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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1화

서인경은 믿기지 않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야랑국 황제가 목숨처럼 아꼈다는 여인이 어찌 서가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스스로 사랑하는 여인을 그려내면서 왜 욕조 위에 굳이 서가의 영패를 남겼단 말인가? 그리고 그 영패는 전생에 서가가 반역죄로 몰려 참화를 당할 때 가장 유력한 증거로 제시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할수록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아무리 짚어도 풀리지 않는 매듭 같았다.21세기에서 수많은 소설을 보아온 경험으로 따져 보건대, 이런 전개는 십중팔구 개연성 없는 막장 혈연, 삼각 구도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야랑국 황제와 서가의 사내가 같은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여인은 결국 서가의 남자를 선택했다. 그래서 황제는 이를 갈며 복수심에 찬 나머지 진국의 간신들과 손잡고 서가를 모함하여 파멸로 몰아넣었다.그렇게 짐작한 서인경은 다시 화폭을 펼쳤다. 그림 속 여인은 욕조에 몸을 반쯤 기댄 채 물결을 희롱하고 있었다. 투명한 물방울이 희디흰 팔 위로 흘러내렸고 입가에는 혼을 빼앗을 듯 요염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 눈빛. 화폭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금세라도 말을 걸어올 것만 같은 요사스러운 눈매였다.서가의 사내들은 대대로 첩을 두지 않았다. 근 삼대 동안 여인이라고는 서인경 자신과 궁중의 숙귀비를 제외하면 원래 몸 주인의 모친과 할머니뿐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불러내어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화폭 속 여인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서가의 여인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왕야 말로는 이 여인이 야랑국의 전 황후라는 말입니까?”연기준의 시선도 그림 위에 머물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본왕이 야랑국에 갔을 적 친히 이 화폭을 본 적이 있다. 틀림없다.”서인경은 곧장 상상력을 뻗어나갔다.혹시 그 여인은 황제에게 강제로 들려갔으나 마음속으로 사랑한 이는 서가의 사내였던 것인가? 결국 생을 마칠 때까지 황제는 여인을 가졌으나 그녀의 마음은 얻지 못해서 그녀가 죽은 뒤에도 복수를 품고 서가를 파멸시키려 모함을 꾸몄던 것은 아닐까?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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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서인경이 군영에서 묵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하나, 이 몸으로 살아난 뒤 맞는 첫 번째 불면의 밤이었다.막사 밖,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순찰병들의 발소리.그 잔잔한 마찰음이 오히려 밤의 고요를 더 비워내 한없이 쓸쓸하고 공허하게 만들었다.서인경은 문득 짜증이 났다. 연기준 때문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화가 치밀었다.명색이 먼저 화리를 원한 것은 자신이었다. 화리한 후, 각자의 길을 가면 그뿐인데...그렇게 되면 그가 단은설과 백년해로 약조를 맺어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그런데 왜 마음이 이렇게 요동치는 것일까? 어처구니없고 어리석기까지 한 심정의 기복이었다.게다가, 저 사내는 원래 몸 주인이 탐냈던 남자고 그녀가 억지로 쥐고자 한 인연이었다. 반면, 자신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저 원래 주인의의 껍데기를 잠시 빌려 산 것이니 그와 맺어진 부부 인연 또한 찰나의 허울일 뿐이었다.자신의 한 가지 소명은 서가를 지키는 것, 전생의 비극을 뒤집는 것. 그리고 자신이 버려지는 결말을 피하는 것, 그뿐이었다.그러니 먼저 버려야 했다. 미련을 남기지 말고 단호히 잘라야 했다.연기준이 마지막에 누구의 손을 잡고 살아가든 그건 더더욱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서인경은 스스로를 다독이듯 주문처럼 되뇌었다.“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 절대 좋아하지 않아…”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중얼거림 속에서 그간 연기준이 저질러온 만행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씹고 또 씹었다.“개 같은 남자.”그렇게 서인경은 온 밤 그를 욕하며 저주했다.근교의 장원.열댓 살의 소녀가 잠에서 덜 깬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하인에게서 연기준이 전날 밤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졸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한설은 기쁨에 눈을 반짝이며 이불도 정리하지 않은 채 달려 나갔다.그때, 연기준은 막 아침을 들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쿵쿵 울리는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곧이어 작은 그림자가 홱 식당으로 뛰어들어왔다.“지하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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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마치 한 판 전세를 뒤집은 듯한 통쾌함이 번졌다.“잘했다, 아주 잘했어.”식사 후, 두 사람은 뜰로 자리를 옮겨 회랑 아래 긴 의자에 나란히 몸을 뉘었다.연기준은 담소하듯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들으니 요즘 매일 밖에 나가겠다 떼쓴다지? 할 일 없어 곰팡이나 슬겠다며?”한설은 그제야 기회가 왔다 싶어 눈을 번쩍이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맞습니다! 들으니 매달 보름마다 장터가 열린다던데 이번에는 제발 저 좀 데리고 나가주세요. 바람도 쐬고 싶단 말입니다.”지난번 미인대회가 열리던 밤, 바깥에서 발작을 일으킨 뒤로 연기준의 규율은 더욱 엄격해졌다. 때문에 한설은 이제 대문 밖조차 내다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매일같이 이 좁은 담장 안에서 부대끼니 답답해 없던 병마저 생길 지경이었다.그러나 연기준은 느닷없이 경전 한 권과 글씨가 가득 적힌 종이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심심하다 했으니 잘 됐군. 이 글씨체를 따라 이 책을 삼백 번 옮겨 쓰거라.”한설은 손에 불이라도 닿은 듯 휙 몸을 빼며 도망쳤다.“벌주고 싶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세요! 나가서 백 바퀴든 천 바퀴든 돌라 하면 돌겠습니다. 한데 이런 귀찮은 글씨를 삼백 번이나 베끼라니! 차라리 제 목숨을 끊는 게 나아요!”연기준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태연히 말했다.“태황태후께서 그녀에게 내린 벌이다. 네가 하지 않으면 그녀가 직접 해야 한다.”한설은 말문이 막혀 잠시 머뭇거렸으나 화살을 곧 연기준에게로 돌렸다.“그럼 태황태후께서 그렇게 기를 죽이는 걸 보고만 있겠단 말입지까? 제 부인 하나 지켜주지도 못하면서 무슨 남자라고!”그 말은 독하지 않았지만 모욕적이긴 했다. 그러나 연기준은 여전히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본왕은 그녀를 고생시키려는 뜻은 없다. 다만 네 글씨는 개가 할퀴어 놓은 것 같아 그녀 것과 팔 할은 닮았으니 딱 알맞구나.”한설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금세 하늘로 날아갈 듯 치솟았다.“제가 봉인줄 아십니까? 자기 부인도 감싸주지 못하면서 왜 저를 잡아다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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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호청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낮게 말했다.“최근 두 차례 한설 아가씨께 수혈한 효과가 이전보다 확연히 떨어졌사옵니다. 제가 의심하기로는 그녀가 몰래 무슨 약을 복용해 피의 작용을 억누른 듯하옵니다.”그 말에 연기준의 안색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그러나 호청은 눈치 없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제 추측이 맞다면 그녀는 이런 방법으로 왕야께서 자신 없이는 버티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옵니다. 아이고, 마마께서는 어쩌다 그런 악독한 정적을 맞이하셨는지... 업보이옵니다, 업보!”연기준의 얼굴빛은 이미 먹구름처럼 짙게 드리웠다.“한 달을 더 주겠다. 그때까지 방법을 찾지 못하면 국경으로 내쳐져 다시는 돌아오지 말거라.”호청은 화들짝 놀라 수염까지 덜덜 떨렸다.“왕야, 그리 매정하실 수가! 이 늙은 몸을 저 험한 변경으로 보내시겠다니! 그건 제 목숨을 끊겠다는 말씀이옵니까!”연기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의 발걸음은 단호했고 호청의 절규 섞인 애원은 그 뒷전에서 공허하게 메아리쳤다.서인경은 이튿날 정오 무렵에서야 눈을 떴다. 병사들의 훈련 구령과 발소리가 그녀의 잠을 흔들어 깨운 것이었다. 세수를 하고 막사 밖으로 나오자 시선은 자연스레 그 그림 두루마리에 머물렀다. 모든 일의 실마리가 기어이 야랑국과 맞닿아 있는 듯했다.잠시 생각에 잠긴 끝에 서인경은 그림을 약왕곡에 수납해 두었다. 두려울 것은 없었다.오늘이야말로 진상을 마주할 기회가 올 터이니.정오의 햇빛은 원을 그리며 높이 떠 뜨거운 기운을 온 대지 위에 쏟아내고 있었다.경성의 성문 앞.서인경이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인파가 물결처럼 모여들어 있었다.연기준은 맨 앞에 서 있었고 그녀는 말없이 걸음을 옮겨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오늘 그는 짙은 자줏빛 조복을 차려입었다. 이에 맞춰, 평이는 서인경에게 옅은 자줏빛 치마저고리를 골라 입혔다. 두 사람은 마치 서로의 자리를 위해 태어난 듯 선남선녀 한 쌍이 되어 시선을 휘어잡았다. 그러자 백성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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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연기준은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다음에 외출할 땐 차라리 추하게 분장하고 나가거라.”서인경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왜 굳이 추하게 꾸며야 합니까? 세상 남자들이란, 제 아내가 군중 속에서 절세의 미모를 자랑해 체면을 세워주는 걸 좋아하는 거 아니었습니까?”연기준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는 이 여인이 지닌 모든 아름다움이 오직 자기 눈에만 담기기를 바랄 뿐이었다.“남자의 체면은 스스로 세우는 것이다. 여인의 빛에 기대는 건 나약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지.”서인경은 눈썹을 치켜세웠다.“허, 과연 상왕 다운 말씀입니다! 칭찬해 드릴만 하군요.”두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인파에서 멀리 떨어진 한쪽 모퉁이에는 자매가 서 있었다.단여월은 시종 울상인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언니, 저는 곧 대황자부에 가야 하는데 왜 여기까지 끌고 온 겁니까? 변방에 불과한 야랑국 사신 같은 건 하나도 관심 없단 말입니다.”단은설의 시선은 대열 맨 앞, 나란히 서서 은밀히 속삭이는 두 사람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 눈빛은 평온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조용히 무언가를 꾸며내고 있는 듯했다.동생의 불평이 귀에 들어오자 그녀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너 그동안 몇 번이나 대황자부를 드나들었지? 한데 정작 대황자 얼굴은 보았느냐?”그 말에 단여월은 발을 구르며 분노를 터뜨렸다. 대황자의 측비로 정해진 이래, 그녀는 진가이와 끊임없이 부딪히며 이미 여러 차례 모욕을 당했다. 이전에는 대황자가 그녀를 보면 미소라도 지어주었건만 요즘은 차갑게 돌아설 뿐이었다. 몇 차례 대황자부에 발걸음을 옮겨도 그는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다.반면 진가이와 대황자의 소문은 무성하기만 했다. 대황자가 진가이와 함께 주루에서 술을 마시고 교외로 나가 산책을 하며 호숫가에서 유람을 즐겼다는 이야기.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총애가 기울어져 간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제가 발길을 끊으면 그 진가이가 더 기세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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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얼마 지나지 않아 야랑국의 사절단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왔다.서인경의 시야에도 대열 맨 선두에서 말을 타고 오는 세 명의 모습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거의 한눈에 세 사람의 신분을 구분해낼 수 있었다.태자 예정훈, 소년 같은 얼굴에 여인의 기품이 깃든 모습. 초상화에서 보았던 선황후와 거의 판박이였다. 야랑국 황제가 매일같이 이 얼굴을 마주한다면 지금도 그녀가 세상에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양옆에서 그의 뒤를 따르는 두 사람.그중 더 젊은 자는 눈빛이 음울하고 살기가 흘러넘쳐 첫눈에 보아도 선량함과는 거리가 먼 자였다.서인경은 단번에 짐작했다. 아마 이자가 바로 그 악명 높은 팔황자 예정임일 터.그 생김새 자체가 보는 이를 불쾌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또 다른 한 명은 더 연장자였는데 체구가 우람하고 얼굴 가득 덥수룩한 수염이 덮여 있어 결코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위세를 풍기고 있었다. 그가 바로 야량국의 대장군 단진역이리라.세 사람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내리더니 연기준을 향해 어깨를 맞대는 예를 올렸다.“야랑국 사신, 진국의 상왕께 문안드리옵니다!”연기준도 주먹을 모아 맞절을 하며 화답했다.“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서인경은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희미하게 감추었다.그녀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다만, 야랑국에서 온 사절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연기준의 말대로 그녀는 실제로 태자 예정훈에게서 단서를 찾고 싶었다. 단 가와 야랑국 황제 사이에 대체 무슨 원한과 얽힘이 있는지, 그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 하지만 첫 대면에서 함부로 입을 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연기준은 사절단을 이끌고 성 안으로 향했다.하지만 서인경은 굳이 뒤따르지 않았다. 이런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는 원래 조정 대신들의 몫이었다. 그녀가 간다 한들 궁중 연회에 들어설 자격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제자리에 머물며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단 가의 자매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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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호위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장사판에서는 제, 단 두 집안이 서로 크게 맞붙고 있사옵니다. 몇 차례 제 가 쪽의 장사가 망가진 적이 있는데 뒷수작은 모두 단 가였사옵니다. 또 단 가와 진 가는 혼인으로 이미 연을 맺었으나 겉으로만 화목할 뿐 마음속으로는 불화가 깊어 종종 충돌을 빚고 있사옵니다. 더구나 폐하께서 유아 실종 사건을 추적하신 이후로 단 가는 몸을 최대한 낮추고 예전 같은 작은 술수조차 감추었사옵니다.”서인경은 냉소를 머금고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단 가라는 자들은 고작해야 그런 하찮은 수법밖에 쓰지 못하는 무리였다.“유아 실종 사건이 단 가와 무관하다는 말은 아마 연기준 같은 멍청한 자만이 곧이곧대로 믿을 테지.”그녀의 음성이 살짝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사람을 보내 야랑국의 단 가와 진국의 단 가 사이에 어떤 연줄이 있는지 샅샅이 캐내거라.”호위는 곧장 허리를 숙였다.“예.”그가 물러가자 서인경은 불현듯 기억 속에서 다른 일을 떠올렸다. 그가 방금 입에 올린 제 가.자신이 투자한 상점들을 아직 직접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제 가의 장사가 번성하고 있다 하니 단 가가 집요하게 견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또한, 그녀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막효연 어머니의 병이 걸려 있었다. 홍소단에 대한 소식을 얻기 위해서라도 제혁을 한번 만나야 했다.서인경은 곧장 기억을 더듬으며 성 동쪽, 십리포로 향했다.마침 가장 번화한 시각이라 큰길과 좁은 골목마다 장사꾼들의 외침이 가득 메워지고 좌판마다 물건이 오가며 삶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갓 찐 만두는 순식간에 동나고 저쪽 장신구 가게 앞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아가씨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왁자지껄했다. 서인경은 연기로 가득한 인파 속을 거닐며 잠시 마음마저 환해졌다.제혁이 운영하는 가게는 십리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눈에 띄는 곳은 두 칸의 점포를 터서 만든 약방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여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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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제혁은 크게 당황하며 두 손을 저었다.“왕비 마마 지나친 말씀입니다. 단 가의 잔재주쯤은 저희 쪽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도리어 마마께서 몸소 염려해 주시니 송구할 따름입니다.”제혁이 끝내 고개를 숙이며 사양하자 서인경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제 백부께 여쭙고 싶은 약이 있습니다. 혹시 홍소단이라고 아십니까?”그 순간, 제혁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다.“왕비 마마, 홍소단은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그의 반응이 너무 격해 서인경은 오히려 의심이 더 짙어졌다.“제가 홍소단을 찾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입니까?”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제혁은 서둘러 안색을 거두며 태연을 가장했다.“아… 아닙니다. 제가 잠시 실례를 범했군요. 홍소단은 원래 심장병을 다스리는 약입니다. 하나 이미 오래전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저 또한 이름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본 적은 없지요. 왕비 마마께서는 흑수암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거기 도팔천에게서조차 구할 수 없었다면 아마 이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서인경의 눈빛이 미묘하게 빛났다. 그렇다면, 어째서 방금 전 그토록 큰 반응을 보였단 말인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제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 세상에서 더 이상 홍소단을 필요로 할 사람이 없을 터인데… 왕비 마마께 묻겠습니다. 혹시, 그 사람은 왕비 마마의 지인입니까? 정말로 홍소단이 아니면 살릴 수 없는 병증입니까?”들어갈수록 이상해졌다. 서인경은 속으로 깊이 머리를 굴린 끝에 천천히 대답했다.“제 백부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당사자의 동의 없이 남의 일을 함부로 드러내는 건 옳지 않아서요. 환자는 제 친구의 어머니이십니다. 제가 직접 맥을 짚어본 적은 없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제 친구가 홍소단만이 유일한 희망이라 하더군요. 한데 방금 제 백부 말씀에 석연찮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 홍소단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다니... 그건 무슨 뜻입니까?”제혁은 의미심장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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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그녀도 같은 일불락 출신.도팔천이 홍소단을 길러내지 못했다는 것은 단순히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초에 길러낼 수 없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서인경은 그 순간 가슴이 턱 막히듯 답답해졌다. 봉수정의 출신을 막론하고 그녀는 우선 막효연의 어머니였다. 만약 정말 고칠 길이 없다면 효연은 반드시 슬픔에 잠길 터였다.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상실감이 스쳤다. 그 빛을 놓치지 않은 제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화제를 돌렸다.“사실… 전혀 방도가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서인경의 눈이 번쩍였다.“다만 무엇입니까?”그는 낮게 말을 이었다.“방법이 좀 편법에 가깝고... 무엇보다 실행하기 어렵습니다.”서인경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간절히 다그쳤다.“제 백부, 말씀만 해주세요. 실행할 수 있을지는 제가 고민해 보겠습니다.”제혁은 깊은숨을 내쉬고 무겁게 털어놓았다.“어족이 일불락의 수장을 지켜온 이유는 양쪽 조상이 맺은 혈맥의 계약 때문입니다. 만약 수장 가문의 후손을 찾아내어 그 피로 공양한다면 평생 심장이 안정될 수 있지요.”서인경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그건 단순히 어렵다 할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었다. 그녀가 어디서 일불락의 수장 후예를 찾는단 말인가?차라리 몰랐을 때는 희망이라도 붙들 수 있었는데 알아버리니 오히려 더 절망스러웠다.그 순간, 후원에서 오가던 담담한 대화가 끊겼다. 전원 쪽에서 시끄러운 고성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제혁이 즉시 하인을 불렀다. 잠시 후, 하인 하나가 다급히 뛰어들어오며 아뢰었다.“주인어른, 큰일 났습니다! 가게 안에서 소동이 났습니다. 손님께서 말하길 우리 약을 먹고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그 말을 들은 제혁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왕비 마마, 염려 마시옵소서. 우리 약방의 의원들은 모두 믿을 만한 분들이니 결코 사람 목숨을 해칠 약을 내어줄 리 없습니다. 분명 요즘 장사가 시들해진 단 가가 또다시 꾀를 부리는 것이겠지요. 감히 우리를 무너뜨리려 하지만 헛된 수작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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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이쪽에서는 몇몇 사내들이 서로 밀치며 고함을 질러댔다. 약방 주인이 무슨 말을 해도 그 남자는 고집스럽게 의원이 아이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서인경은 조용히 아이 곁으로 다가가 몸을 낮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울부짖는 부인의 얼굴에 닿았다. 그 여인의 상심과 눈물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서인경은 낮게 속삭였다.“네 딸, 아직 살릴 수 있다.”부인은 눈물을 뚝 그치며 번개처럼 고개를 들어 서인경을 보았다.“지금 그 말, 진짜입니까?”서인경은 단호하게 응답했다.“나는 상왕비 서인경이다. 내 목숨을 걸고 보증하지. 네 딸은 아직 살 수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상왕부로 오거라. 내가 묻겠다. 정말로 아이를 구하고 싶으냐?”부인의 눈빛이 번쩍 빛나더니 곧장 몸을 곧추세워 서인경의 손목을 움켜쥐었다.“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우리 딸 좀 살려주세요!”서인경은 부인의 몸으로 뒤쪽의 시선을 가리며 다섯 손가락을 뻗어 소녀의 손목 위에 얹었다. 그리고 곧 진맥의 결과를 얻었다. 중독.이 어린 아이에게 독을 쓰다니! 이런 약물은 정규 약방의 처방에는 절대 실리지 않는다. 서인경은 단번에 결론을 내렸다. 이 약은 결코 제 가 약방에서 처방된 것이 아니다.또 죄를 뒤집어 씌우는 수법이라니... 단 가의 악독함은 전생에서 현생까지도 변함이 없었다!뒤쪽에서 울음소리가 그치자, 남자와 노파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곧장 거칠고 성급한 발소리가 뒤에서 몰려왔다. 순간, 한 쌍의 굵은 손이 서인경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뭐 하는 것이냐? 우리 딸 건드리지 말고 당장 물러서거라!”남자가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밀쳐내려는 순간,쿵!단단한 충격음이 들려왔으나 서인경은 아무렇지 않게 소녀의 맥을 짚고 있었다. 반대로 남자는 고꾸라져 다섯 걸음이나 밀려 나가 기둥에 처박히더니 땅바닥에 엎어져 버렸다.서인경은 겉보기에 혼자 온 것 같았지만 어둠 속에는 왕부의 암위가 이미 대거 잠입해 있었다. 오늘 현장을 지휘한 이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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