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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271 - Chapter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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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1화

그는 자신의 곁에서 고요히 잠든 서인경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 연기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옷을 걸쳐 입고 조용히 문을 나섰다.막부, 주원막수한과 봉수정은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그때, 하인이 다급히 문을 두드리며 아뢰었다.“성주, 상왕께서 뵙기를 청하시옵니다.”막수한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이 늦은 시각에? 그가 무슨 일로?”막수한은 사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조정의 사람들과 그 어떠한 인연도 맺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일이 끝나면 곧장 구실을 붙여 그들을 흑시에서 내보낼 작정이었다. 봉수정은 조용히 겉옷을 들어 막수한에게 건넸다.“오라버니, 나가 보세요. 만약 조정이 정말 흑시에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우리도 일찍 대비하는 게 나아요.”막수한은 외투를 받아 걸치며 탁자 위의 약탕을 들어 올렸다.“약은 반드시 뜨거울 때 마시거라. 다 마시면 곧장 쉬고. 날 기다릴 것 없다.”봉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막수한은 연기준을 서재로 맞아들였다.“왕야께서 이 심야에 어쩐 일로 오신 것입니까?”연기준이 입을 열었다.“막 성주와 그 아이들의 거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왔습니다.”막수한은 태연히 답했다.“지금 그 아이들은 대장로의 득월산장에 있습니다. 상왕과 상왕비께서 떠나실 적에 함께 데려가시면 될 일이지요.”연기준은 손끝으로 찻잔을 어루만지다 문득 화제를 꺾었다.“본왕은 막 성주께 한 사람을 묻고 싶습니다.”“누구요?”“도팔천입니다.”막수한의 동공이 순간 흔들리더니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들어는 보았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독왕이라 불리던 자. 오십 해 전 흑수암 독왕곡으로 은거한 후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지요. 왕야께서 그를 찾고자 한다면 직접 흑수암에 찾아가 보심이 더 빠를 듯합니다.”연기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흑수암이라… 본왕은 이미 다녀온 바 있습니다. 십오 해 전 중추절, 막 성주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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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연기준이 혈적자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도팔천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었다. 막수한이 방금 말한 사실들은 그조차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 순간, 그는 곧바로 깨달았다. 서인경의 정체가 드러나 버렸다는 것을. 단 1초의 머뭇거림도 허락지 않고 연기준은 곧장 혈적자를 거두어 품에 감췄다.“그녀는 아직 자신의 신분을 알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막 성주께서도 비밀을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들끓는 심정을 다잡지 못한 막수한이었지만 동시에 연기준의 말뜻을 또렷이 알아들었다.“왕야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저 역시 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일은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거예요.”연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막수한의 태도는 자신보다 더 신중할 터.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감히 묻겠습니다, 왕야. 주인장께서 무엇을 명하시렵니까?”그 호칭이 너무도 재빨리 바뀌었으나 연기준은 곧바로 그 변화를 받아냈다.“막 성주께서 저 아이들의 거처를 해결해 주신다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 주는 셈입니다. 본왕은 곧 그녀를 데리고 경성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일은 자연스레 흐려져 더는 누구도 추궁치 못할 것이지요.”이번에는 막수한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아이들 문제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저에게 맡기십시오. 다만…”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혹… 주인장께서 며칠만 더 저희 부에 머무르실 수는 없을까요?”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내보낼 궁리만 하던 그가 이제는 머물러 달라 간청하는 형국이었다. 이 돌연한 태도 변화에 정작 당혹스러운 것은 막수한 자신이었다.연기준은 그들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오랜 세월 애타게 찾던 인물이니 어찌 쉽사리 보내려 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사사로운 마음으로도 서인경의 정체가 드러난 이 땅에 더 머무는 것은 원치 않았다.“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막 성주께서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저희 또한 경성을 너무 오래 비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막수한의 얼굴에는 깊은 아쉬움이 드리웠으나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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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눈앞에 들어온 것은, 햇살을 온몸에 받아들이며 책을 읽고 있는 한 미남의 그림 같은 자태였다. 남자의 옆얼굴은 각이 뚜렷했고 햇빛이 그 윤곽을 따라 흐르니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대로 서인경의 취향을 저격했다. 이 사내는 정말 사람을 중독시키게 하는 매력적인 존재였다.그제야 서인경은 이해했다. 전생에서 원래 몸 주인이 왜 그토록 이 사내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는지. 만약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모른 채 살고 있었다면, 21세기의 철저한 비혼주의자였던 그녀조차도 이 남자를 보는 순간 든 생각은 ‘가지고 싶다’였을 것이다.서인경은 그대로 자리에 누운 채, 멍하니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한 음성이 불쑥 가볍게 날아들었다.“입 좀 닦거라. 침 흘러내리겠다.”서인경은 흠칫 놀라며 황급히 손을 들어 입가를 훑었다. 그러나 묻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이런, 제기랄!곧장 방석 하나가 날아오더니 연기준을 향해 내리꽂혔다.“저한테 장난쳤습니까?”연기준은 미소를 띠며 방석을 가볍게 받아내고 등 뒤에 괴어 놓은 채 다시 책을 펼쳤다. 서인경은 이내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이곳은 마차 안이었다. 가림막을 젖히자 창밖으로는 산림의 수목이 빠르게 뒤로 흘러가고 있었다.“지금 우린 어디로 가는 겁니까?”연기준의 대답은 간결했다.“경성으로 돌아간다.”서인경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아직 제가 처리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잖아요!”연기준은 책을 내려놓고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막 성주께서 이미 허락하셨다. 아이들은 모두 대장로의 득월산장에서 돌보게 될 것이다. 완쾌될 때까지 그곳에서 지내다 차츰 좋은 집안에 들여보내질 거다. 게다가 산장에는 백여 명의 하녀가 있어 그 아이들을 돌보는 데 무리는 없다고 들었다. 한데 무엇이 그렇게 못 미덥단 말이냐?”서인경은 더욱 놀라 눈을 크게 떴다.“그게 사실입니까? 막 성주께서는 전에 단호히 반대했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답니까?”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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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황혼 무렵, 마차가 드디어 경성에 도착했다. 서인경은 저무는 햇살을 밟으며 상왕부의 대문 앞에 발을 내렸다. 그러나 고개를 들자마자 서인경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문 앞에 기다리는 이들은 단순히 왕부의 인원들뿐만이 아니었다.태황태후와 황제, 그리고 황후.궁중의 위엄스러운 의장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서인경은 그들이 무슨 의도로 나왔는지 헤아리기도 전에 연기준의 손에 이끌려 무릎을 꿇었다.“태황태후, 폐하, 황후께 삼가 문안 드리옵니다!”“어서, 어서…”황제가 갓 두 마디를 뗐을 때 목소리가 뚝 멎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가로막힌 듯했다. 곧이어, 태황태후의 날 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대담한 상왕비! 감히 상왕을 꾀어내어 출경케 하고 역병의 위험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네 죄를 아느냐!”서인경은 억울해 눈앞이 아찔해졌다. 대체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자신이 꾀어낸 탓이란 말인가? 분명, 그 사내가 스스로 쫓아온 것인데!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굴리며 속으로만 울분을 삭였다. 입술은 꾹 닫문 채 눈동자만 하늘로 치켜뜨고 있었다.연기준은 곧장 허리를 펴고 목소리를 높였다.“태황태후께서 오해하셨사옵니다. 본왕이 실종된 어린아이들의 사건을 추적하기 위해 왕비를 동행시켜 눈을 속인 것이옵니다. 왕비가 본왕을 꾀어낸 것이 아니라 본왕이 왕비를 꾀어낸 것이옵니다.”그의 노골적인 두둔에 태황태후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다.“준아, 너는 어찌하여 번번이 왕비로 인해 화를 당하고도 여전히 그 여인을 감싸는 것이냐! 대체 왕비가 너에게 어떤 미혹의 술을 먹인 것이냐!”황제는 상황이 험악해지자 급히 나섰다.“황조모, 진노를 거두소서! 이번 일은 분명 짐이 아우를 명해 출경시킨 바 있습니다. 그러니 상왕비와는 무관합니다. 설사 죄를 묻는다 하여도, 남편을 지극히 모시지 못한 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상왕비를 폐문 반성케 하고 보증문을 써서 이후 상왕을 잘 보살필 것을 약속하게 하는 정도로 끝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서인경은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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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서인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나는 정말 몰랐다고!’아마 원래의 주인은 예법에 따라 꼬박꼬박 궁에 들어갔던 듯하다. 하지만 그녀가 이곳에 들어온 후로는 그런 규율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연기준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때는 저희 부부가 한창 깨를 볶을 때라 그랬사옵니다. 이 새로움이 지나면 그때 가서 왕비를 궁에 들게 하면 되겠지요.”서인경은 예상치 못한 답에 고개를 숙여 실소를 참느라 어깨가 들썩였다.이건 곧, 선조 황제가 태황태후에게 느낀 신혼의 새로움이 고작 한 달뿐이었다는 소리가 아닌가?태황태후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너… 너… 너 같은 패역한 역자가 어디 있느냐! 애가가 너를 기른 세월이 얼마인데 겨우 한 여자를 위해 애가를 거역하다니! 쿨럭, 쿨럭……”황제와 황후는 다급히 태황태후의 등을 두드리며 진정시키려 애썼다.“황조모, 노여움을 거두소서! 상왕이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황제는 눈을 번뜩이며 연기준을 노려보았다.“상왕이 함부로 망언을 뱉었으니 경서를 삼백 번 필사하여 사흘 뒤 상왕비의 것과 함께 궁에 들이거라!”연기준은 태연히 응수했다.“본왕은 야랑국 사신을 접대해야 하니, 두려 컨대…”그러자 황제의 입에서 거의 욕설이 터져 나왔다.“두려 컨대는 개뿔! 네놈! 밤을 새우더라도 반드시 짐에게 완성해 바치거라!”“...예.”태황태후는 황제와 황후에게 부축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혹여 연기준이 또 어떤 말로 세상을 뒤흔들까 두려운 듯 황제는 동작을 신속히 하여 곧바로 그녀를 황가의 가마에 실었다.“궁으로!”성대한 어가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인경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아직도 무릎 꿇고 있느냐? 무릎 꿇는 게 그리도 달콤하더냐?”말이 끝나자 서인경은 잽싸게 일어나 무릎을 털었다.“겨우 돌아오자마자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연기준은 그녀를 힐끗 보았다.“아마도 네가 사람들 눈에 미움을 산 탓이겠지.”서인경은 눈을 부릅뜨며 흰자위를 드러냈다.개 같은 남자, 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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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맹은영은 어려서부터 경성을 떠난 적이 없어 바깥 세상의 화려한 풍경에 늘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특히나 신비롭고 은밀한 지하흑시라는 장소는 그녀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했다.이번에 마침내 서인경을 만나자 맹은영은 경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단명료하게 들려주고는 곧장 그녀 곁을 파고들어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서인경은 교묘히 진실을 피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단지 새로운 친구 하나를 사귀었으니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맹은영에게도 소개해 주겠다고만 했다.막효연의 이름이 언급되자, 서인경은 순간 연기준에 대한 원망이 불쑥 치밀었다. 모든 게 그 사내 탓이었다. 그녀가 떠나기 전, 막효연와 작별조차 나누지 못한 건 결국 그가 막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성급했다. 마치 연기준이 고의로 그녀의 작별을 차단해 버린 듯, 정작 그녀는 누구와도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두 여인은 마주앉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서서 이야기하더니 힘들었는지 슬슬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러다 결국 나중에는 비스듬히 기대기까지 했다. 목이 탈 만큼 떠들고 나니 창밖 하늘은 이미 어둑하게 물들어 있었다.맹은영은 아예 자리를 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늘은 상왕부에서 자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서인경은 두 손 들어 찬성했다.‘좋다! 연기준은 오늘 밤 서재에서 자라지 뭐!’그러다 문득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요즘 태황태후는 또 무슨 바람이 든 겐가? 내가 뭘 잘못했나?”맹은영은 이 얘기만 나오면 이를 갈았다.“다 단은설 그 개 같은 년 탓입니다! 태황태후 앞에서 헛소문을 퍼뜨렸다니까요. 진보이가 정절을 잃던 날, 마마께서 근처에 있었다고 말입니다! 태황태후께서는 귀까지 막혔는지 그 한마디만 믿고선 단은설 편만 든 것이지요. 그 화를 몇 날 며칠 쌓아두다 마마께서 돌아온다 하니 당장 달려와 시비를 건 것입니다.”서인경은 코웃음을 쳤다.“흥! 난 하나도 무섭지가 않네. 있으면 증거를 들이대라지!”사실, 그녀는 그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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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분명히 오늘 밤은 상왕부에서 함께 자겠다면서 경서를 베껴 쓰라는 말 한마디에 줄행랑이라니... 이토록 가벼운 자매의 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서인경은 속으로 푸념했다.‘답답하고 속이 막히는군!’평이가 다가와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과 옷자락을 정돈해 주었다.“왕비 마마, 가서 보시겠사옵니까?”서인경은 거친 숨을 고르며 물었다.“누가 온 것이냐?”“단효산과 단은설이옵니다.”서인경은 곧장 신발을 꿰어 신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좋다! 가 보자. 어떤 잔꾀를 부리려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 주지.”상왕부 서재 앞.서인경이 다다르자마자 안에서 울음 섞인 비명이 흘러나왔다.“왕야, 초민은 억울합니다! 초민이 경성에 들어온 이래, 법을 지키고 본분을 다하며 장사에 전념했을 뿐인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이는 분명 누군가가 왕야께서 단 가를 비호하신다 질투하여 저희를 모함하고 단 가를 경성에서 몰아내려는 수작입니다. 부디 왕야께서 명찰하시어 단 가의 결백을 밝혀 주시옵소서!”굵은 음성. 단은설의 아버지이자 서풍교의 남편, 한때 서 가의 데릴사위였던 사내의 목소리였다.단 가가 서풍교의 손으로 일으켜 세워진 뒤 단효산은 세 아이들의 성을 다시 단으로 바꾸었고 과거의 데릴사위라는 치욕스러운 이력은 다시는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되었다.현세로 말하자면 전형적인 봉황남 아닌가! 만약 서풍교의 강단이 없었다면 그 뒷마당은 벌써 첩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연기준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밖에선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이윽고 단은설이 나섰다.“왕야, 제발 이십 해 동안, 아니 적어도 십 해간, 제가 언제나 왕야 곁에 있었음을 생각하시어 이번만은 아버지를 믿어 주십시오. 아버지는 늘 경성에만 계셨고 아이들의 실종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지하흑시와도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낭하에 기대 선 서인경의 머릿속에는 단 한마디 문장만 메아리쳤다.“십 해 동안, 언제나 왕야 곁에 있었습니다.”그녀는 내내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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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깊은 밤, 서인경은 군영으로 곧장 발을 들였다. 막사를 젖히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검게 그을린 장대한 팔뚝들이었다. 몇몇 장수들이 한데 몰려 웅성이며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부장들은 흠칫 놀라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서둘러 상의를 걸치며 허둥지둥 소리쳤다.“왕비 마마, 어찌 이곳에…!”“어서, 어서 입거라! 이런 꼴로 왕비를 뵙다니! 왕야께서 아신다면 목이 달아날 일이다!”서인경은 힐끗 눈길만 던지고는 담담히 시선을 거두었다. 어깨는 넓고 근육은 실로 장대했으나 연기준과 견주면 한참은 모자랐다.그녀가 책상 앞에 앉자 네 명의 부장들은 옷매무새를 겨우 정돈하고서야 불편한 기색으로 줄지어 섰다. 막사 안은 묘한 어색함이 흘렀다. 이 깊은 밤에 여인이 불시에 군영에 들이닥칠 줄은 그들 역시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왕비 마마, 혹 왕야의 명이 있었사옵니까?”서인경은 손으로 턱을 괴고 시선을 대각선 위로 흘렸다.“이번에 할아버지를 따라 막북으로 간 이들이 몇이나 되는 것이냐?”주 부장이 나서서 답했다.“곽 부장과 여 부장을 비롯하여 기병 천 명이 따랐사옵니다.”“흠.”그녀는 짧게 응답하더니 이어서 물었다.“할아버지께서 떠나시기 전, 여검 부대에게는 무슨 지시를 내리셨느냐?”주 부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여검은 줄곧 노장군께서 친히 지휘하신 터라 소인들은 전혀 알지 못하옵니다.”서인경은 잠시 기세가 꺾였다. 서회윤이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늦었을 것이다.연기준이 영패를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일은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역시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여검 부대의 실체에 관하여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었다. 답답함이 밀려오자 혀끝에서 쯧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그 순간, 무심코 뒤를 돌아본 그녀의 눈에 방금 전 장수들이 모여 있던 자리 한편이 들어왔다. 무언가가 말려 둔 채 바닥에 놓여 있었고 드러난 부분은 알록달록하여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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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부장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주 부장이 불쑥 앞으로 나서더니 아직 반쯤 펼쳐져 있던 화폭 위에 손을 꾹 눌렀다.“왕비 마마, 오해가 있으시옵니다! 여기, 이 부분을 보시지요!”무심코 그곳을 들여보다 본 서인경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졌다. 몸을 숙여 막 부장이 가리킨 지점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저건, 서 자? 이게, 여검의 영패란 말이냐?”그림 속, 미인이 몸을 담근 욕조 옆면에는 위장된 패가 그려져 있었다. 흐릿한 먹빛으로 새겨진 한 글자, 서.욕조의 색과 흡사하여 처음 보는 이들은 반드시 미인의 자태에 사로잡혀 이 작은 글자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주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이 화폭은 오늘 갑자기 막사 밖에 놓여 있었사옵니다. 처음에는 모두 단순히 음탕한 그림이라 여겼으나 소인이 수상쩍어 안으로 가져와 함께 확인한 것이옵니다.”서인경은 머릿속이 잠시 멍해졌다.“한데... 다 같이 보는 데 꼭 웃통을 벗어야 했단 말이냐? 아직 봄도 오지 않았는데, 무슨 더위 때문이라고.”주 부장은 속이 타들어가며 설명했다.“오늘 군영에서 연습하느라 옷이 다 땀에 흠뻑 젖었사옵니다. 저희는 상의를 벗은 채 돌아오는 길에 마침 이 그림을 보았고 그것을 확인해 보느라 옷을 갈아입을 틈이 없었던 것이옵니다. 왕비 마마께서 의심스러우시다면 저희 옷을 맡아 보십시오. 아직 땀내가 가시지 않았사옵니다.”서인경은 평소 군영에 올 때마다 주 부장이 안내를 맡았으므로 그와는 다른 장수들보다 친숙했다. 농담을 섞어도 대수롭지 않은 사이라 주 부장은 서스럼 없이 팔을 내밀며 소매를 그녀 눈앞에 들이밀었다. 콧속을 찌르는 구린내가 확 밀려오자 서인경은 코를 움켜쥐었다.“믿는다, 믿는다! 그러니 제발 비켜라. 냄새가 독하구나.”주 부장은 오히려 뒤로 물러서지 않고 더 다가왔다. 그녀를 책상 모서리까지 몰아넣으며 억지로라도 냄새를 맡게 해야 억울함을 풀겠다는 태도였다.평소 보기 드물게 서인경이 곤란한 꼴을 보이자 나머지 세 명은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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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이번에 연기준은 영리해졌다. 서가군으로 가는 길 내내, 왕부안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머릿속에서 곱씹고 또 곱씹어 보았다.방금 서인경의 한 마디에 그는 순간 깨달음을 얻은 듯 다급히 입을 열었다.“너, 단은설이 왕부에 드나드는 게 신경 쓰이느냐?”서인경은 그를 흘겨 보았다.“왕야께서 누굴 들이든 말든 그건 제 알 바가 아닙니다. 제가 신경 쓰일 게 뭐가 있겠습니까? 헛소리하지 마세요!”서인경은 입이 직설적이되 아무에게나 욕을 퍼붓는 사람은 아니었다. 연기준은 그제야 확신했다. 문제의 뿌리는 단은설일 것이라고.“본왕이 일부러 소문을 흘려보냈다. 붙잡힌 아이들 몸에 단 자가 새겨져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단효산과 단은설이 다급히 달려와 해명한 것도 의심을 벗고자 함이지.”그러자 서인경은 곧장 되물었다.“그래서, 그걸 믿습니까?”연기준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야랑국 황후의 외가 또한 단 씨다. 석연찮은 점이 아직 많으니 섣불리 단정할 순 없지.”서인경의 화가 단숨에 치밀었다.“왕야께서는 전장의 왕이라더니 뇌가 말발굽에라도 차인 것입니까? 단은설이 단 가가 무죄라 하면 왕야께서는 곧이곧대로 믿습니까? 만약 제가 할아버지께서 나라를 배신할 리 없고 영패 사건은 누군가의 모함이라 말한다면, 그것 또한 믿어 주시려나?”연기준은 곧장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본왕은 결코 노장군의 충절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사건은 아직 조사 중이다.”서인경의 입가에는 싸늘한 웃음이 번졌다. 둘의 차이는 명백했다.단은설이 무죄라 하면 조사는커녕 그대로 믿어 주는 것. 하지만 자신이 서 가의 무고함을 외치면 돌아오는 건 늘 의심이었으니.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전생에서도 이 남자는 처음에 믿는다 했었다. 그러나 끝내는 서 가 일문을 단두대 위에 올려놓았다.“우리 서 가의 일은 제가 직접 밝힐 것입니다. 다만 상왕께서는 둔 눈 똑바로 뜨고 공정히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선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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