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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161 - Chapter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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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화

진보이는 철저히 누군가의 계략에 빠졌다.그 자는 여인의 소중한 정절을 짓밟기 위해 가장 추악한 방법을 쓴 것이다.그리고 그 꾀임에 말려 들어간 여인이 하필 그의 핏줄이었다.진방옥은 마치 벌레라도 삼킨 듯 속이 메스껍고 역겨웠다.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이 더러운 소용돌이 같은 경성에는 오지 않았을 텐데.진보이와 단평안이 끌려갔지만 이 일은 여기서 일단락되지 않았다.이날 밤 벌어진 일은 이미 너무나 많은 이들이 목격했으니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다.황제는 분노를 터트리며 단 가와 진 가를 호되게 꾸짖었다. 그리고 어명을 내려, 어림군에게 이 일을 철저히 수사하도록 명했다.“궁 안에서 이런 더러운 수작을 벌인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거라. 그리고 당장 사형에 처하도록!”폐전을 빠져나온 뒤에도 서인경은 곧장 출궁하지 않았다. 그녀는 숙귀비를 따라 궁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숙귀비는 얼굴을 굳히며 황자에게 쏘아붙였다.“꿇어라!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너 때문에 네 사촌누이가 화를 입을 뻔했다!”열다섯 째 황자는 이미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궁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불안에 떨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다 숙귀비의 호통이 떨어지자 그는 무릎을 꿇으며 끝내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어머니, 누님, 송구하옵니다.”서인경은 그가 겁에 질릴까 염려해 반쯤 무릎을 굽혀 손수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사내대장부는 함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법이다. 무성아, 울지 말거라. 대신 네 누님에게 설명해 주렴. 어찌하여 그리로 달려갔던 것이냐?”황자는 흐느낌 속에서 어렵게 답했다.“깜쟁이를 쫓아가다가 그만...”깜쟁이는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켜온 강아지였다. 이유만 놓고 보면 그럴듯했지만 서인경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판 함정임을 직감했다.“유모, 깜쟁이는 찾았느냐?”계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찾았사옵니다. 지금 마당에 있사옵니다.”“고모, 깜쟁이를 꼭 살펴보게 해주세요.”그 말뜻을 단번에 알아챈 숙귀비는 눈짓을 보냈고 곧 유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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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서인경은 잠시 동안 일의 맥락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걱정과 불안을 숙귀비에게까지 전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그녀는 숙귀비에게 작별을 고하고 열다섯 째 황자를 달래준 뒤 곧장 궁을 떠났다.그녀가 막 문을 나서자, 어둠 속에 서 있는 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희미한 불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서인경은 문득 생각했다.‘이 남자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배신 당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을까?’하지만 그의 반응은 지나칠 만큼 차분했었다. 사랑의 유무를 떠나 사내라면 누구라도 쉽게 참아낼 수 없는 일이었을 텐데.왕부로 돌아오는 길에 서인경은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연기준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본왕은 처음부터 안에 있는 게 네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서인경은 그 대답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떻게 알았습니까?”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너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으니까.”서인경은 얼떨떨해 그에게 되물어 보았다.“목소리요?”잠시 후 그녀는 그 말의 뜻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서인경은 손에 잡힌 방석을 그의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당신... 콜록콜록… 이 못된 놈!”연기준은 오히려 기분이 좋은 듯, 방석을 옆으로 던져두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마차가 왕부에 닿자 서인경은 잽싸게 내려 안으로 달려갔다. 더는 이 개 같은 남자와 말 섞고 싶지 않았다.반면, 연기준은 천천히 내려 곧장 밤바람을 맞으며 유유하게 걸어갔다.“왕야, 확인되었사옵니다. 단평안은 도사원 감옥의 수직을 매수하고 단 가의 마차를 따라 궁에 들어갔다 하옵니다. 궁 안에서의 구체적인 일은 아직 조사 중이나 내일 중으로 결과가 나올 것이옵니다.”어둠 속이라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매섭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수직은 즉시 참수하거라! 단평안의 죄도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니 단효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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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하지만 이번 생에는 종소리도, 박수도, 잊지 못할 밤도 없었다. 올해의 새해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전정에서는 부관이 하인들을 불러 모아 폭죽을 터뜨렸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장난스런 아우성이 사방으로 튀는 불꽃들과 한데 어우러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대조되는 집 안의 조용한 공기가 오히려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서인경이 두어 번 바깥을 흘낏 바라보자 연기준이 곧장 물었다.“나가서 보고 싶은 것이냐?”불꽃놀이는 이미 궁안에서 실컷 보았기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그리고 아까 하도 많이 집어먹었던 터라 그녀는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굳이 안 가도 됩니다. 저기 있는 사람들끼리 신나게 놀면 되지요. 만약 우리가 나간다면 다들 눈치 보지 않겠습니까?”사실상 연기준을 배려해서 한 말이었다. 맨날 빚이라도 잔뜩 진 사람처럼 얼굴을 굳히고 있으니 사람들이 폭죽 하나 터뜨릴 때조차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서인경의 대답에 연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더 이상 훠궈를 먹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연기준은 갑자기 몸을 숙이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서인경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연기준은 그녀를 품에 안고 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상을 아직 치우지도 않았습니다. 이따가 평이가 들어오면 다 볼 텐데요.”연기준은 태연하게 대꾸했다.“그 정도 눈치도 없는 애라면 네 곁에 둘 이유가 없지.”창밖에서는 불꽃이 연이어 터져 올랐고 방 안에서는 더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연기준은 마치 약이라도 먹은 듯 거칠었고 그 때문에 서인경은 버티기 어려웠다.정신이 아득해지던 순간 갑자기 어깨를 물어뜯는 듯한 통증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부릅뜨고 연기준을 노려보았다.“연기준, 너 개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야?”연기준은 이미 감정에 휩싸여 눈꼬리가 붉게 물든 채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네가 개를 좋아한다지 않았느냐?”차라리 그와 화이해서 강아지 상인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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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태황태후와 진선엽은 이번 일의 배후가 단 가라고 단정했다.상왕비와 진 가, 두 집안 모두와 이해관계에서 충돌하는 집안은 단 가 말고는 없었다.목적은 분명했다. 진보이가 대황자의 측비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태황태후가 버티고 있으니 단여월은 언젠가 자신의 정비 자리마저 위태로워질까 두려웠을 것이다.한쪽에서 진방옥은 조용히 모든 말을 듣고 있었다. 이제 그는 단 가 사람과 혼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늘 원하던 결말을 얻었지만 마음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소원을 이룬 대가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전각 안, 진보이는 이미 안신약을 먹었으나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그녀는 악몽에 시달리며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진가이는 줄곧 그녀의 곁을 지키며 땀을 닦아주고 물을 먹이고 이불을 덮어주며 자매로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진가이의 눈가가 울음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슬픔은 없었다. 차갑고 얄팍한 빛만이 깃들어 있을 뿐.배후의 손길을 짐작한 태황태후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황제의 침궁으로 들이닥쳤다. 그 시각, 황제와 황후는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고 졸지에 태황태후의 방문에 후다닥 깨어났다. 사정을 들은 황제는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황조모, 이는 어디까지나 황조모와 진 대인의 추측일 뿐입니다. 아무런 증거 없이 곧바로 사람을 잡아들이라 명하면 조정은 신망을 잃을 것입니다. 짐이 이미 사람을 보내 조사 중이니 진상이 드러나는 즉시 진 아가씨의 억울함을 풀어주겠습니다.”그러나 태황태후는 물러설 뜻이 없었다.“보이가 대황자의 측비로 정해졌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일 아니더냐? 하필 이때 보이를 함정에 빠뜨리다니! 이는 곧 황은을 우롱하는 짓이다. 네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절대로 못 참는다!”그녀는 눈빛을 번쩍이며 황후에게 따졌다.“황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황후는 최대한 존재감을 낮추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지목을 받자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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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단여월과 단은설은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단효산은 목을 곧추세운 채 호되게 그들을 꾸짖었다.“내가 뭐라 했느냐? 진 가와는 평화롭게 지내라 하지 않았더냐! 누가 감히 진 가 사람을 건드리라 했느냐?”단여월이 서둘러 변명했다.“아버지, 딸은 분명 아버지의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보이의 일은 정말 저희와 무관합니다.”그러나 단효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네가 아니면 또 누가 있단 말이냐? 진 가가 이제 막 경성에 들어왔는데 누가 무슨 이유로 그들을 해치겠느냐!”단은설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그건 서인경입니다. 아버지, 틀림없습니다. 딸은 분명히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녀가 끌려 들어가는 것을. 그런데 모두가 도착했을 때 안에 있던 이는 보이였지요. 분명 서인경은 몰래 빠져나가고 보이를 대신 희생시킨 겁니다.”단효산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또다시 서인경이로구나!”단여월은 곧장 말을 보탰다.“아버지, 이번 일은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합니다. 진 가에 사과드리고 평안도 계략에 말려든 것이라 하는 게 어떻습니까? 진보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아내로 맞겠다고 합시다. 그렇게 하면 진 가와의 관계도 깊어지고 모든 책임은 상왕비에게 떠넘길 수 있습니다.”진 가는 태황태후를 등에 업고 있었으니 단효산 역시 일찍이 그런 계산을 했었다.다만 진 가의 두 딸이 눈이 높아 늘 황실에 시집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기에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단효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 또한 이득이었다.“부인은 서둘러 준비하세요. 내일 아침 일찍 우리가 객잔으로 가겠습니다.”서인경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른 채 곯아떨어졌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햇살이 창밖에 가득 비치고 있었다.배가 고파 몸을 일으켜 시각을 보려던 찰나 신음이 흘러나왔다.그 소리에 연기준이 즉시 눈을 떴다.“어떻게 된 것이냐?”보통이라면 그녀가 깨어날 때는 이미 자취를 감췄던 그가 옆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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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서인경은 힘이 약해 금세 연기준에게 제압당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그때 창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왕야, 궁에서 전갈이 왔사옵니다.”연풍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왕야와 왕비의 은밀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젯밤 연기준이 명을 내린 바 있었다. 어떤 상황이든 결과는 즉시 보고하라고.그의 말에 연기준의 동작이 잠시 멈칫했다.“말하거라.”서인경도 잠시 반항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단 가의 본래 의도는, 지난 섣달 그믐밤에 단평안을 데리고 폐하께 직접 아뢰어 과거의 죄를 사면 받는 것이었다 하옵니다. 단평안은 어화원을 거닐다 폐하를 뵐 기회를 엿보던 중, 우연히 진보이와 마주쳤다 하옵니다. 그리고 그 약에 관해서는… 궁녀 하나가 여러 가지 말린 꽃을 잘못 섞어 썼다고 하옵니다. 각각 따로 쓰면 무해하나 섞이면 최음 작용을 일으킨다고 하더군요. 그 궁녀는 이미 곤장살을 당했고 단 가는 이른 아침부터 두터운 예물을 들고 진선엽을 찾아가 진보이를 단평안의 아내로 맞아 명예를 지키겠다고 했사옵니다. 진 가는 보이의 명예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응했다 하옵니다. 폐하께서는 왕야께서도 태황태후와 진 가의 체면을 세워주라 하시며 단평안은 가벼운 처벌로 그치라는 뜻을 내리셨사옵니다.”참으로 가볍고 대수롭지 않게 덮어버린 결말이었다.이토록 추잡한 사건조차 이렇게 쉽게 가려질 수 있다니. 단 가는 분명 궁 안에도 든든한 뒷배가 있을 것이다.어쩌면 어제 궁 안에서 독이 묻었던 그 거문고조차 단 가와 궁중 세력이 결탁해 벌인 짓일 터.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상인 집안인 단 가가 궁 안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리 없었다.태황태후가 친히 나섰기에 진 가 사람에게 해를 가할 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권세가 닿는 이는 황제와 황후뿐이었다.서인경은 입술을 깨물며 많은 생각을 했다.“궁은 험준한 곳이라더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로군. 이 일, 태황태후께선 끝내 추궁하지 않으셨더냐?”밖에서 연풍이 대답했다.“황후께서 진보이를 의붓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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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평이는 연풍이 나오는 걸 보고는 엉덩이를 툭 털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그러자 연풍이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아직 주무시고 계신다. 들어가지 말거라.”평이는 정오가 다 된 햇볕을 보며 자기 왕비가 굶어 죽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서인경은 정말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굶어 죽지는 않았지만 거의 기절 직전까지 굶주려 있었다. 꿈속에서조차 배고파 쓰러지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눈을 뜬 후, 그녀는 연거푸 만두 두 개를 먹고 나서야 겨우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배를 채운 후 그녀는 익숙한 흰색 자기병을 꺼내어 그 안에서 있던 흰 가루를 조금 덜어내 물에 타서 마셨다.평이는 전에 왕비가 이 약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있어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하지만 온조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왕비마마, 그건 무슨 약입니까?”서인경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몸을 튼튼히 하는 약 이지.”온조를 믿지 않아서 거짓말로 둘러댄 것이 아니라 괜히 번거로워질까 싶어 그런 것이었다. 서인경에게 피임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터.혼인한 뒤에도 피임을 한다 하면 반드시 세상이 뒤집힐 대사건처럼 떠들썩해질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낫겠지.병 안에 약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보고 서인경은 조금 근심스러워졌다. 연구해 본 바, 이 약재 몇 가지는 확실히 피임 효능이 있었다.하지만 피임약만 쓰면 몸에 큰 해가 될 터. 그 부작용을 상쇄할 약재는 아직 연구해 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남겨둔 의서에도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연기준은 이 일에 유난히 집착했으니 반드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던 때 부관이 문간에 서서 그녀에게 말했다.“왕비마마, 왕야께서 부르시옵니다. 세뱃돈을 나눠줘야 하거든요.”진국에서는 정월 초하루에 하인들에게 세뱃돈을 주는 풍습이 없었다. 이건 오직 상왕부에만 전해 내려오는 관례였다. 이는 연기준의 생모가 살아 있을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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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연기준은 그녀의 등 뒤에 서서 서인경이 차츰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일흔을 훌쩍 넘긴 마부 노인 앞에서는 태연히 이렇게 말했다.“연세도 많으신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황혼 연애도 잘 되길 바라오!”연기준은 황혼의 연애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지만 글자 뜻만으로도 얼추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부는 무슨 뜻인지는 모르고 그저 축원의 말이라 생각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서인경은 덕담을 건네며 붉은 봉투를 나눠주었다. 자기 돈이 아니니 더욱 기분 좋게 건넬 수 있었다. 왕부의 인원이 워낙 많아 모두에게 나눠주고 나니 이미 반 시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관례에 따라, 세뱃돈을 나눈 뒤에는 또 하나 중요한 절차가 있었다.사당을 여는 일.다른 집안의 사당은 조상을 모시지만 연기준의 조상은 황가 사당에 모셔져 있기에 따로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상왕부의 사당에는 오직 한 사람, 그의 생모였던 희귀비만 모셔져 있었다.오늘은 정월 초하루일 뿐만 아니라, 희귀비의 기일이기도 했다. 서인경은 희귀비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지 않았다. 어릴 적 잠시 만났을 때 자신을 안고 사탕을 건네주었던 기억이 전부였다.인상 속의 그녀는 단아하고 온화하며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는 너그러운 여인이었다. 심지어 가장 거만한 궁비조차 그녀를 헐뜯은 적이 없었다. 당시 황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한때는 그녀가 차기 황후가 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그러나 그녀는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선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녀 또한 순장을 택해 황릉에 묻혔다. 아픈 데도 없고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선제와 함께 묻히기를 택한 것이다. 그 덕분에 온 나라가 그녀의 깊은 정에 감동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었다.서인경은 전생의 기억으로 알고 있었다. 순장은 눈속임에 불과했고 연기준을 달래기 위해 꾸며낸 말이라는 것을.그때 연기준은 어렸고 어머니에게 깊이 의지했기에 그런 설명만이 그가 받아들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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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연기준은 그 상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억울하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 본왕을 처음 보자마자 맛있는 건 전부 본왕한테 주겠다 맹세한 게 누군데! 겨우 사탕 하나 뺏겼다고 우리 어머니께 고자질이나 하고... 말 바꾸는 데는 아주 선수더구나.”서인경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정말 순전히 그의 얼굴에 홀려 세상 좋은 걸 다 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잘생긴 얼굴이라고 해도 몇 번 보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그 이후로 다시 만났을 때는 사탕 하나 주는 것도 아까워졌다. 자기 몫도 모자라니까.하지만 서인경은 억지를 부렸다.“그건 왕야의 어머님께서 제게 주신 거니까 당연히 남한테 주기 싫었지요.”그러자 연기준이 불쑥 물었다.“그때 네 나이가 몇 살이었느냐?”“세 살쯤?”연기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세 살 때 일을 그렇게 또렷이 기억한단 말이냐?”서인경은 말문이 막혔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원주인의 기억은 마치 다운로드한 드라마처럼 원할 때마다 수시로 꺼내볼 수 있었다. 그의 의심을 피하려 서인경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뻔뻔하게 말했다.“기억력이 좋으면 안 됩니까? 어릴 적 일은 다 기억합니다. 왕야의 어머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도 해주셨는걸요. 왕야께서 이불에 소변을 보았다가 울었다고... 그 이야기도 해드릴까요?”연기준은 불의에 목이 막혔다.“허튼소리!”서인경은 그가 약점을 잡힌 듯한 기세에 더욱 신이 났다.“흥, 왕야의 어머님 앞에서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제 말이 조금이라도 틀렸다면 오늘 밤 모비께서 제 꿈에 나타나 절 꾸짖으실 것입니다.”연기준은 속으론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자기가 진짜 오줌을 싸고 울었단 말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누가 믿겠는가!서인경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얘기를 지어내자 연기준은 눈을 흘겼다.“호칭 똑바로 하거라. 그분은 네 어머니이시기도 하다!”이번에는 서인경이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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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사당에서 나오니 이미 황혼이 깔려 있었다. 서인경은 홀로 쓸쓸히 새해를 맞고 있을 그 애틋한 노인을 떠올렸다.“저녁은 장군댁에 가서 먹을게요. 그러니 제 몫은 준비하지 마세요!”연기준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명령했다.“마차를 준비하거라. 본왕도 오늘 밤은 저택에서 먹지 않겠다.”서인경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친정에 간다 하니 연기준도 따라오려는 것이다.그 역시 뜻밖이었다. 해마다 정월 초이튿날에야 가던 그녀가 오늘은 초하루부터 친정을 찾겠다고 하니. 혹시 무슨 말썽을 부릴까 염려된 그는 그녀를 지켜보기 위해 함께 길을 나섰다.두 사람이 막 대문을 들어서자 부관이 크게 외쳤다.“아이고, 마마와 왕야께서 돌아오셨군요! 어서 장군께 알리러 가거라!”서인경은 곧장 할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되어 물었다.“할아버지 건강은 어떠느냐?”부관은 두 사람을 안으로 모시며 기쁜 얼굴로 말했다.“마마 걱정 마시옵소서. 장군께서 며칠 전 고뿔에 걸리셨으나 이제 거의 나으셨사옵니다. 마마와 왕야께서 오신다는 얘기를 들으면 분명 완쾌되실 것이옵니다.”멀리서 소리가 들리자 서회윤은 곧장 서재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핀잔을 주었다.“시집간 딸이 정월 초하루부터 친정에 오는 법이 어딨느냐? 상왕도 좀 말리셨어야지요... 참으로 제멋대로구나!”서인경은 문턱을 넘어 할아버지 팔에 안겨 그를 추운 곳에서부터 끌어냈다.“얼굴 좀 추스르세요. 입꼬리가 귀에 닿겠네! 저 말고 누가 할아버지 곁에서 새해를 함께 하겠습니까?”서회윤이 손을 들어 때리려 하자 서인경은 웃으며 몸을 피했다.연기준은 두 사람 뒤를 따라 들어와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서회윤은 입으로는 엄격하게 손녀를 타박했으나 행동은 전혀 달랐다. 잠시 장난을 주고받은 뒤에야 그는 연기준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능숙하게 스스로 차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아이고, 상왕. 접대가 부족했습니다. 경이야,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왕야께 차를 따르거라!”“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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