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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261 - Chapter 270

465 Chapters

제261화

서인경은 혹시나 약의 부작용이 발작한 건 아닌지 불안해져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녀가 문을 막 들어서는 순간, 차가운 손 한 쌍이 그녀를 문에 꾹 눌러 붙였다.연기준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의 안색만으로도 몸이 쇠약해졌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붉게 핏발 선 그의 눈동자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불길처럼 치솟아 있었다.“서인경, 네가 서 가의 군공을 빌미로 본왕을 억지로 혼인에 묶어둔 것이냐? 네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로구나!”뭐야, 이거.이 익숙한 소설 클리셰 같은 장면은 또 뭐람. 그런데 이건 이미 몇 년 전에 발생했던 일 아니었나?서인경은 턱을 거칠게 움켜쥐는 손에 짓눌려 눈물이 흘러나왔다.“왕야... 기억을 잃은 것입니까?”연기준의 손이 더욱 거세게 조였다.“아직도 연기하는 것이냐!”숨이 턱 막히며 질식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잠시 후, 서인경의 눈은 뒤집히며 흰자위가 드러났다.그때, 육승이 연기준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고 눈앞의 광경을 보자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잠시 후 호위들이 몰려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왕야, 제발 손을 거두시옵소서! 마마께서는 왕야를 구하셨사옵니다!”연기준은 그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그녀 같은 바보가 본왕을 구했다고?”젠장!서인경은 속으로 쌍욕을 삼켰다.‘내가 아니었으면, 넌 벌써 죽은 목숨이야!’육승은 상황을 모르고 있었기에 가장 간결한 말로 전후를 요약했다.“왕야, 지금은 왕야와 왕비 마마께서 혼인하신 지 삼 년째이옵니다. 저희는 지금 지하흑시에서 어린 소녀 실종 사건을 조사 중이었사옵니다. 어젯밤 왕야께서는 남산에서 독에 중독되셨고 그걸 마마께서 해독해 주신 것이옵니다.”혼인 삼 년째? 실종 사건?연기준은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손끝의 힘을 서서히 풀었다. 서인경은 그 틈에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휴, 하마터면 여기서 목숨을 잃을 뻔했네.’연기준은 그녀를 똑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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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화

“연기준...”연기준은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스치더니 곧 서인경을 통째로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상 쪽으로 향했다.“본왕이 너를 아내로 맞아들이겠다는데 아직도 불만인 것이냐?”불만은 무슨, 그녀는 이미 너무나 만족스럽다 못해 속으로 욕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몸이 이리저리 흔들리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감히 버둥거릴 수도 없었다. 혹여라도 이 허약한 사내가 발을 헛디뎌 그녀를 내던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넘어지면 그만이지만 자신까지 패대기쳐지면 안 되니까.“당장 내려오세요. 차라리 이야기라도 좀 합시다!”연기준은 뜻밖에도 말을 곧잘 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내려놓은 곳은 바닥이 아닌 침상 위였다. 그 순간 장막이 휙 드리워지며 눈앞의 빛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연기준은 단호히 그녀를 눌러 눕혔다.‘이게 무슨 해독제란 말인가? 이건 분명히 흥분제가 아닌가!’“이제 말해보거라!”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그녀가 한 마디만 내뱉으면 곧장 덮쳐들겠다는 듯한 위압으로 가득했다. 서인경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슬그머니 그의 맥을 짚었다. 그러면서도 말로 그의 시선을 끌어야 했다.“몸에 아직 독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무리하면 안 됩니다.”연기준은 입꼬리를 비틀며 대답했다.“그럼 네가 대신 수고하면 되겠구나.”‘정신머리가 너무 말짱한 것 같은데?’그녀는 순간적으로 확신했다. 연기준은 아무 문제도 없는데 대낮에 억지로 추태를 부리고 있다고.맥을 짚어도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몸속에 그를 자극할 만한 약물은 전혀 없었다. 다만 독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완전히 제거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제야 서인경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 상태라면 그의 기세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 침상에 널브러졌다. 심지어는 다리를 꼬아 올릴까도 고민했다.“왕야 말투로 보아서는 저를 아내로 맞을 뜻은 없어 보이는데... 좋습니다. 마침 저도 더는 원치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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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화

“왕야는 저와 혼인하기 싫고, 저 역시 왕야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으니 서로 협의하여 평화롭게 갈라서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서명하세요. 서명만 하면 왕야께서는 자유의 몸이십니다!”서인경은 종이와 붓을 연기준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서인경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 종이를 받지 않았다.“너… 본왕 앞에서 춤을 한 곡 춰라. 그러면 서명해 주겠다.”‘춤? 춤은 무슨 춤!’“저는 출 줄 모릅니다.”연기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마치 고심이라도 하듯 다른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그럼 넌 무엇을 할 줄 아느냐?”서인경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사람을 팰 줄 알지요!”연기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지한 태도로 훈계까지 곁들였다.“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 폭력은 잘못된 것이다.”서인경은 웃고 싶지 않아 엄숙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러나 연기준의 그 진지한 얼굴을 보자 그녀는 비웃음을 흘렸다. 때리는 게 잘못이라니, 이 사내가 사람을 때린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는 직접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수많은 부하들까지 두어 폭력을 일삼지 않았던가?곧 연기준은 또 다른 수가 떠오른 듯했다.“그럼 노래를 불러 보거라.”서인경은 깊은 숨을 내쉬고 종이와 붓을 그의 품속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먼저 서명하세요. 그러면 노래를 불러드릴게요.”그러나 연기준은 결정적인 순간만큼은 의식이 말짱했다.“아니다. 네가 먼저 노래를 불러라. 그러면 본왕이 서명하겠다.”서인경은 숨을 몰아쉬며 이를 갈았다.“지금… 일부러 이러는 것입니까?”연기준의 두 눈은 점점 더 흐릿해져 갔다. 앞에 있는 인물조차 희미하게 보이지 않는 듯 그의 고개가 툭툭 꺾이며 흔들렸다.“본왕과 단은설은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다!”이건 또 무슨 소리냐! 앞뒤가 맞지 않는 이 고백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그러나 연기준의 말은 그녀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혹시, 이 틈이야말로 약점을 붙잡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서인경은 황급히 물음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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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화

서인경은 흥분된 얼굴로 눈앞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기준이 손에 붓을 쥐고 화리서를 탁자 위에 펼쳐 들여다보는 모습에 그녀는 이미 승리의 순간을 맛본 듯했다.연기준은 단숨에 화리서 내용을 훑어내렸다. 한눈에 열 줄을 훑으며 금세 끝까지 다 읽고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붓을 들어 올렸다.서인경의 심장은 쿵쿵 뛰었다. 마침내…!그러나 첫 획이 종이에 닿기도 전에 연기준의 몸이 툭 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서인경은 기겁하며 손을 뻗어 그를 밀쳤다.“연기준, 너 지금 장난하냐?”하지만 그의 몸은 놀랄 만큼 가벼웠다. 그녀가 손에 힘을 주자 연기준은 그대로 쓰러지며 나가떨어졌다. 두 눈이 꼭 감긴 채 종이 위에 드리운 얼굴은 창백하여 마치 손에 쥔 화리서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서인경은 순간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이것은 연기일 리 없었다. 그녀가 방금 전 온갖 수단을 다해 쥐어짜낸 기회가 단숨에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 순간이었다. 방을 나설 때, 서인경은 뼛속까지 지쳐버린 듯 발을 질질 끌며 걸어 나갔다.밖에서 지키던 육승은 속으로 두 사람이 안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 잔뜩 오해하며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뒤, 서인경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녀의 얼굴은 세상 모든 희망이 꺼져버린 사람처럼 절망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물었다.“왕야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옵니까?”서인경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진심을 담아 단 두 글자를 토했다.“젠장!”육승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그 말은… 자기네 왕야를 두고 한 소리란 말인가?연기준은 그날 그대로 하루 밤낮을 내리 잠들었다.육승은 혹시 무슨 변이 생긴 것은 아닐까 두려워 하루에도 여덟 번은 서인경에게 다그쳤다. 그녀는 약재를 달이다가 끝내 짜증이 치밀어 올라 말을 돌려버렸다.“그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연풍을 도와 주거라.”연기준이 잠든 사이, 밖의 일은 전부 연풍이 맡아 진묵염과 함께 수사해 나가고 있었다. 그 배후의 음모는 조정의 정변과도 이어져 있었다. 연풍은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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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화

연기준이 있는 한 그들은 다시는 아이들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오늘 성주께 말씀드리고자 온 것도 이 일 때문입니다. 저는 이 아이들이 모두 온역으로 죽은 것처럼 꾸미고 싶습니다. 그래야 다시는 누구도 그 아이들을 노리지 못할 테니까요.”막수한과 봉수정은 동시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서인경을 바라보았다.“온역이라고요?”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지금 지하흑시에 온역이 퍼졌다면 성주께서는 명분과 권한을 쥐고 성 전체를 봉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문제는 성 안에서 해결할 수 있지요.”도망갈 길을 완전히 막아둔 뒤 안에서 철저히 공격하겠다는 계략에 막수한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건 이미 실행할 방책을 마련해 두셨다는 겁니까?”서인경은 품 속에서 약봉지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이걸 수원에 풀어두면 됩니다. 하루 뒤면 모든 사람의 증상이 온역과 비슷하게 나타날 겁니다. 의원들도 진맥으로 알 수 없기에 온역으로만 판단하겠지요.”막수한은 그것을 받아들고 잠시 침묵에 잠겼다.“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서인경은 곁에 앉은 봉수정을 바라보았다.“막 마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지요. 아이들은 대장로께 보낼 수 있다고요.”봉수정은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상왕께서는… 단 한 번도 그 아이들을 데려가실 생각을 하지 않으신 겁니까?”서인경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연기준과 정식으로 의논한 적은 없었으나 그녀는 이미 그를 대신해 결정을 내렸다.“그 아이들은 누군가의 딸일 수 있고 또 누군가의 누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누군가의 지배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삼 오 년이 지나 이곳을 떠날 때가 되면, 그 아이들은 그저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들일 뿐이지요.”봉수정의 눈빛에 존중과 찬사가 번졌다.“그렇다면 상왕비, 어째서 우리를 믿으시는 겁니까?”서인경은 시선을 돌려 막수한을 바라보았다.“성주께서는 의술에 능하여 유월비설, 금전초, 홍소단 같은 약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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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화

다행인 것은 그녀에게는 아직 포기를 원하지 않은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막수한은 봉수정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낮게 말했다.“너는 나에게 약속하지 않았느냐?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봉수정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곁에 있던 서인경을 바라보았다.“상왕비, 세상 누구나 지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마마께서는 아이들을 지키고자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지하흑시가 있지요. 흑시는 우리 목숨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저 아이들을 돕는 것은 우리가 아직 인간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지 결코 누군가의 조건이나 요구 때문이 아닙니다.”그 말은 서인경의 예상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뜻을 보였다.“제가 성급했네요. 이미 아이들에게 피난처를 내주신 것만으로도 은혜가 지극합니다. 역병의 일은 막 성주께 부탁드리되 그 밖의 일은 제가 따로 방법을 찾겠습니다.”사인경이 떠난 뒤, 막수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봉수정을 바라보았다.“아니, 너도 아이들을 구하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상왕비께서 말하자마자 왜 거절한 것이냐?”봉수정은 담담히 말했다.“저는 이곳이 더럽혀지는 걸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곳을 이용하게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흑시는 오라버니와 어머니께서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곳입니다. 제발 저 때문에 흥정하지 말아 주세요.”막수한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낮게 맹세했다.“걱정 말거라. 내가 반드시 너를 구해낼 것이다.”봉수정은 미소를 지으며 손끝으로 그의 어깨에 흘러내린 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오라버니는 저를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지요. 제 몸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차라리 먼저 상왕비께서 준 약을 확인해 봅시다.”막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 꾸러미를 열었다. 하지만 내용물을 보는 순간, 그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지고 얼굴이 굳어졌다. 봉수정은 그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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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7화

서인경은 대청 앞 계단에 그대로 앉아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잠깐의 정적 끝에, 아직 기운이 다 돌아오지 않은 듯 허약한 기색이 묻어나는 연기준의 목소리가 울렸다.“그 아이들 몸에 새겨진 단 자는 무슨 연유인 것이냐?”“낙철로 지져 만든 자국이옵니다. 이 방식은 야랑국 황실에서 유래된 것이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속 노예 등 뒤에 가문의 성씨를 낙인처럼 남겨 주권을 과시하옵니다.”“야랑국?”연기준의 목소리에는 의혹이 담겨 있었다. 그 이름이 귀에 스치자 서인경의 심장도 순간적으로 쿵 내려앉았다. 전생에서 바로 그 나라가 진국의 국방도를 손에 넣은 뒤 모든 죄를 서회윤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야랑국의 손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국의 심장부까지 스며들어 있었다.연기준은 낮게 중얼거렸다.“본왕의 기억으로는 단 가와 야랑국 사이에 교역왕래가 있던 것으로 안다.”그러자 연풍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왕야의 기억이 옳사옵니다. 예전에는 단효산이 자주 야랑국에 드나들었사옵니다. 다만 근래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경성에 뿌리를 내린 것이옵니다.”“사람을 보내거라. 야랑국에서 단 가의 내막을 샅샅이 뒤져 오거라!”“예, 명 받들겠사옵니다.”연기준이 다시 말을 잇지 않자 연풍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황자의 가례가 정월 이일에 거행되옵니다. 폐하께서 두 분이 조속히 경성으로 귀환하라 명하셨사옵니다.”“알겠다.”연기준이 짧게 대답하자 연풍이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다 문간에 앉아 있던 서인경을 보고는 급히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왕비 마마를 뵙습니다.”서인경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웃음을 띠었다.“오랜만이구나.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틈날 때 우리 평이도 좀 챙겨주렴. 아직 손이 성치 않잖니.”연풍은 순간 그녀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마주한 서인경의 눈빛은 의외로 지극히 진지했다. 섣불리 억측할 수 없었기에 그는 억지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연풍이 떠나자 서인경은 방 안으로 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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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8화

연기준의 눈빛에 잠시 짜증이 스쳤다.“머리가… 아프다.”서인경은 그의 손목을 놓고 이마에 살며시 손을 대보았다.“몸속에 아직 독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약을 지어드릴게요. 며칠만 더 복용하면 괜찮아질 겁니다.”아직 독성이 그의 기맥 속을 떠도는 탓일까? 연기준의 눈에는 피로가 깊이 깔려 있었고 말하기조차 귀찮은 듯한 나른한 기색이 번져 있었다. 서인경은 아까 연풍이 말한, 황제가 두 사람에게 조속히 경성으로 돌아오라 명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저는 흑시에 며칠 더 머물러 아이들을 제대로 안배한 뒤에야 돌아가고 싶습니다. 왕야께서 급하다면 먼저 가셔도 됩니다.”이어 그녀는 막수한과 상의했던, 가짜 역병을 조작하는 계획도 그대로 이야기했다.이에 대해 연기준은 뜻밖에도 반대하지 않았다.“본왕도 함께 돌아가겠다. 네가 그 아이들을 어디에 두고자 하는 것이냐?”서인경은 솔직하게 말했다.“몰래 경성으로 데려가 서가군의 군영에 두고 싶습니다.”그러나 연기준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군영은 온통 사내들뿐이다. 아이들을 돌보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지. 그뿐만 아니라 가는 길이 위험천만하다. 일단 발각이라도 되면 수십 명의 아이들 중 단 한 명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폐하께서 눈치라도 챈다면 서가군이 반심을 품었다 의심할 수도 있다.”이미 하나의 영패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서가군의 머리 위에는 날 선 도끼가 매달린 형국이었다. 거기에 특별한 아이들 오십 명까지 더해진다면...황제라면 차라리 몰살을 택할 것이었다.서인경은 맥이 풀린 듯 힘없이 중얼거렸다.“그럼 왕야께서는 뭐가 옳다고 보십니까?”연기준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본왕에게 방도가 있다.”“어떻게요?”그녀가 물었으나 연기준은 답하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부축하거라. 밖에 나가 걸어야겠다.”방 안에 오래 누워 있다 보니 사지가 무뎌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서인경은 움직이지 않고 단칼에 그의 제안을 잘라냈다.“안 됩니다. 지금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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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화

출입을 위하여 아주 작은 뒷문 하나만 남겨 두었다.날마다 그 뒷문으로 ‘병에 걸려 구제불능으로 죽은 자’들의 ‘시체’가 실려 나갔다.이틀 내내 연기준은 마치 노인이라도 된 듯 하나부터 열까지 서인경을 부려 먹었다.차를 따르는 것부터 물을 길어오는 것까지, 온갖 자질구레한 시중을 드는 일에 그녀를 내몰았다. 서인경은 속으로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그저 억지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연기준은 여전히 아이들을 어떻게 안배할지에 대해선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이대로라면 그냥 집어치우고 도망쳐 버릴 것이다.밤이 되자, 서인경은 속으로 이렇게 결심하며 곧장 연기준에게 따져 물었다.’“왕야, 저를 속여서 하녀 부리듯 쓰려는 겁니까?”연기준은 그녀가 정성껏 깎아 내고 잘게 썰어 건넨 사과 조각을 받아 입에 물고 있었다. 지금껏 그는 이렇게 정갈히 손질된 과일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늘 귀찮아했고 군영 같은 곳에서는 지나치게 까탈스럽게 굴면 대번에 장정들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으니.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군가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니 연기준은 인생 처음으로 자신이 구름 위에라도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세 조각의 사과를 더 받아먹은 후에야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곧 알게 될 것이다.”이에 서인경은 속수무책이었다. 남은 사과를 연기준의 머리통이라도 되는 듯 와작와작 씹어댔다. 그녀는 밖에 나가지도 않고 매일 방에 틀어박혀 평이가 실시간으로 전해 오는 소식을 들었다.“왕비 마마, 온 성안의 사람들 마음이 흉흉하옵니다. 다들 집 밖을 나오려 하지 않고 거리에서는 약 냄새만 진동하옵니다.”“막 성주께서 성황묘에 임시 격리소를 세우셨사옵니다. 열이 있는 자들은 모두 그곳으로 옮겨졌고 성안의 의원들이 총동원되어 환자들을 돌보고 있사옵니다.”“왕비 마마, 오늘은 사망자가 나왔다 하옵니다. 남쪽 큰 구덩이에서 수십 구의 역병 환자 시신을 불태웠다는데 그 타는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퍼졌다더군요. 듣기만 해도 오싹하옵니다.”“오늘도 막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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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화

평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아하니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서인경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팔불출 같은 호기심이 불타올랐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소문을 캐내고 싶을 지경이었다.그때, 연기준의 목소리가 불쑥 흘러나왔다.“궁금하다면 들어오너라. 본왕이 직접 알려 주마.”평이는 그 말을 듣자 잽싸게 돌아서더니 마치 도망치듯 바깥으로 달아나 버렸다. 서인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걸음을 옮겨 병풍 너머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침상에 반쯤 기대앉아 책을 펼쳐 든 미남자가 있었다.“왕야께서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까?”연기준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무심히 책장을 넘겼다.“너보다 한 시진은 먼저 알았다.”그제야 서인경은 기억을 더듬었다. 방에 들어오기 직전, 안포가 막 이 방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결국, 얼음덩이 같은 이 사내 역시 은근히 루머를 즐기는 심성을 가진 셈이었다.“그럼 말해 보세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이제 라가에는 멀쩡한 사람이 라운석 한 명뿐이었다. 그는 아내를 맞이하기는커녕 침소를 덥혀 줄 작은 하녀조차 없었다고 들었는데... 설마 라채월의 압박이 사라지자 라운석이 본성을 드러낸 것일까?연기준은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 서인경을 바라보았다.“라북명은 다리가 망가졌으나 하반신의 기능은 멀쩡하다. 그는 집안의 권한을 라운석에게 넘기고 스스로는 저택의 외진 뜰로 거처를 옮겼지. 라채월은 정실의 지위를 박탈당해 천한 첩으로 떨어졌다. 그 대신, 라북명은 뜰 안의 하녀 열여 명 남짓을 줄줄이 첩으로 삼아 밤마다 흥청망청 놀아댔다. 그 하녀들은 수년간 라채월의 설움에 짓눌려 살아왔으니 이제야 비로소 그녀를 밟고 누르며 울분을 풀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들이 어찌 이것을 놓치겠느냐?”서인경은 머릿속에서 과거 거만하고 오만하던 라채월의 자태를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참혹한 처지를 들으니 문득 허무한 감정이 밀려왔다. 인과응보, 돌고 도는 보응이었다.“그러니까, 그 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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