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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181 - Chapter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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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1화

막효연는 옅은 웃음을 띠며 비꼬듯 말했다.“어머나? 팔리기 어려운 물건이고, 날씨도 이미 따뜻해져 수요가 줄었을 텐데 오히려 값을 올리다니. 황 사장님께서 언제 이렇게 장사 수완이 서툴러진 거지?”점원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이게… 그게…”서인경은 이미 눈치를 챘다. 백호 가죽은 꼭 사서 할아버지의 여비로 챙겨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호구가 될 수는 없는 법. 그녀는 곁에서 거들어 준 막효연에게 눈길을 주며 점원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이렇게 하지. 지금 바로 주인어른께 여쭤보거라. 오백 냥이면 내가 바로 가져가겠다.”“예, 마님, 막 아가씨. 두 분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곧 확인하고 오겠습니다.”“수고하거라.”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점원이 안쪽으로 사라지자 막효연은 몸을 기울여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속지 마십시오. 황 사장께서는 이틀 전부터 가게를 비웠다고 들었습니다. 뜬금없이 삼백 냥을 더 올린 걸 보면 분명 저자가 자기 주머니에 넣으려는 술수일 거예요.”서인경은 비로소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아가씨 덕분에 돈을 뜯기는 일은 면했습니다. 저는 서인경라 합니다. 시댁 성은 엽이지요. 낙엽의 엽. 아가씨의 존함은 무엇입니까?”막효연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이제부터는 내가 경이라 부르겠네. 그쪽도 그냥 내 이름으로 부르면 되네. 내 이름은 막효연,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흑시 동성(东城)의 성주, 막수한이네. 혹시 동주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겐가?”서인경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세상에! 점원이 그녀에게 함부로 굴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흑시는 동서남북 네 명의 성주가 나누어 다스리는데 그 가운데 동성의 성주는 모든 성주의 우두머리이고 흑시 창립 원로의 의자로 입적된 장남이라 위세가 가장 높다고 했다. 그녀는 이제 막 동주에 발을 들였을 뿐인데 곧장 왕자격의 인물을 만나 버린 셈이었다.“맞네. 내 남편이 병이 들어 약을 구하러 온 길이지.”“그럼 제때 찾아온 셈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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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두 벌의 외투는 색상만 달랐지 모양은 동일했다. 하나는 하얀색, 또 다른 하나는 핑크색.막효연이 지금 보고 있는 외투는 매혹적일 만큼 고왔다.서인경은 점원에게 손짓했다.“저거 좀 내려 주겠느냐?”그녀는 곧장 막효연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아까 큰 도움을 받았으니 이걸 선물로 드리겠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막효연은 두 손을 내저었다.“안 되네. 난 그대의 고마움을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저 옷이 탐 나서 원래 직접 살 생각이었네.”서인경이 점원에게 값을 물으니 이번에는 숨김없이 정직한 대답이 돌아왔다.“한 벌에 은 일백 냥입니다.”서인경은 가슴속에서 매끄럽게 은표 두 장을 꺼내 탁 놓았다.“괜히 사양하지 말게. 우리 눈길이 같은 모양의 외투에 머문 것도 인연이지 않겠나? 곧 흑시에 가면 분명 폐를 끼치게 될 텐데 이건 미리 주는 사례라 생각하게.”돈을 아끼려 하지 않는 서인경의 태도에 막효연은 더 이상 고개를 젓지 않았다. 그녀도 하녀에게 눈짓을 보내 온조와 함께 외투를 정갈히 싸 들게 했다.“그럼 사양하지 않겠네. 대신, 꼭 우리 집에 와야 하네. 남편분과 함께 와서 내 집에 머무르시게. 우리 집 요리사가 손맛이 좋아 직접 대접해 주고 싶어 그러네. 만약 오지 않는다면 내가 많이 서운할 걸세.”두 사람은 어느새 오래된 벗처럼 마음을 나누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그때였다. 갑자기 공기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아악! 내가 점찍어둔 옷은 어디 갔느냐? 누가 감히 먼저 가져간 것이냐!”서인경과 막효연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거만하고 오만한 낯짝이 시야에 들어왔다. 상대 역시 막효연을 발견하자마자 기세등등하게 다가왔다.“역시 너였구나, 막효연! 넌 왜 뭐든 나랑 부딪히는 건데? 묵염 오라버니까지 빼앗더니 이제는 내가 점찍어둔 옷까지 내 손에서 가로채?”방금 전까지 부드럽게 웃고 있던 막효연의 얼굴이 단숨에 얼어붙었다.“라은정, 말 가려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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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화

스스로 이길 힘이 없으니 결국 어른한테 고자질하겠다며 울부짖다니...서인경은 순간 실소를 삼켰다. 이건 초등학생들 싸움도 아니고 대체 뭐 하는 꼴인가.그 오만방자한 기세는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 원주인이었던 자신보다도 더 가관이었다. 문밖에는 이미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얼핏 들은 몇 마디 말로도 대강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라은정, 또 다른 성주의 딸이자 막효연의 약혼자인 묵염을 탐하는 경쟁자.그 때문에 어디서든 막효연과 부딪히며 눈에 띄는 곳마다 적대감을 드러낸다는 것.막효연는 그녀가 바닥에 드러누워 발을 구르며 우는 꼴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됐어! 체면 좀 지켜. 옷은 네게 줄 테니 얼른 일어나 집에나 가.”서인경은 눈을 크게 떴다. 아까 그 당당하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쉽게 물러서는 것일까? 그러나 라은정은 아예 땅에 주저앉아 다리를 마구 걷어차며 버텼다.“싫어! 난 두 벌 다 가질 거야!”“네가 도를 넘는구나!”막효연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욕을 억지로 삼켰다. 라은정은 눈물을 찍어내면서도 독기 서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다 네 탓이야! 왜 저 여자가 널 잡아 끄는데 그냥 가만히 내버려둔 건데?”“웃기지 마!”막효연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내 뺨은 터졌겠지. 라은정, 세상이 다 네 것인 줄 알아? 네 버릇을 다 받아줘야 속이 시원하겠어?”“싫어, 싫다고 했어! 안 줄 거면, 난 곧장 너희 집에 가서 고해버릴 거야! 외지인까지 끌어들여 날 괴롭혔다고!”피가 거꾸로 솟는지 막효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좋아! 네가 가겠다면야 말리지는 않을 게!”예전 같으면 통했을 협박이 전혀 먹히지 않자 라은정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인경은 슬며시 막효연에게 속삭였다.“혹시 그대 부모님께 이 일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겐가?”막효연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집안이 저 아이 집안에 빚을 졌다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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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화

“큰, 큰 아가씨… 마님께서 아시면 크게 노하시지 않겠사옵니까?”취영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러자 라은정이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돈을 내거라! 그건 내 어머니 돈이다!”취영은 속으로 수없이 한숨을 삼켰다. 이 말 안 통하는 주인을 어찌하랴. 그녀는 결국 얌전히 은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이로써 서인경은 순식간에 흥정을 두 번 한 셈이 되었다. 처음에 점원에게서 백호 가죽을 삼백 냥 깎아내더니 이제는 값이 이백 냥밖에 안 되는 외투 두 벌을 라은정에게 사백 냥에 넘겨버린 것이다.기분이 좋아진 서인경은 한낮이 되자 사람들을 데리고 동주 최대의 주루(酒楼:술집)로 향했다. 위층의 넓은 객실을 통째로 빌린 후 모두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막효연에게 차례대로 소개했다.“이 셋은 내 동무들이네. 평이, 온조, 그리고 육승. 이름으로 부르면 되네.”막효연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나눈 뒤 옆에 선 소녀를 가리켰다.“여긴 내 곁을 지키는 시녀, 소민이네.”한자리에 모인 이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자 막효연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서인경을 바라보았다.“경이, 라은정은 서성의 성주 라채월이 가장 아끼는 딸이네. 그녀 역시 딸 못지않게 고집이 세기로 유명하지. 그러니 앞으로 마주치거든 가능하면 피해 다니는 게 좋을 걸세. 겁이 나서 그러는 게 아니라 괜한 번거로움은 피하자는 뜻이네.”“그래서 그동안 줄곧 그렇게 두 모녀를 떠받들며 지낸 겐가?”서인경이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막효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아네. 그렇게 하면 저들만 더 기세등등해질 뿐이라는걸.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도 그 여인만은 어쩌지 못하네. 일이 커지면 집안의 추문이 되니 그냥 눈 감고 넘어가실 뿐이지.”‘추문이라… 이 흑시의 뒷이야기인 건가? 은근 흥미롭군.’서인경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서성의 성주가 여인라는 뜻인 겐가? 그럼 라은정의 아버지는 누구인 겐가?”그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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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화

라은정의 오라버니 이야기가 나오자 막효연은 또다시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그 집 아들은 라운석이라고 하네. 얼굴 생김새가 아비였던 라북명과 꼭 닮았지. 그래서인지 어머니인 라채월은 아들을 볼 때마다 원수라도 본 듯이 막 대했네. 그 애는 태어난 순간부터 그녀의 수치로 낙인 찍혔으니까. 라북명이 죽고 난 뒤에 그녀의 행패는 더욱 심해져 오히려 아들을 괴롭히는 걸 낙으로 삼을 정도였다네.”막효연은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어렸을 때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그 애를 불쌍히 여겨 우리 집으로 데려와 돌본 적도 있었네. 하지만 채월이 몇 번이고 집 앞에서 난리를 치며 막 씨 집안이 라북명이 죽은 틈을 타 라 가의 어린 주인을 빼앗아가려 한다고 소리쳤지. 결국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돌려보냈네. 그 뒤로 라운석은 완전히 기가 꺾였지. 늘 눈치만 봤고 큰 소리가 나면 벌벌 떠는 아이로 성장했네. 그런 그가 어찌 어머니와 여동생의 행패를 막을 수 있겠나?”평이는 순진한 표정으로 듣다가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세상에… 제 자식에게 남편의 죄를 뒤집어 씌우다니요. 그런 어미가 어디 있답니까?”서인경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왜 막효연이 이야기를 하는 내내 한숨만 내쉬고 있었는지. 모두 듣기만 해도 저절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얘기였다.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억지로 낳게 된 아이를 혐오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라채월은 어미이기 전에 한 인간이지. 그녀는 자기 과거를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그 과거를 만천하에 들추며 발작하듯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아들은 벙어리처럼 짓눌려 살고 딸은 버릇없는 채로 자라나 제멋대로 날뛰니… 그것 역시 일종의 복수 같군.”“복수?”막효연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그래. 그대 부모님을 향한 복수. 자신이 불행할수록, 그대 부모님은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니까. 그리고 죽은 라북명에 대한 복수도 있겠지. 무덤 속에서라도 자기 아이들이 이렇게 망가져 가는 걸 보게 만들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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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장을 봐 온 것이냐?”연기준이 고개를 들고 물었을 때, 서인경은 양손 가득한 짐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지친 듯 침상에 털썩 앉아 손을 내저었다.“평이야, 아까 그 목도리, 얼른 찾아보거라!”평이가 짐을 뒤적이더니 금세 회색빛의 보송보송한 털목도리 하나를 꺼냈다.서인경은 그것을 받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기준의 앞에 섰다.“고개 숙여 보세요.”그가 미소 섞인 눈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자 서인경은 능숙하게 목도리를 그의 목에 두르고 두어 번 감아 정리해 주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서서 뿌듯하게 바라보았다.“흠, 잘 어울리네. 이게 바로 패션이지!”“…뭐라고?”“좋아 보인단 뜻입니다.”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면서 다시 짐을 뒤적였다. 이번에는 같은 색의 털로 된 손목 보호대를 꺼내더니 그의 손목에 끼워 보았다.“자, 이건 어떻습니까?”연기준은 책을 내려놓고 꼼지락거리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담담히 말했다.“이건 조금 촌스럽군. 본왕은 검은색을 더 좋아한다.”“쳇, 젊은 나이에 맨날 검정, 흰색뿐이라니. 재미없습니다.”서인경은 투덜거리면서도 꿋꿋이 손목에 그것을 채워 주었다.“그래도 상공의 성격을 생각해서 회색을 골랐습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분홍색으로 씌워 줬을 겁니다.”연기준은 자신이 분홍색 목도리와 손목 보호대를 찬 모습을 잠시 상상하고는 이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상상은 차라리 지워 버리는 게 나았다.어느새 육승, 평이와 온조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고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서인경은 오늘 산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마치 자잘한 수다처럼 쏟아냈다.“내일은 흑시가 열리니까 저희는 동성 막씨 집에 묵기로 했습니다. 효연이 말로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조용히 지내셔서 뒷마당은 아주 한적하다더군요. 그곳에서 숨어 지내면 저희 신분도 감출 수 있기에 딱 좋습니다.”연기준은 그녀가 입에 올린 이름을 곱씹었다. 막효연이라…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듯한데.“그 막효연이라는 자 혼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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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서인경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황제는 매번 새로 즉위할 때마다 흑시와 협상을 벌인다지요? 이번엔 누가 파견됐습니까?”연기준은 턱을 괴고 작은 침상에 몸을 기대어 있었다. 그의 목과 손목에는 그녀가 씌워 준 보송보송한 털 장식이 매달려 있어 꼭 한량 귀공자 같은 모양새였다.그의 눈길은 탁자 위에 놓인 닭고기를 스쳐지나 다시 그녀에게로 옮겨졌다.“그냥 이렇게 빈손으로 묻는단 말이냐?”서인경은 그의 뻔뻔한 태도를 단박에 읽고 즉시 닭을 뜯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리 하나를 잡아 뜯어 그의 앞에 내밀며 웃었다.“자, 받으세요.”기름 냄새가 진하게 퍼지자 연기준은 눈살을 찌푸렸다.“본왕에게 이걸 뜯어 먹으라는 것이냐?”순간, 서인경은 집에서 그가 닭을 먹을 때를 떠올렸다. 뼈를 발라내어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야만 젓가락을 드는 까탈스러운 버릇.‘허참, 전쟁터를 누빈 장군이 어찌 이리 까다롭담?’서인경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방긋 웃었다.“잠깐만요. 금방 해 드릴게요.”그녀는 접시와 젓가락을 챙겨 와 닭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답답했는지 손으로 직접 뼈를 발라내며 닭 한 마리를 완벽하게 분리해 뼈까지 깨끗이 추려냈다.“이제야 만족하시겠어요?”연기준은 그제야 흐뭇하게 닭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 그는 살점을 맛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십여 년 전, 황제가 막 즉위했을 때 흑시와의 협“국구라…”상에 보낸 이는 바로 지금의 국구(国舅:황후나 귀비의 형제), 하선준이었다.”서인경은 닭을 해체하느라 기름 범벅이 된 손을 허공에 턱 걸친 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그럼 혹시, 그가 흑시의 누군가와 손잡고 몰래 거래를 트진 않았을까요? 이를테면 유월비설 같은 물건을.”연기준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실종된 소녀 사건과 하선준은 무관하다.”“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연기준은 씹는 것을 멈추지 않고 흐트러짐 없는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했다.“그가 개입했다면, 목적은 반드시 태자를 위해 세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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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화

저건 제 아들을 새 황제의 옥좌를 지탱하는 도구로 삼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만민을 저버리지 않겠다, 황실을 저버리지 않겠다...?그런데 만약 그의 생모가 정말 태황태후에게 목숨을 잃었다면 황실은 이미 오래전에 그를 저버린 것이 아닌가.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자 서인경은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손이나 씻고 올게요.”그 순간, 연기준은 막 고기를 집으려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그 닭... 뜯기 전에 손은 씻었느나?”서인경은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머뭇거렸다.“씻… 씻었…을 걸요…?”연기준은 그녀의 눈빛을 한 번만 보고도 답을 알아냈다.‘안 씻었군.’순간, 입안에 남은 닭고기 맛이 살짝 뒤틀렸다.그 시각, 흑시 동성의 가장 크고 화려한 저택 안.막효연은 오늘 장만한 건 별로 없었지만 표정은 마치 큰돈이라도 벌어들인 듯 들떠 있었다. 그녀는 문턱을 넘자마자 곧장 한 여인에게 달려들었다.“어머니!”봉수정은 고개를 돌려 와락 안겨드는 딸을 받아안았다.“다 큰 애가 어찌 저리 덤벙대는 것이냐?”말은 나무라는 듯했지만 손길은 다정했다. 그녀는 막효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곱게 매만져 주며 미소를 지었다.“오늘은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전지가위가 들려 있었다. 봉수정은 막 가지치기를 하려던 모양이었다.막효연은 서둘러 그것을 빼앗아 하인에게 맡기고는 어머니를 부축해 툇마루의 의자에 앉혔다.“어머니, 제발 좀 쉬시라니까요. 또 이런 일 하시면 어떡합니까?”봉수정은 두어 번 가볍게 기침을 하며 웃었다.“놀고만 있자니 답답해서 그런다. 요 며칠은 몸이 훨씬 나아진 걸 모르느냐? 얼굴빛도 돌았잖니.”막효연은 어머니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과연 혈색이 지난번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그녀는 그제야 오늘 있었던 일을 신나게 털어놓았다.“오늘 제가 아주 특별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분께서는 절 도와 라은정을 곤란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점심도 함께 먹었어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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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듣다 못한 막수한이 나서서 말했다.“정아, 너무 염려 말거라. 효연이 이미 약속을 했으니 이제 와서 번복할 수는 없지 않으냐? 사람을 집으로 들이되 똑바로 지켜보면 된다.”“한데…”봉수정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이었다. 그러자 막수한은 아내의 어깨를 다독이며 시선을 딸에게로 돌렸다.“곧 손님이 오지 않느냐? 어서 방부터 마련하거라.”“알겠어요, 아버지!”막효연은 기뻐서 폴짝 뛰더니 바람처럼 사라졌다.봉수정은 그런 딸을 보며 눈을 흘겼다.“상공께서는 늘 저 아이만 두둔하시는군요.”막수한은 딸의 뒷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아내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괜찮다. 효연은 좀처럼 바깥에서 친구를 사귀는 성격이 아니지 않느냐? 이번만큼은 기죽이지 말고 지켜보자고.”그 역시 곁에 앉으며 목소리를 낮췄다.“이번 흑시에 누군가 유월비설을 찾는다는 말이 들려왔다.”봉수정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치켜떴다.“누구요? 대체 무슨 목적으로?”“들리는 소문으로는 병든 남편을 고치려는 상인이라더군.”“그럴 리 없어요.”봉수정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어머니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유월비설로 병을 다스릴 줄 아는 이들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막수한의 눈동자가 깊어졌다.“이유야 어떻든 그 약을 노리는 자가 해를 끼친다면 이 땅을 무사히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봉수정의 가냘픈 손가락이 그의 손등을 꼭 움켜쥐었다.“상공께서는 오래전부터 흑시 안에 그 약을 거래하는 자들이 숨어 있다고 의심해 왔지요. 이번이 정말 그 단서를 찾을 기회라면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막수한은 아내의 손을 거꾸로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사태가 간단치 않겠지. 정아, 너는 차라리 효연을 데리고 장모님 댁에 가 있거라. 일이 끝나면 데려오겠다.”봉수정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상공이 있는 곳이 제가 있을 곳입니다. 효연도 마찬가지예요. 괜히 따로 떼어 놓으면 더 눈치채고 근심할 겁니다.”막수한은 결국 체념한 듯 숨을 고르며 말했다.“좋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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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라은정은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굳었으나 곧 억울함에 입술을 내밀었다.“고작 이백 냥이잖아요. 우리 라 가가 돈이 아쉬운 집안도 아니고!”라채월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 속에 깃든 건 실망인지 아니면 속으로 기다리던 대답을 얻은 기쁨인지 알 수 없었다.“그래, 라 가는 돈이 모자라지 않아. 하지만 어리석은 건 넘치도록 많지. 오늘 널 속인 자가 누구라 했지?”딸은 어머니의 앞말은 흘려듣고 뒷말에만 정신이 팔렸다.“외지인 같았어요. 막효연이 그녀를 경이라 불렀는데 아마 이제 막 사귄 친구 같았습니다.”“막효연…”채월은 그 이름을 낮게 읊조리며 알 수 없는 기색을 띠웠다.“봉수정의 딸이 제법이네. 벌써부터 외부 사람을 끌어들여 내 아이를 손보려 하는 걸 보면.”라은정은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분노해 준다 착각하고 곧장 입을 열었다.“그럼요! 막효연은 자기 편만 믿고 우쭐댔다니까요!”그러나 채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옷 두 벌을 집어 든 채 차갑게 명했다.“사람을 불러 당장 불사르거라.”그러자 한 하인이 즉시 앞으로 나와 옷을 들고 나가려 하자 라은정은 눈이 동그래졌다.“어머니, 안 돼요! 제발, 이건 제가…”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채월이 눈을 번뜩이며 위압감을 드러내자 그 눈빛에는 모성의 온기라곤 한 치도 없고 숨 막히는 경고만이 가득했다.“옷 따위에 목매기 전에 차라리 진묵염을 되찾아 오거라. 하찮은 옷 한 벌에 속아 이백 냥을 내주고도 스스로 기특하다 자랑하는 꼴이라니. 네 아버지처럼 구렁텅이에 곤두박질치는구나. 그 어리석음은 뼛속까지 빼다 박혔어!”라은정은 질겁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어머니가 등을 돌려 떠난 뒤에야 간신히 중얼거릴 수 있었다.“자기 손으로 쟁취하지 못하면서 왜 저만 탓하는 것입니까?”뒤돌아 나오려던 그녀의 눈에 기둥 뒤에서 엿보는 시선이 포착되었다. 라은정은 방금까지의 기죽었던 태도는 모두 사라지고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여인이 곧 진묵염에게 시집간다는데 좋습니까?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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