을 갖춘 궁중 연회에서 옷이 술에 젖은 채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예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결국 갈아입을 옷을 챙겨 탈의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한편, 이도현은 그녀가 자리를 뜨는 모습을 힐끗 바라본 뒤 아무렇지도 않게 청매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잠시 후 윤수혁이 예왕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그 모습을 본 이도현은 속으로 차갑게 비웃음을 흘렸다.그러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경림원은 그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몇 번이나 드나든 곳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익숙한 곳이라, 눈을 감고도 어느 길이 가장 빠른지 알 정도였다.신수빈은 원래도 이런 연회에서는 특히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은보는 먼저 탈의실 안팎을 꼼꼼히 살펴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신수빈을 안으로 들였다.신수빈은 젖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던 참이었다.그때였다.끼익.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곧장 경계하며 외쳤다.“누구세요?”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이도현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왕야께서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연회가 지루해서. 네가 나가는 걸 보고 따라 나왔다.”신수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왕야께서는 경림연이 늘 이런 자리라는 걸 잘 아시잖아요. 헌데 오늘은 어째서 오신 겁니까?”이도현은 대답 대신 그녀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그리고 곁에 놓여 있던 다른 옷 한 벌을 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거위빛 노란색이 너한테는 더 잘 어울린다.”이런 궁중 연회에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보통 두세 벌의 옷을 준비해 오는 것이 관례였다.신수빈은 방금 연한 푸른빛 치마저고리로 갈아입은 상태였다.그녀는 이도현이 내민 옷을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예전에는 제가 무슨 옷을 입든 왕야께서는 별로 관심도 없으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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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3화

“몇 사람 눈여겨본 이들은 있었다. 헌데 정작 본인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모양이더군. 끝내 승낙하지 않았다.”거기까지 말하던 이도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신수빈의 미묘한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헛기침을 했다.“내 매력이 세상 모든 여인을 사로잡을 만큼 대단한 건 아니니까.”그 말에 신수빈은 입가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무슨 말씀이세요? 왕야께서는 원래도 훤칠하고 기품 있는 용모를 지니셨는데, 오늘 차림은 그 멋을 더욱 살려 주고 있잖아요. 오늘 왕야를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누군가 왕야를 마음에 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이도현은 피식 웃었다. 웃음 끝에는 어딘지 모르게 자조가 배어 있었다.“사람들이 탐내는 건 결국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쥔 권세와 부귀겠지. 오늘도 수많은 규수들이 앞다퉈 호의를 보였지만, 언젠가 내가 권세를 잃고 산골에서 나무나 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장정이 된다면, 그들은 아마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그는 걸음을 멈추고 신수빈을 바라보았다.“빈아.”“네.”“너는 내 무엇이 좋아서 나를 사랑하느냐?”갑작스러운 질문에 신수빈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모르겠다고?”이도현이 부드럽게 되물었다.“어째서?”신수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처음 왕야 곁에 오게 된 건 제 뜻이 아니었잖아요. 그때는 마음속에 원망도 많았고, 왕야를 모실 때마다 서럽고 억울했어요. 헌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마음도 자연스레 옅어졌고, 왕야를 오래 곁에서 지켜볼수록 백성을 위해 애쓰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워졌어요. 그리고 저를 늘 세심하게 보살펴 주시는 마음에도 조금씩 감동하게 됐고요.”이도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잠시 후, 다시 조용히 물었다.“그렇다면 정말 내가 권세를 잃고, 나무를 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내가 된다 해도… 그래도 나를 사랑하겠느냐?”신수빈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어차피 그런 날은 오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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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4화

신수빈은 자신의 몸에 걸친 거위빛 노란 옷을 내려다보는 순간,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 내려갔다.불길한 예감은 오래가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남자 손님들 쪽에서 떠들썩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이쪽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윤 공자, 이제 그만 털어놓으시죠. 아직 혼인도 안 하셨는데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면 당당히 맞아들이면 될 일 아닙니까? 뭘 그렇게 숨기십니까?”윤수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턱선이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니 애써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어이쿠, 아직도 비밀입니까? 설마 그 여인의 신분이 그렇게 특별한 겁니까?”“뭐가 그렇게 특별합니까? 오늘 여기 온 규수들은 다 혼기를 앞둔 처녀들인데… 설마 윤 공자께서 마음에 둔 사람이 남의 부인이라도 된다는 겁니까?”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윤수혁이 지금은 금군에서 벼슬을 맡고 있다고는 해도, 이 자리에 모인 명문가 자제들 앞에서는 별다른 위세를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윤씨 가문은 이미 조정에서 세력을 잃었고, 일족마저 숙청당한 뒤였다. 그러니 윤수혁에게는 의지할 만한 배경이 없었다.그래서인지 그들은 조금도 그를 존중하지 않았다.신수빈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문득 며칠 전 주루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그때도 명문가 자제들이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윤수혁을 몰아세우고 있었다.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자신인 걸까?그날 이도현은 분명 그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 없이 넘겼다.그는 이 일의 전말을 알고 있는 걸까?“다들 오해하셨습니다.”윤수혁이 깊게 숨을 삼킨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저에게는 마음에 둔 사람이 없습니다.”“윤 공자, 이번에는 발뺌 못 합니다.”한 사람이 씩 웃으며 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게 뭔지 한번 보시죠.”윤수혁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담담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물건을 본 적이 없습니다.”“아직도 잡아떼시네요.”그가 비웃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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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5화

쏟아지는 시선과 추궁 속에서 신수빈은 무심코 이도현을 바라보았다.그는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 아래에는 무언가 거센 감정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는 그저 조용히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신수빈이 입을 열려던 바로 그때, 윤수혁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그는 신수빈이 입고 있는 거위빛 노란 옷을 한 번 바라본 뒤, 마음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그 손수건은 제 것이 맞습니다.”순간 연회장이 조용해졌다.“어젯밤 금군 막사에서 목욕을 하다가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더군요. 헌데 두 분께서 경림원 뒤편 별채에서 주우셨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그 한마디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집혔다.“그 말씀은…”누군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호국부인과 밀회를 가진 사실을 인정하신다는 뜻입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신수빈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그보다 신태안이 먼저 움직였다.쾅!그가 탁자를 내리치는 순간 황화리 탁자가 산산조각 났고, 놀란 규수들과 부인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소경지! 함부로 지껄이지 말거라!”그러자 소경지가 비웃음을 흘렸다.“왜 그렇게 흥분하십니까, 신 장군?”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서로 마음이 있다면 있는 거지요. 예전에는 윤서원이 살아 있어서 두 사람이 뜻을 이루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윤씨 가문도 멸문했고 윤서원도 죽었습니다. 이제 두 분 사이를 막을 사람도 없으니,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닙니까?”신태안이 당장이라도 욕설을 퍼부으려는 순간, 윤수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손수건이 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헌데 그것이 호국부인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근거도 없이 호국부인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군요.”“근거가 없다고요?”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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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6화

진하빈의 말은 빈틈이 없었다.윤수혁은 지금 금군영의 장수였다. 역병이 돌던 시기에는 황궁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황제의 침전을 지켰고, 황제를 가까이에서 간호하던 진하빈과 정이 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더구나 진하빈은 황제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공으로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아무런 상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왕부를 떠나게 해 달라고 청했다.대주 왕조에서 왕야의 측비 자리를 마다할 여인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그런데도 진하빈은 기꺼이 그 자리를 포기했다. 그만큼 마음을 더 빼앗긴 사람이 있었기에, 하사받은 은혜를 빌려 그 한 가지 소원만을 청한 것이리라.조금 전까지 신수빈을 물고 늘어지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노란 옷을 입은 여인이 윤수혁과 밀회를 했다고 주장한 것도, 신수빈이 노란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진하빈이 직접 나서 그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인정해 버리자,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아도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그때 최지첨이 입을 열었다.“우리 쪽에서 잘못 본 모양이군요. 헌데 윤 공자, 경림연은 호위와 궁녀가 사사로운 정을 나누는 곳이 아닙니다. 다음부터는 그대도 좀 조심하십시오.”그 말을 듣자 신수빈과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쾌함이 스쳤다.서하랑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여러분 모두 명문가에서 예법을 배우며 자라신 분들 아닙니까. 입에서 나온 말이 쇠도 녹인다고 하고, 유언비어는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된다고도 하지요.”그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고작 손수건 하나를 주웠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근거도 없이 한 여인의 정절을 짓밟으려 하셨습니다. 헌데 이제 와서는 그저 오해였다는 말 한마디로 넘어가시겠다는 겁니까? 사과 한마디 없이요?”순간 그들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마치 사람들 앞에서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결국 그들은 신수빈 앞으로 걸어와 사과하려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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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7화

진하빈이 앞으로 나선 순간, 신수빈은 이 소동의 배후가 누구인지 깨달았다.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비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이도현에게 돌렸다.애초에 그가 바라던 그림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던가.그가 마련한 무대 위에서, 자신은 그의 뜻대로 한바탕 연극을 끝까지 마쳐 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가 직접 나서 마무리하는 일뿐이었다.예상대로 이도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몇 사람 앞으로 걸어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경림연에서 이토록 큰 소란을 벌이다니. 참으로 대단하군.”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순간, 그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이도현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이번에는 손수건 하나를 주웠다는 이유만으로 호국부인을 걸고넘어졌지. 그렇다면 다음에는 아무 물건이나 하나 들고 와 폐하를 의심하고, 본왕을 의심하며, 민심을 선동해 조정을 흔들려 들 셈이냐?”갓 성인이 된 젊은이들이 전장을 누비고 관직에서 십수 년을 버틴 사내의 위압감을 견뎌 낼 수 있을 리 없었다.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다급히 변명하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그러자 이도현이 다시 물었다.“아니면 방금 호국부인이 말한 대로, 이런 일을 벌인 것도 모두 가문의 지시였다는 뜻이냐?”그 말에 몇 사람은 더욱 질려 버렸다.“왕야, 소신은 감히 그런 뜻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저희의 경솔함 때문입니다. 호국부인을 모욕한 죄를 인정하오니, 왕야께서 벌을 내려 주십시오.”차라리 자신들이 벌을 받는 편이 나았다. 괜히 가문까지 끌어들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이도현은 더는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들을 한 번 훑어본 뒤 담담히 말했다.“잘못을 인정했으니 이번 일은 여기까지 하겠다. 잠시 후 모두 장 삼십 대를 맞도록 하거라. 그리고 너희 아비들은 반년 동안 녹봉을 삭감하고, 석 달 동안 자택에서 근신하도록 한다. 집에서 자식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신수빈은 이도현의 뒤편에 앉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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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8화

설마, 왕야는 뜻이 있는데 정작 그녀는 마음이 없는 것인가?신수빈은 담담히 예를 갖춰 답했다.“과분한 말씀입니다. 신첩이 한 일은 그저 대주 왕조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이도현은 옅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부인은 대의를 안다. 덕과 재능을 두루 갖추었기에 이번 역병 때도 성 밖 백성들을 위해 그토록 애쓸 수 있었던 것이겠지. 듣자 하니 성 밖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부인을 위한 장생비까지 세웠다 하더군. 조만간 본왕도 직접 찾아가 둘러볼 생각인데, 그때 부인도 함께해 주시겠느냐?”그 말에 연회장 사람들은 모두 속으로 눈치를 챘다. 섭정왕이 호국부인에게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처음에는 호국부인이 재가한 몸이라는 점이 흠이 될 것이라 여겼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민간에서 저토록 높은 명망을 지닌 그녀가 황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시집가는 것이야말로 더 어려운 일이었다.예로부터 백성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으면서도 황실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은 드물었다.그런 명성과 신분을 가진 사람이 첩이 되는 것은 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황실의 정식 비빈이라면 몰라도.더구나 황제는 아직 어렸다.지금 황실을 둘러보면 아직 정실을 맞지 않은 사람은 섭정왕뿐이었다.사람들은 신수빈이 어떻게 답할지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신수빈은 가볍게 웃으며 차분히 말했다.“송구하지만 왕야와 함께 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을 내기 어렵습니다.”이도현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그렇다면 부인이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군.”그는 더 이상 그녀가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지금의 신수빈이 자신에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든 돌아오는 것은 거절뿐일 테니.이도현은 몸을 돌려 이번에는 윤수혁을 바라보았다.순간 연회장의 공기가 다시 팽팽하게 긴장됐다.왕야의 측비였던 여인이 다른 사내와 정을 통했다는 상황이었다.모두가 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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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9화

신수빈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한쪽에 앉았다. 이도현은 그녀를 한 번 흘낏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침묵 속에서 호국부까지 돌아왔다.마차에서 내리던 신수빈은 술기운 때문인지 머리가 어지러워 발걸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자 이도현이 곁에서 그녀의 팔을 가볍게 받쳐 주었다.“감사합니다, 왕야.”신수빈이 가볍게 몸을 굽혀 인사하자, 이도현은 술기운으로 붉어진 그녀의 뺨과 살짝 충혈된 눈가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주량이 약하면 다음부터는 술을 조금만 마시거라.”신수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침소로 돌아갔다.세수도 하지 않은 채 창가의 귀비탑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얼마 뒤 주방에서 해장탕이 올라오자 청하가 그녀를 깨웠다.신수빈은 청하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해장탕을 마시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그렇게 해가 저물 무렵까지 잠들어 있다가, 창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부인께서는 깨어나셨느냐?”“왕야께 아룁니다.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곧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방 안에는 아직 불도 켜지지 않았지만, 이도현의 큰 체구는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이 뚜렷했다.“깼느냐?”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숨결을 듣고는 이미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네.”막 잠에서 깬 탓에 신수빈의 목소리에는 나른함과 잠긴 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다.이도현은 그녀가 방금 잠에서 깼음을 짐작했다.“불을 밝히거라.”시녀들이 들어와 촛불을 밝히고, 청하는 어린 시녀들과 함께 저녁상을 차렸다.왕야가 함께하는 것을 보고는 평소 신수빈이 늘 준비해 두던 술도 한 병 올렸다.이도현은 그것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술은 치우도록.”시녀들이 술을 물리자 청하는 신수빈의 세면을 도왔다.정갈히 씻고 나온 신수빈은 식탁에 앉아 있는 이도현을 보았다.그녀는 시녀에게서 젖은 수건을 받아 직접 그의 손을 닦아 주고,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낸 뒤 자리에 앉았다.이도현은 곁에 놓인 수건을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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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0화

이불이 살며시 젖혀지자, 이도현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잠옷 안으로 스며들었다.신수빈은 눈을 뜨자마자 아래로 더듬어 내려가려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왕야, 월경이 시작됐습니다.”이도현의 손길이 멈췄다.오늘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미리 알리지도 않은 채 자신의 뜻대로 이용한 것이니, 그녀가 마음에 품은 응어리가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화가 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그 역시 며칠째 가슴속에 분노를 눌러 담고 있었다.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입을 다문 채였고, 그 또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지 못했다.언제나 맑게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는 오늘따라 먼지가 내려앉은 듯 흐려져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사람을 홀리던 평소의 기색도 온데간데없었다.이도현은 짧게 대답한 뒤 그녀의 잠옷깃을 다시 여며 주었다.“월경이 시작됐으면서 낮에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마셨느냐.”“막 시작됐어요. 날짜를 잊고 있었어요.”“시녀를 불러 탕파자를 가져오게 할까?”“괜찮습니다. 이번 달엔 약을 먹으며 몸을 조절하고 있어서 그렇게 힘들진 않아요.”“그렇다면 다행이군.”어색하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 보려는 듯, 이도현은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아랫배를 감싸더니 조심스럽게 문질러 주었다.신수빈은 그의 품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후 내내 잠을 잤으니 지금쯤은 잠이 오지 않을 거라 짐작한 이도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며칠 전에 두다 만 바둑판을 시녀에게 치워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낮잠도 오래 잤으니 잠은 안 올 테고... 나와 바둑 한 판 두겠느냐.”신수빈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왕야께서는 오늘 이미 아주 큰 바둑 한 판을 두셨는데도 아직 부족하신가요?”그 말에 이도현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서서히 차갑게 식어 갔다. 그는 그녀를 감싸고 있던 팔을 거두고 몸을 일으켜 침상 안쪽을 바라보았다.신수빈은 등을 돌린 채 옆으로 누워 있었고, 끝내 그를 돌아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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