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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1화

서인경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러니 앞으로는 저와 거리를 두시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가급적, 열다섯 째 황자는 다른 곳으로 옮겨 지내게 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마의 아이들 둘 중 하나라도 저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는 정말 만 번 죽어도 그 죄를 덜지 못할 겁니다.”맹은영이 바로 발을 구르며 외쳤다.“왕비 마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건 마마의 잘못이 아니잖아요!”서인경은 맹은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대도 나와 거리를 두는 게 좋겠네.”그들은 연기준이 떠난 지금, 뒤에서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를 사람들이었다. 서인경은 그 누구도 함부로 위험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싫습니다!”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단호한 거절이었다.“저희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왕비 마마가 아니셨다면 전 아직도 병약한 몸으로 살았을 거라고 했습니다. 벌써 대황자에게 시집가 그 사람의 후원에서 잡아먹히고 있었겠지요! 전 어쩌면 진작에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저희 맹국공부 사람들은 평생 왕비 마마 편이에요. 저희가 왕비 마마 곁을 떠나게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서인경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고마움이 차올랐으나 동시에 그녀를 지키고 싶은 걱정이 겹쳤다. 무어라 입을 떼려던 순간, 신비가 그녀의 손을 거머쥐었다.“본궁은 목숨을 아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 곁에 서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우릴 가만히 두겠습니까? 굳이 피하려 하지 마세요. 열다섯 째 황자를 다른 데로 보낼 필요도 없습니다. 본궁은 남에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희를 위협하려 드는 자가 있다면 본궁이 맞서겠습니다.”“한데 마마 곁에는 열일곱 째 황자도 있고, 열여덟 째 공주도 있습니다.”서인경은 두 어린아이를 보며 더 깊은 걱정을 삼켰다.신비는 두 아이의 볼을 다독이며 씁쓸하게 웃었다.“이 아이들은 황실에서 태어났기에 애초에 편안한 삶은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버틴다면 그들의 복이고 버티지 못한다면 명이겠지요.”그녀의 단호함과 각오를 담은 한마디에 서인경은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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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2화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마음이 오갔다.신비의 침전을 나와도 맹은영은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후궁은 귀가 많고 눈이 많은 곳이라 그녀는 마음이 들끓어도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궁문을 지나 마차에 올라서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인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표정이 우스워 미소를 짓고는 옷매무새를 풀어 이미 배고파 팔과 다리를 허우적대던 꼬막이에게 젖을 물렸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시게.”그러자 막혔던 둑이 터지듯, 맹은영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세상에, 세상에! 제가 방금 들은 게 진짜입니까? 열셋 째 왕야의 죽음이 폐하와 관련 있는 겁니까?”서인경도 단정할 수 없어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폐하일 수도 있고, 태황태후일 수도 있네. 한 가지 분명한 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지. 아마 신비 마마조차 모든 진실을 알지는 못할 걸세.”맹은영은 더 불안해졌다.“그럼 상왕께서도 열셋 째 왕야처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럼 왕비 마마와 꼬막이는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바로 그때, 꼬막이가 힘껏 젖을 빠는 소리가 들렸다.‘제가 있는데 무슨 걱정입니까?’서인경은 피식 웃으며 꼬막이의 볼을 살짝 눌렀다.“병사가 오면 장수가 막고, 물이 밀려오면 흙으로 덮는 것이네. 지금 연기준이 없는 마당에 미리 걱정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지.”맹은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차 바닥에 털썩 누웠다.“역시 신비 마마께서는 세상을 너무 잘 압니다. 황실 사람으로 산다는 게 이리 버거운 줄이야.”맹은영을 맹국공부에 내려주고 마차는 다시 상왕부로 향했다.숨 막히는 하루, 서인경은 그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같은 시각, 또 다른 마차 안.서왕비는 정화의 손을 잡고 아이가 떠들썩하게 묘사하는 신비궁의 소동을 차분히 듣고 있었다.“할머니, 열여덟 째 공주가 오늘 정말 죽을 뻔했대요! 그래도 황숙모께서 계셔서 살았습니다. 황숙모는 정말 대단해요!”서왕비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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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3화

연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 저희가 걱정되어 일부러 떠난 척 연막을 쳤던 겁니까? 그래야 폐하께 이 성지를 청할 명분이 생기니까?”연기준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서인경은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당신답군요.”연기준은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아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했다.“앞으로 누구든 너를 궁에 불러들인다면 거절해도 된다. 연풍을 남겨 너를 지키게 할 테니 너는 여기서 편안히 기다리고 있거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서인경은 즉각 고개를 저었다.“안 됩니다. 연풍은 당신의 오른팔이잖아요. 당신이 위험할 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합니다.”“대신 무현를 데리고 갈 것이다. 그는 열셋 째 황숙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이니 믿을 수 있어.”무현라는 이름이 나오자 서인경은 바로 약왕곡의 약 꾸러미들을 꺼내 한 처방전과 함께 건넸다.“그분의 다리는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습니다. 이 약들을 먹고 나면 처방대로 약을 지어 계속 복용하게 하세요. 평범한 약재들이라 어디서든 살 수 있습니다.”연기준은 그걸 받아들며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또 내게 해줄 말이 있느냐?”서인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오늘 신비 마마의 말도 그렇고… 저희가 일찍 대비하지 않는다면 정말 열셋 째 왕야와 같은 결말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돌아오면 여기서 벗어날 방법을 함께 생각해 봅시다. 네?”연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가 곧 단단히 자리 잡았다.“좋다. 네가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서인경은 미소를 지었다.“당신, 예전엔 이렇게 말을 잘 들은 적이 없었는데요.”전생의 그림자만 없었더라면, 그리고 첫날부터 이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을까?연기준의 얼굴엔 욕정이 아닌, 오로지 그녀를 향한 연정과 아쉬움만이 고요히 번졌다.“내가 돌아오면 매일 네 말만 들을 것이다.”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은 다시금 그의 입술에 사로잡혔다.얽히고 설키며 파고드는 키스에 애틋함이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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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4화

단은설이 입궁한 뒤로, 황제는 한 번도 신비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신비 역시 그런 고요를 즐기며 열다섯 째 황자와 열일곱 째 황자, 그리고 열여덟 째 공주와 함께 네 사람만의 조용한 나날을 꾸리는 것으로 만족했다.신비는 성품이 유순하여 누구와도 다투지 않았고 그렇다고 함부로 그녀를 건드리는 이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일로, 그동안 잠잠했던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달라졌다.그날 오후, 신비는 자신이 갓 입궁했을 때 황제가 특별히 내려준 화려한 궁복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오래 봉인해 두었던 화장함의 뚜껑을 열었다. 곁에 있던 궁녀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다.“마마… 마침내 마음을 굳히신 거군요.”하지만 신비의 얼굴엔 기쁨이라곤 없었다. 그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처럼, 고요하고 단단한 표정만이 서려 있었다.“마음을 굳히지 않으면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오늘 내 친딸 하나조차 지켜내지 못할 뻔했다. 설령 언젠가 궁문을 나간다 해도 나 혼자뿐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신비는 원래부터 신묘하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가볍게 단장만 해도 그 고운 자태와 매혹적인 기운은 감히 견줄 이가 없었다. 궁녀는 몇 년 만에 보는 신비의 화려한 모습에 넋을 잃었다.“마마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둘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보시면 반드시 마음을 빼앗기실 겁니다.”신비는 동그란 놋거울 속의 자신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황귀비와 비교하면 어떠느냐?”궁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가장 진실한 마음으로 답했다.“황귀비께서 어찌 마마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마마는 태생부터 귀족 공주시라 기품이 남다르고 웃음 하나, 손짓 하나에도 품위가 깃들어 있지요. 그 황귀비는 한낱 상인 집안의 여식일 뿐, 어디를 봐도 졸렬한 티를 감출 수 없습니다.”신비는 미소를 지으며 먹을 내려놓았다.“네 입은 참으로 달콤하구나.”그러다 시선이 문쪽으로 옮겨지는 순간, 그녀의 웃음이 딱 멈췄다. 문가에 열다섯 째 황자가 서서 깊은 생각을 품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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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5화

신비는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올리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네 어머니께서 너를 참 잘 가르치셨구나.”신비가 떠나자, 열다섯 째 황자는 곧장 열일곱 째 황자와 열여덟 째 공주를 자신의 침전으로 데려갔다.“신비 마마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 셋은 한데 모여 있는 거야.”열일곱 째 황자는 이미 철이 들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여덟 째 공주는 두 오라버니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이 났는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이 셋이서 한데 모여 놀고 있을 때, 문득 익숙한 그림자가 조용히 들어섰다. 유모는 문턱을 넘자마자 열다섯 째 황자를 찾듯 눈을 고정시켰다. 그 시선을 감지한 듯, 열다섯 째 황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한 번 스쳤을 뿐인 얼굴인데도 어딘가 아련하게 익숙했다.유모는 너무 오래 주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탓에 늙은 유모에게 바로 꾸지람을 들었다.“아랫사람이 주인을 똑바로 보는 건 무례다!”꾸중을 들은 유모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허둥지둥 부엌 쪽으로 몸을 피했다.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열다섯 째 황자의 마음은 묘하게 흔들렸다.“저 사람은 누구냐?”궁녀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부드럽게 설명했다.“신비 마마께서 특별히 데려온 분입니다. 세 분의 수라를 맡는 사람이지요. 황자께서는 그녀를 운 유모라고 부르시면 됩니다.”“운… 유모?”열다섯 째 황자는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그림자를 한참이나 바라보며 속삭였다.어서재.그날 밤, 황제는 단은설의 패를 들고 있었다. 그때, 경사방(敬事房: 궁중에서 황제의 후궁과 궁녀의 관리, 일상적인 부부생활 관련 업무를 전담한 환관 조직의 핵심 부서) 태감이 물러나기도 전에 또 다른 태감이 급히 들어와 알렸다.“신비 마마께서 뵙기를 청합니다.”황제의 놀라움은 낮에 서재에서 연기준을 보았을 때만큼이나 컸다.“들게 하거라.”황제가 막 상소문을 내려놓았을 때, 눈부신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문으로 들어섰다. 찬란한 비단 옷이 몸 선을 따라 흘렀고 두 아이를 낳은 몸이라곤 전혀 믿기지 않을 만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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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6화

단은설은 분이 폭발해 침궁의 물건을 죄다 집어던졌다. 갓 떠온 따끈한 피 한 그릇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그 존재가 오히려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다.그 시각, 황후는 자신의 침전에서 태연히 향로에 향가루를 한 줌 더 올리고 있었다. 후궁의 일이란 어느 것 하나 그녀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저 황귀비, 어리석기 짝이 없군. 자업자득이지, 뭐.”곁에서 서 있던 유모도 맞장구쳤다.“마마께서는 분별이 밝으십니다. 후궁이라는 곳에 영원한 총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때 아픈 척 몸을 사리시는 게 가장 현명합니다.”황후는 향로 뚜껑을 덮고 유모의 부축을 받으며 침상에 몸을 기댔다.“내가 병든 체하는 건 모두 황자 때문이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아이를 풀어주지 않는다 했지? 이번 일은 정말로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야. 괜히 나서서 계속 구명해 봐야 괘씸죄만 쌓일 뿐이지. 차라리 폐하 앞에서 잠시 사라지는 편이 낫다. 곧 후궁이 황귀비 때문에 사달이 나기 시작하면 폐하께서도 다시 나를 찾을 테니까.”유모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마마께서는 어찌 그리 현명하신지요.”그러나 황후는 그 말에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침상에 기대어 눈을 감자 속에서 피로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대황자가 갇힌 이후로 그녀는 늘 기운이 모자랐다. 아침에 머리를 빗다가 하얀 새치 몇 올을 발견했을 때 폐하가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문득 알 것 같기도 했다.그녀는 후궁에서 평생을 조심하며 살았다. 하 씨의 영화를 위해, 폐하의 총애를 위해, 그리고 아들의 태자 자리를 위해 힘껏 버티고 견디며 싸웠다. 하지만 끝에 다다르니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만 늘어나는 듯했다.비록 지쳐도 포기할 권리는 그녀에게 없었다. 황가란 원래 그런 곳이니까. 총애를 잃는 순간, 곧 제물로 전락한다.황후는 다시금 눈을 뜨고 곧추앉았다.“내일부터 가이를 들여 병시중을 들게 하거라. 단여월은 궁에 들어온 지 꽤 됐건만 배에 아무런 기척도 없지 않으냐? 급할 때 보탬이 되기는커녕 사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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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7화

“그렇다면 상왕의 일은 어떻게 할 셈이냐? 너는 분명 나에게 약속했다. 가영이를 상왕부에 들이겠다고. 나는 더 이상 서인경이 저렇게 기고만장하게 구는 꼴은 참을 수가 없구나!”황제는 난처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황조모, 아홉 째 아우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일은 서두를 수 없습니다. 가영은 이미 사신단에 끼워 보내지 않았습니까? 아홉 째 아우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그 아이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부부 사이의 일은 결국 아우가 원해야 가능한 법이지요.”태황태후가 가장 답답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느끼는 지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기어이 연기준이 경성을 떠나게 만들었건만 정작 서인경을 어찌할 방법은 여전히 없었던 것이다.연기준은 은밀히 맹국공부와 서왕부를 움직여 서인경의 든든한 후견으로 세워 두었다. 그가 그녀에게 마음을 둘수록 태황태후의 살기는 오히려 더 짙어졌다.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상왕이 서 씨 집안 여인 하나에 휘둘리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상왕부에서 이 소식을 들은 서인경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반면, 곁에 있던 맹은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정말 잘 됐습니다! 궁에 황귀비가 하나 더 생겼으니 단은설이 이제 함부로 설치지 못하겠지요.”하지만 서인경은 조금도 웃지 못했다. 그녀는 짐작하고 있었다. 신비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분명 마음을 거스르는 선택을 했을 거라는걸.욕심 없던 사람이 갑자기 다투기 시작했다는 건 대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소설 속에서는 온순한 인물이 흑화 했다며 통쾌하게 소비되겠지만 정작 그 자리에 선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삼켜야 했는지는 묻지 않는다.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연기준은 사신단을 따라잡았다.그날 하루 마차 안의 사람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밤이 내려앉고, 마차가 역참 뒤뜰로 들어섰을 때 연기준과 체격이 흡사한 한 사내가 내리더니 곧장 암위들의 무리 속으로 섞여들었다.그 시각, 연기준은 막 역참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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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8화

그것도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그는 이들이 어떤 작자들이었는지조차 거의 잊을 뻔했다.침상 위의 여인은 허둥지둥 옷을 끌어당겨 걸쳤다. 옷매무새도 가다듬지 못한 채 침상에서 내려오다가 눈앞에 겨눠진 장검을 보고는 온몸이 떨려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조금 전, 침상에 오를 때의 그 기세와 자신감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왕야, 살려주십시오! 왕야,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이곳이 왕야의 방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연기준은 분노를 억누른 채 물었다.“넌 누구냐? 누가 너를 이 안으로 들였느냐?”여인은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저, 저는… 저희 아가씨를 모시는 몸종입니다. 저희 아가씨는 호부상서 유운상의 딸 유가영 아가씨입니다.”그 순간, 연기준의 분노는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누가 꾸민 짓이냐? 당장 캐내거라. 하나도 빠짐없이!”소란을 감지한 병부 관리가 급히 달려왔다. 방 안의 광경을 보고는 과거 연기준의 악명이 떠올라 그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떨며 외쳤다.“왕야, 부디 살펴주십시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연기준은 무현의 손에 들린 검을 낚아채 그대로 관리의 목덜미에 들이댔다.“사신단에 출처 불명의 자가 섞여 들어왔는데 네가 몰랐다고? 직무를 유기한 죄는 만 번 죽어도 모자라다!”검날이 빛을 가르며 들려 올라갔다. 관리는 다리가 풀려 버텨 서지 못했고 이내 방 안에 역한 오줌 냄새가 퍼졌다.“태, 태황태후입니다!”검이 찔러 들어가는 순간, 관리는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그러나 연기준은 멈추지 않았다. 장검은 그대로 관리의 어깨를 관통했고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피비린내와 오줌 냄새가 뒤섞인 방 안은 지옥처럼 참혹했다.연기준은 피 묻은 검을 무현에게 건네며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방을 나섰다.“말끔히 처리하거라. 다시는 본왕의 방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자가 없게 해야 한다. 다음엔 자비는 없을 것이다.”역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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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9화

그 유모는 태황태후가 직접 붙여 보낸 인물로 유가영을 돕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었다. 이전에도 그녀는 자주 연도현에게 들여보내질 여자들을 감시하러 보내졌었다. 도중에 겁을 먹고 물러서려는 이들을 다루는 일쯤은 이미 손바닥 보듯 익숙했다.“태황태후께서 뒤에 계시는데 아가씨께서는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정말 이대로 돌아가실 셈이신가요? 상왕을 잡지 못한다면 유 가는 태황태후께 아무 쓸모 없는 집안이 됩니다. 유 아가씨께서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유 상서께서 아가씨에게 과연 얼마나 더 인내심을 가질 것 같습니까? 듣자 하니 유 상서께서는 이미 화류병(花柳病: 성병)에 걸린 승상의 아들을 사위로 삼아 적출인 큰아들에게 앞길을 열어 주려 한다고 하더군요.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병든 남자에게 시집가 후반생의 행복을 통째로 망칠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남아 상왕비의 자리를 위해 한 번 크게 걸어볼 것인지.”선택지의 격차가 클수록 그 유혹은 더 치명적이었다. 유가영은 돌아가 맞닥뜨릴 자신의 운명을 떠올리자 온몸이 저절로 떨려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유모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저는 남겠습니다. 상왕비의 자리를 위해, 한 번 끝까지 가 보겠습니다.”유모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여 당부했다.“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이 자리가 누구 덕분인지 잊지 마세요. 태황태후께서 아가씨를 이 자리에 올려놓으신 겁니다. 베갯머리에서 불어넣을 말이 무엇인지는 아가씨께서도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유가영은 즉시 충성을 표했다.“염려 마세요, 유모. 태황태후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모두 태황태후의 뜻을 따르겠습니다.”어둠 속에 숨어 있던 무현은 입에 나뭇가지를 물고 소리 없이 비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이 자리를 떠난 뒤에야 그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연기준에게 보고하러 향했다.사신 길에 오른 도중, 연기준이 침상에 기어오른 여인을 거의 죽일 뻔했다는 일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중요한 소식은 늘 더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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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0화

소위 말하는 내연녀라는 표현 역시 서인경이 처음 가르쳐 준 말이었다. 맹은영은 이제 그 말을 제법 입에 붙여 쓰고 있었다.서인경은 난처한 듯 그녀를 흘끗 보았다.“사내가 정말로 바람을 피우고 싶어 한다면 그 상대가 누군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네. 그러니 내연녀를 찢어 봐야 소용없지. 후환을 완전히 끊고 싶다면 먼저 사내부터 찢어야지 않겠는가? 이 방법, 그대도 잘 배워 두시게.”“쯧.”맹은영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제가 그런 걸 왜 배웁니까? 저는 평생 시집도 안 갈 건데요.”그제야 서인경은 맹은영이 한때 대황자부에 시집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 궁사점을 없애고 평생 혼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물론 그때는 궁지에서 나온 임기응변이었지만 정말로 마음을 나눌 사람을 만난다면 서인경은 그녀가 행복해지길 바랐다.다만 맹은영이 정말로 개의치 않는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과거를 꺼내는 그녀의 말투는 지나치게 가벼웠다.“궁사점도 없으니 어느 사내도 저를 원하지 않겠지요. 한데 저도 맹국공 집안 권세나 노리는 속물 남자들은 질색입니다. 외삼촌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저 혼자 잘 살라고 큰돈을 남겨 두셨답니다. 조카들 역시 장차 제가 늙으면 자기가 모시겠다고 서로 나서고 있고요. 나중에 나이가 들면 폐하나 황후께서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실 테니 그땐 제가 뭘 하든 간섭할 사람도 없습니다. 돈이 있으니 영앤핸썸인 사내들이야 마음껏 즐기면 그만이지 않겠습니까?”영앤핸썸이라는 표현 역시 서인경이 알려 준 말이었다. 21세기 출신인 서인경도 맹은영의 이 같은 발상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담력도 있고 계산도 빠른, 그야말로 본받을 만한 인물이었다.더 말할 것도 없이 곁에 있던 연풍과 평이, 봉한설은 그저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중 서인경과 봉한설은 질투 섞인 부러움이었고 연풍과 평이는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그, 그런 삶도 가능한 겁니까?”“맹 아가씨는 정말로 세상 이치를 벗어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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