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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251 - Chapter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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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1화

안포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한 개의 영패를 꺼내 서인경에게 내밀었다.“그 자의 몸에서… 이런 것이 나왔사옵니다.”서인경은 그제야 안포의 기색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그녀가 그것을 받고 들여다본 순간, 얼굴빛이 단번에 굳어졌다.영패 위에는 단 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서.서인경의 머릿속이 멍해지며 새하얗게 변해버렸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순간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이 번갯불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가군에는 불과 이백 명으로 이루어진 비밀 부대가 있었다. 그 이름은 여검.이 여검은 오직 서회윤의 명만을 받들었고 각국으로 잠입해 첩자로 활동하며 군사 기밀을 수집했다. 극도의 기밀성을 위해 여검의 대원들조차 서로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서로를 알아불 수 있는 유일한 증표는 바로 이 영패였다.즉, 이 영패는 그 부대의 신분을 상징하는 동시에 서회윤의 심복임을 증명하는 징표였다. 하지만 어찌하여 그런 영패가 지하흑시, 그것도 라 가의 방화범의 손에서 발견되었단 말인가?서인경의 머릿속은 폭발하듯 요동쳤다. 전생 내내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가 이 순간 한 줄기 빛처럼 드러났다.서인경은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서회윤이 어찌하여 역모의 누명을 쓰게 되었는지.사람들은 모두 말했다. 서회윤이 진국의 국방도를 적국 야랑국에 넘겨주어 국경의 열다섯 성이 연이어 무너졌다고. 서회윤에게서 국방도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이는 반드시 그의 심복뿐이었다. 이제 와서 보니 그 배신자는 아마도 서가군, 여검이라는 이름의 그 비밀부대에서 나온 자일 터였다.안포 역시 그 영패를 보는 순간부터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돌아오는 길 내내 망설이다가 끝내 서인경에게 숨김없이 보여주기로 했다.“마님... 설마 이 일이 정말 서 노장군과 연관이…”“그럴 리 없다! 할아버지께서는 절대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니야!”서인경은 그의 말을 끊어내고 곧 영패를 거두어 품 속에 넣었다.“혹시… 당장은 이 일을 연기준에게 비밀로 해줄 수 있겠느냐?”전생의 피비린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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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2화

평소라면 몇 사람이 합을 맞춰야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배였기에 그의 두 팔 힘만으로는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최 관사는 온몸이 땀에 젖도록 안간힘을 썼으나 화물선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그때, 강둑 위에 불현듯 일렬로 횃불이 솟아올랐다. 활활 이는 불빛이 강안을 붉게 비추었고 최 관사의 창백한 얼굴 또한 그 아래에서 선명히 드러났다.“끝났구나… 끝장이야…”그는 털썩 배 위에 주저앉아 강둑에서 배로 오르는 한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서슬 퍼런 기세로 그를 향해 다가왔다.“당신은... 당신은 누구십니까?”서인경은 배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선언했다.“나는 상왕비다!”최 관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머릿속은 한순간 텅 비어 버렸다.“상... 상왕…까지 온 것입니까?”그는 꿀꺽 침을 삼키며 긴장된 기색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이내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하게 말을 내뱉었다.“저는 평생 정직히 장사만 해왔습니다! 상왕이 어찌 감히 저의 생업을 빼앗으려 드는 것입니까!”서인경은 곧장 안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는 명을 받들어 즉시 인원을 이끌고 화물칸 깊숙이로 달려 들어갔다. 그 순간, 그녀는 최 관사의 손이 갑자기 움켜쥐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정직한 장사꾼인지 아닌지는 뒤져보면 알 일이지.”날이 훤히 밝아올 무렵, 화물칸에서 짐짝들이 하나둘 갑판 위로 실려 올라왔다. 시위들은 상자마다 뚜껑을 열고 속의 물건들을 전부 쏟아냈다. 눈앞에 펼쳐진 건 지하흑시에서 팔아넘기려던 각종 특산품들이었다.그리고 최 관사의 침상 곁에서 금전초 한 뿌리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얼마 전 서인경이 내다 팔았던 바로 그 금전초였다.최 관사의 얼굴에는 곧 자신감이 되살아났다. 그는 벌떡 일어나 목청을 돋우었다.“다들 보시오! 이 여자가 바로 상왕비입니다! 멋대로 우리 배를 뒤지고 우리 선원들을 약으로 잠재우고 우리 장사를 방해하지요! 조정과 우리 지하흑시는 이미 협약을 맺었거늘!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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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3화

최 관사의 선동에 강둑 위의 백성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그들은 심지어 배 위로 몰려들 기세였고 마치 목숨 걸고서라도 화물선을 지켜내고 지하흑시의 체면을 사수하겠다는 각오가 서린 듯했다.연기준의 시위들은 상왕비를 지키라는 절대 명령을 받았으니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선착장 입구에서 버티며 달려드는 백성들을 연이어 밀어내고 또 밀어냈다. 하지만 사태는 곧 격렬한 몸싸움으로 번졌고 그것이 도리어 민심을 더 자극했다. 분노는 불길처럼 치솟아 군중의 고함이 우레처럼 하늘을 찔렀다.“지하흑시에서 썩 꺼져라!”“나가라, 나가라!”“우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간다! 조정의 간섭 따윈 필요 없다!”“필요 없다! 필요 없다!”귀청을 찢는 아우성에 서인경의 고막이 윙윙 울렸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단 하나, 화물칸 입구에만 고정되어 있었다.이 배, 절대로 출항해서는 안 된다.지금 이 순간 서인경이 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단지 연기준과의 약속이 아니었다.그녀는 서가를 위해서라도 이 싸움에 몸을 던져야 했다.전생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지하흑시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바로 이때 연기준이 반 달 동안 경성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돌아왔을 때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한층 더 차갑고 잔혹해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분명 이곳, 지하흑시에 왔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여기서 서가가 역모를 꾀한다는 허위의 단서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이야말로 서가의 누명이 시작된 지점이다. 서인경은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가의 결백을 바로잡아야 했다.하늘이 다시 그녀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갑자기, 뒤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한 무리의 백성들이 갑판 위로 뛰어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곧장 왕부의 시위들에게 제압당했다.“왕비 마마!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렵사옵니다. 부디 속히 물러나 주십시오!”한 시위가 서인경 곁으로 달려와 다급히 권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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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4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들은 여전히 나란히 서서 서인경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한 겹의 두터운 육벽이 되어 백성과 서인경 사이를 단단히 갈라놓았다. 그 육벽 너머로 서인경과 백성들은 마주 선 채 대치했다.“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조정이 시켜서도 아니고 이곳의 사무에 간섭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단지 사건을 조사하러 왔다! 밖에서는 수많은 가정에서 네다섯 살 난 어린 딸들이 납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만약 누군가 네 집 딸아이를 해친다면 너희는 초조하지 않겠느냐? 분노하지 않겠느냐?”백성들은 그 말에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자 누군가 용기를 내어 의문을 제기했다.“하나 그 잃어버린 여자아이들과 우리 지하흑시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그건…”서인경의 시선이 옮겨졌다.“그건 최 관사에게 물어보아야겠지!”최 관사는 아직도 방금 서인경이 던진 말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으나 이내 그 말을 듣자 움찔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온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저… 저는 모릅니다!”“막 성주께서 오셨다!”배 아래서 외침이 터져 나오자 백성들은 즉시 몸을 돌려 길을 열어 주었다. 막수한은 수많은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의연히 배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백성들은 든든한 버팀목을 본 듯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막 성주, 제발 저희를 위해 나서 주십시오!”“조정이 우리 지하흑시에 간섭하게 해선 안 됩니다. 막 성주는 결코 굴복해선 안 됩니다!”“저희는 막 성주를 믿습니다! 막 성주만이 저희에게 공평을 주실 분입니다!”막수한이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자 방금 전까지 들끓던 소란은 단칼에 베어낸 듯 고요해졌다.서인경은 속으로 감탄했다.이것이 바로 진짜 권위이다. 과연 강용이라 한들 토지의 뱀을 누를 수는 없는 법.지하흑시에서는 조정을 들먹여도, 상왕을 내세워도 통하지 않는다.오직 성주의 말만이 그들의 법.막수한은 서인경과 잠시 시선을 주고받더니 곧 백성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상왕비께서 말씀하신 실종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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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5화

서인경은 안포를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의 얼굴에서 지금 같은 표정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주먹을 악착같이 움켜쥐어야만 간신히 억누를 수 있는 깊고 뜨거운 분노.곧 화물칸 출구에서 왕부의 시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걸음은 무척 가벼웠으나 각자 두 팔에는 작은 몸뚱아리 하나씩이 안겨 있었다.아이들은 모두 마르고 왜소했으며 드러난 팔목의 살결에는 검게 번진 자국들이 하나둘 새겨져 있었다. 소화가 죽기 전, 몸에 남았던 그 자국과 똑같았다. 아이들이 배 위로 옮겨지는 순간 현장은 숨소리조차 사라진 듯 고요에 잠겼다.서인경은 몇몇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 보았다. 깊은 몽약에 빠져 있었지만 맥박은 잘 뛰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열댓 명에 이르는 아이들이 줄줄이 드러난 광경에 그녀의 가슴은 여전히 무겁게 짓눌려 내려앉았다. 그 안에 혹여 온난이 섞여 있는 건 아닐까…막수한의 얼굴은 철처럼 굳어 있었고 목소리에는 제어하지 못한 떨림이 번졌다.“사람을 불러라… 최 관사를 감옥에 가둬라!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그를 만나선 안 된다.”곧 인부들이 달려들어 이미 시체처럼 축 늘어진 최 관사를 끌어냈다. 서인경 앞으로 지나치던 순간 그가 갑자기 발악하듯 몸부림쳤다. 그가 사람들을 뿌리치고 그녀를 향해 돌진한 것이다.그때 은포가 날카롭게 발을 뻗어 그의 몸을 허공에 날려 보냈다. 최 관사는 갑판 위에 처박히며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손을 뻗어 서인경에게 향하려 했다. 마치 마지막으로 무언가 전하려는 듯이.서인경은 그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안포가 곧장 가로막았다.“왕비 마마, 위험하옵니다. 소인이 가 보겠사옵니다.”안포는 조심스레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가 잠시 후 몸을 일으켜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그가 말하길… 그의 아내와 딸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제발 왕야와 왕비 마마께서 그 모녀만은 곤란하게 하지 말아 달라고 했사옵니다.”서인경의 시선은 서늘하게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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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6화

단서가 끊겼다.이제는 오직 최 관사를 심문해 뭔가를 캐내는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막부로 돌아왔다. 하지만 막상 대문을 들어서자 앞마당의 광경에 그대로 굳어버렸다.“형수님, 형수님, 부디 저를 때려 죽이십시오! 자식이 잘못된 건 아비의 죄라 하였거늘! 열이가 미혹되어 연이를 해치려 들었다니! 다 내 불찰입니다. 제 손으로 그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죄입니다! 형수님, 제 목숨으로 속죄하겠습니다!”남궁오는 두 다리가 이미 쓸려 무릎조차 꿇을 수 없어 그저 땅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일어나세요. 제발 그러지 마시고… 무슨 일이든 수한 오라버니께서 돌아오면 그때 함께 논의합시다.”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눈빛은 차분히 남궁오를 달랬다.“저는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결코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연이는 형수님 집안의 심장인데 만약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저는 만 번을 죽어도 그 죄를 씻을 길이 없을 겁니다!”바로 그때 막수한이 대문을 넘어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본 순간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이게 무슨 짓이냐?”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봉수정은 뒤돌아보며 몸을 일으켰다.“오라버니, 제발 남궁을 좀 말려 주세요. 남궁열의 일은 아직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지금 벌써 죄를 청하다니요... 너무 이릅니다.”그 말에 서인경의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봉수정에게 머물렀다.‘이 사람이 연이의 어머니인가?’그녀의 품격은 고급지고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세월의 풍취가 어려 있었으나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무엇보다, 방금 뱉은 그 한마디.분명히 남궁열의 짓임을 알고 있고 연이를 위해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결코 대충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이러니 막수한이 애지중지하고 효연이가 자랑스러워하는 거겠지.봉수정 역시 서인경을 알아보았다. 둘의 시선이 서로 맞닿자 그녀는 고요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서인경도 예를 갖추어 답례했다.그 사이, 막수한은 남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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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7화

서인경이 연기준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연기준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었고 입술은 푸르게 질려 있었다. 어젯밤 남산에 간 이는 연기준과 육승, 그리고 진묵염이었다. 지금 세 사람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으나 누구의 피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몰골만으로도 전날 밤의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육승은 서인경을 보는 순간, 털썩 무릎을 꿇었다.“제가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왕야께서는 저를 지키시려다가…”“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어서 물러가거라.”서인경이 날카롭게 그의 말을 끊었다. 연기준의 몰골을 바라보는 순간 서인경의 심장이 바짝 죄어왔다. 육승은 서인경이 약간의 의술을 익힌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곧장 일어나 진묵염을 부축하며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서인경은 단숨에 침상 곁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그의 맥을 짚어보더니 미간을 바짝 찌푸렸다.독이었다.이 독은 곧바로 목숨을 앗아가진 않지만 매우 교묘하고 악랄했다. 독이 발작할 때면 온몸의 푸른 힘줄이 불거지고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가 뼛속까지 파고들 듯이 갉아먹는 고통을 느낀다. 보통 이 독에 걸린 자들은 독사가 아니라 고통에 못 이겨 생을 마감한다.서인경은 독의 정체를 분명히 확인한 뒤 다시 그의 몸을 세세히 살폈다. 외상은 없었다. 그녀의 신식은 곧장 약왕곡으로 돌아갔다. 도팔천이 기른 해독 약재는 많았으나 대부분 약성이 온화하여 연기준의 몸속 독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잘못 쓰면 오히려 독이 부작용을 일으켜 독성을 더 깊게 할 수도 있었다.서인경은 온갖 약재를 찾다가 마침내 패독초를 골랐다. 예전에 어머니의 의서에서 본 적이 있었다. 백독을 풀 수 있으며 효과는 그야말로 강력했다. 그러니 패독초는 연기준의 독을 눌러 꺾기에는 딱 알맞았다.다만… 그녀는 의서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 그날, 피임약을 들고 있던 그녀의 손을 연기준이 쳐내며 책의 후반부가 망가져 버렸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패독초의 부작용을 끝내 알 수 없었다.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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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8화

뜰 안의 사람들은 모두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제야 깨달았다. 다른 아이들 역시 온난이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차갑고 무정한 눈빛, 그 시선에는 온기라곤 한 점 없었다. 그들이 마당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적을 대하듯 했다.“주공을 제외한 너희는 모두 나쁜 놈이야! 다 죽어야 해!”온난이 날카롭게 외치자 쉰 명이 넘는 소녀들이 마치 소환이라도 받은 듯 일제히 움직였다. 그 작은 몸들이 물결처럼 몰려와 온조와 평이를 향해 덮쳐들었다. 그러자 평이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듯 절망이 밀려왔다.‘나는 오늘 여기서 끝나는 걸까…’그 순간 옆에서 한 줄기 강풍이 일었다. 이어 손가락의 압박이 풀리자 평이는 전신이 힘을 잃은 채 아래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떨어지는 그녀를 받아낸 것은 단단하고 믿음직한 한 쌍의 팔이었다.연풍이었다.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랜만에 다시 본 이 소녀가 고작 네댓 살 남짓의 아이에게 손가락이 부러지는 참상을 당하고 있다니!곧이어 검은 옷을 입은 시위병들이 대거 들이닥쳤다. 그들은 소녀들의 목덜미를 하나하나 내리쳤다. 칼날 같은 손끝이 휙휙 날아들자 쉰 명이 넘는 아이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평안해졌다.의관이 급히 달려와 평이의 손을 살폈다. 그녀는 연풍의 품에 안긴 채 후원 정자 앞 돌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의관이 부러진 손가락을 맞추고 붕대를 감는 모습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정신을 잃을 만큼 아팠는데 울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긴장이 풀리자 억눌렀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귀군... 왜 이제야 온 겁니까!”연풍은 그녀가 우는 걸 보자 당황해 허둥거렸다.“미안하다. 내가 늦었다. 좀 더 일찍 왔다면… 네가 다치지 않았을 테고 왕야께서도 독에 당하지 않으셨을 텐데…”그는 밤낮을 달려 남산에 도착했을 때, 연기준이 절벽에서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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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9화

서인경은 연기준에게 약을 먹이고 옷까지 갈아입혔다. 그녀가 문을 열고 옷을 내던졌을 때 육승은 여전히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그는 그녀가 나오자마자 벌떡 일어섰다.“왕야께서는 어떠시옵니까?”“이거나 버리거라.”서인경은 옷을 그에게 건네주고 고개를 돌려 여전히 피투성이의 몰골인 육승을 바라보았다.“잠시 들어가 쉬어라. 네 집 왕야가 깨어나면 다시 네가 곁에서 그를 지켜줘야 하지 않겠느냐?”육승은 순간 멍하니 굳더니 곧장 무릎을 꿇어버렸다.“마마, 감사드리옵니다! 마마, 정말 감사드리옵니다.”서인경은 어이없어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내 상궁이다. 내가 그를 구하는 건 천리와 의리일 뿐. 네가 내게 고맙다 할 일은 아니지 않으냐?”육승은 그제야 깨닫고 급히 설명했다.“속뜻은 그게 아니옵니다. 왕야께서 저를 구하시려다 독에 당하신 것이옵니다. 무능한 신이 일을 그르쳐 왕야를 연루시킨 것 같아서...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그만 됐다. 네 왕야께서 목숨을 걸어 널 구한 건 네가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겠지.”그 말에 육승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는 늘 스스로를 목숨을 팔기 위해 태어난 자라 여겨왔다. 다만 다른 자들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아 공로가 많은 상왕을 따르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큰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결코 자신이 귀한 존재라 믿은 적은 없었다.서인경은 처마 아래로 걸어 나와 앉으며 물었다.“그 아이들은 어찌 되었느냐?”육승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가와 답했다.“연풍이 도착해 감시 중이옵니다. 막 성주와 막 마님께서도 아이들을 구할 방도를 찾고 계시옵니다.”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승이 물러날 기미가 없자 차라리 얘기라도 더 듣자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네가 졸리지 않다면 어제 남산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보거라.”남산의 일이 떠오르자 육승의 낯빛은 금세 무거워졌다.“어젯밤 저희가 남산에 도착했을 때, 산골짜기 하나가 중병으로 삼엄히 지켜지고 있었사옵니다. 예전부터 남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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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0화

뜰을 나서자, 서인경은 먼 곳에서 한쪽 방향으로 분주히 드나드는 하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발걸음은 급박했고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향하니 늘 상냥하기만 하던 막효연이 의원과 다투며 다급하게 성을 내고 있었다“도대체 할 수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치료가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어린 아이들을 두고 치료할 수 없다니요!”나이 지긋한 반 백 살의 의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막 아가씨, 제가 치료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 유월비설이란 약재는 책에서 글로만 본 적이 있을 뿐, 실제로는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삼킨 아이들을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이 병증은 저도 어찌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차라리 고명한 의원을 따로 모시는 것이 나을 테지요.”그러자 막효연은 더욱더 안달이 나 의원의 소매를 붙들며 애원했다.“의원님은 흑시에서 가장 연륜 있는 분이잖아요! 꼭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돈이 얼마가 필요하든, 아이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전부 드릴게요!”의원은 손을 저으며 고개를 숙였다.“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에요.”그때, 서인경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존재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평이였다. 그녀는 황급히 서인경 앞으로 달려와 엎드렸다.“왕비 마마.”서인경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이들 몸을 살펴보았느냐? 새겨진 글자는 없었느냐?”평이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확인했사옵니다. 허리 오른편에 모두 단 자가 새겨져 있었사옵니다.”서인경은 마음속으로 이미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평이가 다시 귀띔해 주었다.“왕비 마마, 어서 온조 언니를 살펴보십시오.”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보니 온조는 문가에 웅크린 채 방 안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서인경의 가슴은 서늘히 내려앉았다. 그녀는 평이를 향해 시선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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