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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171 - Chapter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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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서인경은 정월 초하루 저녁,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했다.늙은 장군은 입으로는 규율에 어긋난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얼굴에 드러난 기쁨은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부관도 연신 감탄하며 말했다.“장군님께서 오늘은 밥 한 그릇 더 드셨사옵니다.”함께 저녁을 먹고 난 뒤 서인경이 장군댁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은근슬쩍 내비치자 서회윤은 두말없이 두 사람을 내쫓았다.상왕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서인경은 연신 투덜거렸다.“할아버지께서는 너무 인색합니다. 하룻밤도 못 자게 하다니요.”그러자 연기준이 대답했다.“내일은 잘 수 있지 않느냐?”진국에서는 정월 초하루에 딸이 친정에 머무는 행동은 불길하다고 여겼다. 오늘도 연기준이 함께 따라오지 않았다면 이 소식은 궁궐에 들어가 큰 문제로 번질 수도 있었다.그녀는 이미 이런 풍습을 여러 번 들어왔다.21세기에도 정월 초하루에는 남자들이 이혼당한 누이나 집 없는 여동생을 쫓아내 호텔에 묵게 했다는 뉴스를 접하곤 했다. 그때는 룸메이트들과 함께 욕을 퍼부으며 분개하던 기억이 선명했다. 봉건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기에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만약 자신이 평범한 집안에 시집왔다면 상관없었겠지만 문제는 상대가 연기준이라는 것. 그는 황가와 직접 연결되어 있으니 괜히 구설에 오르면 끝도 없을 것이다.자신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그녀는 결국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다.그날 밤 서인경은 조심스럽게 연기준에게 물었다.“내일은 몇 시에 입궁합니까?”연기준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묘시 사각이다.”서인경은 힘겹게 시간을 따져보았다.묘시는 새벽 5시, 사각은 15분씩 네 번이니, 아침 6시쯤. 그때는 아직 해도 뜨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기쁨과 불쾌함 사이에서 출렁거렸다.서인경은 억지로 표정관리를 하며 말했다.“너무 일찍 일어나면 제가 잠을 설치니 오늘 밤은 서재에서 주무세요.”그러자 연기준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의 반응에 서인경은 곧바로 축 늘어진 모습을 하고는 투덜거렸다.“어제도 잠을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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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방 안을 둘러보니 탁자 위의 찻잔은 엎어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한 장의 흰 종이가 놓여 있었다. 유모는 그것을 꺼내어 부관에게 건넸다. 그는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 본 순간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저도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평이와 온조는 제가 데리고 갈 테니 여인의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연기준은 이 편지를 읽고 난 후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서인경이 어째서 갑자기 정월 초하루에 장군댁으로 돌아가려 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어젯밤 자신을 서재로 내쫓았는지를 말이다.이것은 모두 일찍이 계획된 일이었다.그는 육승과 안포를 곁에 붙여 감시하게 했으니 그녀가 벗어날 길은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둘은 쓸모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서인경은 애초에 그들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지금 두 사람은 무릎 꿇은 채 군영 앞에 늘어져 있었고 속으로는 분통을 터뜨렸다.자신들은 그럴듯하게 연기했다고 믿었지만 왕비의 연기가 더 뛰어나 그만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왕비가 정말로 자신들을 믿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 보니 완전히 착각했던 것이었다.열다섯 째 황자는 서회윤과 함께 말을 타고 들판을 질주하다가 땀에 흠뻑 젖은 채 군영으로 뛰어들어왔다.“황숙! 뭐 하고 계십니까? 우리 달리기 시합 한 번 해봅시다!”연기준은 서인경을 닮은 얼굴을 마주 보며 차갑게 대답했다.“네 누이는 세상 구경을 가 버렸는데 네놈은 어찌 아직도 놀 생각만 하는 것이냐?”그러나 소년의 눈은 오히려 별빛처럼 반짝였다.“누님은 진짜 멋집니다! 저도 따라가고 싶어요!”뒤이어 들어온 서회윤은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무슨 일인지 대충 감을 잡았다. 그는 연기준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고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어찌 이 자식은 그리 잔꾀가 많은지!”연기준은 차갑게 그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서인경은 지금 어린 소녀들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러 간 것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걱정도 되지 않습니까?”그 말에 서회윤은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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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심지어 도팔천이라 불리던 약왕곡에서도 이 약초를 재배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이 약이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은 동주의 ‘지하흑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약왕곡을 제외하고 이런 약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거기였으니.서인경은 이들을 추적하며 머릿속으로 처참한 소화의 시신을 떠올렸다.온조의 여동생, 그리고 수많은 어린 소녀들이 지금도 비인간적인 행위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반드시 이 극악무도한 조직을 뿌리째 뽑아버리리라!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단 가의 거대한 음모와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당장이라도 단 가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유월비설을 입에 털어 넣어 주고 싶었다. 그들이 남에게 가한 그 죄악을 스스로 똑같이 맛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새벽 어둠이 가시기 전에 출발한 세 사람은 정오가 되어서야 작은 읍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반나절이나 말을 탄 평이는 밥을 두 그릇이나 비운 뒤에야 겨우 힘을 내 입을 열수 있었다.“마마, 왜 육승과 안포는 부르지 않은 것이옵니까?”그 둘이 함께 왔다면 평이는 굳이 혼자 말을 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연풍에게 무술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기승법을 익혔을 뿐인데 한 번에 이렇게 먼 길을 달리니 몹시 힘들었다. 서인경은 갓 물어뜯은 만두를 씹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온조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아직도 모르겠느냐? 그 둘은 사실 왕… 아니, 공자께서 마마 곁에 일부러 붙여둔 사람들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서인경은 볼을 빵빵하게 불린 채 엄지를 치켜세우며 동의했다.그러자 평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건 어떻게 알아낸 것입니까?”온조는 태연히 답했다.“겉으로는 전혀 티가 안 나지. 연기를 잘했으니까. 이건 그냥 짐작일 뿐이다. 왕야의 성격에 쫓아내려던 사람들을 어찌 왕비 곁에 붙여 두겠느냐?”서인경은 만두를 삼키고 두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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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개 같은 남정네!상왕부가 파산이라도 했단 말인가? 방 하나 더 잡을 돈도 아낄만큼?서인경은 육승과 안포가 쫓아올 거라는 짐작은 했으나 정작 연기준이 몸소 나타날 줄은 예상치 못했다.이튿날 아침,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서자 마당 한편에 세 개의 머리가 맞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평이, 육승과 안포 세 사람이서 서로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육승과 안포는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평이의 키를 맞춰주려는 것인지 허리를 잔뜩 굽히고 있었다. 반면, 평이는 등허리를 곧추세우고 마치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듯 목소리에 힘을 주어 호령했다.“경고해두겠어요. 저는 마마 곁에서 가장 총애 받는 사람입니다. 마마께서는 제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죠. 그러니 만약 귀군들께서 앞으로도 마마 곁에 남고 싶다면 예전에 제가 했던 말들은 모두 잊으세요. 누구 하나 연풍 귀군 앞에서 입을 놀린다면 가만두지 않겠어요!”육승은 순순히 몸을 굽혀주었으나 그의 말투에는 성가신 기색이 역력했다.“알았다니까. 오늘만 벌써 팔백 번은 들은 것 같네.”하지만 안포는 부드럽게 말하며 그녀를 달래주었다.“평이 누님, 안심하세요. 전 기억력이 나빠서요. 누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벌써 까맣게 잊었습니다!”평이는 흐뭇하게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역시 안포 귀군께서는 눈치가 있으시군요.”그때, 계단 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보니, 연기준과 서인경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급히 몸을 꼿꼿이 세우며 일제히 인사했다.“어르신, 마님, 아침 인사 올리옵니다!”그들은 경성을 떠나며 서로 호칭을 다르게 부르기로 결정했다.연기준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서인경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좋구나, 연기도 잘하고 몸놀림도 재빠르니 역시 내 상공(相公:주로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말로 사용됩니다)께서 데려온 사람들이구나.”평이는 또랑또랑한 콧소리를 내며 ‘흥’ 하고 거들었다. 그 한마디가 서인경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듯싶었다.육승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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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연기준은 손수 찢어낸 만두를 우아하게 씹어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마침 한가하던 참이다. 네가 보고 싶다던 세상, 함께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서인경은 할 말을 잃었다.“할아버지께서는 곧 막북 변경으로 떠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상공께서는 돌아가 군을 지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연기준은 태연하게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부장들을 그리 많이 둔 게 허투루 밥만 먹으라고 둔 줄 아느냐? 젊은 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지.”서인경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건 분명 자신이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는데 돌고 돌아 스스로의 발등을 찍은 셈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 억지로 쫓아낼 수도 없었고 힘으로 제압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결국, 그녀는 체념한 듯 모든 것을 운명이라 여기며 받아들이기로 했다.동주까지는 아직 쉰 리 남짓.후반부에는 마차로 갈아탔고 그녀와 연기준은 나란히 같은 공간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서로 오고 가는 대화가 없어 그들 사이에는 정적만 흘렀다.연기준은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고 서인경은 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짜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쫓아낼 수 없다면 차라리 이용해야지.그는 어쨌든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든든한 방패 아닌가.그때, 그녀의 머릿속이 번쩍하며 묘책이 떠올랐다.“저기, 상공… 동주의 관리들하고 안면이 있습니까?”연기준은 고개를 저었다.“이름 정도는 알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다.”“그 사람들은 상공의 얼굴을 압니까?”“동주 전역의 관원 서른두 명 가운데, 다섯 해 전 조정에 들어온 자는 자사 유박문 하나뿐이다. 하지만 그 무렵 본왕은 변경에 있었으니 결국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셈이지.”서인경은 손바닥을 짝하고 맞부딪쳤다.“됐습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연기준은 그녀의 호들갑에 눈을 가늘게 떴다.“무슨 꿍꿍인 것이냐?”서인경은 두 주먹을 꽉 쥐며 말문을 열었다.“앞으로 상공께서 기억해야 할 건 인물 설정입니다. 저희 둘은 지금부터 집안이 넉넉한 상인 부부입니다. 한데 상공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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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연기준의 마음은 이미 들썩이고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먼 길을 달려온 그녀를 배려해 욕망을 억누른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반면, 서인경은 분통이 터졌다.분노의 화살은 두 갈래였다. 느닷없이 농을 던지며 다가오는 연기준이 원망스러웠고 그의 두세 마디 말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려 솔직하게 반응해오는 자신이 미웠다.평이와 온조 앞에서는 뭐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는데 정작 연기준 앞에서는 매번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그녀는 어떻게 해도 연기준을 이길 수 없었다.서인경은 그를 무시하고 손끝이 떨리는 걸 억누르며 지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강제로 그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기 위함이었다.연기준이 몸을 기울여 다가오려는 순간, 서인경은 눈을 번뜩이며 그를 노려보았다.“멀리 떨어지세요. 이 늙은 망나니 같은 인간!”연기준은 태연히 몸을 뒤로 젖히며 얄궂게 미소 지었다.“망나니는 그렇다 쳐도 늙었다는 건 지나치군.”서인경은 눈을 흘겼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 여진을 억누르며 오로지 지도에만 몰두했다.지도를 따라 눈길을 옮기던 그녀는, 동주의 최북단 험준한 산기슭에 새겨진 이름 하나에 시선이 멈췄다.‘지하흑시’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천여 년 전부터 전설로만 내려오던 장소였다. 그러나 백여 년 전, 이 세상에 실체를 드러내더니 순식간에 비밀스럽고 거대한 거래의 중심지로 성장했다.겉으로는 동주 땅에 속하지만 실상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곳이자 진국의 국경 안에서 유일하게 조정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땅이었다.그곳은 흑과 백,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백― 여기에는 절대적인 규율이 존재했다.동서남북 네 명의 성주가 함께 흑시를 다스렸으며 그 누구든 규칙을 어기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제조차도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결국 그들의 룰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네 가문이 지닌 힘이 결코 보통이 아님을 의미했다.흑― 법으로 금지된 모든 거래가 이뤄지는 곳.세상에 드문 보물, 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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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서인경은 눈을 또르르 굴렸다.“허, 이거 정말 죽기 일보 직전 같은데요?”연기준은 기운 한 줌 쓰지 않고 다른 이의 손을 뿌리쳤다.마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온몸을 서인경에게 기댔기에 보는 이들 눈에는 그저 다정한 부부 같았다.서인경은 속으로 그가 일부러 그러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계획을 위해 이를 악물고, 무거운 몸을 억척스레 짊어진 채 계단을 올랐다. 아래층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오자 서인경은 애써 고개를 돌려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실례합니다. 제 남편은 불치병에 걸려 곧 쓰러질 몸입니다. 이번 동주행은 목숨을 살릴 약을 구하러 온 것이지요. 이 병은 조금만 시끄러워도 발작을 일으켜… 사람을… 깨물기도 해서…”허리를 덥석 꼬집히는 바람에 마지막 말은 이상하게 꺾여 나왔다. 아래층 사람들은 오히려 그 소리를 아내의 울먹임으로 오해했다. 곧, 한 선량한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위로했다..“부인, 너무 근심 마십시오. 돈만 있으면 흑시에서는 못 구할 약이 없습니다. 반드시 쾌차하실 거예요.”서인경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 남편이 그리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겠지요.”하지만 그녀의 어깨 위에 얹힌 이 거구는 점점 더 무겁게 그녀를 짓눌러 왔다.서인경은 더는 입을 뗄 여유도 없이 숨 가쁘게 계단을 올라갔다.방에 들어선 후 문이 막 닫히기도 전에 연기준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날렵한 움직임은 조금도 병색과 어울리지 않았다.육승과 안포가 방 안팎을 먼저 살폈다. 그들이 머물 방은 이층 최고의 객실로 마치 현대의 스위트룸 같았다. 밖에는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널찍한 거실이 있었고 안쪽에는 작은 침실이 따로 있었다. 두 사람은 구석구석 살핀 뒤 돌아와서 보고했다.“어르신, 안전하옵니다.”연기준은 손을 들어 그들을 물러나게 했다. 서인경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상공은 절대 밖에 나갈 생각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상공을 데리고 나간 사람이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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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연기준은 바깥 응접실의 작은 탁자에 앉아 들어오는 육승과 안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육승.”그의 음성은 낮고 묵직했다.“흑시가 열리기 전까지 본왕은 밖에 나설 수 없다. 네가 한 걸음도 떨어지지 말고 왕비를 지키거라. 그녀의 안전에 만에 하나라도 허점이 생긴다면 본왕은 너에게만 책임을 물을 것이다.”엄중한 명령에 육승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예, 명 받들겠사옵니다.”이어 연기준은 품 속에서 반쪽짜리 옥패와 밀봉된 서찰 한 장을 꺼내어 손짓으로 안포를 가까이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더 낮아졌다.“너는 흑시 북성의 성주 진묵염을 찾아라. 그에게 이 옥패의 나머지 반쪽이 있을 것이다. 옥패가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진가를 가릴 수 있다. 진짜 진묵염이 맞다면 그때 이 서찰을 건네 주거라.”안포는 긴장된 눈빛으로 두 물건을 조심스레 받아 품에 넣었다.“명심하겠사옵니다.”한편, 안쪽 방에서 서인경은 잠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문틈 사이에 귀를 바짝 붙여 모든 대화를 엿들었다.연기준이 육승에게 자신을 보호하라 지시하는 건 들었다. 그러나 안포에게 내린 명령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묘하게도, 진짜 중요한 건 그쪽인 것 같은데.그가 동주에 온 건 단순히 그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겉으로는 왕비를 따라온 것이라 했으나 실제로는 다른 목적이 있는 듯했다.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서인경은 문틀에 몸을 기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순간, 문이 불쑥 열리더니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분명 잠자리에 들겠다던 사람이 왜 거실에 나타난 걸까?연기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서인경은 어색하게 몸을 똑바로 세우며 중얼거렸다.“저… 물을 많이 마셔서, 자다 말고 화장실이 급해서… 에에…”그러나 그는 곧장 서인경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았다. 연기준은 그녀를 단숨에 안아올려 거침없이 침실로 향했다.“잠이 오지 않는다면, 다른 걸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그러자 서인경의 뇌리에 즉각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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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연기준은 이미 마음속으로 수많은 대비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실제로 서인경의 목에서 붉게 빛나는 혈적자를 보았을 때 그 순간의 파문은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앞날이 걱정되었고 또한 평생을 잊지 못할 벗이었던 도팔천의 죽음을 떠올리며 애도를 삼켰다.서인경은 그의 손목을 놓으며 태연히 말했다.“상감께서 스스로 무덤을 파지 않는 한 몸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연기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가슴께로 손을 뻗어 펜던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이건 어디서 난 것이냐?”서인경은 슬쩍 고개를 숙여 한 번 보고는 망설임도 없이 거짓말을 내뱉었다.“며칠 전 장터에서 산 것입니다. 예뻐 보여서요.”연기준은 속으로 비웃었지만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저 펜던트를 그녀의 옷깃 속 깊이 밀어 넣으며 낮게 말했다.“이건 잘 간수하거라. 절대 남의 눈에 띄게 하지 말고.”서인경은 곧 눈치를 챘다. 그의 표정에서 분명히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낌새가 보였으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자신이 지어낸 허술한 거짓말을 그가 일부러 덮어주는 듯했으니. 그녀는 잠시 펜던트를 다시 꺼내어 빛에 비춰 보았다.“왜요? 이게 뭔지 압니까?”연기준은 침대 머리에 반쯤 기대어 팔을 베고 눕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옛 전설을 들은 적 있다. 혈적자는 한 신비한 민족의 상징이라지. 그들은 독을 다루고 짐승을 길들이며 점을 치고 미래를 내다보는 자들이었다고 하거군. 그래서 늘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에게 침탈 당했고 그 땅의 사람들은 노예로 전락했다지.”서인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예전에 육승에게서 들었던 일불락(日不落)이라는 종족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혈적자가 그들의 상징이라는 것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미신을 누가 믿습니까?”연기준의 눈빛이 잠시 깊어졌다.“만분의 일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통치자는 반드시 손을 뻗는다. 혹여 이게 진짜든 가짜든 네가 그것 때문에 그 자들의 눈에 띄게 된다면 억울해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서인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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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산 아래에 사는 사냥꾼들은 그야말로 산짐승을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자들이었다.법으로 금지되지 않은 이 땅의 또 다른 삶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서인경은 머지않아 북방 전장으로 향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큰마음 먹고 하나 사드리기로 했다. 상점 정문, 가장 눈에 띄는 곳에는 눈부신 백호의 모피로 만든 대의가 걸려 있었다. 온통 백설처럼 희디흰 털은 빛을 머금은 듯 윤이 흘렀다. 죽기 전까지 그야말로 왕처럼 살아갔을 짐승의 위엄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서인경은 이 모피가 마음에 들어 바로 점원을 불러 세웠다.“이 옷, 좀 볼 수 있겠나?”점원은 단박에 귀한 손님이 왔음을 알아챘다. 그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재빨리 탁자 위로 올라가 손끝으로 조심스레 옷을 내렸다.“아이고, 마님! 안목이 예사롭지 않으십니다. 이건 흔히 구할 수 없는 백호 가죽이랍니다. 몇 해 동안 이런 모피를 들여오지도 못했는데 지난달에야 사냥꾼이 가져왔지 뭡니까. 저희 주인어른께서 어제서야 공정을 마치셨고 오늘 아침 막 걸어둔 따끈한 신상품입니다.”서인경은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가늠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웃으며 눈길로만 농을 던졌다.“듣고 보니 마치 나를 위해 맞춤한 것 같군.”점원의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입을 털었다.“마님의 상공은 반드시 비범한 분일 것입니다. 이런 옷은 오직 마님처럼 신분이 남다른 분에게나 어울리지 다른 이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내지요!”서인경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남편을 위한 게 아니다. 나는 할아버지께 드리려는 것이지.”점원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곧장 능청스럽게 말을 바꾸었다.“어르신께서는 참으로 복도 받으시군요. 이런 손녀를 두셨다니 분명 무덤 속에서도 웃으실 겁니다. 저희 집에 마님 같은 손녀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희 할아버지는 아마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수도 있을 겁니다.”서인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이 집이 장사가 잘되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네. 입을 이토록 잘 놀리니 팔리지 않을 물건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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