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의 모든 챕터: 챕터 581 - 챕터 590

603 챕터

제581화

신수빈은 이도현의 뜻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우선은 아이가 끼고 있도록 두라는 말이었다.그 반지는 이도현에게 무척 소중한 물건인 듯했다. 신수빈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이준우를 품에 안아 손에 낀 반지가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감싸 주었다. 아이를 유모에게 넘길 때도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유모 역시 그 말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이준우를 데려간 뒤에는 붉은 실로 튼튼한 백복 매듭을 직접 엮어 반지를 아이의 목에 걸어 주었다. 혹여라도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한 것이다.아이를 보낸 뒤 신수빈은 다시 침상으로 돌아왔다.이도현은 두 팔을 베개 삼아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왕야, 물이라도 좀 드실 겁니까?”“그래.”신수빈은 곧 물 한 잔을 따라 가져왔다. 그가 천천히 물을 비우는 것을 지켜본 뒤 잔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이윽고 금갈고리를 풀어 휘장을 드리우고는 그의 발치 쪽으로 돌아 조용히 침상에 올랐다.그런데 막 몸을 눕히는 순간이었다.허리 뒤로 거센 힘이 밀려오더니 순식간에 안쪽으로 떠밀렸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신수빈은 그대로 비단 이불 위에 엎어졌다.산처럼 묵직한 그의 몸이 그대로 등을 덮쳐오니 신수빈은 몸을 돌릴 틈도 없었다.얇은 잠옷은 금세 흐트러졌고, 어깨를 스치는 까슬한 수염이 따끔거렸다. 불편한 감촉에 몸을 조금 비틀었지만 소용없었다.등 뒤에서는 짙은 술 냄새와 남자의 체취가 뒤섞여 밀려들었다.거침없이 이어지는 입맞춤은 등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더니 나비뼈에 이르러서는 가볍게 이를 세웠다.“아...!”신수빈은 놀라 짧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리려 했다.하지만 뒤에서 그녀를 단단히 붙든 그는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꼼짝할 수 없었다.“왕야... 취하셨어요.”그녀의 말에도 이도현은 대답이 없었다.얇은 잠옷 따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의 입맞춤은 마치 깨물 듯 거칠었지만, 상처를 남길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은근한 통증만 또렷하게 남겼다.신수빈은 결국 울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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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2화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짚더니 물결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졌다. 몸을 숙인 순간, 팔은 통째로 물속으로 잠겼다.“왕야,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신수빈은 다급히 다리를 모으며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이도현은 붉게 물든 눈으로 그녀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수건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찾는 중이다.”하지만 그의 손이 찾고 있는 것이 정말 수건일 리 없었다.신수빈은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러나 있는 힘껏 버텨도 그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그가 움직일 때마다 욕조의 물결이 잔잔하게 흔들렸다.신수빈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왕야, 저는 정말 더는 못 견디겠어요.”이도현은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물안개가 자욱한 사이로 비친 그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어, 차마 더 매정해질 수가 없었다.“걱정하지 말거라. 아까는 내가 너무 심했으니, 오늘은 제대로 달래 줘야 하지 않겠느냐. 편히 쉬게 해 주마.”말을 마친 그는 물속에 잠겨 있던 손을 거두더니, 긴 다리를 욕조 안으로 들였다.신수빈은 속으로 뒤늦은 후회를 삼켰다.차라리 목욕을 하지 말 걸 그랬다.*방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한 채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욕탕에서는 침상에서처럼 거칠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힘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마지막까지 버틸 수 없었다.침상으로 돌아온 이도현은 그녀를 다시 품에 안고 누웠다.그제야 신수빈이 희미하게 눈을 떴다.허리를 살며시 문지르던 그녀는 잔뜩 풀어진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왕야, 다음부터는 정말 이러지 마세요.”이도현은 말없이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어 천천히 주물러 주었다.“그래.”낮게 흘러나온 대답에는 미안함이 배어 있었다.사실 욕탕에서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조금 전 자신이 너무 거칠게 굴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걸 알았기에, 이번만큼은 다정하게 달래 주고 싶었다.그런데 욕실 바닥에서 그 팔찌를 보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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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3화

그 손톱 자국은 이도현의 어깨에서 등을 잇는 곳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하필 그런 자리에 남긴 흔적이라니.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윤수혁뿐 아니라 다른 장수들 역시 그 상처를 보았다.그들은 오랫동안 왕야를 곁에서 모셔 왔지만, 후원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지난해 갑자기 장자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적잖이 놀랐지만,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이제는 여인의 손톱 자국 정도로는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다.무엇보다 그들에게 왕야의 후원에 어떤 여인이 있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왕야쯤 되는 사람이라면 삼처사첩을 거느리는 것이야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이곳 장수들 가운데 상당수는 위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발탁된 이들이었다.평소에는 왕야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커녕, 얼굴을 마주하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그렇기에 오늘만큼은 누구 하나 힘을 아끼지 않았다.비무에서는 실력을 숨기는 것이야말로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이도현은 연달아 세 사람과 겨루며 하나하나 부족한 점을 짚어 주었다.그러다 문득 한쪽에 서 있는 윤수혁에게 시선을 돌렸다.“윤 지휘사도 한번 내려와 보겠느냐?”갑작스러운 지명에 윤수혁은 포권을 올리며 공손히 답했다.“저는 왕야의 무용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감히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그 순간, 이도현의 발끝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은창 하나를 가볍게 걷어 올렸다.창은 바람을 가르며 곧장 윤수혁을 향해 날아갔다.“상대가 되는지 아닌지는 겨뤄 보면 알 일이다.”윤수혁은 재빨리 손을 뻗어 창을 받아 들었다.손에 닿는 순간 묵직한 내력이 그대로 전해졌다.그는 흔들림 없이 은창을 움켜쥐었다.이쯤 되면 더는 사양할 수도 없었다. 이미 비무를 청하는 뜻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그럼 무례를 무릅쓰겠습니다. 왕야,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말을 마친 윤수혁은 먼저 방어 자세를 취했다.이도현 역시 은창을 들었다. 먼저 움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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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4화

주변 장수들은 두 사람의 비무를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이처럼 숨 막히도록 치열한 승부는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어느새 이도현의 탄탄한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윤수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땀에 젖은 것은 물론, 옷은 이미 여러 군데가 찢겨 너덜너덜해져 있었다.바로 그때, 이도현이 손에 든 쌍구에 힘을 실어 휘두르자 윤수혁의 웃옷이 순식간에 갈라져 나갔다.그 역시 이도현처럼 상반신을 드러낸 채 서게 되었다.순간 훈련장이 조용해졌다.장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수혁의 몸으로 쏠렸다.명문가 자제들과는 전혀 달랐다.가문 출신 무인들도 상처 하나쯤은 있을 수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윤수혁의 몸에는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칼에 베인 상처, 검에 찔린 흉터는 물론이고, 화상을 입은 흔적까지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평생 전장을 누빈 이도현의 몸에도 흉터는 많았다. 그러나 윤수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는 그보다도 훨씬 처참했다.이도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하지만 그는 곧 다시 무기를 휘두르며 윤수혁에게 달려들었다.윤수혁 역시 승부욕이 완전히 끌어올랐는지 조금 전과는 달랐다.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격렬하게 맞붙었다.그러던 중 이도현의 휜 칼날이 예상치 못한 각도로 파고들었다.윤수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죽음이 눈앞까지 다가온 듯한 기척이었다.몸은 본능적으로 치명적인 살초를 펼치려 했다.하지만 그는 끝내 그것을 억눌렀다.더는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윤수혁은 천천히 눈을 감고 칼날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휘어진 칼은 무서운 기세로 그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목덜미를 스칠 듯 피부에 바짝 멈춰 섰다.날카로운 칼끝에 피부가 살짝 베이며 가느다란 핏방울이 맺혔고, 양옆으로 흩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허공을 흩날리며 잘려 나갔다.주변에서는 놀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조금만 더 나아갔다면 윤수혁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이도현은 눈을 감은 채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윤수혁을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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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5화

어젯밤 이도현이 워낙 거칠게 굴었던 탓에 신수빈은 오전 내내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미인탑에 기대어 축 늘어진 채 앉아 있던 그녀는 은보가 한참 동안 허리와 다리를 주물러 준 뒤에야 뻐근한 몸이 조금 풀렸다.사실 다음 날 열리는 경림연에는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하지만 이도현이 꼭 참석하라고 했고, 어머니와 형수님도 함께 간다는 말을 듣자 결국 생각을 바꿨다.신씨 가문은 이제 막 장안에 뿌리를 내린 신흥 세력이었다. 혹여 명문가 부인들이 어머니나 형수님을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내일은 함께 가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먹었다.그날 밤 이도현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목욕을 마친 신수빈은 거울 앞에 서서 제 몸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절로 이를 갈았다.정말 사람을 물어뜯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옷 밖으로 드러나는 곳은 교묘하게 피해 놓고, 옷에 가려지는 곳은 성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그가 오늘 밤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모처럼 푹 잘 수 있을 테니 말이다.*다음 날 아침, 신수빈은 청하에게 새로 지은 봄옷을 꺼내 달라고 했다.평소 그녀는 화려하기보다는 단정하고 편안한 차림을 즐겼다.장안의 복식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장식도 많았다. 귀하기는 했지만, 온종일 몸을 조이고 있는 듯 답답해 그녀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그래서 이날도 평소처럼 맑고 담백한 분위기의 옷을 골랐다.머리도 가장 평범한 추마계를 틀고, 장식이라곤 끝에 작은 술 장식 하나만 달았을 뿐 다른 치장은 하지 않았다.왕부가 황성과 가까웠기에 이른 아침부터 자신의 마차를 보내 어머니와 형수님을 모셔 오게 했다.이번에 어머니가 신태안을 데리고 경림연에 참석하는 이유는 그에게 어울리는 혼처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신씨 일가를 맞이한 뒤, 신수빈은 어머니와 형수님과 함께 같은 마차를 타고 연회장으로 향했다.도착한 시각은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미 연회장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화려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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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6화

신태안은 연회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하나같이 평범한 얼굴들뿐이었지만, 그중에도 눈에 띄는 미남이 몇 있었다.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올해의 탐화랑이었다.아마 규수들이 바라보는 사람도 그 탐화랑일 터였다.그런데 이상했다. 왜 자꾸만 자신과 탐화랑을 번갈아 쳐다보는 걸까.설마 둘 중 누가 더 잘생겼는지 비교하는 건가?참 쓸데없는 짓이었다.여동생은 강남 제일의 미인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그 친오빠인 자신이 어디 가서 얼굴이 빠질 리 있겠는가.게다가 남자는 얼굴만 잘생기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그때 탐화랑도 신태안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멀리서 포권을 올리며 예를 표했다.신태안은 어머니의 당부를 떠올렸다.괜히 사람들과 척지지 말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고 했었지.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예를 받아 주었다.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있던 규수들이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작은 비명을 터뜨렸다.“꺄아!”신태안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그쪽을 바라봤다.장안의 명문가 규수들은 원래 저런 사람들인가?무슨 일로 저토록 흥분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계속 앉아 있자니 마치 구경거리라도 된 듯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져 영 불편했다.결국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연못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등을 기대고 잠시 쉬던 그는 바닥의 조약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나무 위에 앉은 물총새를 맞혀 조카에게 선물해 줄 생각이었다.그때였다. 여러 여인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아까 둘이 눈 마주친 거 봤어요? 너무 달달하지 않았어요?”“제가 뭐랬어요? 둘은 분명 뭔가 있다니까요. 화본에도 얼마나 생생하게 써 놨는데요. 사람들 앞에서는 그냥 동료인 척하면서 뒤에서는 서로 얼마나 애틋한지... 아, 진짜 이게 무슨 운명 같은 사랑이람?”신태안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디선가 몰래 만나던 연인이 사람들에게 들킨 모양이었다.장안은 정말 풍속이 개방적인 곳이었다. 항주였다면 혼인도 하지 않은 남녀가 함께 있는 모습만 들켜도 부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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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7화

“방금 무슨 이야기를 한 겁니까?”평소 장안에서 옥면소장(玉面小將: 옥처럼 희고 고운 사람을 칭찬하는 별호)이라 불리던 신태안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얼굴이 새까맣게 굳어 있었다.눈앞의 상대가 이제 막 성년이 된 어린 규수들이라는 사실도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아... 아무 말도 안 했어요.”전장을 누비던 장군다운 기세는 평소 아무리 온화하게 굴어도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얼굴을 굳힌 채 서 있기만 해도 사람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흘러나왔다.신태안이 말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규수들은 일제히 놀라 서로를 끌어안은 채 뒷걸음질을 쳤다.“끝까지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좋습니다. 어느 집안 규수들인지 하나하나 알아낸 뒤, 직접 당신들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찾아가 묻겠습니다. 대체 집안에서 딸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남색을 다룬 화본을 재미 삼아 떠들고 다니는지 말입니다.”아까 가장 신나게 떠들던 규수는 결국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신 장군,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저희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장군님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않을게요.”신태안은 훌쩍이며 우는 어린 규수들을 한참 바라보다 더 겁을 주지는 않았다.대신 차갑게 물었다.“그 화본은 어디서 산 겁니까? 누가 쓴 것이고, 대체 무슨 내용입니까?”규수는 더는 숨길 엄두도 내지 못했다.“장안서방에서 샀어요. 필명은 반산객이라고 하는데 내용은...”말끝을 흐리며 신태안의 눈치를 살피던 규수는 그가 눈을 한번 흘겨보자 흠칫 몸을 떨더니 이내 황급히 입을 열었다.“신 장군께서 얼마 전 운사의 반란을 평정하고 개선하셨잖아요. 성 밖에서 말을 타고 돌아오시다가 거리에서 탐화랑과 우연히 마주치게 됩니다. 그러다 두 분이 말 위에서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규수는 숨을 한번 삼켰다.“첫눈에 반해 버리는 이야기입니다.”신태안은 말문이 막혔다.기가 막혀도 이런 기가 막힌 일이 또 있을까.“그 반산객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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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8화

소씨 아가씨는 올해 스물한 살이었다.혼기가 늦었음에도 울거나 의기소침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한 얼굴로 경림연에 참석했다.남들이 무슨 말을 하든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친한 벗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신씨 부인은 볼수록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이처럼 강단 있고 결단력 있는 성품이라면, 덤벙대고 철없는 넷째 아들의 성격도 충분히 잡아 줄 수 있을 터였다.한 살 연상인 것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그때 신태안이 돌아왔다.신씨 부인은 곧장 그를 붙잡고 소씨 아가씨 이야기를 꺼냈지만, 신태안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반산객이라는 자를 찾아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어머니께서 좋으신 대로 하세요.”건성으로 대답하는 넷째 오빠를 보던 신수빈이 입을 열었다.“넷째 오라버니, 혼인은 평생이 걸린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 끝낼 일이 아니에요. 오라버니의 마음에도 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마침 오늘 소씨 아가씨도 와 계십니다. 서하랑 언니와는 절친한 사이라던데, 제가 언니께 부탁해서 이쪽으로 모셔 볼게요.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눠 보시면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을 거예요.”신수빈은 새삼 장안의 풍속이 강남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신태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다른 데 가 있었다.그가 알고 싶은 것은 오직 반산객의 정체뿐이었다.신수빈은 곧 서하랑을 불러 조용히 말했다.“언니,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 어머니 뜻이에요. 소씨 아가씨 쪽 생각은 아직 모르니까 맞선을 보는 거라고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우선 두 분이 자연스럽게 인사만 나눌 수 있게 해 주세요.”“알겠어.”서하랑은 옅게 미소 지었다.속으로는 신씨 집안 사람들의 안목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소온별은 비록 혼기가 늦었지만, 인품과 품성만큼은 장안 어느 명문가 규수에게도 뒤지지 않았다.잠시 뒤 서하랑과 함께 다가온 소온별은 신씨 일가를 보자 예를 갖춰 신씨 부인과 신수빈에게 인사했다.신씨 부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찬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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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9화

신수빈은 소온별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말을 나눌수록 그녀는 식견이 넓고 재치가 있었으며,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지도 높이지도 않는 품격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함께 있으면 마치 봄바람을 맞는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역시 서하랑 언니의 절친한 벗답네요. 언니처럼 함께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신수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설령 넷째 오라버니와 인연이 닿지 않더라도, 자신과는 좋은 벗이 될 수 있겠다고.소온별은 환하게 웃었다. 꽃처럼 화사한 미소였다.“사실 저도 전에 연회에서 부인을 몇 번 뵌 적이 있어요. 풍채가 워낙 고우셔서 꼭 한번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신선 같은 분이라 쉽게 다가가기 어려울 것 같아 망설였지요. 헌데 오늘 직접 뵈니, 그동안 제가 괜한 생각을 했다는 걸 알겠네요.”곁에서 듣고 있던 서하랑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아가씨니 부인이니 그렇게 부르지 말거라. 나이로 치면 너는 온별이보다 어리다. 그러니 언니라고 부르면 된다.” “그리고 온별이 너도, 빈이를 수빈이라 부르든, 그냥 빈이라고 부르든 편하게 하면 돼.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면 어색하잖아.”세 사람은 다시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어느 정도 가까워졌다고 느낀 신수빈은 더는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띤 채 목소리를 낮췄다.“사실 오늘 온별 언니를 모신 건 어머니 뜻이었어요. 어머니께서 서하랑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언니 사정을 들으셨는데, 무척 감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언니를 만나 얘기를 나누신 겁니다. 혹여나 우리 넷째 오라버니를 좋게 봐 주실 수 있을까 싶으셨대요.”그녀는 신태안이 있는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신수빈의 말을 들은 소온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어딘가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은 부끄러움과는 조금 달랐다.신수빈은 이유를 알 수 없어 조심스레 물었다.“온별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넷째 오라버니는 이제 스무 살이고 아직 첩도 두지 않았어요. 게다가 할아버지께서 예전에 집안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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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0화

신태안은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듣기 싫었기에 예를 갖춰 인사했다.“소씨 아가씨를 뵙습니다.”소온별도 예에 맞춰 답례했다.신태안은 그녀를 보며 명문가에서 곱게 자란 단정한 규수라는 인상만 받았다.흥미가 뚝 떨어진 그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인 뒤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서하랑은 두 사람의 반응이 미적지근한 것을 보고 신수빈과 눈빛을 주고받았다.둘 다 더 볼 것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때 연회장 밖에서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섭정왕께서 드십니다!”한마디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향했다.오늘 이도현은 조복 대신 흰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은은한 암문이 새겨진 옷감은 화려함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고귀한 품격을 풍겼고, 타고난 귀인의 기품이 온몸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전포나 엄숙한 조복을 입었을 때와 달리, 몸에 밴 살기는 한결 누그러져 보였다.흰 장포는 그의 차갑고 강인한 인상을 적당히 감싸 주었고, 문득 사람들에게 장안 최고의 풍류공자로 이름을 떨치던 젊은 시절의 모습까지 떠올리게 했다.사람들이 일제히 예를 올리자 이도현은 담담히 손을 내저었다.“예는 거두거라.”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한쪽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오늘 마침 휴무였는데, 경림연이 성황이라는 말을 듣고 나도 한번 들러 본 것이다.”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곧 그의 의도를 깨달았다.장안에서 경림연은 이미 공공연한 맞선 자리였다.미혼 남녀와 자식의 배필을 알아보려는 부인들만 참석하는 자리였으니, 이도현이 나타난 이유도 하나뿐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들은 아직 돌도 지나지 않았다.아들의 며느리를 고르러 온 것이 아니라면 새 왕비를 고르러 온 것일 터.몇몇 명문가 자제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이도현 같은 권세와 지위를 가진 사내가 나타났으니, 규수들의 시선이 다른 남자에게 향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실제로도 그랬다. 적지 않은 규수들이 은근슬쩍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러나 이도현은 시종일관 담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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