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진묵염은 다정스레 막효연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미소를 띠며 서인경과 연기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엽 씨 마님, 엽 도련님. 지하흑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착각일까? 서인경은 “엽 도련님”이라는 호칭과 연기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묘한 뉘앙스가 실려 있음을 감지했다.연기준은 언제나 그렇듯 낯선 이에게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서인경이 대신 예를 표했다.“친히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를 끼쳤습니다.”막효연은 서인경에게 팔짱을 끼고 그녀를 안으로 이끌었다.“여긴 처음 온 것이니 산책하면서 둘러보는 게 좋네. 우리 집도 성문에서 멀지 않다네.”서인경은 뒤돌아보며 속삭였다.“상궁, 먼저 마차 안에서 기다리세요. 도착하면 부를 테니.”어찌 되었는 병약한 인물 설정은 철저히 지켜야 했다.연기준은 때맞추어 두어 차례 기침을 하더니 천천히 마차로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진묵염이 서둘러 팔을 뻗어 그의 팔꿈치를 붙잡았다.“엽 도련님, 몸이 불편하시잖습니까? 엽 도련님, 천천히. 엽 도련님, 다치면 곤란합니다.”연신 세 번 “엽 도련님”이라 부르는 진묵염의 태도는 자못 뿌듯하면서도 어딘지 속을 뒤집는 듯했다.그러나 연기준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온몸의 무게를 고스란히 그의 어깨에 실었다.“저는 몸이 불편하니 성주께서 부디 수고해 주시길.”불시에 덮쳐온 무게에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묵염은 거의 연기준을 부축하다 못해 떠맡으며 마차 안으로 그를 밀어 넣다시피 했다.서인경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어째서인지,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흘러나왔다. 브로맨스처럼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인 걸까? 그녀는 지금껏 연기준이 남자와 저렇게 가까이 닿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일행이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넓은 한가운데에 우뚝 선 것은 높이 두 장, 너비 열 장에 달하는 거대한 공시판이었다.허나 이 시각, 공시판은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서인경은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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