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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1화

연기준은 사람들 앞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망설임은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이 자리에 있는 모두와 완전히 반대편에 세워버렸다.서인경이 막 이 세계로 넘어왔던 그 시절이라면 이런 장면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때의 두 사람은 물과 불처럼 대립했고 서인경은 화이를 결심한 채, 이 남자와 완전히 연을 끊고자 했다.그런데 지금은 마치 전생의 안개가 하나씩 걷히듯, 모든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서인경이 손을 내밀어 연기준의 손을 잡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손과 맞물린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서인경을 보았다.그의 시선과 마주친 것은 눈부시게 환한 웃음이었다.서인경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지금 당신 모습, 진짜 멋있습니다.”진심이 담긴 칭찬이었고 숨김없는 호감이었다.목숨과 권세를 내던져서라도 자신의 여인을 지키려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연기준의 심장이 순간 흔들렸다.지금 당장이라도 그 입술에 꿀이라도 바른 것은 아닌지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였다.두 사람은 주변을 완전히 잊은 듯, 그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애정을 드러냈다.연강호는 그런 모습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그의 말투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여자 하나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놈! 그러니 그때 황위가 네게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연기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검은 그림자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였다.“내가 일불락 수장의 혈통과 혼인한다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건 진국이다. 너 역시 진국 출신이면서, 입만 열면 내가 진국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하지. 그럼 너는 진국 사람이 아닌 것이냐? 아니면… 천하를 이끌고 일불락의 후손과 맞서려는 데, 다른 속셈이라도 있는 것이냐?”연기준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연강호에게로 향했다.연강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낮게 입을 열었다.“나는 네가 이 여인에게 속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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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2화

작디작은 은침 하나일 뿐인데도 연강호는 마치 대적을 마주한 듯 경계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돌아온 사람처럼 숨을 고르며 그는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서인경은 그의 검은 옷 틈 사이로 눈동자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살기를 본 것만 같았다.“네 선조들처럼 어리석구나. 죽고 싶은 거냐!”순간, 장풍이 몰아쳤다.서인경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연기준이 몸을 내밀어 그녀 앞을 막아섰다.그는 내력을 응축해 연강호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다.“은침 하나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유가 뭐지? 설마 예전에 입은 상처가 아직도 안 나은 것이냐? 은침 하나도 못 막을 정도로?”그 말에 연강호의 분노가 완전히 폭발했다.그는 마치 허공에서 물건을 끌어당기듯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주변 사람들의 허리에 차 있던 장검들이 갑자기 웅웅 울리더니 어떤 힘에 이끌리듯 한순간에 뽑혀 나왔다.검은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당하는 듯 곧장 서인경을 향해 날아들었다.그러자 연기준이 옆에 있던 의자를 들어 올려 막아냈다.공중에서 검과 의자가 부딪쳤다. 장검이 의자를 꿰뚫었고 의자는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하지만 그 힘도 다한 듯 장검 역시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연강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구경만 하던 이들을 향해 차갑게 외쳤다.“뭘 멍하니 서 있느냐? 오늘, 서인경을 잡는 자는 훗날 일불락을 나눌 때, 내가 가장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겠다!”그 말은 무엇보다 강력한 유혹이었다.사람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다시 한 번 서인경을 향해 몰려들었다.이것은 서인경과 연기준이 처음으로 함께 싸우는 전장이었다.연강호가 끌어모은 자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수법을 펼치며 덤벼들었다.연기준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막대한 이익 앞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이들을 막아내기란 쉽지 않았다.앞의 사람이 쓰러지면 뒤의 사람이 곧장 달려들었다. 변화무쌍한 공격이 이어졌다.서인경은 독과 은침을 번갈아 사용했지만 점점 대응하기 벅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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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3화

빙능이 연이어 상대의 몸에 박혀 들어갔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를 틈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움직임을 멈췄다.대장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까지 빙능술을 잘 썼던가?서인경 역시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꼬막이가 보였던 행동과 지금 이 순간 또르르 굴러가는 눈동자까지 모두 눈에 담겼다.이 아이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어머니인 자신조차 이 아이가 어떤 수를 더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설산에서의 그 기묘한 여정이 아마도 이 아이에게 많은 변화를 남긴 듯했다.서인경은 꼬막이의 안전에 대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깊이 생각할 여유도, 따져 물을 시간도 없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밀려드는 공격을 맞이했다.연강호의 시선은 줄곧 서인경에게 꽂혀 있었다.연기준이 상처를 입는 것부터, 서인경이 은침과 독 외에는 더 이상 꺼낼 수 있는 수가 없는 것, 그리고 가족이 위험에 처했음에도 서인경이 더 이상 최고 결계술을 사용하지 않는 것까지 그는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다.그리고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역시나 지난번 그 결계술로 상대를 베어버린 데에는 분명 후유증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유증은 적어도 그녀가 다시 한 번 그 술법을 펼치지 못하게 만들 만큼 컸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서인경이 그 마지막 수를 꺼내지 않을 리 없었다.오랫동안 지켜본 끝에 연강호는 확신했다. 서인경은 이미 궁지에 몰려 있었다.결국 어릴 때부터 일불락에서 자라지 않은 자는,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법이다. 일불락 수장 일족의 후손이라 해도 이 정도일 뿐이다.연강호의 눈앞에는 자신의 야망이 조금씩 현실로 이루어지는 광경이 어른거렸다. 그의 가슴 속에서 욕망은 끝없이 부풀어 올랐다.이제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서인경은 그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그때가 되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입막음 하면 된다. 그러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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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4화

검은 그림자는 땅에 단단히 내려섰다.그의 온몸에서는 숨을 막히게 하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고 그 기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뜻밖의 인물이 난입하자 모두가 손에 쥔 무기를 멈췄다.백여 명에 달하던 인원은 지금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바닥에는 시체가 널브러져 더는 발 디딜 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공기에는 비릿하고 역겨운 피 냄새가 짙게 퍼져 있었다.싸움이 멈추자마자 봉한설과 촌장 일가는 재빨리 서인경과 연기준 쪽으로 모여들었다.갑작스레 나타난 이 조력자에 서인경조차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그녀는 연기준을 바라보았다. 연기준은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제야 서인경은 조용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연강호는 이 불청객을 노려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너는 누구냐? 서인경은 내 것이다. 감히 끼어들다니. 일불락을 혼자 차지하려는 속셈인 것이냐?”검은 그림자는 연강호처럼 온몸을 가린 모습이었지만 그처럼 음침하지는 않았다. 그는 천천히 검은 망토를 벗어냈다.드러난 것은 풍파를 오래 겪은 듯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었다.왜 그렇게 보였냐 하면, 햇빛에 그을려 거칠고 검게 탄 피부와 오랜 세월 바깥을 떠돌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오른쪽 얼굴에는 긴 흉터가 하나 있었는데 눈썹에서 시작해 귀밑까지 이어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할 만큼 흉측했다.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잔혹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높은 자리에 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서인경조차 단번에 느꼈다. 이 사람,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그가 얼굴을 드러낸 순간 연강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곧바로 태연함을 되찾았지만 그 한 걸음은 이미 서인경과 연기준의 눈에 들어왔다.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검은 그림자는 연강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연강호, 너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군.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예전의 너는 싸움을 잘했고, 또 그것을 즐겼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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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5화

연강호 자신도 얻지 못한 것을 어찌 원수에게 넘겨주겠는가.그는 눈앞의 중년 남자를 노려보며 그 말이 사실일 리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헛소리로 사람들 마음을 어지럽히려는 속셈이냐! 내가 떠날 당시, 너는 이미 예순을 훌쩍 넘긴 늙은이였다. 목까지 흙에 묻힐 나이였지. 장생불사약이 있어도, 늙지 않을 뿐이지 젊어지지는 않는다! 너는 결코 임건이 아니다. 대체 누구냐!”연강호는 거의 고함을 치다시피 하며 검은 그림자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그러나 검은 그림자는 전혀 놀라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역시 백 년 전의 연강호 그대로군. 당대의 상왕답다. 그때는 내 증조부가 너를 속이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의 증손자인 나조차 너를 속이지 못하는구나. 그래, 나는 네 원수가 아니다. 나는 네 원수의 증손자이지. 성은 임, 이름은 선우다.”사람들 사이에서 한숨 같은 안도의 기운이 퍼졌다.그러나 곧 그 얼굴에는 실망이 떠올랐다. 장생불사가 아니었다. 그 약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임선우…”연강호는 그 이름을 되뇌며 가볍게 비웃음을 흘렸다.“임건 그 늙은이가, 너에게 꽤 큰 기대를 걸었나 보군.”서인경은 알고 있었다. 역사 속에도 같은 이름의 위대한 병법가가 존재했다는 것을.이 시대에도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지만 연강호에게 그것은 그저 비웃음거리일 뿐이었다.“아무리 좋은 이름을 지어도 결국 헛수고지. 네 증조부는 고지식한 머리로 옳고 그름도 구분 못 하는 인간이었다. 너희 임 씨 집안은 하나같이 멍청해. 실력은 있어도 평생 남 밑에서 고개 숙이는 운명일 뿐이지.”그의 모욕적인 말에도 임선우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인 듯 그는 차분히 오래된 일을 꺼내 들었다.“증조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한때 그분에게 반란에 가담하라고 권유했지만 거절당했다고. 그 일로 원한을 품고 다른 나라의 첩자들과 손잡아 임 가가 적과 내통했다는 증거를 조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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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6화

연강호는 그 옛날에 이런 사연이 남아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거짓이 들통 난 순간, 그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선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처음에는 임 가에 다시는 원수를 갚을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 여겼지. 헌데 지금 보니 기회가 찾아온 것 같군.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건, 네 그 어설픈 장생불사 덕이기도 하고,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어리석음 덕분이기도 하다.”서인경은 문득 생각했다.임선우라는 사람은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그는 말 몇 마디만으로도 연강호를 질식시킬 수 있을 듯했다.연강호는 분노가 극에 달하자, 되려 웃음을 터뜨렸다.“네 그 하찮은 삼류 실력으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가당치도 않다! 네 증조부조차 내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너 따위가 뭘 할 수 있겠느냐!”임선우는 그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담담하게 답했다.“나는 너를 단번에 죽일 생각이 없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까. 그건 가장 가벼운 복수일 뿐이잖아?”연강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서인경은 그 표정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눈앞에 원수가 있는데도 죽이지 않는다고?임선우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조용했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가장 잔혹한 복수는 네가 영원히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늙지도 죽지도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그리고 네가 원하는 건 단 하나도 손에 넣지 못하게 하는 것.”“백 년을 넘어 이곳까지 왔지만, 네 곁에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이도 남지 않았지. 네 안에 남은 건 탐욕과 욕망일 뿐이다. 일불락을 향한 집착, 천하를 손에 넣겠다는 광기. 헌데 만약 그것들을 영원히 손에 넣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끝없는 고통이 되지 않겠느냐.”그는 가장 고요한 어조로, 가장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서인경은 놀란 눈으로 임선우를 바라보았다.백 년을 이어온 가문의 원수를 앞에 두고서도, 그는 이토록 냉정하고 또렷했다.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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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7화

망토가 들춰지는 그 순간, 연강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그러나 그는 곧바로 몸을 빼며 임선우의 동작이 더 이어지지 못하게 막아냈다.이어 임선우가 가까이 다가온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의 가슴을 향해 한 장을 내질렀다.임선우는 그 충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연강호는 재빨리 망토를 끌어올려 얼굴을 다시 가렸다. 모든 것이 너무도 빠르게 벌어진 탓에, 서로 얽히고 흔들리는 그 혼란 속에서 대부분의 시선은 오직 연강호의 얼굴에만 쏠렸다.그러나 서인경은 달랐다. 그녀의 눈은, 또 다른 것을 놓치지 않았다.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던 그의 체형은 사실 두터운 옷으로 억지로 부풀려 놓은 것에 불과했다.검은 옷 아래에는 텅 비어버린 듯한 몸이 숨겨져 있었다. 연강호의 몸은 이미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장내는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들을 이끌던 자가, 저토록 메마른 노인일 줄은.“저 꼴로 우리를 설산까지 데려갈 수는 있는 거야? 중간에 혼자 죽어버리는 거 아니야?”방금 전까지 가장 거칠게 싸우던 노란 머리가 거칠게 내뱉었다.연강호는 분명, 설산에서 백 년을 살아왔다고 했다. 그곳의 진귀한 보물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노란 머리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귀한 약재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이 싸움에 뛰어들었다.그러나 방금 그 얼굴을 본 순간, 노란 머리의 마음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저희를 속이고 있던 것이지요? 결국 당신 욕심 때문 아닙니까?”손에 쥔 무기를 내려다보고,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보던 사람들 또한 점점 망설이기 시작했다.“당신이 죽으면, 누가 우리를 설산으로 안내합니까?”“맞습니다! 설산 안에는 함정이 가득하다잖아요. 백 년 전에 쳐들어갔던 사람들, 한 명도 못 돌아왔습니다. 전부 그 안에서 죽었다고요! 당신이 곧 죽을 몸이면, 우리가 여기서 싸워서 뭐 합니까? 싸워도 못 들어가는데!”“이거 완전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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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8화

연강호가 사라지자, 남아 있던 이들은 임선우가 서인경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며 곧바로 기세가 꺾였다.설령 서인경을 붙잡는다 해도 그들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설산에 들어가는 일은 이제 불가능할 테니까.백 년 전 선조들처럼 함정에 빠져, 그곳에 남아 뼈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갈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슬그머니 빠져나가려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그러나 문턱에 다다르기도 전에 군사를 이끌고 달려온 맹경운이 길을 막아섰다.바닥을 가득 메운 시체들, 공기 속에 짙게 밴 피비린내. 생사를 수없이 겪어온 맹경운조차 이곳에서 방금 어떤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끌어내거라! 신원을 철저히 조사해서, 뒤에 있는 세력의 우두머리에게 전하거라. 직접 와서 데려가라고! 데려가지 않는다면 전부 산에 던져 개 먹이로 만들어 버리거라!”연기준의 명이 떨어지자, 맹경운은 즉시 병사들을 지휘해 움직였다.반항하려던 자도 있었지만 연기준의 장창이 번쩍이며 그 팔을 꿰뚫었다.순식간에 피가 쏟아졌고 비명이 객잔 안을 가득 채웠다.연기준은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시체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방금 전에는 수가 많다고 조금은 우세를 점했겠지. 아직도 불복하는 자가 있다면 직접 나서 보거라. 내가 친히 저승길로 보내주지.”하얀 옷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자신의 피인지, 남의 피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그러나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중요한 것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한때, 시체 더미 속을 헤치고 살아남은 상왕었다는 사실을 말이다.조금 전, 부인과 아이를 지키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감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설 자격조차 없었을 것이다.설산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서인경도 붙잡지 못했다. 그런데 연강호마저 달아났다.일불락의 전설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안에 정말로 전해지는 보물이 존재하는지, 이제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맹경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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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9화

봉한설은 바람처럼 발걸음을 재촉하며 밖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당신들은 신경쓰지 마세요. 이 사람은 제가 맡을 겁니다.”서인경은 두 사람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맹경운에게 당부했다.“번거롭겠지만, 네가 사람을 붙여 지켜봐 주거라. 저 사람은 꾀가 많으니 한설이가 다치지 않게 지켜주거라. 살리고 죽이는 건, 그 아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면 된다.”그 여자는 이미 연강호에게서 쓸모를 다한 몸이었다. 그가 그녀를 구하러 올 리도 없었고, 서인경에게도 더 이상 이용할 가치는 남아 있지 않았다.맹경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뒷수습을 하러 나갔다.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는 촌장 일가 세 식구가 묵묵히 치우고 있었다.연기준은 내내 말이 없던 임선우를 바라보았다.이 사람. 그야말로, 연기준이 진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인물이었다.그는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췄다.“위로 올라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임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연기준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서인경은 일층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높은 계산대 위에 올라가 있는 꼬막이를 발견했다. 방금 전 그 처절한 싸움이 아이에게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듯했다. 꼬막이는 바닥 가득한 피를 보고도 전혀 겁내지 않았다. 손에는 작은 바가지 하나를 들고 바닥에 물을 뿌리며 신이 나 있었다. 이따금씩 앞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지시까지 했다.“저쪽! 저쪽을 더 깨끗이 쓸어버리세요!”“거기! 거기도!”“저 기둥도 더러워요!”계산대 앞에서는 대장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가리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오히려 재미있어 보이기까지 했다.서인경은 먼저 서재로 가기로 했다. 임선우와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아들의 피에 대해 묻기로 마음먹었다.*서재 안.서인경은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연기준은 이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고 임선우와 마주 앉아 작은 평상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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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0화

“세월이 참 빠르군요. 어느새 십오 년이나 흘렀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어요. 서 가는 충의로 이름난 가문이라, 누구나 우러러볼 만하다고 말입니다. 다만 서 가는 임 가처럼 물러날 운을 타고나지 못했으니 결국 그 끝은 더 비참해질지도 모른다고 하셨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서인경의 가슴이 조용히 저려 왔다.겉에서 보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 가는 끝내 그 길을 향해 걸어갔다.이제 와 곱씹어 보니, 할아버지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관직을 내려놓고 물러설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군권을 놓지 않았고 연기준과의 화친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으며 서가군을 온전히 서인경의 방패로 남겨두었다.아마도 서인경의 정체가 드러나는 그날을 대비해, 그녀의 뒤에 설 힘을 남겨두려 했던 것일 터였다.결국, 서 가가 임 가처럼 온전히 물러나지 못한 것은 모두 서인경 때문이었다.그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연기준은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흑돌 하나를 집어 서인경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 바둑판 위 한 자리에 돌을 내려놓게 했다.그 손길에 이끌리듯, 서인경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대화로 돌아왔다.연기준이 입을 열었다.“임 가는 은거한 뒤로, 더 이상 조정에 나선 사람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헌데 어르신께서는 그때 어찌하여 막북에 계셨던 겁니까?”“경호 운송 때문입니다.”임선우는 짧게 답했다.“증조부께서 조정을 떠난 뒤에도, 먹여 살려야 할 식솔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표국을 하나 열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줘서, 근근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그해에 마침 능지국으로 보내야 할 물건이 있었고, 그 길에 국경에서 서 노장군 일가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연기준의 시선이 임선우의 옷차림으로 옮겨갔다.겉으로는 단순한 검은 옷이었지만 그 직물의 질감은 분명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근근이 입에 풀칠’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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