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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1화

임선우는 잠시 미묘하게 눈을 떴다가, 곧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제 속셈을 의심하는 겁니까?”서인경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침묵으로 받아들인 셈이었다.일불락이라는 이름이 지닌 유혹은 그만큼 컸다.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임선우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백돌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바둑판 위에 흩뿌렸다.찰칵. 막 중반에 접어들던 판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흑과 백이 뒤섞여, 어지럽게 얽혔다. 그는 태연히 찻잔을 들어 올려 단숨에 반 잔을 들이켰다.막 입에 머금은 순간, 눈빛이 번쩍 빛났다.“이거, 좋은 차군요. 정말 귀한 차입니다. 저는 차를 좋아해서, 예전에 온 천하를 돌아다니며 좋은 차를 찾았는데 이런 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이건 틀림없이 일불락에서 나온 물건이겠지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모두 일불락을 차지하려 드는지. 이런 맛이라면 저조차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마지막 말은, 묘하게 여운을 남겼다.서인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단순히 복수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어쩌면 바깥의 그들과 같은 목적을 품고 있으면서도 더 깊이 감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방금 보여준 실력을 떠올리자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설마 또 하나의 적이 나타난 건 아닐까.서인경이 다시 한번 그의 의도를 떠보려는 순간, 갑자기 손목이 붙잡혔다. 고개를 내리니 연기준의 넓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덮고 있었다.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이 부드러운 살결을 거칠게 스쳤다.그의 목소리가 낮게 귀에 닿았다.“어르신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따로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그저 차잎일 뿐입니다. 일불락에서는 흔한 물건이지요. 좋은 것은 나누는 법, 장차 세상 모든 차를 좋아하는 이들이 함께 맛볼 수 있게 될 겁니다.”그 말에 임선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다만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훗날 이 차가 세상에 풀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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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2화

연기준의 말에는 깊은 정이 담겨 있었다.그 진심 어린 어조에 임선우의 가슴에도 잔잔한 울림이 번져 갔다.그는 손끝으로 찻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며 임 가에 대대로 내려온 사명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참지 못한 듯 눈가가 붉어졌다.“제가 이곳에 온 일은 그 누구에게도 알린 적이 없습니다. 헌데 백 년 전의 진국에 임 가라는 가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니… 증조부께서 하늘에서 이 소식을 들으신다면, 틀림없이 웃으며 눈을 감으실 것입니다.”임선우는 손등으로 눈가를 가볍게 훔친 뒤, 다시 고개를 들어 연기준을 바라보았다.전에는 온화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늘 경계와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폐하께서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물으십시오. 아는 건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그의 말투와 태도는 한층 진중해졌다.그러자 연기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르신께서는 화족의 위치를 알고 계십니까?”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서인경과 임선우 모두 잠시 말을 잃었다.서인경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연기준이 왜 임선우가 화족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반면, 임선우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연기준이 무엇을 눈치챈 걸까?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스친 한 줄기 동요는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서인경과 연기준은 짧게 시선을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임선우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이를 악물었다.“모릅니다. 일불락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하면서, 아직도 화족을 못 찾았단 말입니까?”그는 시선을 서인경에게 돌렸다.“이제 보니, 당신이 수령이라 해도 능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은 모양이군요.”서인경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담담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어르신 말씀대로입니다. 더 힘쓰겠습니다.”그 태도는 연기준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겸손했다.임선우는 순간 멍해졌다.그저 경호 운송을 하며 살아온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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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3화

연기준에게 전생의 일을 말해야 할까.서인경은 잠시 망설였다.환생이라니, 너무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하지만 일불락 같은 기이한 곳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환생이라고 해서 불가능할 이유가 있을까?생각에 잠긴 채, 그녀는 정신을 나누어 약왕곡에서 약상자를 꺼내 들었다.고개를 숙인 채, 연기준의 상처를 하나하나 손보았다.“우린 이미 서로 등을 돌릴 사이를 훨씬 지난 것 같은데요. 꼬막이도 이제 곧 돌인데 제가 제 부군을 걱정하는 이유를 굳이 물어야 합니까? 좀 쓸데없는 질문 아닌가요?”연기준의 가슴이 잔잔히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낮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는 평소 좀처럼 웃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가끔 터지는 웃음은 보기에도, 듣기에도 지나치게 눈부셨다.서인경은 약을 준비하다 말고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아마도 전생에 좋은 일을 참 많이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복을 받은 게 아닐까.연기준은 그런 속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신경 쓰는 이 순간이, 꽤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곰곰이 떠올려보면 막북에서 돌아온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변해왔다.수차례 생사를 넘나들고 헤어짐과 재회를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서로의 운명을 나누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연기준 역시, 오래전의 그 꿈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전생의 마지막이 어떤 비극이었는지, 그 기억은 단 한순간도 그를 놓아준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절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연기준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서인경 역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녀는 끝내 결정을 내렸다.말하자. 서로 속마음을 숨기기만 하는 이야기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어차피 함께 가야 할 길이라면 그녀는 더 이상 참고 삼킬 생각이 없었다.연기준의 상처는 대부분 겉으로 난 것들이었다.약을 바르고, 붕대를 정성스럽게 감았다. 모든 처치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마침 그의 시선과 맞닿았다.연기준은 줄곧, 뜨겁게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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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4화

희태비가 했던 말 서인경은 화와 복을 함께 타고난 천명지녀이며 그녀와 평생을 함께할 사내의 앞날은 험난할 것이라는 그 예언은 연기준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앞날이 어떻든, 그는 이미 선택을 끝낸 사람이었다. 이제 그 자신 또한 천명지자가 되었으니 두 사람은 더없이 완벽한 한 쌍이었다. 누가 와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나도 전생을 꿈으로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내 손으로 서 가의 사람들을 모두 죽였지. 그리고 널 왕부에 가둔 채, 단은설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너는 나를 끝까지 증오했고,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나는 그런 너를 안고 경성을 떠났고. 그 뒤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연기준은 말을 마치고 서인경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혼란과 갈증이 가득했다.“그 이후의 일을 너는 봤느냐?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그리고 나는 널 데리고 어디로 간 것이냐?”어디로 갔느냐고? 서인경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시신을 할아버지와 고모에게 돌려보냈다.그 이후의 행적은 그녀 역시 알지 못했다. 아직 그 뒤의 꿈은 꾸지 못했으니까.하지만 지금의 연기준은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는 듯했다.서인경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끝내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이번 생에서는 단 한순간이라도 서 가 사람들의 목숨을 밟고 올라서서 권세를 잡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연기준의 눈빛이 번뜩이며 날카롭게 변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기세였다.“넌… 나를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는 것이냐?”서인경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질문은 처음부터 꺼내선 안 되는 것이었다.연기준은 굳은 얼굴로 그녀의 턱을 붙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그러고는 피할 수 없게 시선을 맞추게 만들었다.그 눈빛은 방금 전보다 더 거칠고 무거웠다.“서 노장군은 내 은사이시다. 네 아버지, 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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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5화

연기준은 상처를 모두 치료받고도, 좀처럼 기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서인경은 약상자를 정리하면서도 그 모습이 우스워 일부러 그를 놀렸다.“됐습니다. 그렇게 풀이 죽지 마세요. 그게 뭐 대수라고. 본 황후는 마음이 넓으니까, 전생 일쯤은 따지지 않을게요. 대신 꼭 감사할 줄은 알아야 해요, 알겠습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얼굴이 좀 반반한 게 전부지, 잘생겼다고 밥 먹여 주는 건 절대 아닙니다. 성질은 또 얼마나 사나운지, 조금만 기분 상하면 산 채로 염라대왕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어느 여자가 그걸 견디겠어요? 저처럼 이렇게 너그럽고 속 넓은 부인을 만난 건, 당신이 팔 대에 걸쳐 쌓은 복이에요. 그러니까 잘하세요.”완벽한, 노골적인 압박이었다.연기준은 뭔가 이상하다는 건 느꼈지만 어디가 문제인지 딱 짚어내지는 못했다.그는 대충 겉옷 하나를 걸치고 일어섰다.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려 했다.서인경이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어디 갑니까?”연기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어머니께 제사라도 지내야겠어. 오늘 밤 꿈에 나오셔서, 전생 일을 좀 제대로 알려주시게.”그 말이 문밖에서 희미하게 흘러들었다.서인경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이 남자 또 괜한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네.그래도 그녀는 끝내 진실을 말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스스로 알아내야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 정 안 되면 자기도 아직 꿈을 못 꿨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서인경은 금세 그 일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대신 봉한설 쪽이 신경 쓰였다.혹시라도 부생의 꾐에 넘어간 건 아닐까 걱정되어서였다.그렇게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찾아갔을 때, 이미 상황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부생은 기둥에 단단히 묶여 있었고 그 앞에는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객잔에서 옮겨온 시체도 있었고, 막 베어낸 듯한 것도 섞여 있었다.마치 피로 씻겨 나간 형장처럼 짙은 혈향이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주위를 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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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6화

서인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생과 봉한설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버렸다.부생은 경악했다. 자신의 유혹술 속에서 화족의 환술 흔적을 읽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반면 봉한설은 아예 고개를 저었다.“얘가 화족이라고요? 우리가 그렇게 찾던 화족이란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그녀의 눈에는 노골적인 불신과 숨김없는 혐오가 뒤섞여 있었다.“너 도대체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해 온 거야? 단은설 같은 인간쓰레기랑 손잡기나 하고. 눈이 삐었어? 사람 보는 눈도 없지. 게다가 일불락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원흉 편에 붙어서 앞잡이 노릇까지 하다니. 그게 도둑을 아버지로 섬기는 거랑 뭐가 달라? 거기다 수령 일족의 후손이랑 남자 하나 두고 다투기까지 해? 세상에 있는 남자가 다 죽기라도 했어? 그리고 지금은 또 이렇게 묶여서 꼴좋게 당하고나 있고. 우리 일불락 사람이 언제 밖에 나와서 이렇게까지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냐고!”봉한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화족이라는 말 한마디에 마치 불붙은 화약통처럼 폭발해 버린 것이다.화가 났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그녀는 수없이 상상해 왔다. 화족 사람을 마주하는 순간을.하지만 이렇게 몇 번이나 자신들을 노리고 칼을 겨누던 존재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서인경은 그런 봉한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진정시켰다.“진정하거라. 일단 얘 말부터 들어보자.”말을 마친 그녀는 품 안을 더듬어 약왕곡에서 꺼낸 약가루 한 봉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봉한설에게 건넸다.“이거 물에 타서 먹이거라. 한 각쯤 지나면 정신 돌아올 것이다.”군영 전체가 마치 혼이 빠진 듯한 상태였다.이대로 적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전멸은 순식간이었다.봉한설은 급히 약을 받아 들었다.“알겠습니다! 잠깐만, 먼저 호청 의원부터 먹이고 올게요!”먼저 호청과 군의들을 깨운 뒤, 그들더라 다른 병사들을 돌보게 할 생각이었다.그러면서도 봉한설은 서인경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기다리세요! 돌아오면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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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7화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부생의 눈 깊은 곳에 꾹 눌러 담아 둔 감정이 일렁였다.“제가 좋아서 원수 밑에서 일한 줄 압니까? 백 년 전 그 전쟁 이후, 화족에 남아 있던 혈맥은 모조리 흩어졌습니다. 우리 계통은 저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동안 청루에 몸을 담고, 사방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며 수없이 물어봤지만 화족에 대한 흔적은 단 한 점도 찾지 못했어요. 만약 정말 이 세상에 저 하나만 남은 거라면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수 없습니다. 단은설이랑 연강호가 절 찾아왔을 때, 백 번 싫어도 살아남는 게 먼저였어요. 화족의 피는 끊어질 수 없으니까.”부생의 말은 점점 격해졌다. 억울함을 토해내듯 쏟아냈고, 표정에는 끝내 감추지 못한 체념이 어렸다.그 말을 듣자마자 봉한설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헛소리하지 마!”그녀는 손가락으로 부생을 가리키며 분노를 터뜨렸다.“연강호 밑에 붙은 뒤로, 네가 한 짓이 뭔지 알아? 처음엔 폐하께 독을 쓰고, 그다음엔 폐하를 꼬드겨서 나와 황후 마마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지. 심지어 황후 마마의 정체를 알고 나서는, 연강호랑 온갖 탐욕스러운 인간들까지 끌어들여서 죽이려고 했어. 이제 와서 그게 다 화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우리를 바보로 아는 거야?”부생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됐거든!”봉한설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너, 이미 일불락 따위는 안중에도 없잖아. 그냥 높은 데 올라가고 싶었던 거지. 처음엔 연강호였어. 그 인간이 진짜 장생불사라는 걸 몰랐으니까, 옆에 붙어 있으면 너도 덕 좀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러다 나중엔 진국 황후 자리까지 노린 거고. 황후 마마 대신 그 자리에 앉아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던 거잖아. 하! 꿈 깨.”가차 없는 말들이 쏟아졌다.부생은 더는 반박하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었다. 서인경은 그 모습을 보며 이미 답을 알 수 있었다.봉한설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이제 부생은 쓸모를 다한 말에 불과했다. 그녀가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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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8화

“천한 인간 주제에, 일불락 앞에서는 그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개미 같은 존재일 뿐이야. 배울 필요도 없어. 네가 아무리 호신술을 익혀 봤자, 일불락 사람들 앞에서는 결국 도마 위에 오른 고기 신세일뿐이니까!”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한설이 한 발짝에 거리를 좁히며 손을 올렸다.찰싹!둔탁한 소리와 함께, 부생의 얼굴이 한쪽으로 세게 꺾였다.순식간에 반쪽 얼굴이 붉게 부어올랐다. 부생의 태도에 봉한설은 유난히도 예민하게 반응했다.“입 닥쳐!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남을 비웃어? 네가 이렇게까지 일불락에 먹칠을 하고도, 아직도 적이 모자란 줄 알아? 네가 화족의 마지막 혈맥이라고 해서 황후 마마 앞에서 멋대로 굴어도 되는 줄 알아? 너 같은 혈통은 없어도 상관없어!”부생의 입가에 기괴하게 일그러진 웃음이 번졌다.“당신은 못 합니다.”그 말투는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었다.“설산에 있는 일불락 유적에는 각 부족이 남겨 둔 결계가 있어요. 그 안에는 각 부족의 신물도 보존되어 있고. 그 결계를 열려면 모든 부족의 혈맥이 한자리에 모여야 하거든요. 저는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화족의 피입니다. 제가 죽으면, 당신들은 평생 그 결계를 열지 못해요. 유적에 들어가지 못하면 일불락은 영원히 부흥할 수 없습니다!”그제야 서인경은 깨달았다.이게 바로 부생이 그토록 거리낌 없이 굴 수 있었던 이유였다.애초에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임선우가 네가 화족 후손이라는 걸 알고 있었느냐?”부생이 순간 멈칫했다.서인경은 똑똑히 보았다. 그녀 입가에 걸려 있던 미묘한 웃음이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순간을.그제야 마음이 반쯤 놓였다.“역시 모르고 있었네. 아니면 너 같은 인간은 애초에 임선우랑 엮일 기회조차 없었겠지.”부생은 왜 갑자기 임선우 얘기가 나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무지한 만큼 대담했다. 그녀는 비웃듯 턱을 치켜들었다.“그자가 나를 만날 자격이 없는 것이죠! 어디서 굴러먹다 온 사기꾼이, 감히 제 신분을 알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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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9화

봉한설은 부생을 죽이지 못한 사실 때문에 얼굴에 분노와 아쉬움이 가득했다.“마마, 왜 저걸 살려두는 거예요? 저건 우리 일불락 사람이 될 자격도 없어요. 저런 걸 살려두는 건, 그냥 화를 키우는 거라고요!”서인경은 담담히 그녀를 달랬다.“이미 쓸모없는 사람이다. 더 이상 위협이 되진 못해. 화족의 다른 후손도 아직 못 찾았으니, 찾은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다.”혹시라도 화족의 다른 후손을 찾지 못하거나, 혹은 그들이 서인경과 뜻을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부생의 피가 아직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봉한설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죽일 수 없다는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됐다.서인경은 이어서 아직 약을 먹지 않은 병사들을 살펴보았다.부생이 사용한 환술은 그리 고급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설령 서인경이 오지 않았더라도 한 시진이 지나면 병사들은 스스로 깨어났을 것이다.하지만 전장에서는 한 시진은커녕, 단 한 순간의 방심도 치명적이었다.그 사이, 맹경운은 내내 곁을 따라다니며 초조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리고 서인경을 바라보는 시선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이전에는 그저 평범한 여인이라 여겼다. 그저 얼굴이 조금 예뻐 겨우 연기준의 눈에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알았다. 그녀가 연기준의 곁에 설 수 있는 이유는 결코 외모 따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그의 눈에 비친 서인경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한편, 호청은 그런 맹경운의 변화를 보며 은근히 흐뭇해했다.자신도 똑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으니까.다만 자신은 더 일찍 알아봤다. 그게 은근히 자랑스러웠다.그래서일까,솥에 물을 붓는 손길도 괜히 더 분주해졌다.맹경운은 그런 호청의 속내를 전혀 모른 채, 서인경 옆에 공손히 서 있었다.“황후 마마, 그 환술이라는 게… 정말 풀 방법이 없는 겁니까?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이 생기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서인경은 병사의 맥을 짚고 눈꺼풀을 들어 올려 살폈다.병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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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0화

맹경운이 멍한 얼굴로 서 있는 걸 보자, 호청의 마음속에 은근한 우쭐함이 차올랐다.“이 녀석아, 네가 모르는 게 아직도 한참이다. 좀 배워 둬라.”말을 마치고는 국자에 담긴 온천수를 소중히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취사병을 찾아 나섰다.맹경운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진국의 이 황후에 대해 아직도 아는 게 너무나 적다는 걸.서인경이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연기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물어보니, 한 시진 전부터 서재에 들어간 뒤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꼬막이는 마침 대장과 함께 권법을 주고받고 있었다.동작은 아직 어설펐지만 기합 소리만큼은 제법 기세가 있었다.서인경이 바라보자 녀석은 일부러 주먹을 두 번 더 휘두르며 자랑하듯 눈을 반짝였다.‘어머니, 저 잘하죠?’그 눈빛은 마치 이렇게 물어보고 있는 듯했다.서인경은 망설임 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역시 우리 아들, 최고야. 정말 잘했어.”칭찬을 받자마자, 꼬막이는 더욱 신이 나서 주먹을 휘둘렀다.이 부자(父子)는 하나같이 서인경의 칭찬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타입이었다.그때 촌장 부인이 갓 만든 다과를 들고 나왔다.손에는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황후 마마, 방금 도착한 편지입니다. 평이라는 아가씨가 사람을 시켜 보냈다 하더군요.”서인경은 곧장 편지를 받아 펼쳤다.봉한설도 곁으로 다가왔다.“평이 언니가 뭐라고 했습니까?”서인경은 편지를 훑어본 뒤, 그대로 봉한설에게 건넸다.“평이가 말하길, 금수 대장공주랑 야랑국의 덕비가 산에 들어간 뒤로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구나. 헌데 오늘부터 산을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고 무슨 큰일을 준비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고 적혀있다. 게다가 닭이랑 오리 같은 산 짐승을 백 마리 넘게 사서 들여보냈다는데…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는구나.”‘백 마리 넘는 닭과 오리.’그 말을 듣는 순간, 촌장 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면 장생불사술과 관련된 거예요. 그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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